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한가람 역사문화 연구소) 소장이 서울신문과 자신의 페이스북에 쓴 글들을 읽으며 내가 떠올린 것은 지난 2007년 이 분의 저서인 ‘조선왕 독살사건’이란 책을 읽은 기억이다.

바른 역사관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며 깊이 공감하고 감명 깊게 읽은 책이었고 학교 졸업 후 처음으로 읽은 자율적인 의식서(意識書)라 할 책이었다.

오늘 오른 그 분의 페이스북 글은 도종환 의원의 문체부 지명과 관련해 느닷 없이 현안이 된 고대사 논쟁에 대해 밝힌 글이고, 일제의 식민사관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조선, 한국, 경향, 한겨레 등 언론 카르텔의 문제점에 대해 지적한 글이다.(경향과 한겨레의 일제 식민사관 고수는 충격적이다. 이들이 일제의 식민사관을 고수하는 것은 밥줄 때문이라고 한다.)

“지금 100년 전 조선총독부에서 만든 역사관을 하나뿐인 ‘정설, 통설’이라고 우기는 식민사학계가 독립운동가의 역사관을 따르는 학자들을 ‘유사, 사이비역사학’으로 매도하는 이유도 본질은 밥에 있다.”(2017년 6월 22일 이덕일 소장 페이스북 글 중에서.. 본문에는 ‘역사관이‘라 되어 있지만 ’역사관을‘으로 수정)

이와 관련해 발표된 일련의 글들을 다 이해하기에는 내 내공이 부족해 역사학자 이주한 님의 ’위험한 역사 시간‘, ’한국사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이덕일 소장의 ’우리 안의 식민사관‘ 등을 읽기로 했고 다음(Daum)의 ’한가람 역사문화 연구소’ 카페에 가입했다.

다만 서울신문에 오른 이덕일 소장의 ‘세종 같은 대통령이 나오려면’(2017년 4월 20일)이란 글을 말하고 싶다.

이덕일 소장은 악역을 담당한 태종이 있었기에 세종 같은 성군이 가능했다고 말한다. 태종이 담당한 악역이란 강력한 공신세력을 정리하고 모두 법 아래 존재하는 법치국가를 만든 것이다.

이미 명나라의 공식 인정을 받은 세자 이제(李禔: 양녕)를 폐출하고 이도(李祹: 충녕)를 임금으로 발탁한 태종의 결단도 악역에 포함시켜야 할지 모르지만 시사하는 바가 있다.

당시 양녕은 많은 물의를 일으킨 상황이었다. 태종의 결단은 세자 개인보다 국가가 중요하다고 판단한 데서 도출된 것이다.

태종의 결단은 적장자(嫡長子) 왕위 승계에 집착하지 않은 결과라 할 수 있다. 태종의 결단은 주나라를 흠모한 유가의 성군답게 장자인 문종에게 왕위를 잇게 한 세종의 결정과 대비된다.
병약한 문종은 오래 살지 못했고 어린 장남 단종이 왕이 됨으로써 숙부 수양이 섭정하는 구실이 마련되었다.(장인용 지음 ‘주나라와 조선’ 참고)

이와 비교할 글이 이재영의 글이다. 저자는 세조가 아버지 세종의 유훈대로 어린 조카 단종을 잘 보필하여 적장자 승계 원칙을 지켰으면 조선 역사는 덜 시끄럽지 않았을까, 라 말한다.(‘조선 왕릉, 그 뒤안길을 걷는다’ 80 페이지)

하지만 수양의 잘못은 적장자 승계 원칙을 깬 것이 아니라 왕위를 찬탈한 것이다.

어떻든 이덕일 소장의 결론은 한국 사회에 필요한 대통령은 태종 같은 인물이라는 것이다. 해방 이후 친일청산에 실패한 데다 개발독재가 가세하면서 우리 사회 상층부 구석구석을 장악한 부패와 특권 카르텔을 해체하려면 태종처럼 악역을 감내하는 소명의식이 필요한 바 그 이후에야 세종처럼 안정된 상태에서 선정을 펼칠 수 있는 성공한 대통령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글은 개혁이 혁명보다 힘든 이유를, 초법적인 혁명과 달리 개혁은 법적 테두리를 지키는 변화이기 때문이라 설명한 뒤 개혁가는 좋은 의미의 마키아벨리스트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오길영 교수의 글(2017년 6월 17일 페이스북)과 함께 음미할 글이다.

나이브(naive: 순진, 고지식함)의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절대로 안 되는 것이다.

* 중요한 글을 써야 하는데 머리가 너무 아프다. 거의 일주일 동안이나 성(城)에 진입하려는 고투(苦鬪)를 계속하지만 실패하는 카프카의 ‘성(城)’의 주인공 K처럼 나는 글을 시작하지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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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설물 유지, 보수 및 진열물 교체 등을 위해 8월 이후 내년 초까지 폐쇄되는 고궁박물관 지하 1층의 종묘실(宗廟室)에 다녀왔다.(2017년 6월 21일) 종묘에서 본 것들과는 다른 풍경이 연출되어 있었다.

재현(再現) 공간이기에 압축적이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핵심적인 것들만 진열해 놓은 고궁박물관의 종묘실과, 그리 넓지 않지만 해설을 들으며 구석구석 다니려면 한 시간 이상이 소요되는 종묘의 위상은 다를 수 밖에 없다.

재현 공간은 현실적이지 않다. 궤식(饋食)이란 단어가 눈길을 끌었다. 박물관의 설명에 의하면 종묘 제향(祭享)은 네 가지 순서로 이루어진다. 신을 맞이하는 절차, 신이 즐기는 절차, 신이 베푸는 절차, 신을 보내는 절차 등이다.

궤식은 신이 즐기는 절차 가운데 하나로 익힌 고기를 신에게 바치고 곡식을 태워 즐기시게 하는 것이다. 먹일 궤(饋)자를 쓰는 궤식은 생소한 단어이다. 물론 익힌 고기를 바치는 것은 생소하지 않다. 우리는 익힌 고기에 익숙하다.

그런데 종묘 제례를 이야기하며 희생(犧牲)을 이야기한 입장에서는 의아하다. 희생이란 종묘 제례에 바치는 산 짐승이다.(한 일간지는 궤식을 익힌 고기, 생고기 덩어리를 조상에게 통째로 바치는 절차로 설명한다.)

한 블로그에 이런 글이 올랐다. 익힌 고기는 희생의 세 번째 모습이라는 것이다. 날 것 그대로를 올리는 것은 상고(上古)의 예식이기 때문에 행하지만 실제로 맛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닌 반면 궤식은 익힌 고기를 올려 봉양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기에 중요시되었다는 글도 함께 실렸다.(이 글이 실린 블로그의 이름은 ‘왕실의 의례‘이다. 인상적이다.)
어떻든 이런 사실들은 지난 6월 17일 종묘 해설 당시에는 알지 못하던 것들이다. 미처 준비하지 못한 부분이다. 하버드 대학교의 인류학자 리처드 랭엄의 가설이 생각난다.

불에 익혀 먹는 행위(요리)가 인간의 해부학적 변화를 유발하는 데서 더 나아가 생리적, 심리적, 사회적 변화를 낳았고 인간이라는 종 전체를 혁신적으로 진화시키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다는 것이고 인간의 큰 뇌는 화식(火食)의 산물이라는 것이다.(’요리 본능‘ 참고)

희생(犧牲)이 상징(적)이라면 궤식(饋食)은 현실(적)이다.(고궁박물관 지하 1층의 종묘실을 소개해주신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종묘의 제례는 이런 상징과 현실의 차이 또는 조화를 두루 살펴보아야 할 의식이고 절차이고 이야기 거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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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경복궁 답사(踏査) 수업 시간에 비확정적인 우리 전통 문과 고정(확정)적인 서양 문의 차이에 대해 설명을 듣는 부분이 있었다.

마루나 방 앞에 설치하여 접어 열 수 있게 만든 큰 문을 분합문(分閤門)이라 하는데 이 문을 활용하면 거실을 넓게 쓸 수 있다.

자폐를 극복하고 자폐증 분야의 권위자가 된 동물학 박사 템플 그랜딘의 ‘나는 그림으로 생각한다’에 개념적, 추상적 사고에 어려움을 겪는 반면 그림을 떠올려 생각하고 컴퓨터 시뮬레이션 하듯 모든 어렵고 복잡한 과정을 머리 속에서 그리는 저자가 삶의 다음 단계로 나아간다는 추상적 개념을 문(門)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 것으로 시각화해 깨우치는 장면이 나온다.

그는 지난 일기를 보니 각각의 문들이 자신이 다음 단계로 옮겨가는 것을 도와주었다고 말한다. 이제 시작점에 선 나에게 오늘 배운 문(門)은 꽤 상징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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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수사원(飮水思源)은 물을 마실 때는 그 근원을 생각해야 한다는 뜻이니 교훈이 되는 좋은 의미로 해석하기 쉽다.

하지만 반대어가 배은망덕으로 통용된다고 하니 무언가 이상하다.

근원이라는 말을 듣고 나는 바람, 흙, 물, 햇빛, 영양분 등 수많은 인연(전 우주의 참여)에 의해 만들어지는 꽃의 섭리 같은 것을 생각했다.

즉 물 한 잔을 마셔도 숱한 인연을 생각하라는 의미로 생각했다.

하지만 음수사원의 반대어로 배은망덕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의도는 목 마른 사람에게 물을 가져다 준 자신들의 은혜를 기억하라(잊지 말라)는 말을 하는데 있다.

음수사원이 굴정지인(掘井之人) 즉 우물을 판 사람의 고마움을 잊지 않는다는 말과 함께 쓰이니 말이다.

문제는 우물을 판 사람의 은혜를 강조하다보면 자연이라는 근원(에서 나오는 선물의 고마움)을 도외시하게 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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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말 중촌 & 남촌 시연 자료를 찾는 과정에서 정동이 중촌(中村)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덕수궁, 배재학당, 구 러시아 공사관, 성공회 서울주교좌 대성당, 정동제일교회 등이 있는 정동은 역사적 명소이다.

이재영 님의 ‘조선 왕릉, 그 뒤안길을 걷는다’에서 정동과 관련한 중요한 사실(史實)을 알았다.

태조 이성계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아들 태종이 태조 사후 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정동(貞洞) 소재 정릉(貞陵)을 도성(都城) 안에 능이 있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이유로 지금의 성북구 정릉동(貞陵洞)으로 천릉(遷陵)하고 능을 묘로, 신덕왕후 강씨는 왕후에서 후궁으로 격하시켰다는 부분이다.

아버지와의 사이가 좋지 않아서이기도 하지만 계비(繼妃)가 원비(元妃)의 장성한 아들들을 제치고 자신의 둘째 아들을 세자로 만든 악연 때문이다.

이현군의 ‘서울, 성 밖을 나서다’에는 선정릉(宣靖陵) 이야기가 나온다. 서울(강남)에 왕릉이 들어선 것이 아니라 들어설 당시는 경기도 땅이었다가 서울에 편입되었다는 것이다.(206, 207 페이지)

그러면서 저자는 조선 시대 능은 도성 안에 들어설 수 없었다는 말을 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당시 선정릉이 있던 곳은 ‘도성 안이 아닌’(도성을 조금 벗어난) 정도가 아니라 서울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경기도 땅이었다.

오버하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경국대전’에 왕릉은 도성에서 80리 안에 있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

그 규정에서 벗어난 것이 세종의 영릉(英陵)과 사도세자의 융릉(隆陵)이다.(이재영 지음 ‘조선 왕릉, 그 뒤안길을 걷는다’ 64 페이지)

정릉(貞陵)이 있던 곳은 정동(貞洞)이고 현재 정릉이 있는 곳은 정릉동(貞陵洞)이니 재미 있다.
정릉동에서 능(陵)을 옮겼으니 정동이고 능이 들어선 동네는 정릉동(貞陵洞)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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