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은(素隱) 박홍규 선생(철학자)의 사상을 해설한 제자 소운(逍雲) 이정우 교수의 책 ‘소은 박홍규와 서구 존재론사‘를 읽고 있다.

서구 존재론의 두 축인 플라톤과 베르그손의 사상을 다룬 책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이정우 교수의 책은 열 여덟 권이다. ‘소은 박홍규와 서구 존재론사‘, ‘가로지르기‘, ‘담론의 공간‘, ‘접힘과 펼쳐짐‘, ‘주름 갈래 울림‘, ‘탐독(耽讀)‘, ‘주체란 무엇인가‘, ‘세계의 모든 얼굴‘, ‘천 하나의 고원‘, ‘진보의 새로운 조건들‘, ‘인간의 얼굴‘ 등 모든 책이 고투하며 읽은 책들이다.

내가 처음 읽은 이정우 교수의 책은 ‘가로지르기‘이다. 20년 전의 일이니 1997년 이후 거의 1년에 한 권씩 이 교수의 책을 만난 셈이다.

소은(素隱)과 소운(逍雲)이란 호가 눈에 띈다. 한문은 다르지만 한글로는 발음이 같은 ‘소‘라는 글자를 보며 나도 소자를 넣어 호는 아니고 별칭을 하나 하나 짓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소윤(宵贇)은 어떨까? (드물고 어려운 글자이지만) 밤 소(宵)와 예쁠 윤/ 빛날 윤(贇)을 쓰는 이름이다.

밤과 빛남은 밤과 낮처럼 완전히 반대되는 말은 아니지만 상대어라 할 수 있다.

그럼 반대되는 이름을 넣어 별칭을 지으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나의 속성으로 이름이 모두 채색되지 않게 하려 하기 때문이다.

윤(贇)은 빛남과 예쁨 외에 문채(文彩) 즉 아름다운 문장의 빛남을 뜻하기도 한다. 그리고 문(文)과 무(武)가 모두 들어 있는 멋진 글자이다.
나는 윤(贇)이란 글자로부터 문질빈빈(文質彬彬; 외양의 아름다움과 내면의 아름다움이 조화롭게 어울리는 것)을 생각한다.

다만 문과 무의 관계를 내면의 아름다움과 외양의 아름다움의 관계로 볼 수 있는지는 미지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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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읽은 책들 가운데 김용만 소장의 ‘조선이 가지 않은 길’과 이은선 교수의 ‘다른 유교 다른 기독교‘를 함께 말하고 싶다.

김용만 소장의 책 내용들 가운데서는 종법(宗法) 제도와 사대봉사(四代奉祀)의 문제점을 지적한 ‘양반들이 집착한 진짜 이유’란 글이 기억에 남는다. 고려 때만 해도 여자의 인권 상황이 좋았다는 주장이 담긴 글이다.

이은선 교수의 ‘다른 유교 다른 기독교’란 책에서 내가 알게 된 것은 로버트 커밍스 네빌의 ‘보스턴 유교’라는 개념(책)이다. 기독교 또는 서양 사상과 접목된 유교를 말하는 보스턴 유교는 연구자들의 근거지가 보스턴인 데서 붙은 이름이다.

‘다른 유교 다른 기독교‘가 유교와 기독교, 유교와 페미니즘의 대화를 추구하는 책이듯 ’보스턴 유교‘는 기독교와 유교의 생산적 대화를 추구한 책이다.

유교와 페미니즘의 대화를 큰 틀에서의 유교와 기독교의 대화로 진단하는 이은선 교수는 최근 서구 기독교 여성신학자들이 가부장적 전통을 여성해방적으로 재해석하여 다른 관계를 맺고 있듯 유교 진영에서도 그런 일이 가능하다고 본다.
저자는 조선에 비해 여성 인권 면에서 앞섰다는 평가를 받는 고려 시대가 당면했던 문제로 혼인이 성립하면 신랑이 신부의 집에서 일정 기간 거주하는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을 든다.

그리고 ’한국의 유교화 과정‘의 저자인 마르티나 도이힐러의 논의를 참고해 너무 단기적인 과정과 정태적인 개별 대상에 대한 집중에서 벗어나 좀 더 긴 기간에 대한 장기적인 전망과 역사의식을 가지고 실상을 판단하면 다른 측면을 볼 수 있다고 말한다.

남귀여가혼의 문제점은 여자 집에서 혼수를 마련하고 사위를 거주시켜야 하는 제도였기에 실제 상황에서 경제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집안의 여성들은 버림받을 위험에 노출된다는 점이다.

도이힐러의 논의란 조선 사회에서 16세기 중반과 17세기 후반의 큰 인구 증가로 효율적인 식량 공급을 위해서 토지가 더 이상 작게 나뉘어서는 안 되었기에 출가한 딸에게까지 상속을 해줄 수 없었다는 것이다.

너무 여자와 남자의 대결 구도로만 사태를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물론 저자도 페미니즘에 동의하고 그 대의(大義)를 지지한다. 페미니즘도 여러 갈래와 지향성으로 나뉘고 있기에 특정할 수 없지만 여성의 말이 수용되는 세상을 만드는 것 정도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모든 역사적 추세를 진화가 없는 부동(不動)의 것으로 파악하는 역사의 정태(靜態)주의는 물론 역사에서 오직 끊임 없는 변화만을 보고 그런 변화의 기저에 있는 질서와 역학 구조와 방향 등을 무시하는 역사 상대주의(相對主義)도 배격한다.

저자가 의거하는 관점은 장기간에 걸친 역사적 경험을 실증적으로 살펴본다면 분명 뚜렷한 포괄적인 사회발전의 방향과 구조가 드러난다고 역설한 노르베르트 엘리아스의 관점이다.

1930년대에 주로 활약했던 엘리아스는 1970년대 아날학파(Annales School)에 의해 재발견된 이후 빛을 보았다.

아날 학파는 사건들로 시끄러운 역사의 표면 아래에서 거의 무의식과도 같은 평형들을 밝혀냈다.

즉 시원으로부터의, 그리고 시원으로의 목적론적 과정이 아닌, 오랜 시간 동안의 평형 뒤에 찾아오는 급격한 변환의 모델을 사용함으로써 변증법적 역사 철학의 패러다임을 파기시켰다.(이정우 지음 ‘담론의 공간’ 146 페이지)

‘시원으로부터의, 그리고 시원으로의‘란 말을 들으니 베르그손이 거부한 기계론과 목적론이 생각난다.

엘리아스는 유럽인들의 삶의 변화를 문명화 과정으로 보았다. 이에 영감을 받은 저자는 조선조(朝鮮朝)가 성립한 이래 유교적 예(禮)를 국가 삶의 전 영역으로 확산시키고자 한 조선의 예치(禮治) 노력이 조선 사회를 유교화해 갔고 그 과정 안에 여성들의 삶과 살림살이도 포괄되었다고 말한다.(92 페이지)

저자는 조선조 이전에는 여성들이 문화의 각 분야에서 그렇게 폭넓게 활동한 적이 없었다는 한국 여성사 연구를 소개한다.(수긍할 수 있지만 여성들의 활동이 기록보다 더 크고 많았을 수도 있지 않을까, 란 의문이 든다.)

거칠지만 김용만 소장의 논의는 특정 프레임으로 사실들을 보기보다 개별 사실들에 주목한 연구의 소산이고 이은선 교수의 논의는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사실보다 특정 프레임(노르베르트 엘리아스의 문명화 과정)으로 세상을 본 결과란 말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개별 사실에 주목했다는 말이 그런 사실들을 파편적으로 바라보았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취합 없는 연구는 무의미하다.

저자는 문해력을 갖추고 외국어 성서를 번역하거나 여신도들을 계몽한 조선 여성들을 거론한다.

저자가 말하려는 바는 조선사 이전에 미미했던 여성들의 활동을 감안하면 조선은 특히 여성의 주체적 능력면에서 발전했다는 말이다.

이를 보면 내가 점입가경을 누리고 있는 것인지 진퇴양난에 빠진 것인지 묘연하다. 소박(?)한 문화유산의 세계로 돌아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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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유교 다른 기독교 - 한국적 페미니즘, 한국적 포스트모던 영성
이은선 지음 / 모시는사람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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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선의 다른 유교 다른 기독교는 한국 유교의 종교성을 여성들의 삶, 리더십 등과 연결시킨 책이다. 1부 다른 유교, 2부 다른 기독교로 구성된 책에서 저자는 영정조 시대의 여성 성리학자인 임윤지당(任允摯堂: 1721 1793)과 강정일당(姜靜一堂: 1772 1832)의 삶과 사상을 조명하는 것을 통해 자신의 사상을 제시한다.

 

강정일당은 지극한 종교인, 수행자의 삶을 살았다. 남편에게 삶에서 도를 추구하는 삶이 가장 귀중한 일임을 일일이 강조하고 부귀나 생계, 과거 시험 등이 결코 인생의 목표가 될 수 없음을 누누이 상기시켰다.

 

저자는 이런 의식이야말로 오늘날 어떤 현대의 페미니스트 주체의식보다 더욱 견실한 주체의식이라 규정한다.(48 페이지) 저자는 유가적 도()의 특성이 성인지도(聖人之道)의 추구라고 보면서 그것이 단순히 어떤 정치경제적 의미나 윤리, 도덕적 의미만을 갖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배움을 통해 성인(聖人)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깊은 내재적 초월성과 종교성을 포함하는 것으로 본다.

 

또한 유교 종교성은 우리의 의식 속에서 끊임없이 공적 인간으로서의 자각을 불러일으킨다고 설명한다. 저자는 한국 유교 영성과 종교성이 오늘날 여성들에게 포괄성과 지속성의 영성을 준다고 본다.

 

저자는 가정의 안녕을 기초로 해서 정치와 문화와 경제를 통괄해서 보는 안목, 드러나는 일순간의 효과에 좌우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노력하여 뜻을 실현하고자 하는 결심, 자신의 가정이나 사적 울타리를 넘어서 세상의 만물에 마음과 관심을 두는 포괄적 배려심과 생명적 책임감 등의 덕목과 배려심이야말로 오늘 여성들에게도 긴히 필요하고 그것을 강정일당과 같은 유교 여성들의 삶에서 배울 수 있다고 여긴다고 말한다.(53 페이지)

 

1부의 두 번째 장인 한류와 유교 전통 그리고 한국 여성의 살림 영성은 우리가 어떻게 유교 전통에서 새롭게 배울 수 있고 어떻게 유교 문명과 기독교 문명이 서로 대화할 수 있는지 페미니스트의 시각에서 물은 글이다.

 

저자는 유교의 내성외왕(內聖外王), 하학이상달(下學而上達) 등의 가르침을 공과 사, 이념적 삶과 물질적 생활, 타자와 자아 등 오늘날 여성들도 포함해서 현대인들이 첨예하게 느끼는 삶에서의 근본적 간극들을 매우 현실적이고 세속적인 방식으로 조화시키려 한 노력으로 본다.

 

내성외왕은 안으로는 성인(聖人)이며, 밖으로는 임금의 덕을 함께 갖춘 사람이라는 뜻으로, 학식과 덕행을 모두 지닌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하학이상달은 낮고 쉬운 것을 배워 깊고 어려운 것을 깨달음을 이르는 말이다.

 

저자에 의하면 성적 차별과 무관한 유교의 태극론적 우주관이 리()의 현실적인 활동을 위해 다시 음과 양의 우주론적 기()의 원리를 받아들여 형이상학적으로 존재의 구별과 차별을 말하기 시작했다.(60 페이지)

 

현실의 인간 삶에서 여성과 남성의 구별이 차별이 되었고 종법(宗法) 질서는 지독한 남성 중심의 가부장주의의 위계질서가 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유교 성속 체계의 사각지대이다. 이일분수(理一分殊)의 세계관을 가졌지만 현실에서는 속()의 전 영역을 거룩의 영역으로 화()하게 하기 위해 출발점을 필요로 했을 것이고 그 출발점을 모든 세속 가정의 적장자 가부장으로 본 것이라고 이해(61 페이지)하는 저자는 조선 시대 여성들의 삶도 또 하나의 성화(聖化)의 과정으로 본다.(62 페이지)

 

()는 하나이지만 여럿으로 나뉘어져서 다르다고 직역할 수 있는 이일분수(理一分殊)란 모든 리는 태극이라는 하나로 귀결되며 모든 만물에는 각자의 태극이 존재한다는 뜻을 담고 있는 주희(朱熹) 철학의 핵심이다.

 

저자는 오늘날 전 세계로 번지고 있는 한류의 바람과 그 밑바닥에 오랜 기간의 유교적 살림의 과정에서 다듬어진 한국 여성들의 살림의 영성과 리더십이 녹아 있다고 생각한다.(63 페이지) 그런데 이 시점에서 의문이 든다. 유교 이전에 있었던 장구한 세월의 비유교적 가치관들은 오늘날의 한국 여성들에게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이다.

 

저자는 유교 전통 여성들보다 오히려 공적 영역에서 일하는 현대 여성들이 오히려 사적 영역에 갇혀 있다고 말한다. 유교 여성들은 당시 하나의 공적 영역이기도 했던 가계의 유지와 계속을 위해 모자 관계를 극진히 일구었다. 반면 공적 영역에서 일하는 현대 여성들은 대부분 사적 이익을 위해 일하기 때문에 사적 영역에 갇힌 것이라는 논리이다.(67 페이지)

 

저자는 사기종인(舍己從人)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한다.(사기종인이란 자기를 버리고 남을 따르는 것을 말한다. 남이란 공적 영역이라 할 수 있다.) 당연한 논리이다. 문제는 그런 대의를 위해 분투하는 여성들에게 보상책이 주어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다.

 

저자는 한국 유교의 사기종인의 종교성과 영성을 영적 종교성, 세속적 종교성, 탈세속적 종교성 등으로 부른다. 저자는 생명을 낳고 살리고 보살피면서 공적 영역을 가능하게 하는 여성의 역할을 극진한 의미의 주체성의 표현으로 본다.(69 페이지)

 

저자는 사기종인의 리더십이 어짊을 구해 성인(聖人)됨을 이르는 구인성성(求仁成聖)의 리더십과 다르지 않다고 본다.(74 페이지) 저자는 원망은 곧음으로 갚고 덕은 덕으로 갚으라는 공자의 말을 인용하며 그것이 사기종인과 구인성성의 덕을 실행하는 것이 현실에서 얼마나 왜곡될 수 있으며 자기 부정과 굴종, 억압의 덫이 되는지 잘 알려준 것이라 말한다.

 

신자유주의 체제 아래의 세계는 인간 문화 자체가 가능할 수 있도록 하는 가족과 같은 인간적 토대가 빠르게 무너지고 있다. 관건은 누가 사기종인과 구인성성의 도를 행하는 사람이 되는가, 이다. 저자는 이는 단순히 정치사회적이고 경제적인 안목만으로는 되지 않으며 훨씬 더 궁극으로 밀고 가서 존재론적으로 또는 영적으로 탐구해야 할 일이라고 본다.(82 페이지)

 

저자가 제안하는 것은 성()과 속()을 분리하는 종교로는 할 수 없는 것을 성과 속이 급진적으로 하나됨을 지향하는 유교적 도의 가르침으로 한 번 진지하게 살펴보자고 말한다. 저자는 맹자가 말한 무군(無君)을 공적 영역의 훼손과 함몰에, 무부(無父)를 가족적 삶의 해체에 견준다.(87 페이지)

 

저자는 오늘날 서구 기독교 여성신학자들이 가부장적 전통을 여성해방적으로 재해석하여 다른 관계를 맺고 있듯 유교 진영에서도 그런 일이 가능하다고 본다.(88 페이지)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유교의 포스트모던적 종교성이다. 저자는 서구적 포스트모던의 탐색과 유교의 궁극 이해가 잘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조선에 비해 여성 인권 면에서 앞섰다는 평가를 받는 고려 시대가 당면했던 문제로 혼인이 성립하면 신랑이 신부의 집에서 일정 기간 거주하는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을 든 저자는 마르티나 도이힐러의 논의에 의거해 너무 단기적인 과정과 정태적인 개별 대상에 대한 집중에서 벗어나 좀 더 긴 기간에 대한 장기적인 전망과 역사의식을 가지고 판단하면 다른 측면을 볼 수 있다고 말한다.

 

남귀여가혼의 문제점은 여자 집에서 혼수를 마련하고 사위를 거주시켜야 하는 제도였기에 실제 상황에서 경제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집안의 여성들은 버림받을 위험에 노출된다는 점이고 도이힐러의 논의란 조선 사회에서 16세기 중반과 17세기 후반의 큰 인구 증가로 효율적인 식량 공급을 위해서 토지가 더 이상 작게 나뉘어서는 안 되었기에 출가한 딸에게까지 상속을 해줄 수 없었다는 것이다.

 

너무 여자와 남자의 대결 구도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91 페이지) 저자는 모든 역사적 추세를 부동적이고 진화가 없는 것으로 파악하는 역사의 정태주의, 역사에서 오직 끊임 없는 변화만을 보고 그런 변화의 기저에 있는 질서와 역학 구조, 방향 등을 무시하는 역사 상대주의를 모두 배격하고 장기간에 걸친 역사적 경험을 실증적으로 살펴보면 거기에는 분명 뚜렷한 포괄적인 사회발전의 방향과 구조가 드러난다고 역설한 노르베르트 엘리아스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92 페이지)

 

1930년대에 주로 활약했던 엘리아스는 1970년대 아날학파에 의해 재발견된 이후 빛을 보았다. 아날 학파는 사건들로 시끄러운 역사의 표면 아래에서 거의 무의식과도 같은 평형들을 밝혀냈다. 즉 시원으로부터의, 그리고 시원으로의 목적론적 과정이 아닌, 오랜 시간 동안의 평형 뒤에 찾아오는 급격한 변환의 모델을 사용함으로써 변증법적 역사 철학의 패러다임을 파기시켰다.(이정우 지음 담론의 공간’ 146 페이지)

 

시원으로부터의, 그리고 시원으로의란 말을 들으니 베르그손이 거부한 기계론과 목적론이 생각난다. 엘리아스는 유럽인들의 삶의 변화를 문명화 과정으로 보았다. 이에 영감을 받은 저자는 조선조(朝鮮朝)가 성립한 이래 유교적 예()를 국가 삶의 전 영역으로 확산시키고자 한 조선의 예치(禮治) 노력이 조선 사회를 유교화해 갔고 그 과정 안에 여성들의 삶과 살림살이도 포괄되었다고 말한다.(92 페이지)

 

저자는 조선조 이전에는 여성들이 문화의 각 분야에서 그렇게 폭넓게 활동한 적이 없었다는 한국 여성사 연구를 소개한다.(수긍할 수 있지만 여성들의 활동이 기록보다 더 크고 많았을 수도 있지 않을까, 란 의문을 전하고 싶다.)

 

저자는 문해력을 갖추고 외국어 성서를 번역하거나 여신도들을 계몽한 조선 여성들을 거론한다. 저자가 말하려는 바는 조선사 이전에 미미했던 여성들의 활동을 감안하면 조선은 특히 여성의 주체적 능력면에서 발전했다는 말이다.

 

저자는 유교화 과정을 단순히 간단한 윤리, 도덕적 차원에서의 예화(禮化: 매너화) 과정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성화(聖化)의 과정으로 이해한다. 저자가 말하는 성화란 성과 속을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두 영역을 서로 깊이 연결시키는 것이다.

 

저자는 유교를 가장 적게 종교적이면서도 그 안에 풍부한 영적 추구와 실천적 수행의 차원을 담고 있다고 말한다.(96 페이지) 물론 저자가 말했듯 공자 자신도 유교 가부장주의에 갇혀 있었다.

 

유럽에 가서 서양 지도교수로부터 명나라의 신유교 사상가 왕양명을 소개받고 단번에 빠져들었다는 저자(85 페이지)는 체()와 용(), (), (), 안과 밖의 하나 됨을 훨씬 강조하는 양명은 대학 팔조목의 모든 공부가 결국 하나를 이루는 것이며 결코 안팎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말한다.(121 페이지) 팔조목이란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 격물, 치지, 성의, 정심이다.

 

저자는 5내가 믿는 이것, 한국 생물(生物) 여성정치와 교육의 근거에서 한나 아렌트가 19세기 부르주아 제국주의로부터 파생된 20세기 전체주의에 대항할 수 있는 원리로 드러내고자 한 것이 탄생성의 원리라 말한다. 탄생성의 원리란 오직 태어남에 근거해서 귀한 존재이고 존엄한 존재임을 말한다.

 

2부 다른 기독교의 1한국 천지생물지심의 영성과 기독교 영성의 미래에서 저자는 오늘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실리주의와 공리주의, 경제제일주의는 경제라는 하나의 원리에 의해서 삶의 다른 모든 차원이 무시되고 억압되는 것으로 서구적 근대 문명의 물질주의와 깊이 관계되어 있고 그 문명의 토대가 되는 기독교 절대주의와 거기서 실체론적으로 굳어진 기독론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말한다.(179, 180 페이지)

 

저자는 여성신학자로서 우리 시대의 물음을 위해 유교와 대화하려는 이유는 유교의 보편성과 인간주의 때문이라 말한다.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탈세속적이거나 선험적인 방식이 아닌 보편과 다원성, 이곳, 수행의 인간성 속에서 답을 찾는 유교의 비근한 특성이다. 저자는 서구 전통의 배경에 있는 기독교 영성의 초월 신관과 실체론적 세계관을 신유교의 내재 신관과 생명 유기체적, 역동적 사고와 밀접히 만나게 한다면 생명 경시와 공동체 파괴의 인류 문명적 난제를 푸는 데 좋은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185 페이지)

 

책의 중요 부분은 24포스트 휴먼 시대에서의 인간의 조건5장 한국 교회와 여성, 그리고 인류의 미래이고 핵심적인 장은 4장이다. 이 장은 유교와 기독교의 대화를 다룬 장이다. 저자는 유교 전통을 하나의 특별한 종교적 전통으로 보며 거기서 여성들이야말로 그 유교적 영성을 아주 잘 체현하면서 살아왔다고 본다.(281 페이지)

 

유교 영성의 핵심은 이 세상의 세간적 삶에서 도를 이루려는 것이다. 유교 전통 사회에서 여성들의 삶은 이 세상의 온갖 살림살이를 맡아오면서 그 유교적 삶을 살아온 경우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자아가 신이 되고 원리가 되고 법이 되는 서구 근대성이란 유()의 사고를 극단적으로 펼친 결과라고 생각한다.(283 페이지)

 

저자가 제시하는 대안은 무()의 사고이다. 저자는 사기종인 극기복례, 구인성성 등을 유교적 무의 세 가지 방식으로 본다. 이 세 덕목은 서구 근대주의가 빠져들기 쉬운 자아 절대 의의 유()의 언어에 대한 대안으로서 유교적 하학이상달(下學而上達)의 무()의 언어이다.(298 페이지)

 

물론 전통 사회에서 이 세 언어는 한편으로 여성들에게는 혹독한 억압의 언어였고 오늘날에도 그렇게 긍정적이지는 않다. 그러나 저자는 여성들도 도덕적 주체성을 세우는 일을 회피할 수 없다고 말한다. 흥미로운 점은 여성적 사기종인, 여성적 극기복례, 여성적 구인성성이란 말이다.

 

저자는 모든 포스트휴먼적 논의에서 나오는 관계성의 의미나 익명성의 의미 같은 것들이 유교 전통, 특히 거기에서의 여성들에 의해서 실행된 유교적 삶 속에서 이미 잘 녹아 있다고 본다.(303 페이지)

 

저자는 맺는 말에서 기독교 성경의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이 동시에 전하는 수로보니게(가나안) 여자의 믿음의 이야기를 언급한다. 귀신 들려 괴로워하는 딸을 고쳐달라는 여자의 이야기로 예수가 그녀가 이방인이라는 이유를 들어 아이들을 먼저 먹여야지 개들에게 빵을 던져줄 수 없다는 말로 거절하자 여자는 개들도 주인의 상 아래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얻어먹는다는 이야기로 예수를 굴복시킨다는 내용을 갖는다.

 

신약 성경에서 예수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뜻을 꺾고 승복한 예는 이것이 유일하다. 여인에게 승복했다는 점이 중요한데 그녀는 다름 아닌 어머니이다.(311 페이지) 저자는 이 이야기를 어떻게 속된 것을 거룩으로 선포하는 하나님의 창조 사건, 말씀 사건, 언어 사건이 계속되고 있는지 잘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말한다.

 

저자에 의하면 그것은 그리스도 영역의 확장이고, 한 청년 예수가 그리스도로 선언되는데 그치지 않고 이방여인과 온 피조물이 그리스도로 선언되는 것을 고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필요한 것은 변화이고 대화이고 질적 도약임을 알게 하는 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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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형 교수의 ‘간다라 미술’에서 무불상(無佛像) 표현이란 말을 만났다. (불)상을 만드는 대신 상징적인 것으로써 붓다의 생애를 도해(圖解: 글의 내용을 그림으로 풀이함)하는 것을 말한다.

빈(empty) 대좌(臺座: 불상을 올려놓는 대), 붓다의 발자국 등을 통해 상징적으로 붓다를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관행 이후 붓다를 점차 신적 존재로 숭앙하는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붓다를 인간의 모습을 한 상으로 직접 대하고 예배하고자 하는 욕구가 불교도들 사이에서 점차 강해졌다.

하지만 무불상 관행은 쉽게 깨지지 않았다. 인간적 형상은 보는 사람들에게 나름대로 강한 정서적 힘을 발휘할 수 있지만 원형(붓다)과의 관계가 모호하고 언제든지 그런 모호성에 대한 의구심에서 벗어나기 힘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베르그손의 엘랑 비탈(삶의 약동)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논의한 이정우 교수의 시도를 생각하게 된다.

약동은 낭만적 이미지 또는 정서적 이미지로 받아들이기 쉽지만 실은 결정론적 과정을 무너뜨리는 절대 차이를 말한다. 추상적인 것이다.
문제는 결정론을 쉽게 설명하지 못하는 내 역량이다.

인간적 형상이 불러일으키는 정서적 힘과, 삶의 약동을 낭만적 이미지로 보는 것을 한 데 묶어 논의하려는 것은 무리한 시도일까?

형상화에 대해 조심스럽던 태도로부터 불상이 출현한 것을 놀라운 일로 전제한 뒤 새로 등장한 법신(法身: 붓다가 설법한 정법正法) 사상(법신에 호소하는 것)이 오히려 형상화에 대한 제한을 과감하게 떨쳐 버릴 수 있게 하지 않았을까?라고 추정하는 책(명법 스님 지음 ‘미술관에 간 붓다’ 220 페이지)은 인상적이란 말을 하고 싶다.

상상력의 한 진경(眞境)을 보여주었다고 해야 할까?

다만 궁금증이 드는데 그것은 형상으로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 나를 찾으면 삿된 길을 걷는 것이라는 금강경의 가르침과, 법신 및 색신(色身)의 새로운 관계 설정을 연결지을 수 있는지, 이다.

불교 조각에 대한 자료를 찾다가 생각이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감사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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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장
홍성담 지음 / 에세이스트사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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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小說)과 대설(大說)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소설은 디테일하고 사적인 이야기를 주로 하고 대설은 스케일 큰 사회적 차원의 이야기를 한다. 그렇다면 대설에 어울리는 형식은 무엇일까? 풍자(諷刺)가 아닐지?

 

이 즈음에서 생각나는 시인이 김수영이다. 김수영은 신랄하게 사회를 비판했고 때로 자신을 까발렸다. 가령 이렇게. “왜 나는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오십 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이십원 때문에 십원 때문에 일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일원 때문에...”

 

이 시의 제목은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이다. 그럼 풍자(諷刺)라는 단어가 직접 들어간 시가 김수영에게 있을까? 있다. 바로 누이야 장하고나란 시이다. “누이야/ 풍자가 아니면 해탈이다/ 너는 이 말의 뜻을 아느냐...누이야/ 풍자가 아니면 해탈이다/ 네가 그렇고/ 내가 그렇고/ 네가 아니면 내가 그렇다..”

 

김수영을 언급하는 사설(辭說)이 길었다.(사설이란 판소리에서 소리와 소리 사이에 가락을 붙이지 않고 이야기하듯 줄거리를 설명하는 부분이다.) 이유는 홍성담 화백의 난장의 장르인 대설(大說)의 첫 걸음을 떼어 놓은 김지하 시인이 누이야 풍자가 아니면 자살이다란 산문으로 김수영 시인의 누이야 풍자가 아니면 해탈이다란 시를 창조적으로 배반(?)했기 때문이다.

 

홍성담 화백. 박근혜를 풍자한 세월오월을 그린 분이다. 세월(世越)이란 바로 세월호 사건(2014416)을 말한다. 세월호 사건을 소재로 한 대설 난장(亂場)’은 한 바탕 시원하고 짜릿하게 썰을 푼 홍성담 화백의 작품이다.

 

홍성담 화백은 난장을 출간한 같은 출판사의 월간지20145월부터 20161월까지 바리라는 작품을 연재했다. ‘난장은 역시 전기한 월간지에 실었던 그의 죽음 뒤엔 음악이 흘렀다를 수정, 보완한 작품이다.

 

특기할 것은 연재 시작과 함께 세월호 사건이 터졌다는 점이다. 정해진 이정표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엄청난 사건이 터진 이상 어떤 식으로든 작품에 그 사건을 담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란 생각이 가능하다.

 

사건이 터지고 홍성담 화백은 바로 진도 팽목항으로 향했다. 그의 화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단원고 학생도 희생자 가운데 있었다. 작품의 주인공은 28세의 여자 화가 오현주이다. 검은손에 의해서 쫓기면서도 그 검은손의 정체를 쫓는 인물이다.

 

3년의 수감 생활을 거쳐 석방된 그는 어느 날 매복꾼들에게 기습을 당한다. 그 위기에서 그는 매복꾼들에게 사지가 찢겨 죽는 대신 불암산의 큰 바위 절벽에서 투신을 하는 길을 택한다. 1829년에 죽은 처녀귀신인 천무생이라는 어린 귀신이 함께 몸을 날린다.

 

두 사람 아니 귀신은 중랑천 물속으로 떨어지는데 거기에는 투명한 흰 정체의 사람들이 이어가는 긴 행렬을 펼쳐졌다. 흰 정체의 사람들이란 진도 앞바다 맹골수로에서 수장당한 세월호 희생자들로 자신들이 왜 죽었는지를 알지 못해 그 이유를 따지기 위해 청와대로 가는 무리였다. ”그럼, 지금 이 행렬의 목적지가 어딘가?“.. ”청와대.“

 

난장은 마술적 리얼리즘의 색채를 보임에도 직설적이다. 아니 그런 색채를 보이기에 직설적이라 해야 할까? 홍성담 화백은 어릴 때 눈병에 걸린 자신을 위해 정안수 한 그릇을 떠놓고 웅얼웅얼 비나리를 하신 할머니의 심정으로 작품을 썼다고 말한다.

 

작가의 이력에 눈이 가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투옥되고 고문당하고 배신당하고 찢긴 전형적인 인물이다. 그런 분이었기에 걸판진 한 바탕 대설을 늘어놓을 수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난장은 자신들을 쫓는 검은손의 정체를 역으로 찾아내는 과정을 그린 이야기이다. 기이하게 다가오는 것은 그 검은손의 윗 대가리란 것들이 가진 특성이다. 바로 심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미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이 압권이다. ”! 이제 끝났다? 시작도 끝도 없고, 삶도 죽음도 사라진, 중심도 주변도 없는 곳에서, 영원도 찰나도 없는 시간에,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 세상은 지속도 단절도 없이 마냥 존재할 뿐이었다.”

 

여운이 많이 남는다. 현실과 상상이 교차하듯 사회성과 실존성이 교차하는 느낌을 준다. 하기야 죽음을 애도하고 항의하고 난장처럼 풀어내는 것은 사회적인 동시에 실존적인 것이 아닌지? 한바탕 굿을 본 것 같은 마음이 가득하다. 작가에게 경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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