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둘째 주 토요일인 지난 11일 늦가을 추위 속에서 우리나라 궁궐들 중 가장 아름다운 창덕궁 해설을 들었습니다. 최신작인 한양 읽기의 저자 홍순민 교수님께서 해주신 직강(직접 강의)의 시간이었습니다.

 

입장을 위해 표를 사려고 길게 늘어선 다른 여러 일행들 때문에 시작 시각을 넘길 수 밖에 없었지만 오히려 그것이 더 많은 해설을 들을 수 있는 기회로 작용해 좋았습니다. 흔히 창덕궁 해설은 정문인 돈화문 바로 앞에서 시작하는 것이 관례처럼 되어 있지만 교수님께서는 사실상 궁궐이 시작되는, 소맷돌로 장식된 임금의 계단이 좌우 계단을 거느리고 있는 바깥 지점에서 해설을 시작하시는 새로운 면을 보여주셨습니다.

 

돈화문은 액자에 그림을 담은 것 같은 효과를 내기 위해 북한산 보현봉에 맞춰 설정한 문이라는 설명부터 예사롭지 않았고 북한산 한강’, ‘응봉(鷹峯) - 청계천’, ‘인정전 뒤의 산 금천교의 물이라는, 먼 곳에서 가까운 곳으로 프레임을 좁히는 구도로 여러 차원의 배산임수(背山臨水)를 설명하신 것을 보며 전체적인 틀을 헤아리도록 길을 제시한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특별히 인상 깊었던 것은 일제에 의해 훼손된 궁궐을 원래 모습과 다르게 생각 없이 복원시킨 여러 지점을 비판적으로 지적하신 것이었습니다. 당신의 비판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날카로운 것이라는 애드립(?)으로부터도 배웠습니다.

 

고가의 외제 명품이 진짜 명품이 아니라 우리 것이 진정한 명품이고 그런 것을 알아보는 사람이 가치있다는 말씀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내전(內殿)인 희정당 영역에서는 일제에 부역했던 화가들의 그림이 격에 맞지 않게 배치된 서양식 장식물들과 함께 위화감을 조성하는 현실을 새삼 느꼈습니다.

 

적절한 유머 속에서 이것이 중요한가 저것이 중요한가 하는 질문에는 답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는 점도 배울 수 있었습니다. 평소 친숙하게 대하던 창덕궁도 얼마든지 새롭게 볼 수 있음을, 아니 그래야 한다는 사실을 생각한 시간이었습니다.

 

중요한 내용을 스마트폰 메모장에 기록하느라 놓친 부분이나 전체적인 동선, 답사 방식 등을 다시 눈여겨 보기 위해 해설 답사 기회가 한 번 더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염치 없는 생각이지요?) 이번 해설 시간은 명강을 듣기 위해서는 듣는 사람도 준비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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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할 문학관 목록에 기형도 문학관을 더했다. 이 문학관은 내가 개관(開館) 소식을 실시간으로 들은 유일한 문학관이다.

내가 태어나기 이전 이미 많은 문학관들이 설립되었고 문학에 관심을 두었을 때 나는 문학관에 별 관심이 없었다. 시나 소설을 순수(?)하게 읽기만 했다.

몇 년 사이 문학에 대한 관심이 많이 줄었다.(그래도 어제 페친 작가의 신간 장편을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주문했다.)

그런 내게 문학관에 가고 문학 작품을 다시 읽어야 할 이유가 생겼다. 엇갈림이다. 하지만 나의 이런 상황은 보르헤스의 아이러니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아르헨티나의 국립 도서관장에 임명되었을 때 보르헤스는 시력을 읽은 상태였다.

이 난경(難境)이 그를 환상 문학으로 가게 했다. 시력은 되돌릴 수 없지만 문학에 대한 관심은 되돌릴 수 있다.

오픈 시간 내에 언제든 자유롭게 찾을 수 있는 문학관(박물관, 궁궐, 능도 마찬가지이지만)은 (시간이 정해진) 강의 장소와 달리 마음 편한 곳이다.

지난 여름, 그리고 가을 윤동주 문학관을 몇 차례 찾았었다. 부암동 언덕에 자리한 그 문학관은 청운문학 도서관과 함께 올해 내가 찾은 명소들이다.

너무 협소해 아쉽지만 의미 깊은 곳이다. 시인이 즐겨 읽던 미당의 화사집(花蛇集)과 발레리의 ‘시학서설’ 등의 책이 눈에 띄었는데 기형도 문학관에서는 어떤 기획물들을 볼 수 있을까?

이제 기형도 문학관에 가면 윤동주 문학관에 이어 가는 두 번째 문학관이 된다.

그의 시들을 다시 읽고 시인론들을 꼼꼼히 읽어야겠다. 타계 직후 나온 유고 시집(‘입 속의 검은 잎’)에 실린 김현 교수의 해설도 중요 참고거리이다.

시도 한 대 여섯 편 외울 생각이다. 운동주 시인과 비교하는 것도 재미 있겠다. 사람들에게 적어도 한 시간은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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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 자연 문화유산 해설
프리만 틸든 지음, 조계중 옮김 / 수문출판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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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자연유산 해설의 대가로 꼽히는 프리드만 틸든의 ', 자연, 문화유산 해설'은 해설의 전반적인 틀과 세부 사항을 전하는 매우 실용적인 책이다. 덧붙여 해설이 내포하는 인문적 가치까지 일깨우는 학술적 책이기도 한 이 책에서 저자는 해설을 공적 봉사로 정의한다.

 

우리의 경우 문화유산이 많고 미국의 경우 자연유산이 많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 생각하기 쉽지만 해설이 가진 기본적인 면은 같으리라 생각된다. 저자가 제시하는 해설의 여섯 가지 원칙은 다음과 같다.

 

1) 개인 또는 방문객 내면을 나타내지 못하거나 묘사할 수 없는 해설은 쓸모가 없다. 2) 정보 자체는 해설이 아니다. 해설은 정보에 근거한 표현이지만 둘은 완전히 다르다. 모든 해설은 정보를 포함한다. 3) 해설은 전시된 자료들이 과학적이건 역사적이건 건축적이건 여러 예술들을 한 데 묶는다.

 

4) 해설의 주요 목표는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자극시키는 것이다. 5) 해설은 부분보다는 전체를 표현하는 데 목표를 두어야 한다. 6) 어린이(12살까지)를 상대로 하는 해설은 어른을 상대로 하는 해설학과 섞여서는 안 된다. 기본적으로 접근법을 다르게 해야 한다. 최선의 방법은 내용을 분리하는 것이다.

 

해설가에게 필요한 미덕은 간결함과 명확함이다. 해설가는 예술을 사용해야 하며 시인의 기질을 어느 정도 가져야 할 것이다.(62 페이지) 명심할 것은 방문객들은 교육이 아닌 방문의 즐거움을 찾고 있다는 사실이다.(64 페이지)

 

말을 요약하는 직감을 가져야 한다. 요약에 대한 본능은 형태를 설명하는 또 다른 방식이다. 예술가는 자신에게 중요하지 않은 모든 자료를 냉정하게 삭제한다. 해설의 목표는 독자나 청중 즉 탐방객의 관심사와 지식의 수평선을 넓혀주는 방향으로 자극하는 것이며 어떤 사실에 대한 진술 이외의 그 밖에 존재하는 더 광대한 진실을 이해하도록 돕는 것이다.(68, 69 페이지)

 

수많은 단어들 가운데 전체라는 단어보다 더 아름답고 중요한 것은 없다.(81 페이지) 해설의 기본 목표는 상세한 부분이 아무리 흥미 있다 해도 부분보다 전체를 표현하는 것이다. 어린이를 위한 해설은 그들로 하여금 직접적 체험을 훨씬 더 많이 하도록 해야 한다.(98 페이지)

 

해설가의 일반적인 재능의 한 가지 요인은 친근감을 주면서 직접적인 지시를 숨기는 능력이다.(103 페이지) 저자는 생각과 작문 중 생각에 90퍼센트, 작문에 10퍼센트의 비중을 둔다. “특이한 영감의 경우를 제외하면 적절한 해설적인 비문은 90퍼센트의 생각과 10퍼센트의 작문의 결과라고 생각한다.”(113 페이지)

 

우리는 말을 간결하게 표현하는 힘을 길러야 한다.(147 페이지) 지나침은 흥미를 흩어지게 한다.(150 페이지) ()의 영역에서 해설가는 주의해야 한다. 백합에 도금을 하는 것은 좋지 않다. 백합이 부서질 뿐 아니라 화가도 자신이 미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함을 인정하는 것이다.(153 페이지)

 

해설가가 해설적인 표현으로 어떤 일정한 대상을 아름답다고 묘사하는 것은 관람객의 멋을 침해하여 무례할 뿐 아니라 현명하지 못하고 오히려 관람객과 경치 사이를 간섭하게 된다.(154 페이지) 사물을 알려면 먼저 사랑해야 한다. 동정심을 가져야 한다.(166 페이지)

 

저자는 물리학이라는 단어가 그리스인들 사이에서 자연의 의미를 나타내기까지 상당한 변화를 겪었다는 사실을 언급하며 해설이라는 단어는 광범위하게 생각의 수평선을 나타내거나 새로운 욕구와 실행에 맞도록 그 의미가 변화될 것이라 말한다.(169 페이지) 저자는 아마추어란 말이 한 때는 일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을 의미했다고 말한다.(179 페이지) 저자는 좋은 단어인 아마추어를 오염된 상태에서 되찾도록 노력하고 빛을 내어 풍부하게 사용하자고 제의한다.(190 페이지)

 

마지막 장인 미의 추억이란 장(15)에는 저자의 인문적 감수성이 잘 드러난다. 자연유산에 대한 내용이어서 문화유산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큰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자연을 대하는 태도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저자의 강조점은 (자연에 대한) 사랑에 두어졌다. 해설 기법을 구체적으로 아는 것은 다른 책을 통해 얻어야 한다.

 

다만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생태적 책이나 자연과학 책들을 다시 읽고 싶다는 생각이 고개를 든다는 말을 하고 싶다. 저자는 해설사는 교육 활동에 종사한다고 지적하며 그 목표는 듣는 사람에게 무엇을 하라고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을 하도록 일깨워 주는 것이라고 덧붙인다.(198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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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정선 미술관이 문화가 있는 수요일 프로그램을 안내하며 사전 접수 泌이라는 표현을 했다.

사전 접수를 반드시 하라는 의미이겠는데 그렇다면 필(必)이라 쓰는 것이 맞다.

泌이란 글자도 필이라는 음가를 지니지만 이는 스며 흐를 필이고 분비할 비이다. 물론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게시 글에 사전 접수를 반드시 하라는 의미로 泌이라 쓰신 겁니까? 그렇다면 必이라 고치셔야죠.˝ 정도의 글을 올릴 수 있겠다.

필(泌)이 필(必)과 동자(同字)일 가능성도 배제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만일 두 글자가 같은 의미로 쓰인다면 굳이 조금이라도 복잡한 글자를 쓸 필요는 없다.

이것이 미술계의 관행인지 모르지만 비슷하되 차원이 조금 다른 문제 제기를 할 것이 낙관(落款)이란 표현이다.

그 자체로 문제가 아니라 낙관을 찍는다는 표현이 문제이다. 낙관은 하는 것이다.

낙관이란 도장을 의미하는 관(款)을 낙(落)하는 것 즉 찍는 것이니 낙관을 찍는다는 말은 역전(驛前) 앞이란 표현과 같은 중복 표현이다.

늘 생각하는 바이지만 단어는 내용 또는 기획에 비해 덜 중요하지만 기본은 지켜져야 한다.

어제 역사학자 홍순민 교수의 창덕궁 해설을 들었다.

전각이나 역사적 인물 이야기와 함께 복원이 잘못 된 부분을 많이 지적해주신 의미 있는 답사 시간이었다.

교수님은 자신의 비판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날카로운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다. 특히 친일 화가들의 서양화들이 희정당에 걸려 있는 사실을 불편해 하셨다.

복원이 잘못된 부분은 참 많다. 궐내각사의 책고(冊庫)에서 억석루(憶昔樓)로 가는 길(삼로; 三路)에서 임금의 길보다 왼쪽 길이 더 높게 만들어진 것이나 위로 올라가기에 너무 옹색한 억석루 등 지적된 부분은 많다.

용어의 바른 사용과 미의식 또는 건축적 안목 더 나아가 역사적 안목은 직접적인 관련이 있을까? 이것이 화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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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을 읽지 않은 지 3, 4년 정도 된 것 같다. 물론 그 사이에 본격 읽기만 하지 않았을 뿐 제목과 목차, 그리고 저자 후기 정도의 글은 읽었다.

그러니 주례사 같은 평론, 과도한 이론 의존의 평론 등의 사정을 모르지 않는다.

그런데 사정이야 어떻든 내가 평론 특히 시 평론집을 읽지 않아온 것은 내가 그 책들로부터 내 삶과의 직접적인 연관성을 발견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라 해도 틀리지 않다.

최근 두 가지 점에서 평론을 다시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하나는 모 밴드로부터 주 1편 정도의 시 해설을 게시해달라는 부탁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내 글은 본격 시 평론과 소략한 느낌 전달 사이에 난 길을 가게 될 것이다.

다른 하나는 어제 대형 서점 신간 매대에서 본 평론집이 내 관심을 끌었기 때문이다. 박슬기의 첫 평론집이자 시 평론집인 ‘누보 바로크‘가 그 책이다.

모든 책이 그렇지는 않지만 잘 쓴 책들은 제목에 주제가 압축적으로 깃들어 있다.

알다시피 일그러진 진주를 뜻하는 바로크란 말을 통해 저자가 전하는 것은 우리 시들이 함유하고 있는 우울, 알레고리, 파국에 대한 사유이다.

‘누보 바로크‘를 읽고 저자가 언급한 시집들을 읽는 것이 내 목표이다.

다르게 읽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것은 나중의 일이다.

최근 읽은 이은봉 시인의 글이 하나의 단서로 여겨진다.

요즘 시는 독해법을 익히지 않고서는 읽기 어렵다는 의미의 글이다. 이 글이 시 읽기의 의지를 새롭게 한다.

중요한 것은 시와 시 평론을 함께 읽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시와 시 평론 모두 어렵지만 두 장르의 차이까지 느낄 수 있다면 최상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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