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적인 시골 장로교회에 적(籍)을 둔 20대 중반 다가와 겐조(田川建三)의 ‘예수라는 사나이’를 읽었다. 안병무 박사의 ‘갈릴래아의 예수’나 서남동 박사의 ‘민중신학의 탐구’와는 다른 차원으로 기독교에 대해 회의(懷疑)하게 한 이 책에 대한 기억은 어제일인 듯 생생하다.
겐조는 “악에 맞서지 말라.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 대어라. 누가 너를 고소하고 속옷을 가져가려 하거든 겉옷까지도 벗어 주어라.”란 마태복음 5장의 말씀을 사랑이 아닌 무력한 약자의 방어책으로 설명한다. 정신 승리라는 말로 설명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겐조의 해석이 타당한가, 아닌가를 논하고 싶지는 않다. 근대문학의 종언(終焉)을 말한 가라타니 고진도 ‘예수라는 사나이’에 영향을 받았다.
한 논자는 가라타니 고진이 다가와 겐조의 논리 속에서 어떤 ‘장소‘의 이동을 보고자 한다고 전제한다.
그리고 ‘예수라는 사나이’를 읽고 난 후의 성경의 4복음서는 이전의 4복음서가 아니며 만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과 같이 4복음서를 읽는다면, 그것은 가까스로 발견한 예수의 장소를 기독교의 역사 = 체계 = 의미로 다시 소거, 포획시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비평고원 사이트 수록 ‘예수는 없다 : 다가와 겐조,『예수라는 사나이 : 역설적 반항아의 삶과 죽음』읽기’ 참고)
나는 다만 니체가 ‘도덕의 계보‘에서 말한 바와 상통하는 점이 있다는 생각을 했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니체는 보복하지 않는 무력감을 선과 겸허와 순결로, 비겁함을 덕으로, 인내와 가련함을 신의 선택으로 보는 것을 화폐 위조에 비유한다.
니체의 주장 역시 논란 거리이다. 역시 이 부분에 대해 내가 말하기에는 생각이 여물지 않았다. 날카로움이 돋보이는 만큼 반대의 정서 같은 것이 일어난다는 말 정도는 하고 싶다.
화폐를 위조한다는 말은 마음 먹은 것과 표현하는 것 사이에 괴리, 왜곡 같은 것이 있다는 말이다. 궁금한 것은 무력한 본인이 스스로를 무력하다 생각하지 않고 선하다고 생각하는지 여부이다.
이기성의 ’우리, 유쾌한 사전꾼들‘이란 평론집이 있다. 저자가 말하는 사전은 개인이 만든 가짜 돈을 뜻하는 私錢이다.
앙드레 지드의 ’사전꾼들‘에서 암시를 얻었을 테다. ’우리, 유쾌한 사전꾼들‘ 가운데 ’언어왕국의 위조지폐‘라는 챕터가 있다.
저자는 시적(詩的) 언어를 시장의 질서를 교란하고 확신의 체계를 누수 시키는 위조화폐로, 시인들을 견고한 의미의 성벽을 내파(內破)하는 사전꾼들로 본다. 니체가 말하는 위조지페는 부정적이다. 이기성이 말하는 사전(私錢)은 긍정적이다. 아니 영광이다.
내파라니 하는 말이지만 내사(內射)는 어떤가. 투사(投射)와 대비되는. 내사는 외부의 영향이 자아에 미치는 힘을 말한다.
투사는 본능이 환경을 향해 쏘는 힘을 말한다. 이기성이 말한 내파는 implosion이다. 스스로 무너지는 것을 말한다.
내(內)자가 모두 들어 있지만 내파와 내사는 방향이 다르다. 내파는 안에서 스스로 무너지는 것이고 내사는 밖에서 주체를 향해 영향이 미치는 것을 말한다.
견고한 의미의 성벽을 내파한다는 말을 들으니 초월(超越)이 아닌 기어서 즉 포복하면서 넘는다는 의미의 포월(匍越)을 말한 철학자 김진석이 생각난다.
하지만 그냥 그럴 뿐이다. 시인은 견고한 의미의 성벽을 내파(內破)하지만 아니 그런 만큼 새 의미를 만들어야 한다.
의미를 새롭게 하기 위해 견고한 의미의 성벽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것이겠지만 무너뜨리기만 하면 그냥 포복(匍匐)일 뿐 포월도 초월도 아니다. 니체의 ’도덕의 계보‘를 읽다가 정리는 안 하고 이런 생각만 하는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