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적인 생각으로부터는 힘을 얻고 탄식으로부터는 깨달음을 얻는다. 나만 힘들고 어려운 것은 아니라는. 나만 그러는 걸까?

 

˝파산에 가까웠던 내 젊음, 누차 자살로 모든 것을 기권, 청산하려 했던 위기를 겨우 극복하는 데만 낭비했던 내 청춘...” 철학자 박이문 교수가 프랑스 유학 시절을 회고하며 쓴 글이다.(‘다시 찾은 빠리 수첩참고)

 

헛된 정열, 안개끼고 음산하기 이를 데 없는 벨지움의 겨울날씨 속에서 고독과 헛된 정열에 대한 만 가지 상념과...” 철학자 김형효 교수가 벨지움 유학 시절을 회상하며 쓴 글이다.(‘구조주의의 사유체계와 사상참고)

 

고통이 주어졌다는 것은 신이 우리 곁을 지나가고 있다는 신호라고 할 수 있다. 그 보이지 않는 손이 삶을 강하게 구부릴 때, 당신은 어떻게 하는지?” 나희덕 시인이 최근 나온 산문집에서 쓴 글이다.(‘한 걸음씩 걸어서 거기 도착하려네참고)

 

특별히 깨달음을 주는 글은 나희덕 시인의 글이다.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글이기 때문이다. 물론 앞의 두 글 역시 의미를 음미하게 해주는 글이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난 뒤의 글이기 때문이다.

 

나희덕 시인의 글은 도덕의 계보에서 인간의 문제는 고통 자체가 아니라 무엇 때문에 고통스러워 하는지에 대해 답이 없는 것이라는 말을 한 니체를 생각나게 한다.

 

나희덕 시인의 말에 공감하는 사람들은 고난의 의미를 신과 연결지음으로써 자신의 삶을 견딜 수 있는 계기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이재무 시인이 나 시인의 글을 인용한 뒤 ˝신이시여 당신은 너무 자주 내 곁을 지나시는구려.˝란 생각을 덧붙였다.

 

˝그럴까요?˝, ˝(자신은) 신과 동거중˝, ˝어서 지나가시라˝, ˝고통은 그만 누리고 싶다˝ 등 다양한 반응의 댓글이 달렸다. 신이 자신을 모른 척 해주기를 바란다는 글도 있었고 자기 안에는 신이 상주(常住)한다는 글도 있었다.

 

나희덕 시인의 글은 쉽게 하기 어려운 신앙적 고백의 글이다.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는 그의 안목으로부터 배움을 얻는다.

 

물론 생각이 같기 때문은 아니다. 고통에 의미부여를 하는 진실됨이 돋보이기 때문이고 나를 돌아보게 하는 글이기 때문이다. 성무일과(聖務日課) 같은 생각에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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