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리스 해밀턴의 원어 이름을 Alive Hamilton이라고 치고 말았다. 자판의 c 옆에 v가 있는 탓이고 내 손이 정교하지 못한 탓이다. 그런데 alive는 ‘살아 있는’, ‘생기가 넘치는’ 등을 뜻하기에 나쁘지 않다.

아니 그럴 뿐 아니라 ‘이 세상의‘라는 뜻도 가지고 있어 무언가 영감을 주는 단어라는 생각마저 든다.
납의 유해성과 수은의 직업병 관련 사실 등을 밝혀낸 해밀턴은 한 세기(1869 – 1970)를 살다 간, 직업병 연구와 산업 독성학 분야의 선구자이다.
매카시즘과 베트남전을 반대해 90 세가 넘은 나이에 정보 당국의 감시를 받은 분으로 연구 활동만이 아니라 사회 활동도 적극적으로 했다.

여학생이 없었던 시대의 하버드대에서 최초로 여성 교수가 된 분으로 여성 형제들이 결혼을 하지 않고 친하게 지낸 것으로도 화제를 낳은 분이다.

그가 활약했던 시대는 이상한 시대였다. 문득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생각난다.

하지만 이 경우 이상하다는 말은 원어로는 wonder이니 당시는 물론 지금의 기이하고 불합리하고 폭력적이고 충동적인 시대를 나타내는 말로는 부적절하다.

미 연방준비제도 이사회 의장 앨런 그린스펀이 미국 주식시장의 거품을 우려하며 쓴 비이성적 과열(過熱: irrational exuberance)이라는 흘러간 말에서 힌트를 얻어 ‘비이성적인‘이라는 형용사를 써야 할까?

지금의 시대를 과열의 시대로만 볼 수는 없다. 어떤 분야에 대해서는 냉정하거나 무관심하기까지 하니 말이다.

어쩔 수 없지만 사람들은 정치에 과한 열정과 관심을 보이지만 문화 예컨대 비평 같은 것에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지금은 비평의 대중성을 거의 기대하기 힘든 시대이다.(2017년 8월 5일 오길영 교수 페북 글 참고)

오 교수님은 비평이 사라지면 비평의 대상인 문학도, 영화도, 예술도 사라질 것이란 점에서 비평은 필요하다는 말을 했다.

지금은 거대한 물결 같은 것에 휩쓸려 비평을 포함해 소중한 것들을 아깝게 흘려보내는 현실이 상실감을 주는 시대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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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독실(篤實)한 신앙인으로 알려진 한 기독교 신자 부부가 갑질의 주체로 떠오른 것은 씁쓸한 일이다. 과연 새벽 교회에서 무슨 기도를 했을까 궁금하게 하는 그 부부에 대해 내가 할 것은 규탄(糾彈)이 아니다.

언론은 독실이라는 말을 신앙 행위만 보고 쓰지 말거나 독실을 도타울 독(篤)과 방자할 실(肆; 이 글자는 방자할 사이기도 하다.)을 써서 독실(篤肆)이라고 하든지 해야 할 것이다.

언론에 문제가 있다. 그런 새 갑질 인생들이 등장하면 독실한 기독교 신자라는 말을 할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알려졌지만 이제는 아닌 기독교 신자라고 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그런 갑질을 한 사람에게 독실한 기독교 신자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은 기독교에도 좋은 일이 아니다.

교회 열심히 출석하고 헌금 잘 내고 미소 지으며 적당히 교양 있는 척하는 사람에게는 갑질을 해도 독실한 신자라는 이름을 붙인다면 교회를 욕보이는 일이 된다.

예수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 언론에서 그런 식으로 독실이란 말을 무분별하게 써왔기에 냉소를 부르는 것이다.

물론 기독교인들이 냉소의 대상이 되거나 욕을 듣는 것은 언론의 책임이기 이전에 기독교인들이 보인 행태 자체로 인해서이다.

신앙 양심과 일상에서의 양심이 일치하지 않거나 상충하는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 아니다. 그런 기독교인들을 독실한 신앙인이라 부르는 언론은 문제 있는 언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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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페북이 글감의 단서들이 펄럭이는 광장 같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최근 이런 내 생각을 확인하게 하는 글을 두 편 읽었다.

하나는 며칠 전 읽은 다수 한국 교회의 블랙리스트란 글로 오래 전 관심을 가지고 읽었던 저자도 있어 흥미를 가지고 읽었다.

칼 바르트는 만유구원론 자유주의자이고 위르겐 몰트만은 삼신론이란 이단론을 펼친 신학자라는 것이고,

‘나니아 연대기‘의 저자이기도 한 C.S 루이스는 진화론자이고 존 스토트는 영혼멸절설을 믿는 지옥불신자이고 레슬리 뉴비긴은 세계교회협의회인 WCC에 속한 다원주의자이고,

톰 라이트는 믿음으로써 의롭게 된다는 이신칭의 교리를 거부하는 신학자 즉 반펠라기우스주의자이고 헨리 나우웬은 가톨릭 이단 및 동성애 지지자이고 유진 피터슨은 동성애 지지자라는 것이다.

이 글을 올린 목회자는 이단으로 찍힌 저 신학자들을 좋아하는 자신은 무엇인가란 물음과 함께 이제 마녀사냥은 더는 있어서는 안 된다는 설명을 더했다.

언급된 저 신학자들은 분야가 다르지만 나로 하여금 현상을 다르게 보게 해주는 스승들인 셈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의 글들(한 게시글에 달린 세 건의 댓글이기에 글들이라 표현)은 어제 읽은 신학서적 표절반대 그룹에 오른 표절에 대한 글이다.

결국 열심히 공부해서 자신만의 이론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 박사 논문을 쓰다가 포기한 이유 중 하나가 도저히 새 것으로 300 페이지를 채울 재주가 없어서 하루 종일 단 한, 두 줄 쓰다가 그냥 과감하게 접었다는 것,

새로운 내용을 주장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것을 가져올 때는 형식에 무관하게 무조건 인용을 표시하거나 출처를 밝혀야 한다는 것, 앞선 사람의 글을 몰랐다는 것은 그만큼 연구가 성실하지 못했다는 증거라는 이야기 등이다.

나의 경우 문화해설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표절 여부를 떠나 나만의 것을 추구하다 보니 꽤 생각을 많이 하는 편이다.

가령 경복궁 외전 해설을 할 때 ‘근정전 - 천추전 - 사정전‘이나 ‘근정전 - 사정전- 천추전‘이 아닌 ‘사정전- 천추전- 근정전‘ 코스를 택한 것은 정전에 비해 작은(또는 격이 낮은) 편전에서 보조 편전을 거쳐 앞면 5칸, 측면 5칸의 압도적인 정전을 발단 -전개(반복) - 상승의 고전 음악의 소나타 형식에 견주어 설명하려 한 결과이다.

창덕궁에서는 금천교의 대칭인 두 개의 무지개 다리를 설명하며 날개가 대칭인 나비 사진을 보여주기도 했다.

나의 이론을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문제는 익숙한 것이 선호되는 곳에서는 큰 의미가 없다는 점이다. 물론 다른 용도로 쓰일 여지는 언제나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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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강도강도강(都講盜講渡江)이란 말(김상봉, 도정일, 한홍구 등 지음 '다시, 민주주의를 말한다' 27 페이지)을 들으니 많은 생각이 떠오른다. 도강도강도강(都講盜講度江)이란 도(都)정일 교수의 강의를 몰래 듣고<盜講> 강을 건넌다는 말이다.(‘다시, 민주주의를 말한다’ 27 페이지)

1980년대 초반 문학사상사라는 제목의 강의에서 마르크스, 레닌, 알튀세르를 거침 없이 언급했으니 몰래 들었다는 말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것이다. 어떻든 강을 건넌다는 말을 들으니 부처의 비유가 떠오른다. 부처의 설법 중 강을 건너는 것에 관한 비유가 있다.

붓다는 강을 건넜으면 뗏목을 버리라고 가르쳤다. 강을 건넜다는 것은 차원이 다른 세계로 나아갔음을 비유한다.학문의 세계에서는 새로운 인식의 경지로 나아갔음을 의미한다.

내가 처음 접한 도정일 교수의 책은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이다. 1994년 나온 책이니 많은 세월이 흘렀다. 당시 책을 읽으며 설렜던 기억이 23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났음에도 생생하다. 예리하고 깊으면서 넓기까지 한 안목이 빛나는 책이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이다.

'압구정의 유토피아/ 디스토피아'란 글이 대표적인데 문학적으로 상당히 세련된 데다가 비판이론의 세례를 받은 내공이 역력한 글이다. 이 글에서 저자는 압구정을 자본주의 실천 30년 끝에 이룩한 계급문화의 천국, 우리 사회의 정치경제적 모순이 남김 없이 추악한 몰골을 드러내고 있는 모순의 디스토피아로 정의했다.(261 페이지)

망각은 즐거운 것일 수 있지만 거기 죽음이 있고 기억은 고통스러우나 거기에 즐거움이 있기에 인간의 서사문화가 지속되어 온 것이라는 진단(174 페이지)도 인상적이다. 가장 인상적이며 중요한 메시지는 상징제의에 관한 것이다.

저자에 의하면 상징제의는 현실에 아무 영향도 주지 않고 그 누구도 다치지 않으면서 수행되는 전쟁, 현실적 영향이 없으므로 마음 놓고 몰입하는 싸움, 그러면서도 무언가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자족감의 공급을 받으며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전쟁을 종이 위에서 전개하는 대리전쟁이다.(284 페이지)

저자가 상징제의로 규정한 것은 보통의 독자들은 단 한 줄도 읽을 수 없는 용어와 개념으로 가득찬 비평이론서들이 활기를 띠는 현실이다. 문제는, 그리고 관건은 현실과의 연결 고리(를 잃지 않는 것)이다. 어렵지 않은 것이어도 현재의 우리에 어떤 유의미한 점도 주지 못한다면 상징제의(에 드는 것)이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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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지리학(psychogeography)은 신경과학과 건축, 환경 설계 등을 접목시킨 학문이다. 이 과목을 시인 샤를 보들레르의 플라뇌르(flaneur) 개념과 맞닿아 있는 것으로 설명한 글을 읽었다.

19세기 중반 프랑스 빠리에서 일어난 근대화 현상을 지켜보는 자들을 지칭하던 플라뇌르는 산책자 또는 만보자(漫步者)를 뜻한다.

산책자, 하면 니체가 생각난다. 하지만 대립항으로 설정해 설명할 사람이 있으니 루소와 보들레르이다.

루소는 자연을 산책하는 몽상가였고 보들레르는 유행의 물결과 도시의 거리를 산책하는 몽상가였다.(김상환 지음 ‘해체론 시대의 철학’ 359 페이지)

보들레르는 죽음을, 저녁때까지 걸어갈 용기를 주는 것으로 표현(‘악의 꽃’ 수록 ‘가난뱅이들의 죽음’에서)했다.

심리지리학의 선구자인 콜린 엘러드는 도시를 걸으며 즐기도록 하는 것은 새로움과 감각적 흥미라고 말한다.(‘공간이 사람을 움직인다’ 177 페이지)

그에 의하면 어느 정도의 권태는 불가피한 것이고 우리를 창조성으로 이끄는 건강한 것이지만 감각의 다양성을 추구하는 인간의 타고난 욕구를 무시하도록 설계된 거리 풍경과 건물은 새로움과 감각을 추구하는 진화적 충동을 거스를 뿐 아니라 미래의 인간에게도 편안함이나 행복, 최적의 기능성을 안겨주지 못할 것이다.

어제 경복궁 시연에서 나는 동선(動線) 설정은 물론 내용도 새로워서 좋았다는 평을 들었다.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의미를 음미하게 하면서도 재미를 느끼게 하고 추구하는 새로움이 거품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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