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다섯 시쯤 건조함 때문에 잠에서 깨 가습기에 물을 담고 작동 버튼을 눌렀다. 오래 사용하지 않아서인지 바로 작동되지 않았다. 몇 차례 껐다 켰다를 반복하니 가습기 특유의 안개비 같은 수분이 출구를 통해 나왔다. 본격적인 가을이 닥칠 것 같은 기분이다.

 

찬 공기는 따뜻한 공기에 비해 습기가 적다. 한 과학자는 이를 공기가 받아들일 수 있는 수분의 양으로 설명한다. 공기는 따뜻하면 할수록 더 많은 수분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게르하르트 슈타군 지음 날씨 과학’ 149 페이지

  

한 여름 더위에 비해 온도가 불과 2, 3도 정도 밖에 차이가 나지 않겠지만 그 몇 도가 큰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이렇게 실감한다. 추위보다는 건조함이 내게 민감하게 작용하는 것 같다.

 

산중의 공기가 메말라가는 것을 보고 은사 스님께서 머지 않아 곧 가시겠구나란 선명한 예감을 기()로 느꼈다는 스님이 생각난다.

 

물론 그 분의 그런 예감이 작동한 시기는 시월이었다. 8월의 마지막 날인 오늘과 시월은 한 달 이상 차이가 난다. 겨울 대비보다 가을 대비가 먼저 필요하다.

 

특별할 것은 없고 우선 가을과 잘 맞는 음악을 찾아 듣는 것으로 시작해야겠다. 9월에는 열 번 이상 서울에 가야 할 것 같으니 이것부터가 가을 대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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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주침의 발명 - 김행숙이 만난 시인들
김행숙 지음 / 케포이북스 / 2009년 6월
평점 :
품절


바람이 움직임 속에서 현현하듯이 마음은 무정형의 운동 속에서 언어를 고르고 만지고 굴절시키며 배달한다.” ‘김행숙이 만난 시인들이란 부제가 달린 마주침의 발명의 주요 전언(傳言)이다. 김행숙은 시인이고 국문과 교수이다. 이 책에 실린 시인들(저자가 만난 시인들)은 이성복, 황병승, 이원, 진은영, 박상순, 박형준, 김명인, 강정, 이수명, 김언 등이다.

 

마음이 무정형의 운동 속에서 언어를 고르고 만지고 굴절시키며 배달한다는 말은 열 명의 시인들에 대한 논의의 진입로 격인 프롤로그에 나온다. 그러니 책에 나오는 전 시인에 해당하는 말이고 나아가 시 자체의 특성을 아우르는 말이다.

 

세잔의 사과에서 저자 전영백은 D. H 로렌스가 세잔을 40년 동안의 긴 분투 끝에 하나의 사과를 충분히 아는 데 성공한 화가로 정의했음을 지적한다. 세잔은 사과의 본질을 포착하기 위해 40년을 바쳤다. 저자에 의하면 세잔의 사과는 그림(표상)으로 인해 실제(대상)의 근본 속성이 발현되는 것이다.

 

즉 세잔이 사과를 그림으로써 실재의 사과가 진실로 그 자체가 될 수 있었다는 의미이다. 중요한 것은 시니피에(기의); 실재/ 대상, 시니피앙(기표): 그림/ 표상이라는 등식이다. 김행숙 시인이 말한 관계도에서 마음은 시니피에이고 언어는 시니피앙이다. 김행숙 시인은 종종 배달사고가 일어날 것이라 말한다.

 

배달 사고란 언어가 마음을 정확하게 표현하지 못하는 경우를 말한다. “세상의 어떤 어떤 모퉁이에서 시인들을 만나고” “썼다는 저자는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자신이 오독하고 변형한 부분이 있음을 알고 그것을 지우고 새로 쓰게 되었음을 알게 될 것이라 말한다. 새로 쓴다는 것은 오독하고 변형한 부분을 바르게 배달한다는 의미이다.

 

이성복 시인편에 은유는 계속적으로 쇄신되어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 이 말 역시 오독하고 변형한 부분을 바르게 배달한다는 말과 차원이 같다. 황병승 시인도 비유를 한다. 나이에 대해. 새가 나뭇가지에 와서 앉으면 늘어진 나뭇가지가 (새를) 조금 무겁다고 느끼다가 새가 날아가면 그 존재를 잊어버리는 것 같은 것이 나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시인들과 대화(인터뷰)를 하며 시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이야기에는 어떤 유형의 시를 써보려 했으나 도무지 되지 않아 포기했다는 내용도 있다. 이원 시인은 자신에게 가장 부조리하게 느껴지는 것은 몸이라고 말한다. 이상한 생각들이 수도 없이 일어났다가 스러지는데 통제할 수도 없고 열어볼 수도 없는 몸에게 우리는 쩔쩔매는 꼴이라는 것이다.(63 페이지)

 

이원 시인은 욕망과 함께 언어가 움직여주어야 하고 자신이 전적으로 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시가 자신을 일으켜주기도 한다고 말한다.(68 페이지) 앞에서 세잔 이야기를 했는데 이원 시인은 들뢰즈의 감각의 논리를 인용해 세잔이 수행한 사과 하나와의 전쟁, 베이컨이 말한 머리 하나와의 전쟁에 대해 이야기한다.(74 페이지)

 

진은영 시인은 뭘 해도 지루한데 시를 쓸 때만큼은 완전한 몰두가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명징해진다는 것이다. 온전히 자기 정신으로 있는 순간들을 경험한다는 것이다.(89 페이지) 진은영 시인은 예전에 접속사, 조사 같은 것을 다 없애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한동안 시달렸다고 한다. 조사는 단어와 단어를 연결하는 기능을 하는데 단어와 단어를 자유롭게 내버려두고 싶었다는 것이다.(96 페이지)

 

언어는 어떤 감응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지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은 아니라 말하는 진은영 시인은 비평가들이 우리 시를 읽으면서 헤매는 이유는 이 시는 어떤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 나는 분석을 통해 그것을 찾아내야 한다. 만일 내가 그것을 찾아낼 수 없다면 시인인 네가 그 메시지의 전달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고, 너만 알 수 있는 방식으로 그걸 은폐하고 있기 때문이다. 너는 적어도 한 둘을 알 수 있는 방식으로 네가 말하고자 하는 본질을 전달할 의무가 있다는 고답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 말한다.(99 페이지) 감각의 ()문법을 가지고 있는 시를 의미의 문법으로 읽으면 안된다는 것이 진은영 시인의 전언이다.

 

박상순 시인은 고종석이 자신의 시를 언어로 만든 놀이공원이라 정의한 것에 동의한다.(108 페이지) 박상순 시인의 시관(詩觀)과 진은영 시인의 시관(詩觀)은 맥락이 같다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시를 쓰는 박상순은 문제를 푸는 사람이 아니라 문제를 만들어내는 사람이라 말할 수 있다고 말한다.(124 페이지) 그런데 박상순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시인들이 문제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닐지?

 

박형준 시인은 자신을 둔재로 표현하며 둔재에게는 끈질김, 지독함 같은 것이 있어야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라 말한다.(139 페이지) 김명인 시인은 시의 바탕이 진정성으로 이해될수록 그 감동의 자리는 불가해한 시쓰기의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자리이기도 했는데 그 고통은 삶의 실체를 확인하는 데서 오는 막막한 느낌들과 통하는 것이었다고 말한다.(154 페이지)

 

김명인 시인은 내게 시쓰기란 나를 알아가는 길이었다고 말한다.(159 페이지) “실존적 질문을 넘어서려고 애쓴 것이 나의 시쓰기였다면 너무 거창한 고백이 될까.“라 말하는 김명인 시인의 시 새벽까지의 끝 구절(”이 밤의 책들 다 사르리라, 나는/ 불꽃을 뛰어넘는 새벽의 사람이 되어서!“)을 음미하게 된다. 실존 이야기를 한 것을 통해 나는 시인의 새벽까지의 끝 구절이 이해하게 된다.

 

김명인 시인이 시와 삶을 나란히 이야기했지만 저자는 강정 시인은 시를 쓰는 몸으로 삶을 살고 싶어 한다는 말을 한다.(174 페이지) 록커인 강정은 짐 모리슨 때문에 랭보도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184 페이지) 나라면 짐 모리슨을 올더스 헉슬리 때문에, 아니면 올더스 헉슬리를 짐 모리슨 때문에 알게 되었다고 말할 것 같다.

 

저자는 저항이 없는 곳에 자유가 없다는 김춘수 시인의 말을, 김춘수 시인과 시적 코드가 많이 다른 강정 시인의 삶을 수식하는 데 쓴다.(189 페이지) 개인적인 이야기이지만 마주침의 발명에 나오는 시인들 가운데 이수명 시인에 대해 관심이 가장 많이 간다. 어렵기 때문이고 시도 쓰고 시평론도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시를 쓰는 이수명과 시를 말하는(논하는) 이수명은 놀랍도록 날카로운 접점을 가지고 있지만 각각 딴 세계에 있다고 말한다.(196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시를 쓰는 이수명은 무지이거나 미지인 세계에 던져져 있는 자이다.

 

이수명 시인은 시를 쓰는 일은 무엇을 원하지 않는 상태가 되는 일이다. 혹은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하는 상태가 되는 일이다. 시를 쓰기 위해서는 눈앞에 펼쳐지는 시간과 공간, 사물들, 현실의 이름들을 거부하고 그것들로부터 멀어지기를 계속해야 한다,“고 말한다.(197 페이지)

 

낯설게 보기이자 놀이라 할 수 있다. 이수명 시인은 시나 문학은 지금 현재의 혼돈하고 표류하는 것을 현재진행형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말한다.(202 페이지) 저자는 시를 쓰는 이수명은 모르는 자이지만 시를 말하는 이수명은 들여다보는 자이며 정확하게 근접해나가는 자이며 글쓰기의 공간을 인식해내려고 하는 또 다른 두뇌이자 시선이라 말한다.(204 페이지) 시를 쓰며 시를 말하는 서동욱, 김승희, 정끝별 등의 이름이 떠오른다.

 

저자는 가라타니 고진 이야기를 한다. 고진은 근대문학의 기원이라는 지점에서 내면을 말했다. 맨 얼굴의 발견과 함께, 풍경의 발견과 함께 문학에서 작동하기 시작한 내면이 그 기원을 잊고 자명해졌다는 것, 이 내면이 문학의 제도 속으로 깊숙이 들어와 버려서 어떤 전도(顚倒)가 자연물처럼 정착했다는 것을 그의 책은 포착해낸다는 것이다.(211 페이지)

 

전도란 내면이라는 것이 원래 주어져 있는 것이라는 관념, 내면이 그 자체로서 존재한다는 환상을 말한다. 이수명 시인은 자의식적으로 들어온 것이든 외부에서 심어진 것이든 구축된 자아에 전적으로 기대는 서정시는 무반성적이라는 점에서 지극히 자족적이라 말한다.

 

반성적 비판적 매개 없이 구축되어 있는 것을 배포하는 것, 그 방식으로 자기의 고통이나 깨달음을 특별히 의미 있는 것인 양 전파하는 것, 시가 그런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이수명 시인은 말한다.(211 페이지)

 

김언 시인의 전공은 공학이다. 공학도의 필수 과목인 물리학을 네 번째 수강에서야 A학점으로 정복(?)한 이력이 그에게 있다.(D F F A)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의 원리를 더듬고 상상하는 지점에서 물리학이 시와 뜻밖의 조우를 하는 경험을 했다고 한다.(218 페이지)

 

김언 시인은 자신은 시인이나 예술가보다는 굳이 말하자면 학자 타입(체질)이지 싶다고 말한다. 혼자 방에 틀어박혀 세계와 언어에 관한 모델을 세우고 허물고 또 곰곰 궁리하면서 노는 걸 좋아한다고 말한다.(219 페이지)

 

저자는 멈출 수 없다는 것이 계속해서 쓰고 많이 쓰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것은 목소리가 새어나오지 않는 저 바닥 없는 바닥으로 고요하게 내려가는 일일 수도 있으며 그러므로 그것은 침묵에 깊숙이 격정적으로 온몸을 담그는 것일 수 있으며 한없이 산만해지는 정신의 상태를 가리킬 수도 있고 너를 사랑하는 것일 수도 있고 지금 쓸 수 밖에 없는 상태에 빠졌다는 현재적인 글쓰기의 경험에 찍히는 숨찬 느낌표들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248 페이지)

 

마주침의 발명은 관념적이고 추상화 같은 글들의 모음이다. 각기 다른 개성 있는 시인 열 사람을 인터뷰한 책이지만 묘하게 그 각자의 글들이 하나로 수렴하는 듯 하다. 시와 삶의 불가분리성, 그러면서도 놀이로서의 성격을 갖는 시로 수렴되는 듯 하다. 시 자체가 감성적이고 예술적이어서 그런 관념적이고 놀이로서의 성격을 갖는 것이겠지만 저자인 김행숙의 깊이 있는 문학적 시선이 내공으로 작용한 결과라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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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적인 생각으로부터는 힘을 얻고 탄식으로부터는 깨달음을 얻는다. 나만 힘들고 어려운 것은 아니라는. 나만 그러는 걸까?

 

˝파산에 가까웠던 내 젊음, 누차 자살로 모든 것을 기권, 청산하려 했던 위기를 겨우 극복하는 데만 낭비했던 내 청춘...” 철학자 박이문 교수가 프랑스 유학 시절을 회고하며 쓴 글이다.(‘다시 찾은 빠리 수첩참고)

 

헛된 정열, 안개끼고 음산하기 이를 데 없는 벨지움의 겨울날씨 속에서 고독과 헛된 정열에 대한 만 가지 상념과...” 철학자 김형효 교수가 벨지움 유학 시절을 회상하며 쓴 글이다.(‘구조주의의 사유체계와 사상참고)

 

고통이 주어졌다는 것은 신이 우리 곁을 지나가고 있다는 신호라고 할 수 있다. 그 보이지 않는 손이 삶을 강하게 구부릴 때, 당신은 어떻게 하는지?” 나희덕 시인이 최근 나온 산문집에서 쓴 글이다.(‘한 걸음씩 걸어서 거기 도착하려네참고)

 

특별히 깨달음을 주는 글은 나희덕 시인의 글이다.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글이기 때문이다. 물론 앞의 두 글 역시 의미를 음미하게 해주는 글이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난 뒤의 글이기 때문이다.

 

나희덕 시인의 글은 도덕의 계보에서 인간의 문제는 고통 자체가 아니라 무엇 때문에 고통스러워 하는지에 대해 답이 없는 것이라는 말을 한 니체를 생각나게 한다.

 

나희덕 시인의 말에 공감하는 사람들은 고난의 의미를 신과 연결지음으로써 자신의 삶을 견딜 수 있는 계기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이재무 시인이 나 시인의 글을 인용한 뒤 ˝신이시여 당신은 너무 자주 내 곁을 지나시는구려.˝란 생각을 덧붙였다.

 

˝그럴까요?˝, ˝(자신은) 신과 동거중˝, ˝어서 지나가시라˝, ˝고통은 그만 누리고 싶다˝ 등 다양한 반응의 댓글이 달렸다. 신이 자신을 모른 척 해주기를 바란다는 글도 있었고 자기 안에는 신이 상주(常住)한다는 글도 있었다.

 

나희덕 시인의 글은 쉽게 하기 어려운 신앙적 고백의 글이다.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는 그의 안목으로부터 배움을 얻는다.

 

물론 생각이 같기 때문은 아니다. 고통에 의미부여를 하는 진실됨이 돋보이기 때문이고 나를 돌아보게 하는 글이기 때문이다. 성무일과(聖務日課) 같은 생각에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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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잘 쓰는 어떤 작가와 미학자의 대화를 유트브를 통해 시청했다. 작가는 청중들에게 임마누엘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완독한 사람이 있는지 물으며 자신은 그 책을 읽기 위해 애썼지만 도무지 한 장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겠더라는 말을 하면서 그 책이 위대한 책이라는 평가를 했다.

 

'생활의 발견'의 저자인 중국의 임어당(林語堂; 린위탕)의 사례를 생각하게 하는 말이다임어당은 자신이 칸트 철학을 읽지 않은 것은 그의 철학이 서너쪽조차 제대로 읽기 어려웠기 때문이라 말하며 전문 용어와 난해한 논리를 사용하는 철학을 비난했다.(이정우 지음 '가로지르기' 145 페이지)

 

하지만 임어당은 '이교도에서 기독교인으로'에서는 칸트의 사상을 나름대로 분석하고 설명했다예컨대 사상계에서 참으로 독창적인 지성을 갖춘 사람으로 붓다, 칸트, 프로이트, 쇼펜하우어, 스피노자 등을 거론한 것(250 페이지)이 대표적이다.

 

더욱 그는 이성 너머의 잔여 영역, 도덕적인 삶과 도덕적 행동의 영역에서는 상식이 들어설 자리를 허용했는데 그 고전적 사례가 '순수이성비판'이고 정언명령(행위의 결과에 구애받지 않고 무조건 수행해야 하는 도덕적 명령)이라고 말했다.(281 페이지)

 

미학자는 '순수이성비판'을 완독 했지만 역시 전체적으로 볼 때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는 말을 했다칸트 윤리학을 주제로 논문을 써 철학 박사가 된 랄프 루드비히는 자신도 수많은 칸트 입문서를 읽었지만 대부분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말을 했다.

 

특이한 것은 철학자의 삶과 사상의 일치성 여부를 논하며 루드비히가 설정한 비교 대상이다. 철학자의 삶과 사상이 일치하는지를 논할 때 우리는 일반적으로 그 철학자가 자신의 사상을 실천했는지를 논한다.

 

하지만 루드비히는 복잡성과 단순성을 기준으로 제시했다. 단조로운 칸트의 삶과 다양하기만 한 정신 체계의 차이가 크다는 것과, 칸트의 개인적 생활은 겸손했지만 인간 존재의 비밀을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위한 우주법칙으로 설명하려는 사도는 과감했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특이한 경우는 철학자/ 시인 진은영의 책 '순수이성비판, 이성을 법정에 세우다'를 통해 확인 가능하다진은영 시인은 '순수이성비판, 이성을 법정에 세우다'를 쓰는데 도움 받은 책으로 한자경 교수의 '불교철학의 전개'를 지목한다.

 

칸트 이야기는 하나도 없는 책으로부터 '순수이성비판' 해설서를 쓰는데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은 흥미롭다굳이 이유를 살피자면 '불교철학의 전개'에 나오는 현상론과 용수(龍樹) 보살 이야기가 저자의 영감을 자극한 것이 아닌가 싶다.

 

칸트는 현상과 물자체(物自體)를 대립되는 것으로 설명했다. 현상은 눈에 보이는 세계이고 물자체는 우리의 인식 능력과 무관하게 존재한다고 여겨지는 사물 자체이다. 물자체는 우리가 알 수 있는 인식 대상이 아니다불교 중관사상의 대표적 논자인 용수는 김종욱 교수의 '용수와 칸트'라는 책이 말해주듯 칸트 이해에 도움이 되는 듯 하다  

 

노장사상으로 불교사상을 설명하여 중국인에게 불교를 쉽게 이해시키려는 시도인 격의불교(格義佛敎)처럼 칸트도 다른 것들의 도움을 얻어 읽고 이해해야 할 철학자이다앞서 말한 작가는 순수이성비판읽지 말라, 이해할 수 없는 책이다, 추천한 교수도 이해하지 못하고 그랬을 것이다 등의 말을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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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7-08-29 06: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한때 말을 세게 하는 것으로 악명이 떠르르한 사람답게 호언하더라구요. 그때 저도 우연찮게 순수이성비판에 관한 입문서를 읽던 중이었는데..... 저는 입문서만 몇 권 읽고도 나가떨어졌어요.
올려주신 저 책도 ˝쉽게 읽는˝이라고 써 있지만 입문서들 가운데서 쉬운 편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ㅠㅠㅜ

벤투의스케치북 2017-08-29 0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그 작가가 그런 성향을 가진 분이지요.. 입문서를 읽기에도 어려운 철학을 완독은 물론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정도로 이해하는 분들은 대단합니다. 이정우 교수는 대학교 학부 과정에서 교양 과목을 제대로 들은 사람이면 얼마든지 칸트를 읽을 수 있다고 말했지만 말입니다.. ^^ 고맙습니다. 재미있게 접할 수 있는 댓글을 달아주셔서..
 

 

보수적인 시골 장로교회에 적(籍)을 둔 20대 중반 다가와 겐조(田川建三)의 ‘예수라는 사나이’를 읽었다. 안병무 박사의 ‘갈릴래아의 예수’나 서남동 박사의 ‘민중신학의 탐구’와는 다른 차원으로 기독교에 대해 회의(懷疑)하게 한 이 책에 대한 기억은 어제일인 듯 생생하다.

겐조는 “악에 맞서지 말라.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 대어라. 누가 너를 고소하고 속옷을 가져가려 하거든 겉옷까지도 벗어 주어라.”란 마태복음 5장의 말씀을 사랑이 아닌 무력한 약자의 방어책으로 설명한다. 정신 승리라는 말로 설명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겐조의 해석이 타당한가, 아닌가를 논하고 싶지는 않다. 근대문학의 종언(終焉)을 말한 가라타니 고진도 ‘예수라는 사나이’에 영향을 받았다.

한 논자는 가라타니 고진이 다가와 겐조의 논리 속에서 어떤 ‘장소‘의 이동을 보고자 한다고 전제한다.

그리고 ‘예수라는 사나이’를 읽고 난 후의 성경의 4복음서는 이전의 4복음서가 아니며 만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과 같이 4복음서를 읽는다면, 그것은 가까스로 발견한 예수의 장소를 기독교의 역사 = 체계 = 의미로 다시 소거, 포획시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비평고원 사이트 수록 ‘예수는 없다 : 다가와 겐조,『예수라는 사나이 : 역설적 반항아의 삶과 죽음』읽기’ 참고)

나는 다만 니체가 ‘도덕의 계보‘에서 말한 바와 상통하는 점이 있다는 생각을 했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니체는 보복하지 않는 무력감을 선과 겸허와 순결로, 비겁함을 덕으로, 인내와 가련함을 신의 선택으로 보는 것을 화폐 위조에 비유한다.

니체의 주장 역시 논란 거리이다. 역시 이 부분에 대해 내가 말하기에는 생각이 여물지 않았다. 날카로움이 돋보이는 만큼 반대의 정서 같은 것이 일어난다는 말 정도는 하고 싶다.

화폐를 위조한다는 말은 마음 먹은 것과 표현하는 것 사이에 괴리, 왜곡 같은 것이 있다는 말이다. 궁금한 것은 무력한 본인이 스스로를 무력하다 생각하지 않고 선하다고 생각하는지 여부이다.

이기성의 ’우리, 유쾌한 사전꾼들‘이란 평론집이 있다. 저자가 말하는 사전은 개인이 만든 가짜 돈을 뜻하는 私錢이다.

앙드레 지드의 ’사전꾼들‘에서 암시를 얻었을 테다. ’우리, 유쾌한 사전꾼들‘ 가운데 ’언어왕국의 위조지폐‘라는 챕터가 있다.

저자는 시적(詩的) 언어를 시장의 질서를 교란하고 확신의 체계를 누수 시키는 위조화폐로, 시인들을 견고한 의미의 성벽을 내파(內破)하는 사전꾼들로 본다. 니체가 말하는 위조지페는 부정적이다. 이기성이 말하는 사전(私錢)은 긍정적이다. 아니 영광이다.

내파라니 하는 말이지만 내사(內射)는 어떤가. 투사(投射)와 대비되는. 내사는 외부의 영향이 자아에 미치는 힘을 말한다.

투사는 본능이 환경을 향해 쏘는 힘을 말한다. 이기성이 말한 내파는 implosion이다. 스스로 무너지는 것을 말한다.

내(內)자가 모두 들어 있지만 내파와 내사는 방향이 다르다. 내파는 안에서 스스로 무너지는 것이고 내사는 밖에서 주체를 향해 영향이 미치는 것을 말한다.

견고한 의미의 성벽을 내파한다는 말을 들으니 초월(超越)이 아닌 기어서 즉 포복하면서 넘는다는 의미의 포월(匍越)을 말한 철학자 김진석이 생각난다.

하지만 그냥 그럴 뿐이다. 시인은 견고한 의미의 성벽을 내파(內破)하지만 아니 그런 만큼 새 의미를 만들어야 한다.

의미를 새롭게 하기 위해 견고한 의미의 성벽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것이겠지만 무너뜨리기만 하면 그냥 포복(匍匐)일 뿐 포월도 초월도 아니다. 니체의 ’도덕의 계보‘를 읽다가 정리는 안 하고 이런 생각만 하는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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