뽑히면 원고료를 주는 글을 쓰는 것이 순전히 돈 때문은 아니다. 아니 돈은 부차이고 생각의 치밀함과 적합성을 인정받으려는 것이 주목적이다.

만일 돈이 목적이라면 수많은 날 돈과 무관한 페북이나 블로그 글들을 쓰는 것을 설명하기 어렵다.

돈은 윤활유가 되고 에너지가 된다. 오늘 오랜만에 원고료가 있는 글을 써 제출했다.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글임에도 정교하게 앞뒤를 맞춘 글을 썼다.

수학 문제를 풀 듯 썼다. 오늘 받은 주간지의 공지를 보고 쓰기로 마음 먹고 한 시간만에 썼고 시작한 지 한 시간만에 마무리지었다.

자유로운 글도 최소의 틀이나 규격의 규제를 받는다. 1600자 내외로 써야 한다는 말에 수를 어림해 쓴 뒤 1603자로 할까 1597자로 할까 고민하다가 여백의 미를 생각하고 1597자로 썼다.
이제 글자 수 맞추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당연히 글자 수에 따라 내용에 변화가 있게 마련이다.

중요한 것은 내용이다. 글을 한편 쓴 뒤 글자수를 달리해 몇 편의 글을 쓰는 것이 좋은 글쓰기 훈련이 된다.

오늘 글은 1700자 정도를 썼다가 줄였는데 이를 2500자로 늘려 쓰는 것도 좋다.

할 일은 많은데 잡글이나 쓴다고 자탄하지 않기로 했다. 아니 형식 없는 글을 잡글이라 폄하하지 않기로 했다.

현안을 위해 읽는 책들을 투고에 활용해 공부도 되고 응모에도 도움이 되는 읽기와 쓰기를 하면 될 것이다.

빛나는 성찰과 예리한 판단, 대안 등이 지금껏 잡글이라 불려온 글들을 통해 제시되었다. 논문, 소설, 시, 희곡 외의 모든 글들이 그런 글들이다.

고료가 얼마인지 모르지만(아마 5만원? 아니면 10만원?) 뽑히면 유용하게 쓸 것이다.(샴페인을 미리 터뜨리는..) 도서 구입비가 아니라 차비에 보태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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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 신념의 길과 수난의 인간상 문학의 이해와 감상 13
이건청 지음 / 건국대학교출판부 / 199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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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시인을 이야기할 때 열사(烈士)와 의사(義士)의 차이를 논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열사는 무기 없이 비폭력으로 저항한 분들, 의사는 무기를 들고 독립운동을 한 분들이다.) 윤동주처럼 신념의 인간이 행동의 방식이 아닌 시의 방식을 택하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윤동주는 보드랍기 짝이 없는 서정적 자아로 완강하고 투박한 굴욕의 시대에 응전해 갔기에 수많은 상처를 입을 수 밖에 없었고 크나큰 아픔을 감내해야 했다.

 

윤동주는 지사(志士)도 투사(鬪士)도 아니었다. 다만 시로써 끊임없이 "아픔의 먹이"가 되어갔다. 윤동주의 외삼촌 김약연 선생은 1890년 회령에서 이주해 와 청국인에게서 땅을 구입해 조선인 마을을 형성하고 명동서숙(明東書塾)을 거쳐 명동 소학교와 명동중학교를 설립, 발전시켰다.

 

간도는 민족교육의 요람이자 독립운동의 본거지가 되었다. 윤동주 집안과 김약연 집안은 혼인으로 하나가 되었다. 윤동주는 아명이 해환(海煥)이었다. 그 아래에 달환(達煥; 일주)이 있었고 어린 나이에 죽은 동생이 별환이었다.(해와 달과 별이다.)

 

천문학자 박석재 교수는 "우주에는 무엇이 있나요?"란 아이들의 물음에 ", , 별이 있단다"고 답한다고 말한다. '해와 달과 별이 뜨고 지는 원리' 67 페이지 참고) , , 별은 아름답고 순수한 우리말이다. 윤동주 부모는 해와 달과 별처럼 아름답고 순수한 아들들을 생각하고 이름을 그렇게 지어주었을 것이다.

 

, , 별은 윤동주의 시집 제목에 나오는 하늘, 바람, 별과 잘 어울리고 시와도 잘 어울린다. ()이지만 시()라 해도 좋을 듯 하다. 윤동주가 태어나 유년 시절을 보낸 명동의 생가 마을은 과일나무에 둘러싸인 기와집, 오디나무 밑 우물, 이 모두를 굽어보고 선 교회당과 학교 건물 등이 있는 평화롭고 한적한 풍경을 지닌 곳이었다.

 

윤동주는 9세 때인 1925년 명동 소학교에 입학한 이래 194529세로 타계할 때까지 학생 신분이었다. 명동 소학교 시절 윤동주는 학교에서 발간되는 벽보신문에 동시를 빠짐없이 발표했다. 중학교 시절에는 세계문학전집을 통독할 정도로 독서 범위가 넓었다. 명동 소학교 5학년 과정을 수료한 윤동주는 명동촌에서 10리 동남쪽의 대랍자라 하는 곳의 중국인 소학교에 편입하여 1년간을 더 다녀 졸업했다.

 

그의 시 '별 헤는 밤'에 나오는 패(), (), () 등의 이름은 이 시절 만난 여학생들이다. 이 중국인 소학교를 마치고 윤동주는 용정의 은진중학교에 입학했다. 윤동주 집안은 이를 계기로 용정으로 이사했다. 통학의 어려움 때문이기도 하지만 명동에 유입된 공산주의와 무정부주의 때문이었다.

 

은진중학교는 캐나다 선교부의 미션 스쿨이어서 비교적 자유로웠다. 이 시절 윤동주는 다방면에 능력을 보였다. 축구, 교지 편집, 재봉질, 웅변, 수학.. 윤동주는 2학년 때 교내 웅변대회에 나가 1등을 했다. 흥미로운 것은 침착한 어조와 내용으로 1등을 했다는 점이다.

 

동급생이자 고종 사촌인 송몽규가 길림을 거쳐 북경으로 떠나고 문익환이 평양 숭실중학교로 전학하자 윤동주는 부모를 설득해 19359월 숭실중학교로 옮겨갔다. 윤동주는 백석(1912 - 1996) 시집 '사슴'이 출간되자 책을 구할 수 없어 1백부 한정판으로 출판된 이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 온종일 걸려 정자로 베껴냈다.

 

중학 시절 윤동주의 서가에는 '정지용 시집', 한용운(1879 - 1944)'님의 침묵', 수주 변영로(1898 - 1961)'조선의 마음', 파인 김동환(1901 - ?)'국경의 밤', 무애 양주동(1903 1977)'조선의 맥박', 백석의 '사슴' 등이 꽃혀 있었다.

 

신사참배 문제로 숭실중학교가 폐교되자 용정으로 돌아와 일본인이 경영하던 광명학원 중학부 4학년에 편입했다. 이 무렵 윤동주는 동주(童舟)라는 필명으로 '가톨릭 소년'지에 동시를 발표했다. 연희전문 시절 윤동주는 외솔 최현배(1894 - ?) 선생에게서 조선어와 민족의식을, 손진태 교수로부터 역사를, 이양하(1904 - 1963) 교수로부터 영문학 강의를 들었다.

 

윤동주가 일본에 건너가면서 계속 영문학을 한 것도 이양하 선생의 영향이었다. 산책길에서 윤동주는 삼베 또는 옥양목 한복 차림이었고 손에는 항상 책을 들고 있었다. 윤동주 시에는 가필, 정정의 흔적을 찾기 어렵다. 윤동주는 형편상 기숙사 생활을 했다. 하지만 태평양 전쟁 발발과 함께 전쟁물자 수급을 위한 착취 때문에 기숙사도 영향을 받았고 4학년 생인 윤동주는 이에 2학년생인 정병욱과 함께 하숙을 하게 되었다. 누상동 마루터기였다.

 

이 하숙집 이후 소설가 김송(金松; 1909 - 1988)의 집에서 하숙을 하게 되었다. 이 시기 윤동주는 많은 시를 썼다. 김송은 요시찰인이었다. 이 때문에 윤동주는 북아현동으로 하숙을 옮겼다. 이 시기는 참 힘든 시기였다. 하지만 이 시기에 윤동주는 '새벽이 올 때까지', '십자가', '별 헤는 밤', '서시' 등의 대표시들을 썼다.

 

윤동주는 독서 범위가 넓어지면서 더욱 말수가 적어졌다. 시적인 긴장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윤동주는 책에 메모를 할 때도 있었지만 좀체 책에 줄을 치지 않았다. 윤동주는 별안간 떠오르는 시상을 충동적으로 표현해내지 않고 몇 달, 몇 주를 두고 머릿 속에 간직해 두고 갈고 다듬어 완전한 작품이 되었을 때 문자화했다.

 

윤동주는 천성적으로 걷기를 좋아한 시인이었다. 정병욱은 "내가 평생 해낸 일 가운데 가장 보람 있고 자랑스런 일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윤동주의 시를 간직했다가 세상에 알려줄 수 있게 한 일이라고 대답할 것"이라 말했다.

 

윤동주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간행된 것은 해방 후인 1948130일이다. 애초 77부 한정판으로 연희전문 졸업기념의 시집으로 기획한 것이었는데 7년이나 지나 빛을 본 것이다. 1942년 연희전문 문과를 마친 윤동주는 릿쿄대학 영문과에 입학한다.

 

여름 방학이 되어 고향에 돌아온 윤동주는 "앞으로 우리 말 인쇄들이 모두 사라질 것이니 무엇이든 심지어 악보까지도 사서 모으라"고 당부했다. 독립운동 죄목으로 체포된 윤동주는 상당 분량의 시작(詩作) 원고와 일기 등을 압수당했고 압수된 자신의 원고를 일어로 번역해야 했고 심한 취조를 겪었다.

 

1940년을 전후한 시기에 윤동주는 읽힐 기약도 없는 시들을 위해 가장 치열한 정신을 태워올렸다. 윤동주 시 작품으로 우리가 접할 수 있는 것은 117편이다. 이 가운데 35편 정도가 동시의 범주에 속하는 것들이다. 윤동주 시가 일관되게 노래한 것은 그가 설정한 절대적 양심에 도달하지 못한 채 현실에 자리하고 있는 자아의 번민상이다.

 

윤동주 시의 정서적 근원은 고향이다. 그런데 그의 고향은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렇기에 그의 시에는 그리움의 정서가 지배적이다. 이상(理想)으로 설정한 절대 자아에 미치지 못하는 현실적 자아를 상징하는 것이 '또 다른 고향'에 나오는 백골이다.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이 따라와 한 방에 누웠다.."

 

시인이 고향에 돌아온 날 백골을 언급했다는 사실은 윤동주의 고독은 고향에 돌아옴으로써 치유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말해준다. 윤동주는 보다 포괄적이고 온전한 자기 자신을 표명하기 위해 우물, 거울, 하늘, (), 십자가 같은 상징들을 동원했다. 우물이나 거울은 시인의 내면 의식을 비추는 것들이다.

 

윤동주는 연못에 비친 제 모습에 도취된 나르시스와 달리 연민과 갈등의 모습의 자신을 발견했다. 윤동주는 일제 식민지로 전락한 멸망한 왕조의 후예인 자신을 인식할 수 있는 구체적 상징물로 거울을 설정했다. 하지만 그 거울은 파란 녹이 끼어 있었다.

 

윤동주의 자아 성찰은 비극적 자아를 확인한 아픈 것이었다. 식민지적 상황에서 그의 존재는 모멸과 오욕의 것이었다. 윤동주는 단절이나 좌절에 대한 감정적 위로나 화해를 말하지 않았다.

 

윤동주는 그것을 강하게 응시하고 뛰어넘으려 했다. 윤동주는 한국 서정시에 긴장을 불어넣어 깊은 공감의 시세계를 완성한 시인으로 기록되었다.(건국대학교 출판부에서 나온 이건청의 '윤동주'100 여 페이지의 얇은 책이지만 꽤 체계적이고 세밀한 책이다. 충실한 반영과 분석이 돋보이는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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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와 칼‘의 저자 루스 베네딕트는 앤 싱글턴(Anne Singleton)이라는 필명을 썼다.

역사 및 젠더학 교수인 로이스 배너(Lois Banner; 1939 - )는 싱글턴을 싱글 톤(single tone)으로 읽을 수 있다고 말한다.

베네딕트의 시 가운데 ‘유니콘(일각수)과 일출‘이 있다. 이 시는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희곡 ‘별에서 온 일각수‘에 응답해 지은 작품이다.

이 시는 베네딕트가 장미 십자회원들의 신지학 분파인 황금 여명회(Order of the Golden Dawn)라는 신비주의 교단에 모종의 방식으로 연루되어 있었음을 말해준다.

베네딕트는 당대의 다른 여성 시인들과 달리 자신의 시편에서 1인칭 단수를 사용한 적이 없다.

그녀는 남성의 목소리로도 노래하고 여성의 목소리로도 노래했다. 유니콘은 신비주의 전통에서 성별 횡단과 남녀 양성의 영혼을 상징한다.

버지니아 울프는 ˝둘이 조화를 이루며 고상하게 협력할 때 존재는 비로소 정상적이고 편안한 상태에 놓인다.

남자라도 여성적 뇌가 틀림없이 영향을 미친다. 여자도 그녀 안의 남자와 관계를 맺는다.˝는 말을 했다.(‘마거릿 미드와 루스 베네딕트‘ 참고)

로이스 배너의 책에서 눈에 띄는 것은 버지니아 울프의 말이다. 남자라도 여성적 뇌가 틀림없이 영혼을 미친다는 말이다.

시인 윤동주를 생각하게 된다. 책에 좀체 밑줄을 치지 않았고 술자리에서조차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사람.

책 속에 마른 꽃이나 단풍잎을 끼워넣었고 시적 긴장을 위해 말을 아꼈고 침착한 어조와 내용으로 웅변대회에서 1등을 한 사람.

가필, 정정의 흔적을 찾기 어려운 시/ 몇 달, 몇 주를 두고 머릿 속에 간직해 두며 갈고 다듬은 완전한 시를 쓴 사람.

축구 선수로도 뛰었고 재봉틀도 잘 한 사람. 유순하고 다정했으면서 지조와 의지는 굳고 강했던 사람.

스스로 설정한 절대적 양심과 실제적 자아 사이에 존재하는 현격한 괴리를 괴로워하며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바랐던 사람..

이런 윤동주를 단지 양성이 조화롭게 통합된 사람이었다고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그는 그 이상의 완전한 인격을 갖춘 사람이었다고 말해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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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한참 지난 내 글을 다시 보면 아, 내가 이런 글을 썼나? 싶은 때가 있다.

이런 글이란 소재면에서 최근 내 행보와는 어울리지 않는 글이라는 의미이기도 하고 문장의 연결성, 시선, 유려함 등에서 다시 쓸 수 없을 것 같은 글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동순 시인의 시집인 ‘그 바보들은 더욱 바보가 되어간다‘는 나에게 해당하는 제목인 듯 하다. 진심으로 그렇게 느껴진다.

유명 저자들 역시 자신의 지난 글을 보며 변화를 실감할까? 한다 해도 그들은 소재면에서의 변화나 수준의 차이보다 생각의 변화를 느끼지 않을까 싶다.

유종호 교수는 지난 1995년 나온‘시란 무엇인가‘란 책에서 <가령 시인이 “나를 키운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라고 했을 때 팔할이라는 언뜻 비시적(非詩的)인 말이 이례적인 참신성과 의외성과 박력을 획득하고 있음을 본다>는 말을 했다.

누구나 알 듯 유종호 교수가 말한 시인은 서정주 시인이다. 나는 “나를 키운건 팔할이 바람”이란 문장이 참신하다는 주장에 공감한다.

시적 파격이 돋보이는 문장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이나 거의 등의 부사와 달리 정확히 계량한 수치인 팔할이라는 말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제 미당의 시어는 너무 흔하게 인용된다는 생각이 든다. 인용자들은 생소함이나 참신함을 의도하고 그러는지 모르겠으나 너무 많이 인용되다 보니 죽은 비유가 되고 있다.

궁금한 것이 있다. 유종호 교수는 지금도 미당의 저 시어가 참신하고 의외성을 내고 박력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할까?

시인 이승하 교수는 지난 2009년 ‘새로운 시와 지루한 시‘란 글에서 ˝신인의 등단작을 갖고 타박하여 미안하지만 우리 시의 앞날이 밝게 느껴지지 않아 고언을 한 것이니 이해해 주시기를˝이란 말을 했다.

나는 지금 이승하 교수는 우리 시의 면모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궁금하다.

애프터 서비스를 하듯 자신의 과거 글들을 들춰 생각의 변화를 진술하는 것도 의미 있으리라 생각한다. 무리한 기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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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의 연인
김현경 지음 / 책읽는오두막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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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의 연인'에서 알 수 있는 흥미로운 사실 하나. 김현경 여사(1927 - )가 이화여대 영문과 시절 정지용 교수로부터 시경(詩經)을 배웠다는 사실이다. "나는 아직 당신과 동거중입니다"란 말을 하는 김수영 시인의 첫 독자, 아내, 한 여인이었던 김현경 여사의 에세이 '김수영의 연인'은 이렇게 책 날개서부터 관심을 놓지 못하게 한다.

 

정지용 시인은 영어, 라틴어, 한문, 고전 등에 능통한 르네상스 지식인이었다. 김순남, 김현경의 5촌 오빠이자 성우 김세원의 아버지인 이 분은 쇼스타코비치로부터 천재라는 칭호를 받은 작곡가이다. 스승인 하차투리안이 오히려 김순남에게서 새로운 음악을 배웠을 정도이다.

 

김순남의 집에는 임화, 오장환, 김남천, 안회남, 함세덕 등의 카프(KAPF) 시인들이 자주 모였다. 진명여고 2년 여름 김수영 시인을 처음 만난 김현경 여사는 그를 아저씨라 불렀다. 이종구란 이름도 책을 통해 만날 수 있다. 김수영 시인의 선린상고 2년 선배이자 일본 유학 내내 함께 기거한 막역지우이다.

 

이종구가 김수영 시인과 김현경 여사 사이에 다리를 놓았다. 당시 김현경 여사는 배인철을 만나고 있었다. 임화의 집에서 알게 된 배인철은 흑인시라는 장르를 개척한 영문학자였다. 남로당 주요 멤버였던 배인철은 김현경 여사와 데이트 중 괴한의 총에 맞고 목숨을 잃었다. 이 사건으로 김현경 여사는 연애 금지 학칙을 어긴 죄로 이화여대에서 제적을 당했다.

 

모두 꺼렸지만 김수영 시인은 가택 연금 중인 김현경 여사를 찾아왔다. 김수영 시인은 알지 못하는 것은 분명하게 모른다고 말을 한 사람이었다. 김수영 시인은 My soul is dark란 말로 프로포즈를 했다. 김현경 여사는 문학은 모든 각질화된 제도에 저항하는 양식이 아니던가란 말을 한다.

 

"우리는 스스로 결정한 운명이 형식이 되고 제도가 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32 페이지) 1950825일 서울에 남아 있던 김수영 시인은 인민군에 징집되었다. 시인은 그 체험을 일체 말하지 않았다. 김현경 여사에게 두어 번 말했을 뿐이다. 시인은 죽을 고비를 넘기고 소련군을 만났다가 미군을 만나 서울로 돌아왔지만 지서로 끌려가 악몽 같은 고문을 당했다. 이후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가게 되었다.

 

시인은 결국 살아 돌아왔다. 김현경 여사는 김수영 시인의 허락을 얻어 고교 영어 교사를 하던 이종구에게 취직 자리를 부탁하러 갔다. 그곳에서 일년이 훌쩍 지났다. 이종구는 광적으로 집착했다. 세 사람, 아니 김현경 여사가 김수영 시인과 이종구 사이에서 한 처신은 애매했다. 더 이상은 내가 논할 바가 아니다.

 

김수영 시인은 '방안에서 익어가는 설움'이란 시에서 "설움을 역류하는 야릇한 것만을 구태여 찾아서 헤매는 것은/ 우둔한 일인줄 알면서/ 그것이 나의 생활이며 생명이며 정신이며 시대이며 밑바닥이라/ 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마지막 설움마저 보낸 뒤/ 빈 방안에 나는 홀로이 머물러앉아/ 어떠한 내용의 책을 열어보려 하는가"란 말을 했다.

 

김수영 시인은 생계를 위해 김현경 여사에게 외설 소설을 쓰게도 했다. 그렇게 받게 된 원고료를 김수영 시인은 괴롭고 부끄러운 마음에 모두 술을 마시는 데 쓰고 말았다. 김수영 시인은 매문(賣文)이란 말도 했다. 속물이란 말도 했다. 진짜 속물이 되는 것은 속물이 되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것 만큼이나 어렵다고도 했다. 진짜 속물이란 어엿한 글쟁이를 것을 말하는 듯 하다.

 

김현경 여사는 '도취의 피안'을 김수영 시인의 시 중 제일로 꼽는다. 서정의 가락이 유창하게 늘어서 있는 문장들이 특히 좋은데 명확한 의미가 선뜻 다가오지 않아 직접 물으니 김수영 시인은 사회주의에 대한 노스탤지어라고 말했다.(73 페이지) 김현경 여사는 황무지 같았던 서강 언덕에 삶의 자리를 잡았을 무렵 "농사라고 할 것은 없지만 500평의 채소밭을 가꾸"었다고 한다.

 

"그는 농부요 나는 알뜰한 농부의 아내를 자처했다. 그는 또한 매일 같이 읽고 쓰고 또 읽고 쓰고 했다. 농부와 시인이 하나였던 시절이었다."(77 페이지) 김현경 여사는 김수영 시인이 삶의 여유를 반기면서도 끊임 없이 경계하는 의식을 드러냈다고 말한다.(132 페이지) '풀은 김수영 시인이 작고하던 해 529일 쓴, 김수영 시인의 마지막 작품이다. 김현경 여사는 '' 역시 수식 없이 수영의 온몸에서 울려 나온 듯한 소리로 꽉 차 있다고 말한다.

 

김수영 시인은 새로운 시를 쓰느라 꼭 몸부림 같은 진통을 겪었다.(135 페이지) 김수영 시인은 개인으로서 시인의 행복이란 있을 수 없는 것으로 여기고 안일(安逸)과 무위(無爲)를 극도로 거부했다. 오직 존재의 참되고 아름다운 정신의 지표를 바랐다. 김수영 시인은 작고(作故) 무렵 단호한 자신감을 가지고 시와 에세이에 자기만의 시론을 멋지게 정리하려고 마음 먹고 있었다.(143 페이지)

 

김수영 시인은 예술가는 끝까지 고독을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김현경 여사는 김수영 시인과 자신의 자랑이라면 가끔 대화로 밤을 지새울 수 있는 열정을 잃지 않고 살아온 것이라 말한다.(145 페이지) 김현경 여사는 김수영 시인의 죽음을 "48년 생애를 마치고 조각처럼 희고 단정한 얼굴로 무()의 세계로 들어간 것이라 표현한다.(149 페이지)

 

김수영 시인이 운명(殞命)의 날 마지막으로 집을 나선 것은 번역 원고료를 받기 위해서였다. 김수영 시인은 술이라도 한잔 한 날이면 "부끄러움도 없이"(김현경 여사의 표현) "시를 쓰는 일은 바로 인류를 위한 일이야. 나는 인류를 위해 시를 쓴다"는 말을 했다.(152 페이지)

 

김현경 여사는 김수영 시인과 함께 박인환 시인의 서점 '마리서사'에 드나들었던 시절을 이야기한다. 한 일본인 시인의 시를 박인환 시인이 일본어로 낭송했는데 음독이 너무 틀려 그 후로 그를 철저하게 무시했다고 말한다. 김수영 시인은 초현실주의 예술이나 전위예술에 무서운 비평을 가했고 거기에 취해 있는 시인들을 뒤떨어진 시인이라며 경멸했다.

 

김수영 시인은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된 뒤 무척 당황했다고 한다. 갑자기 자유의 몸이 되어 길 한복판에 서서 어디로 갈 것인가 하고 한참이나 망설였다고 한다.(166 페이지) 그것은 어머니한테 먼저 가야 하나, 아내와 아들한테 먼저 가야 하나의 문제였다. 김수영 시인이 택한 곳은 아내와 아들이 있는 곳이었다.

 

김수영 시인은 포로수용소에서 살아야겠다는 의지를 매순간 다짐했다. 김수영 시인은 포로수용소의 답답한 시간을 이를 흔들어 빼는 것으로 달랬다. 김수영 시인에게 그 고통은 살아 있음의 징표였다. 김수영 시인은 소리에 극히 민감했다. 특히 글을 쓸 때 그랬다. 그래서 소음이 없는 곳을 찾다 보니 황무지 같은 서강(西江) 언덕에 자리하게 되었고 호구지책으로 양계를 했다.

 

김현경 여사는 김수영 시인이 늘 그늘과 비애를 삼킨 위대한 서정을 깔고 시를 썼다고 표현한다. 김수영 시인은 일 년에 평균 10편에서 13편 정도 시를 썼다. 김현경 여사가 한 일은 초고(草稿) 정서(淨書)였다. 김수영 시인은 비위에 거슬린 술을 마신 날 김현경 여사에게 심한 주사를 부려 여사로 하여금 이혼을 생각하고 별거를 하게 만들기도 했다.

 

안일과 무위를 싫어한 김수영 시인은 무위도식하는 사람의 술은 마시지 않은 염결(廉潔)성을 보였다. 김수영 시인은 집에서는 절대 술을 마시지 않았다. 집과 서재를 엄숙한 일터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김수영 시인은 앞서 가는 시 정신을 갖기 위해 철학서는 물론 새로운 문학 책을 숙독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김현경 여사는 김수영 시인이 문명과 서울과 인간정신과 인류의 온갖 오염을 시와 행동으로 구체적으로 밀어붙이고 살다 간, 끈질긴 의지의 시인이었다고 말한다. 김수영 시인은 예술가로서의 자신의 삶을 자발적 또는 적극적 감금생활로 정의했다. 김수영 시인은 사람은 죽을 곳을 알아야 한다는 말을 시에 적용해 시인은 자기만의 스타일을 가지고 죽어야 한다는 말로 정리했다.

 

김수영 시인은 고독이나 절망이 용납되지 않는 생활도 그것이 자신의 현실이라면 조용히 받아들이는 것이 오히려 순수하고 남자다운 일이라 생각했다. 김수영 시인은 시는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나가는 것이라 말했다. 김수영 시인은 시는 문화와 민족과 인류를 염두에 두지 않지만 문화와 민족과 인류에 공헌한다는 말을 했다.

 

김수영 시인은 그것을 형식이 내용이 되고 내용이 형식이 되는 것이라 표현했다. 김수영 시인은 새로움은 자유고 자유는 새로움이란 말도 했다. 김수영 시인은 시인의 스승은 현실이고 시인에게는 현실에 정직할 수 있는 과단과 결의가 필요하다는 말을 했다.

 

김수영 시인은 진정한 시의 테두리 속에서 살아 있는 낱말들이 진정 아름다운 우리 말이라는 말을 했다. 김현경 여사는 시를 쓰고 책을 읽으면서 번역도 쉴 사이 없이 부지런히 한 수영의 정진하는 자세를 정말 좋아했다고 말한다.

 

김수영 시인은 잔병치레를 많이 했다. 그 중 하나가 기관지염이다. 김현경 여사는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을 읽으면 수영의 기침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는 말을 한다. 김수영 시인은 술에 취하면 애교가 대단해질 때도 있었지만 울분과 불만의 분화구로 변할 때도 있었다. 울분과 불만 이후에 새로운 시들이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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