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情動)하는 청춘들’...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1527 -1572)의 정(情) 중심적 인간 분석과 정적(情的) 교감의 원리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작업을 하나의 문제 의식으로 설정한 ‘성리학자 기대승 프로이트를 만나다’를 읽는 내게 펑, 하고 나타난 신간이다.

‘성리학자 기대승 프로이트를 만나다’의 저자는 프로이트의 사랑과 죽음이라는 두 개의 본능을, 기대승의 칠정(七情)을 축약한 것으로 설명한다. 의도한 결과가 아니라 그런 원리로 설명할 수 있다는 의미이겠다. 프로이트가 기대승의 학문을 알았을 리 없기 때문이다.

권명아 교수는 “번역어로서도 공통어를 갖지 못한 개념“인 정동(affect)이 무엇인가 묻기보다 그것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또는 어떻게 다른 것에 의해 정동되는가란 문제의식을 갖겠다는 말을 했다.

권명아 교수는 외로움은 자기 안의 풍경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단지 내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기보다 누군가와, 무엇인가와 이어지고 포함되어 있느냐의 여부에 의해 발생하는 것으로 본다.(‘무한히 정치적인 외로움’ 15, 16 페이지)

이 부분에서 생각할 사람이 멜라니 클라인(Melanie Klein: 1882 -1960)이다. 이 분은 사랑과 미움을 본능이 아닌 대상과의 감성적 관계에서 생겨나는 인간 감성의 핵심적 요소로 본 정신분석학자이다.

이정우 교수는 관념과 감정(affectus)을 구분한 스피노자를 설명한다.

affectus를 정(情)으로 번역할 수 있지만 보다 동사적으로 번역해 정동(情動)으로 번역할 수 있다고 말하는 이정우 교수는 어떤 실체가 다른 실체를 지각 또는 표상함으로써 갖게 되는 것이 관념이고 이 관념이 계속 바뀌면서 새롭게 생겨나는 것을 감정/ 정동으로 설명한다. 감정/ 정동은 관념에 의존한다.(‘주름 갈래 울림’ 76 페이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감정/ 정동은 상승하고 까칠한 사람을 만나면 감정/ 정동은 하강한다.

멜라니 클라인은 프로이트 정신분석을 수정, 보완, 확대해 개인과 환경 사이의 변증법을 가장 이론적인 방식으로 정립한 최초의 분석가이다.(홍준기 외 지음 ‘헬조선에는 정신분석’ 205 페이지)(홍준기 님의 ‘라캉, 클라인, 자아심리학’은 언제 읽지?)

‘자본과 도시, 그 경험의 소우주’, ‘갑을관계와 전도된 경제외적 강제, 새로운 신분제의 등장?’, ‘나쁜 시대의 좋은 소설’, ‘정동의 리좀’, ‘공허한 주체에서 벗어나기’..‘정동(情動)하는 청춘들’에서 와락 관심을 끄는 글들이다. 활연관통(豁然貫通)이란 말을 떠올리는 아침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찰 즉 절을 왜 절이라 부를까? 절을 공부하다 보면 궁궐 공부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고 반대로 궁궐 공부를 하다 보면 절을 이해하는 데 참고가 되는 자료를 얻을 수 있지만 이 경우는 막막하다.

단청(丹靑), 세 개의 문을 뜻하는 삼문(三門), 닫집, 벽사(辟邪) 차원의 금천교(禁川橋), 하마비(下馬碑) 등이 눈에 띄는 절과 궁궐의 공통 부분이다.

궁궐을 왜 궁궐(宮闕)이라 하는지는 간명하다. 궁은 집이 여러 채 있는 것을 형상화한 것이고 궐은 궁을 지키는 망루를 의미한다. 그런데 절은 왜 절이라 하는가?

절을 많이 하는 곳이기 때문에 절이라 부르는 것이라 말하는 사람도 있고 소금에 배추를 절이면 숨이 죽듯 절을 하게 해 마음을 절인다(낮추게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절이라 부르는 것이라 말하는 사람도 있다.

불교 행사나 의례가 치러진 경복궁 함원전(含元殿)이 대표적인데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 불교는 나름의 역할을 했다. 불교와 유교가 관련이 있는 것처럼 절과 궁궐도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지?

표면적으로는 적대적이었지만 이면으로는 상호 영향을 주고 받는 관계를 유지하지 않았을까 싶은 것이다. 물론 이는 관념적인 면을 두고 하는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8만권의 중국 고전들을 모아 놓은 사고전서(四庫全書)에도 각자도생이란 말은 나오지 않는다.(2016년 7월 8일 매일경제 ‘각자도생 시대’)

그런데 뜻 밖에도 조선왕조실록에 이 말이 나온다. 무려 아홉 차례나. 물론 기사는 네 차례라고 말했다. 그러니 틀린 것일까? 그렇지 않다.

실록에는 각자도생(各自圖生)이란 말이 네 번, 각자도생(各自逃生)이란 말이 다섯 번 나온다.

각자도생(各自圖生)이란 잘 알려졌듯 각자 제 살길을 도모한다는 뜻이고, 각자도생(各自逃生)이란 제각기 도망한다는 뜻이다. (도망 역시 생존을 도모하는 것이다.)

각자도생(各自圖生)과 각자도생(各自逃生)을 더하면 아홉 차례가 되는데 선조와 인조 재위시에 각 세 차례씩, 숙종, 순종, 고종 재위시에 각 한 번씩이다.

선조 재위시는 왜란(倭亂)을 겪은 시기이고 인조 재위시는 호란(胡亂)을 겪은 시기이다.

요즘 전쟁 상황이 아님에도 각자도생이란 말이 자주 쓰인다. 이는 우리가 참 살기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주 1회 모임을 갖던 시기를 두 번(기초 과정: 2016년 4월 21 – 2016년 7월 14일, 전문가 과정: 2016년 10월 6일 – 2017년 1월 19일) 보내고 주 2회 정도 모임을 갖던 시기(연구원 과정: 2017년 6월 7일 – 8월 20일)도 보내어 이제 1년에 한 번 송년회 때나 만날 수 있는 상황이 된 나와 동기들을 보며 각자도생이란 말을 떠올려도 될까?

한 달에 한 번 모이는 연구회에서 만날 수 있지만 여러 연구회가 있어 함께 모일 수 있을지 어떨지는 알 수 없다.

전문가 과정에서부터 함께 해온 한 동기(同期)는 목표 의식이 없어져서인지 너무 허탈하다는 말을 단톡방에 남겼다.

우리는 이제 함께 공부한 수습 시기를 지나 홀로 해설을 하며 세파(世波)를 헤쳐가야 할 시기를 맞았다.

굳이 말하자면 나도 허무하고 아쉽지만 마음 잡으려고 크게 애쓰지 않는다.

내가 강하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니다. 나는 참 마음이 약하고 여리다. 하지만 마음 잡으려고 굳이 크게 애쓸 필요가 없는 데에는 이유가 달리 있다.

전문가 과정(36기) 동기들을 한 달에 한 번씩 만나지만 이는 공부 모임이 아니라 친목 모임이다.
어쩌면 나도 그렇고 단톡방에 너무 허탈하다는 말을 남긴 동기도 그렇고 공부하며 함께 시간을 나누는 모임을 그리워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떻든 그 동기를 비롯해 연구원 동기들 대부분은 지금까지 생에서 이룬 것이 많고 연수(練修) 과정에서 얻은 성취감을 잊어야 하기에 허탈할 수도 있고 잠시 넋을 놓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나는 무언가 준비하고 구상해야 하기에 그럴 여유가 없다. 아쉽지만 정진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도 잠시 몸을 쉬게 해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최영미라는 본명을 가진 최연 시인의 갤러리 엠에서의 ‘그림에 들다‘ 전시회가 23일(수요일) 17시 30분 오픈된다고 들었다.

전시 장소가 인사동 소재의 갤러리여서 좋다. 그곳에 들고 갈 시집을 사기 위해 물은 몇몇 서점들로부터 하나 같이 그 책은 매장에 없어 주문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무슨 중요한 일이라도 하는 것처럼 책을 주문해서 배송받지 않고 직접 가서 받아야 그날 가지고 갈 수 있기에 마음썼는데 종로 반디앤루니스가 있던 곳에 새로 들어선 종로서적을 통해 내일 이후 책을 받을 수 있게 되어 다행이다.

어제 모임 후 가본 이 종로서적은 예전 그 종로서적이 아니라고 한다. 지난 해 12월 14년만의 부활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옛 반디앤루니스 종로점 자리에 들어선 현 종로서적은 옛 종로서적 창시자 가족과 아무 연관이 없이 이름만 같은 서점이라는 뜻이다.

반디앤루니스 지점들 중 접근성이 가장 좋은 종로점이 문을 닫은 후 찾기 어려운 사당, 잠실, 목동점 등에 가느라 힘이 많이 들던 차에 종로서적이 들어서게 되어 반가웠는데 어제 가보니 서점이라기보다 책도 파는 팬시점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교보도 영풍도 그러니 그런 흐름이 대세인 것 같다. 듣기로 서울의 대형서점들이 출판사로부터 돈을 받고 목 좋은 자리의 매대에 책을 진열시키게 한다고 한다.

이것이 문제인 것은 결국 돈이 많은 출판사가 만든 질 낮은 책이 가난한 출판사가 만든 양질의 책을 팔리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물론 매대를 사는 출판사도 고육책으로 즉 적자를 감수하며 그렇게 하고 있으니 출판계는 이제 끝났다는 탄식은 충분히 공감을 산다.

나는 눈에 잘 띄는 매대가 아닌 구석 구석의 책들을 적극적으로 찾는데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하기를 바랄 수는 없다.

우리나라에서 일주일(토, 일 제외한 5일)에 나오는 책은 1000종이라고 한다. 이러니 선택되지 않고 폐기되는 책들이 많으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나의 책 구매 지침은 좋은 책들이 조금이나마 더 많이 빛을 보아야 한다는 당위에 근거한 것이다.

책만이 지식의 원천은 아니지만 진득하게 사유할 수 있는 것은 책이 유일하지 않은지? 그럴 리 없겠지만 우리의 이런 불합리한 출판계의 관행 때문에 가볍게 즐기기에 적당한 책들만 남는 세상이 된다면 어쩌겠는가.

가치 없는 획일적인 세상이 될 것이다. 인터넷을 통해서 책을 구입하면 낭패를 겪기도 한다고 한다. 그래서 오프라인 매장을 찾아 내용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가서 보면 찾는 책이 없어 주문하고 집에서 받아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를 두고 오프라인 매장이 있는 의미가 무엇인가 묻는 사람들도 있다고 들었다.

바쁘겠지만 발품을 팔아 국립중앙도서관 같은 곳에 들러 내용을 확인하고 책을 선택하는 것은 어떨까?

도서관이 많아지는 것을 토건 중심 정책이라 해서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책을 좋아하는 입장으로는 빌릴 수 있는 책 권수도 성에 차지 않고 새 책 구매 신청 권수도 있으나마나인 수준이어서 미흡하기만 하다.

정부와 출판계 차원의 대책이 마련되겠지만 그것과 무관하게 독자들이 책좀 많이 읽고 쉬운 책보다 인문학의 무게감 있는 원전들을 많이 읽어야 하는 것이 아닌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새것 콤플렉스란 말을 처음 접한 것은 작고한 문학평론가 김현 선생의 책에서였(다고 기억한)다.
김현 선생이 새것 콤플렉스란 개념을 제시한 것은 공부하는 사람이 진득하게 하나의 주제를 연구하지 못하고 유행에 휩쓸려 새 것을 찾아 다니고 그것에 어느 만큼 익숙해지면 또 다른 새 것을 찾아 가는 행태를 비판하기 위해서이다.

물론 새것 콤플렉스에 빠진 사람들이 어떤 기제로 그렇게 하는지는 내 관심 밖이다.

나는 가끔 새것 콤플렉스는 아니고 새것에 대한 열정이 많은 사람이라는 자평을 하곤 한다. 익숙한 것들을 남다른 시각으로 보려는 것 또는 서양 이론과 동양 이론을 비교해 하나의 틀에 담아내려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어제 일정을 마친 후 서점에 들러 책을 훑어보다가 정치학 박사 김용신의 ‘성리학자 기대승 프로이트를 만나다‘란 책을 알게 되었다.

퇴계(退溪)와 사칠리기(四七理氣) 논쟁을 한 유명한 학자인 고봉(高峯) 기대승의 사상과 프로이트 이론을 비교한 책이니 흥미를 자극하는 책이다.

퇴계와 고봉의 논쟁을 퇴고논쟁이라고도 한다. 물론 이때의 퇴고는 완성된 글을 다시 읽어 고치고 다듬는 것을 의미하는 推敲가 아니다.

하지만 退高 논쟁을 推敲 과정으로 볼 수 있다. 논의를 거쳐 진리에 한 발 가까이 다가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글을 쓸 때에는 아무리 어려운 내용일지라도 알기 쉽게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특히 학자들의 말을 인용할 때는 너무 어려운 것은 쉬운 말로 약간 바꾸는 노력까지 한다고 말한다. 내가 염두에 두어야 할 말이다.

이제 고독하게 몰입해야 할 시간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