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 여행을 하지도 않았으면서 가본 사람은 물론 그곳에 살던 사람들보다 더 정확하게 프랑스 파리를 서술했다는 칸트. 그가 다시 흥미를 자극한다.

전쟁(2차 대전) 때문에 적국 일본을 방문할 수 없어 간접 자료들만으로 정확한 일본 분석서인 ‘국화와 칼‘을 쓴 루스 베네딕트, 피에르 바야르의 ’여행하지 않은 곳에 대해 말하는 법‘과 함께 생각해볼 문제이다.

바야르는 예의 그 칸트 이야기를 한다. 바야르에 의하면 칸트는 한 번도 고향 쾨니히스베르크를 떠난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리고 언제나 동일한 도정(道程)을 따라 산책했지만 낯선 나라들에 대한 묘사와 해설을 한 사람이다. 바야르는 자신의 책을 칸트에게 바친다고 말한다.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를 내세웠던 칸트는 신비주의 신학자인 스베덴보리가 놀라운 초능력을 보이자 처음에는 인정했다가 한 발 뒤로 물러선다.
그는 스베덴보리가 펼치는 형이상학이 도덕 신학적 관점에서 가질 수 있는 의의만을 인정했다. 칸트는 상상력의 소산은 지성적 판단에 의해 검토되고 규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스베덴보리는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에서 발생한 대화재를 480km나 떨어진 곳에서 생중계 하듯 설명했다.(설명이 사실과 놀랍도록 일치했다고 함)

스베덴보리는 스웨덴 사람이다. 헬렌 켈러도 소속되었던 새 교회/ 예루살렘 교회의 이론가인 스베덴보리의 ’천국과 지옥‘ 등의 책은 성경 만큼이나, 어떤 때는 성경 이상의 참고서로 통한다는 느낌을, 1년여 시간을 마지못해 동참하며 받았다. 지난 2009년에서 2010년 사이의 일이다.

칸트가 열하(熱河)를 여행한 연암(燕巖)처럼 외국 여행을 할 기회를 얻었다면 열하일기 같은 여행기를 썼을까? 칸트는 왜 한 번도 쾨니히스베르크 밖을 여행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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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자연의 법칙들은 어둠 속에 있었네. 하느님이 말씀하시길, ‘뉴턴이 있으라!’ 그러자 온 세상에 빛이 가득했네.(Nature and Nature‘s laws lay hid in Night: God said, Let Newton be! and all was light.)”

이는 18세기에 활약했던 영국의 유명 시인 알렉산더 포프의, 지금도 널리 회자되는, 시인 자신보다 더 유명한 말이다.

이 말이 “그때 신이 ‘빛이 있으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빛이 생겨났다.”는 구약 성경 창세기(1장 3절)의 한 구절을 바탕으로 나온 말이라는 사실도 유명하다.

포프의 저 말은 뉴턴의 묘비에 새겨진(명銘) 글이기도 하다. 여담이지만 리차드 바이스는 ‘빛의 역사’에서 교황을 뜻하는 Pope라는 말 때문인지 뉴턴의 묘비명을 “교황이 쓴(말한)” 것이라 말한다.(228 페이지) 이는 명백한 오류이다.

이론물리학자 레너드 서스킨드는 증거와 숫자를 나열하고, 더하고 나누고, 도표와 도형을 계량한 박식한 천문학자를 보며 알 수 없게 금방 따분하고 지루해져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빠져 나와 홀로 거닐며 촉촉하게 젖은 신비로운 밤공기 속에서 이따금 하늘의 별들을 말없이 올려다보았다고 말한 시인 월트 휘트먼(Walt Whitman: 1819 – 1892)보다 알렉산더 포프의 감정을 더 선호한다는 말을 했다.(‘우주의 풍경’ 172 페이지)
휘트먼에게 별은 자연과학으로부터 느낀 따분하고 지루한 감정에 대한 해독제였을까? 그가 데이트 상대 여성으로부터 “별이 참 예쁘네요.”란 말을 듣고 “현재 이 지구상에서 별이 빛나는 원리를 알고 있는 사람은 나 뿐.”이라는 말을 했다는, 핵융합 반응과 질량 결손(缺損)에 따라 빛을 내는 별의 원리를 처음 밝힌 한스 베테(다케우치 가오루 지음 ‘이과 바보 문과 바보’ 58 페이지) 같은 사람을 만났다면 어땠을까?

그런데 우리는 ‘빛이 있으라’는 신의 말씀으로 빛이 생겨났다는 사실에 경외(敬畏)를 느끼지만 우치다 다츠루가 그랬듯 그 구약 성경 구절로부터 빛보다 소리가 먼저 있었다는 사실(우치다 다츠루 지음 ‘레비나스와 사랑의 현상학‘ 139 페이지)을 왜 읽지 못하는 것일까?

다츠루는 소리야말로 빛의 기원이라 말한다. 그러나 이는 절대자에게서나 가능한 일이 아닌지? 그리고 빛이 있으라는 말로 인해 빛이 생기게 되었기에 소리가 빛의 기원이라 하지만 엄밀히 말해 신의 의지(意志) 또는 사유가 빛을 있게 한 것이다.

빛과 소리를 차별화해 보는 것은 의미가 없다. 다츠루의 의도는 신을 시각적으로 표상하는 것은 금기이지만 청각적으로 표상하는 것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고 음성을 표상보다 근원적인 지향적 차원으로 간주하는 유태교의 사례를 소개하는 것에 있다.

그런데 빛과 소리를 전혀 다른 것이 아닌 파동(波動)의 상이한 종류로 볼 수는 없을까?(빛도 파동이고 소리도 파동이다.) 형상으로 신을 표현하는 것은 불경하고 소리로 신을 표현하는 것은 그렇지 않은가?(다츠루는 신의 티자성을 훼손한다는 표현을 썼다.) 생각해볼 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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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잃어버려 어쩔 수 없이 새 책을 구입해 반납했다. 돌아오는 길에 김현 평론가가 ‘행복한 책읽기’에서 건망증에 대해 한 말을 생각했다.

옛날에는 건망증이 심하다는 말을 잊음이 많았다고 표현했다는 것이다. 출처는 이태준(李泰俊) 전집이다.

아울러 아르헨티나의 작가 보르헤스가 ‘바벨의 도서관’에서 한 말도 음미했다.

“A라는 책을 찾기 위해 먼저 A가 있는 장소를 지시하고 있는 B라는 책을 참조하고 B라는 책을 찾기 위해 먼저 C라는 책을 참조한다. 그리고 그렇게 영원히.. 이 모험들 속에서 나는 나의 인생의 시간을 탕진하고 낭비했다..”는 말이다.

보르헤스가 말한 ’책‘이 문자 그대로의 책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책이 많지도 않은 서가에서 인용해야 할 것을 찾아 한참을 두리번거리곤 하는 사람이 나다.

내용 없는 사상은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라는 칸트의 말을, 자료로 뒷받침되지 않는 생각은 공허하고 계산을 거치지 않은 자료는 맹목이라는 말로 설명한 책도 내가 찾아 다닌 것들 중 하나이다.

결국 검색을 통해 만난 한 리뷰를 보고 그 책이 전대호의 ’철학은 뿔이다‘란 사실을 알았다. 그런데 그 리뷰는 내가 쓴 것이다. 꼼꼼하게 기록해두지 않아 벌어진 웃긴 일이다.

그래도 나는 주(主)인 내용에 비해 부(副)인 책 제목, 저자 이름 등을 잘 기억하는 편이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결국 기억일 것이다. 생각과 자료 모두 결국은 기억에 의존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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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7-08-18 10: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금은 구할 수 없는 한전숙 선생님의 현상학 책을 모 도서관에서 대출했다가 잃어버리고 현금으로 배상했던 적이 있습니다. 6개월쯤 지나 이사를 준비하다가 책상 뒤 공간에서 그 책이 발견되었는데, 갖다줄까 말까 고민하다가 결국 제가 먹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책이 지금은 또 어디갔는지 보이지도 않네요. 사람의 책 욕심이란 뭘까요...

벤투의스케치북 2017-08-18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러시군요... 현상학 책이라면 꼭 소장하고 싶은 책이 아닐까 싶습니다. 절판된 책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되는가, 하는 궁금증도 생깁니다. ^^ 책 욕심은 가장 신선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댓글 잘 읽었습니다. ^^
 
백정, 외면당한 역사의 진실
이희근 지음 / 책밭(늘품플러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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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에 궁궐이 다섯 개나 되는 곳은 서울 뿐이라며 이를 세계에 널리 알려야 한다고 말했다는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 님의 글을 읽고 민중적 관점의 책이 뭐 없을까 찾다가 이희근 박사의 '백정, 외면당한 역사의 진실'을 발견했다. 4년 전 나온 이 책이 이제 내 관심의 대상이 되다니...

우리 민족이 단일민족이라는 신화를 깰 때가 되었다는 저자는 백정을 북방 유목민의 후예로 정의하며 백정의 비율이 평민의 1/4에서 1/3에 이른다고 전한 '성종실록'을 언급한다. 저자에 의하면 구한말 고종의 고문으로 왕실에 머물렀던 윌리엄 프랭클린 샌즈는 자신의 눈에 비친 조선은 단일민족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샌즈는 한반도에 끊임없이 대륙 및 해양 계통의 인종들이 유입되었다고 보았다. 조선은 유교의 명분과 질서, 엄격한 위계와 혈통을 중시한 숨막힐 듯한 나라였다. 그런 나라에서 백정들이 차별을 받았으리란 점은 불을 보듯 뻔하다. 당시 성인 남자들보다 훨씬 키가 크고 장대한 데다가 눈의 색도 확연히 달랐다.

사냥에 탁월했던 그들은 갖바치(가죽 장인: 匠人), 도한(도축업자) 등으로 세분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백정은 이류(異類), 이종(異種), 호종(胡種), 별종(別種) 등으로 불렸다. 왕조 초기부터 위정자만이 아니라 백성들까지도 화척 등의 부류를 별종 즉 이방인으로 취급했다. 조선에서 백정은 평민조차도 상종하지 않는 집단이었다.

백정은 일상생활의 모든 구석에서도 심한 차별을 받았다. 백정들은 명주옷은 말할 것도 없고 양인의 평상복인 소매 넓은 겉옷조차 입을 수 없었고 심지어 어린아이들에게조차 늘 머리를 숙이고 자신을 소인이라 불렀을 정도로 굴욕적인 차별을 받았다. 저자는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진짜 서울 토박이는 한반도 재래 거주민이 아니라 깊은 산에 둘러싸인 곳에서 호랑이, 표범, 멧돼지와 조류를 사냥하며 살았던 거란족의 후예라고 보는 게 옳다고 말한다.(66 페이지)

예종 무렵 고려의 남경은 지금의 서울이다. 당시 왕의 행차를 맞이하기 위해 거란족이 동원되었다. 당시 거란족 출신이 상당수였다. 당시(11세기 초) 고려인과 거란인은 서로 포로로 잡혀가거나 자발적으로 상대국으로 도망하는 일이 빈번했다.(72 페이지) 수만 명의 거란군이 포로로 잡혀왔다.(75 페이지) 고려는 그렇게 한반도에 정착한 거란족을 양수척이라 불렀다.

고려의 관료들은 평소 사냥으로 단련된 양수척(화척, 재인)의 전투능력을 알고 그들을 원나라의 침략에 대비하는 인력으로 썼다.(81 페이지) 꽤 많은 몽골족이 제주도에 거주하고 있었다. 제주인도 몽골 출신인 것이다. 우리 역사는 그 역사적 풍상(風霜) 못지 않게 다양한 이족들이 왕성하게 넘나들었던 곳이다.(85 페이지)

'세종실록'에 평안도와 황해도에 몽골족의 후예가 정착했다는 기록이 있다.(88 페이지) 고려에 정착한 몽골족은 육식 문화 보급의 주역이었다. 고려시대에는 소고기를 많이 먹지 않았다. 살생을 죄악시하는 불교 탓이기도 하지만 소는 사람 대신 땅을 갈아 곡식을 심게 해주고 무거운 짐을 운반해주는 동물이기에 식용의 대상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104 페이지)

조선 왕조에 이르러 소고기 소비량이 증가했다. 소는 유교식 제례에서 성인인 공자나 천자의 제상에 올리는 희생(犧牲)이었다. 세종은 유독 우금령(牛禁令)을 강경하게 밀어붙였다. 농업보호정책 차원이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고기 반찬이 없으면 밥을 먹지 못했다.(117 페이지) 소를 잡지 못하게 하니 고기 뿐 아니라 가죽 값이 상승했다. 가죽 소비량이 증가해 밀도살이 부추겨졌다.

왕조의 개국과 함께 조정의 지속적인 도살 금지 조치로 백정은 생계수단을 잃고 생계형 범죄행위에 나설 수 밖에 없었다. 도축(屠畜)과 사냥이 백정의 일이었다. 당시에 호환(虎患)이 심했다. 호환은 일상적이었다. 능침(陵寢)도 그런 피해를 입었다. 호랑이의 소굴이 되기까지 했다. 세조와 정희왕후 윤씨의 능인 광릉이 대표적이었다.(133 페이지)

왕조는 개창 직후부터 소나무 벌채를 금지하는 금송령(禁松令)을 내렸다. 특히 서울을 지킨다는 북 현무(玄武)인 백악, 남 주작(朱雀)인 목멱, 좌 청룡(靑龍)인 낙산, 우 백호(白虎)인 인왕산 등에서는 소나무 벌채를 일제 금했다. 이 때문에 도성 근처는 소나무가 울창했다. 호랑이의 최적의 서식 또는 은신처가 된 것이다.

백정들은 발군의 호랑이 사냥꾼이었다. 개국 직후인 태조 이성계 때부터 호환은 위정자들의 최대 고민이었다. 세종때의 재상(宰相) 최윤덕(崔潤德)이 평안도 안주 목사로 있을 때 수만 그루의 버드나무를 고을 남쪽에 심어 수해를 막고, 고을 사람을 해친 호랑이를 잡아 죽여 민원을 해결해 칭송이 자자했다.

이는 어린 시절의 경험 덕이다. 어머니가 죽자 이웃의 백정 집에 맡겨져 자란 것이다. 백정은 위정자들에게 자주 징발(徵發)되었다. 유랑민들인 백정은 조선에서 농민 되기를 강요당하기도 했다. 왕조의 개국과 함께 조정의 지속적인 도살 금지 조치로 백정은 생계수단을 잃고 생계형 범죄행위에 나설 수 밖에 없었다.

백정을 호적에 올리고 토지에 안착시켜 농사를 짓도록 하고 만일 도축을 하거나 농사를 짓지 않고 유랑할 경우에는 범죄로 간주해 처벌하는 것을 제민화(齊民化) 정책이라 한다.(제민의 제는 가지런 할 제이다) 행장(行狀)은 조선 시대의 여행 증명서를 말한다. 백정은 행장 없이 여행할 수 없었다.

조선은 개국과 더불어 백정을 제민으로 만들려는 정책을 지속적으로 시행했다. 물론 이는 왕국 구성원들의 다양성을 부정하는 행위였다. 백정들은 유랑 금지 및 도축 금지로 이중의 어려움에 당면하게 되었다. 농상(農商)만을 천직으로 여긴 조선의 위정자들은 소 사육을 장려하는 정책을 생각하지 못했다.(218 페이지)

우의정 맹사성으로 대표되는 조선의 관리들은 평민이 가죽신을 신지 못하게 하는 등의 금지령만을 양산했다. 특권의식의 발로이자 단견(농상 외의 것을 생각해내지 못하는)이었다. 백정들이 범죄자가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도축 금지와 유랑 금지(= 사냥 금지)때문이었다. 백정들은 자기들끼리의 혼인과 소고기와 소 가죽 수요 증가 등으로 번성했다.

인구 증가로 그들의 범죄율이 늘었다. 관군에 대적할 정도였다. 왕국의 교화사업이 실패했음을 증거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백정 출신 도둑떼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은 경기도 양주 출신의 임꺽정이었다. 임꺽정은 명종 때 3년간 활약했다. 사실 백성들은 임꺽정 무리의 보복(신고에 대한)을 두려워 했는데 그보다는 자신들의 재산만 약탈하지 않는다면 굳이 이들을 고발할 필요가 없었다.

당시 도적이 성행했던 주 원인은 수령들의 가렴주구(苛斂誅求)와 재상들의 탐오(貪汚)였다. 임꺽정이 의적(義賊)이라는 관념이 생겨난 것은 명종실록 사관의 기술 및 분석 때문이다. 도적이 성행하는 것은 수령(守令)의 가렴주구 탓이며 수령의 가렴주구는 재상이 청렴하지 못한 탓이라는 분석, 윤원형(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의 동생)과 심통원은 외척의 명문거족으로 물욕을 한 없이 부려 백성의 이익을 빼앗는 데에 못하는 짓이 없었으니 큰 도적이 조정에 도사리고 있는 셈이라는 기술(255 페이지)을 보라.

백정은 한반도 주민들의 정주(定住), 정착(定着), 고정(固定)의 생활 유형에 충격을 준 그룹이다.(257 페이지) 백정은 결국 원래의 정착민과 통혼을 거치면서 한반도 정착민의 일부로 뿌리를 내려갔다. 그들은 조선 후기에는 왕조의 수호자가 되기도 했다. 프랑스와 미국의 군대로부터 조선을 지키는 데 큰 기여를 했다.

백정들은 천부적인 전사였다.(261 페이지) 그들은 여진족 토벌 등에 동원되기도 했다. 노비나 다름 없던 백정들에게는 전쟁이, 가문을 일으킬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다.(267 페이지) 백정, 천인들이 임진왜란 와중에 전공을 세워 고위직에 오르자 사대부들은 반발했다. 윌리엄 프랭클린 샌즈는 자신의 책 '극동회상사기(極東回想私記)'에서 두 차례의 양요때 백정 출신 사냥꾼의 영웅적 행위를 묘사했다.

프랑스와 미국의 군대에 맞서 싸운 주력군은 백정 출신 사냥꾼이었다. 그들은 전력 열세 속에서영웅적으로 싸웠다. 그들은 프랑스, 미국의 병사들에 강렬히 저항했다.(309 페이지) 조선시대에 남자 어른은 상투를 틀고 갓을 썼지만 백정은 보통 사람들이 부모상을 당했을 때 죄인이라며 쓰고 다닌 패랭이를 썼다. 늘 죄인 취급을 받았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331 페이지)

황현의 '매천야록'에 의하면 1896년 백정의 갓 착용이 허용되었지만 차별과 박해는 여전했다. 그런 백정들이 당당한 신민으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한 것은 관민공동회로 인해서이다. 조선시대에 백정이 받은 차별과 박해를 보면 외국에서 온 결혼이민자나 노동자들을 멸시하고 차별하는 우리의 부끄러운 모습이 겹쳐진다. '백정, 외면당한 역사의 진실'은 우리가 단일민족이라는 신화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깨달음을 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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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되고 싶지 않은 이들을 위하여‘란 부제를 가진 책 ‘불구의 삶, 사랑의 말‘을 읽고 있다. 이미 어른이 되어 많은 날들을 보낸 내게 도움이 될 여지가 별로 없는 책임에도 구입한 것은 제목이 가진 매력 때문이다.

‘불구의 삶, 사랑의 말‘은 사회화로서의 성장이 개인에게 억압적인 과정임을 라캉의 이론 등에 의거해 쓴 책이고 여성 시인들의 시를 분석한 책이기도 하다.

저자 양효실은 예술가를 전시주의자 또는 노출증자로 정의한다. 양효실에 의하면 전시는 상처를 자랑하는 것이고 노래하는 것이며 즐기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자 도널드 위니콧은 예술가란 소통하려는 욕망과 감추려는 욕망 사이의 긴장에 의해 추동(推動)되는 사람이란 말을 했다.

위니콧처럼 볼 수도 있고 양효실처럼 볼 수도 있다. 다만 예술가가 아니지만 드러내는 듯 감추는 나는 위니콧의 말에 마음이 간다는 말은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정약용의 순정함과 곡진함을 마음에 두지만 표현에서는 감추는 법을 잘 활용하는 글을 쓴 박지원 같은 제스추어를 취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어른이 되고 싶지 않은 이들을 위하여‘란 부제와 달리 저자는 자신의 글이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어른들, 겉모습은 어른이지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 자신만큼이나 약한 이들을 학대할 뿐 여전히 화해하거나 사랑하지 못하는 이들을 위한 것이라 말한다.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어른인 나에게 지침이 될 글이 분명하다. 나는 지금 오랜만에 미학자의 유려한 사유를 만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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