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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죽음 그리고 문화
테리 이글턴 지음, 조은경 옮김 / 알마 / 2017년 1월
평점 :
테리 이글턴의 ‘신의 죽음 그리고 문화’는 무신론은 결코 쉬운 개념이 아니며 전능한 신은 진정 없애버리기 힘든 존재라는 전제하에 문화가 신을 대체하는 기제임을 주장한 책이다. 이글턴은 제도의 의미를 갖는 종교와 개인적 차원의 신앙을 구분하고 교회와 신을 구분한다.
이 책에서 눈에 띄는 것은 그럼에도, 그러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면서 등의 부사(副詞)가 자주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종교 또는 신에 반(反)하는 행동을 보였지만 결국 종교적이거나 신앙적인 면모를 보였거나 신학에서 유래한 개념들에 주된 초점을 두었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러기에 이글턴은 무정부주의자들보다 무정부주의란 개념이, 허무주의자들보다 허무주의란 개념이 무신론자들보다 무신론이란 개념이 먼저 등장했음을 언급한다. 이 중 무신론에 초점을 맞추면 결국 무신론자라 불린 사람들이 신을 저버린 게 아니었다는 말이 가능하다.
알랭 바디우의 행적도 도마(?)에 오른다. 즉 그는 열렬하게 신의 죽음을 받아들이지만 신학적 내력을 가지고 있는 무한함(infinity)과 공허(the void)라는 개념은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글턴에 의하면 무신론이란 단어가 등장한 것은 16세기이다.
계몽주의에 대한 논의도 관심을 끈다. 이글턴에 의하면 계몽주의 프로젝트는 신을 끌어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지몽매한 종교적 믿음을 런던 스트랜드 가(街)의 커피 하우스에서 일어날 법한 대화로 대체하려는 의도를 가졌다.
같은 차원에서 계몽주의가 종교를 공격한 것은 초자연적인 것을 자연적인 것으로 바꾸기 위해서가 아니라 야만적이고 미개한 믿음을 추방하고 그 자리를 문명화된 믿음으로 대체하기 위해서였다는 말도 거론되었다.
계몽주의의 관심은 신의 죽음이 아니었다는 말도 마찬가지이다. 이글턴은 계몽주의는 철학적인 글에 국한하지 않는 하나의 정치적 문화였다고 말한다. 계몽주의가 종교를 공격한 것은 신학적 차원에서라기보다 정치적 이유에서였다. 계몽주의자들은 신에 대한 사랑의 자리를 인류에 대한 헌신으로 대체했고 신성한 은총은 시민의 덕성으로 바꿔놓았다.
이글턴은 계몽주의는 정서적으로 그리고 상상의 근원으로는 너무 희박하고 상징적 관점은 너무 빈약해서 근대성에 자기정당화를 이룰 확실한 수단을 제공할 수 없는 형태의 사상이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우주적 조화보다는 종교가 주는 위안에 더 관심이 많은 대중의 충성을 이끌어낼 수 없었다고 말한다.(45, 46 페이지)
도덕도 거론되었는데 이는 여러 가지 가명(假名)을 이용하며 숨은 신(神)의 이름 중 하나였다. 회의주의자 데이비드 흄은 신앙의 진리와 이성의 진리는 별개의 것이고 진리는 두 개라는 의미를 지닌 이중진리론을 연출했다. 이성(理性) 역시 거론되었다. 이성은 그 자제로 형태가 없다는 점에서 어느 면으로 보나 점점 확실해지는 신의 부재에 그럴듯한 대체자 역할을 할 수 있었다.
물론 성서의 하느님은 인격을 가진 존재인 반면 이성은 비인격적 거만함 때문에 명백하게 신 같지 않다고 이글턴은 말한다. 이글턴이 말하는 것은 딜레마 같은 현실이다. 물론 이성이 처한 딜레마이다.
전능한 신의 개입 없이 돌아가는 엄격하게 이성적인 세상은 모순되게도 자의적이고 비이성적인 신을 만들어내었고 신을 우주의 주변부로 추방하는 것은 신을 없어도 되는 존재로 취급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신의 신비성을 한층 깊게 만드는 행위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글턴으로부터 이성은 사실과 가치를 연결하지 못했다는 말을 듣는다. 이글턴은 신의 왕국은 현존하면서 부재하고, 인간 역사에서 모든 곳에 편재하지만 여전히 초월적 형태로 온다는 정통 기독교의 내부 갈등은 치명적일 정도로 느긋하다고 말한다.
이런 무능력한 이중성을 개조하는 일은 독일 관념주의자들에게 맡겨질 터였다. 근대의 역사는 신의 대리자를 찾는 일에 집중한 역사였다.(65 페이지) 신을 대체하는 문화를 이야기했지만 정신분석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고위 성직자, 고백 의식, 원죄 의식, 존재론적 죄책감, 신비스러운 법, 종파간 분립, 황당할 정도로 불가해한 무의식을 탐구하는 준(準) 신학적 방법 등을 갖춘 대용 종교를 만들어내기도 한 것이 정신분석이다.(66 페이지) 이글턴이 강조하는 바 아마도 신임을 잃어버린 신의 대역으로 가장 성공한 사례는 문화일 것이다.
예술로 알려진 이미지의 보물 창고가 종교적 믿음의 경쟁관계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아마 낭만주의가 도래한 다음일 것이다.(75 페이지) 이글턴은 영(靈)인 아버지가 신체를 가진 아들로 구현(具現)되듯 이성이라는 영원한 관념이 예술이라는 초라한 물질에서 스스로를 명시(明示)한다고 말한다.(76 페이지) 절묘한 말이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에게 가장 숭고한 진리를 매일의 품행으로 연결시키는 종교적 믿음을 대체하기에 예술은 소수적 성향이 강하다. 역사상 그 어떤 상징 체계도 종교와 경쟁 상대가 되지 못했다.(78 페이지)
시인이나 철학자는 세속의 성직자라는 지위를 부여받았고 예술과 신화는 일련의 신성한 의식과 유사한 것으로 전환되었다. 이에 따라 개인주의로 인해 그리고 자연은 완전히 죽은 물질이라는 시들어버린 합리주의로 인해 고통받은 인간 정신도 치유되었을 수 있다.(83, 84 페이지)
자발적으로 종교를 세속적으로 다룸으로써 종교를 불명예스럽게 만든 바로 그 체계(자본주의)가 종교가 제공하는 상징적 통합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것이다.(86 페이지) 이글턴은 종교가 이미지, 의식, 이야기를 활용했듯 이성도 새로운 신화 또는 미학이라는 새롭고 흥미로운 담론을 이용했다고 말한다.(93 페이지)
이성과 감각을 연결하는 것이 미학의 역할이다.(94 페이지) 문화는 신의 세속적 이름이다.(102 페이지) 이글턴은 기독교의 중요 미덕으로 교육받은 자를 위한 것(신학)과 대중을 위한 것(헌신적 실천)이 따로 있는 것을 꼽는다.(107 페이지)
낭만주의자를 주제로 한 챕터에서 이글턴은 예술은 욕망을 정련 또는 숭고화시키는 작업으로 그 분열성을 진정시키면서 동시에 보편적 상태로 끌어올린다고 말한다. 자기표현과 미학적 균형의 필요조건 사이에 가능한 최상의 균형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128 페이지)
절대성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절대성의 존재를 느낀다. 절대성은 보여질 수는 있으나 말로 표현될 수는 없다. 아마도 절대성은 그저 규율적 관념이거나 편리한 가상, 본질적이지만 손에 닿지 않는 것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낭만주의는 분명 믿음과 신의 죽음 사이 어딘가에 갇힌 일종의 부정(否定)적 신학이다.(129 페이지)
신(神)은 적극적 규정이 아닌 무엇이 아니라는 식의 부정의 방법으로만 인식할 수 있다는 신학이 부정 신학이다. 낭만주의는 관념론자들과 신정론(神正論)을 공유한다. 인간은 다투고 불화하지만 이는 오직 미래의 조화에 필수적인 서곡일 뿐이다.(131 페이지)
상상력은 은총의 세속화된 형태이다. 상상력은 바닥을 가늠할 수 없는 깊이 너머에서 자아를 붙잡고 그렇게 해서 아무나 흉내낼 수 없는 그만의 방식으로 자아가 꽃피게 만든다. 상상력을 욕하는 것은 최소한 문학계에서는 일종의 신성모독이다.(133 페이지)
그러나 괴테의 말을 들어보자. 그에 의하면 상상력은 분열된 능력, 창조적 에너지의 원천인 동시에 공포와 망상의 근원이다.(135 페이지) 상상력에는 라캉의 실재와 프로이트의 타나토스적 요소가 있다. 상상력은 통합적이기보다 분열적이다. 상상력에는 은혜로움 뿐 아니라 신성의 공포가 있다.(136 페이지) 워즈워스는 이런 사나운 힘을 우화시키고 길들이는 것이 시의 임무중 하나라고 보았다.
근대성이 진정한 무신론을 성취하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를 생각해보면 놀랍기만 하다. 그리고 마침내 무신론을 달성했을 때도 결코 종교적 믿음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거나 종교적 믿음을 타파해서 얻은 것은 아니었다.(155 페이지)
신을 믿지 않는 것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힘든 일이다. 신은 항상 다른 모습을 하고 무대에 다시 등장한다. 문화는 과연 일반 대중과 지성인을 정신적 교감 안에서 하나로 묶으며 종교 이후 시대의 신성한 담론이 될 수 있을까?(158 페이지) 가능하지 않다.
계몽주의가 종교적 신념을 축출하는 데 실패했다면 관념론자와 낭만주의자들은 종교를 세속화하지 못했다. 우리의 경외감, 존경심, 의무감 등을 신에게서 인류에게로 돌리려 무던히 애를 쓴 허버트 스펜서, 조지 엘리엇, 조지 헨리 루이스 같은 19세기 합리주의자들에게 과학은 불가해한 신비로움을 불러일으키는 준종교적 활동이었다.(181 페이지)
예수에 대해 적확한 논리를 펼친 이글턴은 쇼펜하우어에 대해서도 선언적인 말을 한다. 쇼펜하우어는 일종의 종교적 이단자이자 그가 몹시도 시기한 헤겔의 악몽 버전이며 순수한 형이상학자라고.(196 페이지)
이글턴은 신이 죽어버린 후 욕망의 죽음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고 말한다.(197 페이지) 니체가 볼 때 진정한 초인은 우주의 공허함에 맞서고 종교의 위안 없이 살 수 있는 사회과학자다.
신을 계속해서 생존하게 하는 다양한 인공호흡기 중 가장 효율적인 것은 도덕이다. 이글턴은 도스토예프스키에 반대하며 라캉이 주장하듯 신이 죽었다면 우선 허락해줄 이가 없기 때문에 아무 것도 허락되지 않는다고 말한다.(201 페이지)
자연에 대한 통치권과 으스대는 자기독립적 모습의 초인에게서 신에 대한 신성함의 기색 이상의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역설적이게도 신이 결국 죽지 않았음을 의미한다.(202 페이지)
이글턴은 마르크스의 사상 특히 초기 사고는 유대 그리스도교의 영향을 깊이 받았기에 그에게서 진정한 무신론을 찾을 수 없다고 말한다.(203 페이지) 니체의 초인이 문제이다. 즉 전능한 신처럼 초인도 오로지 자신에게 의지한다. 퇴행적으로 신학을 훔쳐보지 않으면서 자율성이나 자기생산을 말할 수는 없다.
좀더 넓은 의미의 문화는 종교의 공산주의적 정신과 같은 무엇인가를 보유한다. 과학, 철학, 문화, 그리고 정치는 종교의 쇠퇴에도 존속하며 제각기 그들만의 사업을 만드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들은 각자의 사업을 유지하면서 종교의 임무 중 몇 가지를 나눠서 수행해야 하는 입장이다.(221 페이지)
비극은 자유와 결정론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을 우리에게 가르쳤는데 그 한 가지는 혐오스러운 결정론을 섭리 또는 신이라는 좀더 고상한 개념으로 바꾸는 것이다.(227 페이지) 비극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근대에 또다른 형태의 분열된 종교 역할을 했고 개념이라기보다 이미지의 문제로 더욱더 인상적인 존재감을 풍겼다.
미국의 시인 월리스 스티븐스는 어떤 사람이 신에 대한 믿음을 버린 후 삶의 구원으로서 신의 자리를 차지하는 본질이 시라고 말한다. 스티븐스는 시와 훌륭한 음악이 천국의 빈자리와 찬송가를 대신한다고 말한다. 신은 절대 사라지지 않았다. 경제는 아마 순전한 무신론자일 수 있지만 경제를 감시하는 국가는 여전히 진정한 믿음을 가진 자가 될 필요성을 느낀다.(246 페이지)
종교적 믿음과 관련해 인간은 역사상 가장 성공을 거둔 상징체계를 하루 아침에 버리지 않는다. 원리주의는 전지구적 교리다. 세상은 너무 심하게 믿는 자들과 너무 믿지 않는 자들로 양분된다.(248 페이지) 서구 자본주의는 세속주의 뿐 아니라 원리주의를 낳는 데도 일조한 셈인데 이는 가장 칭찬할 만한 변증법의 위업이다.
동시대 자본주의가 탈신학, 탈형이상학, 탈이념, 탈역사의 시대를 향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시점에 분노에 찬 신이 자신의 부고 공지를 너무 빨리 돌렸다고 항의하기 위해 다시 한 번 고개를 들었다.
계몽주의가 도래하면서 과학과 이성은 종교의 권위 비슷한 것을 계승하려 했다. 급진적 낭만주의 시대에는 이성보다는 예술이 통치권을 찬탈하려 했다. 혹은 찬탈까지는 아니라도 최소한 신의 자리를 대체하려 했다.
현재는 우파가 아닌 좌파 진영에서 정치에 대한 종교적 보충물을 찾는 이들이 있다. 이는 부분적으로는 분명 후기 자본주의의 정신적 공허감에 대응하기 위해서이지만 사실상 믿음, 희망, 정의, 공동체, 해방 등에 대해 세속적 개념과 종교적 개념 사이에 중요한 관련성이 있기 때문이다.(254 페이지)
지적 측면에서 볼 때 종교는 순전히 헛소리이지만 종교가 반드시 필요한 공손함, 미학적 매력, 사회 질서, 도덕적 교화에 기여한다면 지적 측면에서 헛소리란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256 페이지)
이글턴은 알랭 드 보통, 마키아벨리, 니체 등이 종교에 대해 보인 '그럼에도'의 역설을 언급한다. 마키아벨리는 종교적 개념은 공허하지만 공포를 조장하고 폭도를 진정시키는데 유용한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니체는 뻔뻔스러운 대담성을 발휘해 문제가 되는 것은 신의 죽음이라기보다 인간의 불신이라 지적했다.(258 페이지)
내가 마르크스주의를 유사(類似) 종교라 말하는 것을 들은 것은 꽤 오래이다. ‘신의 죽음 그리고 문화’는 이 불분명한 말의 의미를 풀어서 설명한 책이다. 물론 마르크스만이 아니라 니체, 알랭 드 보통 등을 비롯한 많은 사례들이 망라되었고 풀어서 설명했지만 쉽지만은 않다. 같은 저자의 ‘신을 옹호하다’를 읽어야겠다. 이글턴의 종횡무진의 박학과 다식(多識)이 놀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