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읽은 책들 가운데 김용만 소장의 ‘조선이 가지 않은 길’과 이은선 교수의 ‘다른 유교 다른 기독교‘를 함께 말하고 싶다.

김용만 소장의 책 내용들 가운데서는 종법(宗法) 제도와 사대봉사(四代奉祀)의 문제점을 지적한 ‘양반들이 집착한 진짜 이유’란 글이 기억에 남는다. 고려 때만 해도 여자의 인권 상황이 좋았다는 주장이 담긴 글이다.

이은선 교수의 ‘다른 유교 다른 기독교’란 책에서 내가 알게 된 것은 로버트 커밍스 네빌의 ‘보스턴 유교’라는 개념(책)이다. 기독교 또는 서양 사상과 접목된 유교를 말하는 보스턴 유교는 연구자들의 근거지가 보스턴인 데서 붙은 이름이다.

‘다른 유교 다른 기독교‘가 유교와 기독교, 유교와 페미니즘의 대화를 추구하는 책이듯 ’보스턴 유교‘는 기독교와 유교의 생산적 대화를 추구한 책이다.

유교와 페미니즘의 대화를 큰 틀에서의 유교와 기독교의 대화로 진단하는 이은선 교수는 최근 서구 기독교 여성신학자들이 가부장적 전통을 여성해방적으로 재해석하여 다른 관계를 맺고 있듯 유교 진영에서도 그런 일이 가능하다고 본다.
저자는 조선에 비해 여성 인권 면에서 앞섰다는 평가를 받는 고려 시대가 당면했던 문제로 혼인이 성립하면 신랑이 신부의 집에서 일정 기간 거주하는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을 든다.

그리고 ’한국의 유교화 과정‘의 저자인 마르티나 도이힐러의 논의를 참고해 너무 단기적인 과정과 정태적인 개별 대상에 대한 집중에서 벗어나 좀 더 긴 기간에 대한 장기적인 전망과 역사의식을 가지고 실상을 판단하면 다른 측면을 볼 수 있다고 말한다.

남귀여가혼의 문제점은 여자 집에서 혼수를 마련하고 사위를 거주시켜야 하는 제도였기에 실제 상황에서 경제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집안의 여성들은 버림받을 위험에 노출된다는 점이다.

도이힐러의 논의란 조선 사회에서 16세기 중반과 17세기 후반의 큰 인구 증가로 효율적인 식량 공급을 위해서 토지가 더 이상 작게 나뉘어서는 안 되었기에 출가한 딸에게까지 상속을 해줄 수 없었다는 것이다.

너무 여자와 남자의 대결 구도로만 사태를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물론 저자도 페미니즘에 동의하고 그 대의(大義)를 지지한다. 페미니즘도 여러 갈래와 지향성으로 나뉘고 있기에 특정할 수 없지만 여성의 말이 수용되는 세상을 만드는 것 정도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모든 역사적 추세를 진화가 없는 부동(不動)의 것으로 파악하는 역사의 정태(靜態)주의는 물론 역사에서 오직 끊임 없는 변화만을 보고 그런 변화의 기저에 있는 질서와 역학 구조와 방향 등을 무시하는 역사 상대주의(相對主義)도 배격한다.

저자가 의거하는 관점은 장기간에 걸친 역사적 경험을 실증적으로 살펴본다면 분명 뚜렷한 포괄적인 사회발전의 방향과 구조가 드러난다고 역설한 노르베르트 엘리아스의 관점이다.

1930년대에 주로 활약했던 엘리아스는 1970년대 아날학파(Annales School)에 의해 재발견된 이후 빛을 보았다.

아날 학파는 사건들로 시끄러운 역사의 표면 아래에서 거의 무의식과도 같은 평형들을 밝혀냈다.

즉 시원으로부터의, 그리고 시원으로의 목적론적 과정이 아닌, 오랜 시간 동안의 평형 뒤에 찾아오는 급격한 변환의 모델을 사용함으로써 변증법적 역사 철학의 패러다임을 파기시켰다.(이정우 지음 ‘담론의 공간’ 146 페이지)

‘시원으로부터의, 그리고 시원으로의‘란 말을 들으니 베르그손이 거부한 기계론과 목적론이 생각난다.

엘리아스는 유럽인들의 삶의 변화를 문명화 과정으로 보았다. 이에 영감을 받은 저자는 조선조(朝鮮朝)가 성립한 이래 유교적 예(禮)를 국가 삶의 전 영역으로 확산시키고자 한 조선의 예치(禮治) 노력이 조선 사회를 유교화해 갔고 그 과정 안에 여성들의 삶과 살림살이도 포괄되었다고 말한다.(92 페이지)

저자는 조선조 이전에는 여성들이 문화의 각 분야에서 그렇게 폭넓게 활동한 적이 없었다는 한국 여성사 연구를 소개한다.(수긍할 수 있지만 여성들의 활동이 기록보다 더 크고 많았을 수도 있지 않을까, 란 의문이 든다.)

거칠지만 김용만 소장의 논의는 특정 프레임으로 사실들을 보기보다 개별 사실들에 주목한 연구의 소산이고 이은선 교수의 논의는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사실보다 특정 프레임(노르베르트 엘리아스의 문명화 과정)으로 세상을 본 결과란 말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개별 사실에 주목했다는 말이 그런 사실들을 파편적으로 바라보았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취합 없는 연구는 무의미하다.

저자는 문해력을 갖추고 외국어 성서를 번역하거나 여신도들을 계몽한 조선 여성들을 거론한다.

저자가 말하려는 바는 조선사 이전에 미미했던 여성들의 활동을 감안하면 조선은 특히 여성의 주체적 능력면에서 발전했다는 말이다.

이를 보면 내가 점입가경을 누리고 있는 것인지 진퇴양난에 빠진 것인지 묘연하다. 소박(?)한 문화유산의 세계로 돌아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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