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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주침의 발명 - 김행숙이 만난 시인들
김행숙 지음 / 케포이북스 / 2009년 6월
평점 :
품절
“바람이 움직임 속에서 현현하듯이 마음은 무정형의 운동 속에서 언어를 고르고 만지고 굴절시키며 배달한다.” ‘김행숙이 만난 시인들’이란 부제가 달린 ‘마주침의 발명‘의 주요 전언(傳言)이다. 김행숙은 시인이고 국문과 교수이다. 이 책에 실린 시인들(저자가 만난 시인들)은 이성복, 황병승, 이원, 진은영, 박상순, 박형준, 김명인, 강정, 이수명, 김언 등이다.
마음이 무정형의 운동 속에서 언어를 고르고 만지고 굴절시키며 배달한다는 말은 열 명의 시인들에 대한 논의의 진입로 격인 프롤로그에 나온다. 그러니 책에 나오는 전 시인에 해당하는 말이고 나아가 시 자체의 특성을 아우르는 말이다.
’세잔의 사과‘에서 저자 전영백은 D. H 로렌스가 세잔을 40년 동안의 긴 분투 끝에 하나의 사과를 충분히 아는 데 성공한 화가로 정의했음을 지적한다. 세잔은 사과의 본질을 포착하기 위해 40년을 바쳤다. 저자에 의하면 세잔의 사과는 그림(표상)으로 인해 실제(대상)의 근본 속성이 발현되는 것이다.
즉 세잔이 사과를 그림으로써 실재의 사과가 진실로 그 자체가 될 수 있었다는 의미이다. 중요한 것은 시니피에(기의); 실재/ 대상, 시니피앙(기표): 그림/ 표상이라는 등식이다. 김행숙 시인이 말한 관계도에서 마음은 시니피에이고 언어는 시니피앙이다. 김행숙 시인은 종종 배달사고가 일어날 것이라 말한다.
배달 사고란 언어가 마음을 정확하게 표현하지 못하는 경우를 말한다. “세상의 어떤 어떤 모퉁이에서 시인들을 만나고” “썼다“는 저자는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자신이 오독하고 변형한 부분이 있음을 알고 그것을 지우고 새로 쓰게 되었음을 알게 될 것이라 말한다. 새로 쓴다는 것은 오독하고 변형한 부분을 바르게 배달한다는 의미이다.
이성복 시인편에 은유는 계속적으로 쇄신되어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 이 말 역시 오독하고 변형한 부분을 바르게 배달한다는 말과 차원이 같다. 황병승 시인도 비유를 한다. 나이에 대해. 새가 나뭇가지에 와서 앉으면 늘어진 나뭇가지가 (새를) 조금 무겁다고 느끼다가 새가 날아가면 그 존재를 잊어버리는 것 같은 것이 나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시인들과 대화(인터뷰)를 하며 시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이야기에는 어떤 유형의 시를 써보려 했으나 도무지 되지 않아 포기했다는 내용도 있다. 이원 시인은 자신에게 가장 부조리하게 느껴지는 것은 몸이라고 말한다. 이상한 생각들이 수도 없이 일어났다가 스러지는데 통제할 수도 없고 열어볼 수도 없는 몸에게 우리는 쩔쩔매는 꼴이라는 것이다.(63 페이지)
이원 시인은 욕망과 함께 언어가 움직여주어야 하고 자신이 전적으로 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시가 자신을 일으켜주기도 한다고 말한다.(68 페이지) 앞에서 세잔 이야기를 했는데 이원 시인은 들뢰즈의 ’감각의 논리‘를 인용해 세잔이 수행한 사과 하나와의 전쟁, 베이컨이 말한 머리 하나와의 전쟁에 대해 이야기한다.(74 페이지)
진은영 시인은 뭘 해도 지루한데 시를 쓸 때만큼은 완전한 몰두가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명징해진다는 것이다. 온전히 자기 정신으로 있는 순간들을 경험한다는 것이다.(89 페이지) 진은영 시인은 예전에 접속사, 조사 같은 것을 다 없애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한동안 시달렸다고 한다. 조사는 단어와 단어를 연결하는 기능을 하는데 단어와 단어를 자유롭게 내버려두고 싶었다는 것이다.(96 페이지)
언어는 어떤 감응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지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은 아니라 말하는 진은영 시인은 비평가들이 우리 시를 읽으면서 헤매는 이유는 ”이 시는 어떤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 나는 분석을 통해 그것을 찾아내야 한다. 만일 내가 그것을 찾아낼 수 없다면 시인인 네가 그 메시지의 전달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고, 너만 알 수 있는 방식으로 그걸 은폐하고 있기 때문이다. 너는 적어도 한 둘을 알 수 있는 방식으로 네가 말하고자 하는 본질을 전달할 의무가 있다’는 고답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 말한다.(99 페이지) 감각의 (비)문법을 가지고 있는 시를 의미의 문법으로 읽으면 안된다는 것이 진은영 시인의 전언이다.
박상순 시인은 고종석이 자신의 시를 언어로 만든 놀이공원이라 정의한 것에 동의한다.(108 페이지) 박상순 시인의 시관(詩觀)과 진은영 시인의 시관(詩觀)은 맥락이 같다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시를 쓰는 박상순은 문제를 푸는 사람이 아니라 문제를 만들어내는 사람이라 말할 수 있다고 말한다.(124 페이지) 그런데 박상순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시인들이 문제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닐지?
박형준 시인은 자신을 둔재로 표현하며 둔재에게는 끈질김, 지독함 같은 것이 있어야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라 말한다.(139 페이지) 김명인 시인은 시의 바탕이 진정성으로 이해될수록 그 감동의 자리는 불가해한 시쓰기의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자리이기도 했는데 그 고통은 삶의 실체를 확인하는 데서 오는 막막한 느낌들과 통하는 것이었다고 말한다.(154 페이지)
김명인 시인은 “내게 시쓰기란 나를 알아가는 길이었”다고 말한다.(159 페이지) “실존적 질문을 넘어서려고 애쓴 것이 나의 시쓰기였다면 너무 거창한 고백이 될까.“라 말하는 김명인 시인의 시 ‘새벽까지’의 끝 구절(”이 밤의 책들 다 사르리라, 나는/ 불꽃을 뛰어넘는 새벽의 사람이 되어서!“)을 음미하게 된다. 실존 이야기를 한 것을 통해 나는 시인의 ‘새벽까지’의 끝 구절이 이해하게 된다.
김명인 시인이 시와 삶을 나란히 이야기했지만 저자는 강정 시인은 시를 쓰는 몸으로 삶을 살고 싶어 한다는 말을 한다.(174 페이지) 록커인 강정은 짐 모리슨 때문에 랭보도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184 페이지) 나라면 짐 모리슨을 올더스 헉슬리 때문에, 아니면 올더스 헉슬리를 짐 모리슨 때문에 알게 되었다고 말할 것 같다.
저자는 저항이 없는 곳에 자유가 없다는 김춘수 시인의 말을, 김춘수 시인과 시적 코드가 많이 다른 강정 시인의 삶을 수식하는 데 쓴다.(189 페이지) 개인적인 이야기이지만 ‘마주침의 발명’에 나오는 시인들 가운데 이수명 시인에 대해 관심이 가장 많이 간다. 어렵기 때문이고 시도 쓰고 시평론도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시를 쓰는 이수명과 시를 말하는(논하는) 이수명은 놀랍도록 날카로운 접점을 가지고 있지만 각각 딴 세계에 있다고 말한다.(196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시를 쓰는 이수명은 무지이거나 미지인 세계에 던져져 있는 자이다.
이수명 시인은 ”시를 쓰는 일은 무엇을 원하지 않는 상태가 되는 일이다. 혹은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하는 상태가 되는 일이다. 시를 쓰기 위해서는 눈앞에 펼쳐지는 시간과 공간, 사물들, 현실의 이름들을 거부하고 그것들로부터 멀어지기를 계속해야 한다,“고 말한다.(197 페이지)
낯설게 보기이자 놀이라 할 수 있다. 이수명 시인은 시나 문학은 지금 현재의 혼돈하고 표류하는 것을 현재진행형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말한다.(202 페이지) 저자는 시를 쓰는 이수명은 모르는 자이지만 시를 말하는 이수명은 들여다보는 자이며 정확하게 근접해나가는 자이며 글쓰기의 공간을 인식해내려고 하는 또 다른 두뇌이자 시선이라 말한다.(204 페이지) 시를 쓰며 시를 말하는 서동욱, 김승희, 정끝별 등의 이름이 떠오른다.
저자는 가라타니 고진 이야기를 한다. 고진은 근대문학의 기원이라는 지점에서 내면을 말했다. 맨 얼굴의 발견과 함께, 풍경의 발견과 함께 문학에서 작동하기 시작한 내면이 그 기원을 잊고 자명해졌다는 것, 이 내면이 문학의 제도 속으로 깊숙이 들어와 버려서 어떤 전도(顚倒)가 자연물처럼 정착했다는 것을 그의 책은 포착해낸다는 것이다.(211 페이지)
전도란 내면이라는 것이 원래 주어져 있는 것이라는 관념, 내면이 그 자체로서 존재한다는 환상을 말한다. 이수명 시인은 자의식적으로 들어온 것이든 외부에서 심어진 것이든 구축된 자아에 전적으로 기대는 서정시는 무반성적이라는 점에서 지극히 자족적이라 말한다.
반성적 비판적 매개 없이 구축되어 있는 것을 배포하는 것, 그 방식으로 자기의 고통이나 깨달음을 특별히 의미 있는 것인 양 전파하는 것, 시가 그런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이수명 시인은 말한다.(211 페이지)
김언 시인의 전공은 공학이다. 공학도의 필수 과목인 물리학을 네 번째 수강에서야 A학점으로 정복(?)한 이력이 그에게 있다.(D – F – F – A)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의 원리를 더듬고 상상하는 지점에서 물리학이 시와 뜻밖의 조우를 하는 경험을 했다고 한다.(218 페이지)
김언 시인은 자신은 시인이나 예술가보다는 굳이 말하자면 학자 타입(체질)이지 싶다고 말한다. 혼자 방에 틀어박혀 세계와 언어에 관한 모델을 세우고 허물고 또 곰곰 궁리하면서 노는 걸 좋아한다고 말한다.(219 페이지)
저자는 멈출 수 없다는 것이 계속해서 쓰고 많이 쓰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것은 목소리가 새어나오지 않는 저 바닥 없는 바닥으로 고요하게 내려가는 일일 수도 있으며 그러므로 그것은 침묵에 깊숙이 격정적으로 온몸을 담그는 것일 수 있으며 한없이 산만해지는 정신의 상태를 가리킬 수도 있고 너를 사랑하는 것일 수도 있고 지금 쓸 수 밖에 없는 상태에 빠졌다는 현재적인 글쓰기의 경험에 찍히는 숨찬 느낌표들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248 페이지)
‘마주침의 발명’은 관념적이고 추상화 같은 글들의 모음이다. 각기 다른 개성 있는 시인 열 사람을 인터뷰한 책이지만 묘하게 그 각자의 글들이 하나로 수렴하는 듯 하다. 시와 삶의 불가분리성, 그러면서도 놀이로서의 성격을 갖는 시로 수렴되는 듯 하다. 시 자체가 감성적이고 예술적이어서 그런 관념적이고 놀이로서의 성격을 갖는 것이겠지만 저자인 김행숙의 깊이 있는 문학적 시선이 내공으로 작용한 결과라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