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의 연인
김현경 지음 / 책읽는오두막 / 2013년 3월
평점 :
품절


 

'김수영의 연인'에서 알 수 있는 흥미로운 사실 하나. 김현경 여사(1927 - )가 이화여대 영문과 시절 정지용 교수로부터 시경(詩經)을 배웠다는 사실이다. "나는 아직 당신과 동거중입니다"란 말을 하는 김수영 시인의 첫 독자, 아내, 한 여인이었던 김현경 여사의 에세이 '김수영의 연인'은 이렇게 책 날개서부터 관심을 놓지 못하게 한다.

 

정지용 시인은 영어, 라틴어, 한문, 고전 등에 능통한 르네상스 지식인이었다. 김순남, 김현경의 5촌 오빠이자 성우 김세원의 아버지인 이 분은 쇼스타코비치로부터 천재라는 칭호를 받은 작곡가이다. 스승인 하차투리안이 오히려 김순남에게서 새로운 음악을 배웠을 정도이다.

 

김순남의 집에는 임화, 오장환, 김남천, 안회남, 함세덕 등의 카프(KAPF) 시인들이 자주 모였다. 진명여고 2년 여름 김수영 시인을 처음 만난 김현경 여사는 그를 아저씨라 불렀다. 이종구란 이름도 책을 통해 만날 수 있다. 김수영 시인의 선린상고 2년 선배이자 일본 유학 내내 함께 기거한 막역지우이다.

 

이종구가 김수영 시인과 김현경 여사 사이에 다리를 놓았다. 당시 김현경 여사는 배인철을 만나고 있었다. 임화의 집에서 알게 된 배인철은 흑인시라는 장르를 개척한 영문학자였다. 남로당 주요 멤버였던 배인철은 김현경 여사와 데이트 중 괴한의 총에 맞고 목숨을 잃었다. 이 사건으로 김현경 여사는 연애 금지 학칙을 어긴 죄로 이화여대에서 제적을 당했다.

 

모두 꺼렸지만 김수영 시인은 가택 연금 중인 김현경 여사를 찾아왔다. 김수영 시인은 알지 못하는 것은 분명하게 모른다고 말을 한 사람이었다. 김수영 시인은 My soul is dark란 말로 프로포즈를 했다. 김현경 여사는 문학은 모든 각질화된 제도에 저항하는 양식이 아니던가란 말을 한다.

 

"우리는 스스로 결정한 운명이 형식이 되고 제도가 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32 페이지) 1950825일 서울에 남아 있던 김수영 시인은 인민군에 징집되었다. 시인은 그 체험을 일체 말하지 않았다. 김현경 여사에게 두어 번 말했을 뿐이다. 시인은 죽을 고비를 넘기고 소련군을 만났다가 미군을 만나 서울로 돌아왔지만 지서로 끌려가 악몽 같은 고문을 당했다. 이후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가게 되었다.

 

시인은 결국 살아 돌아왔다. 김현경 여사는 김수영 시인의 허락을 얻어 고교 영어 교사를 하던 이종구에게 취직 자리를 부탁하러 갔다. 그곳에서 일년이 훌쩍 지났다. 이종구는 광적으로 집착했다. 세 사람, 아니 김현경 여사가 김수영 시인과 이종구 사이에서 한 처신은 애매했다. 더 이상은 내가 논할 바가 아니다.

 

김수영 시인은 '방안에서 익어가는 설움'이란 시에서 "설움을 역류하는 야릇한 것만을 구태여 찾아서 헤매는 것은/ 우둔한 일인줄 알면서/ 그것이 나의 생활이며 생명이며 정신이며 시대이며 밑바닥이라/ 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마지막 설움마저 보낸 뒤/ 빈 방안에 나는 홀로이 머물러앉아/ 어떠한 내용의 책을 열어보려 하는가"란 말을 했다.

 

김수영 시인은 생계를 위해 김현경 여사에게 외설 소설을 쓰게도 했다. 그렇게 받게 된 원고료를 김수영 시인은 괴롭고 부끄러운 마음에 모두 술을 마시는 데 쓰고 말았다. 김수영 시인은 매문(賣文)이란 말도 했다. 속물이란 말도 했다. 진짜 속물이 되는 것은 속물이 되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것 만큼이나 어렵다고도 했다. 진짜 속물이란 어엿한 글쟁이를 것을 말하는 듯 하다.

 

김현경 여사는 '도취의 피안'을 김수영 시인의 시 중 제일로 꼽는다. 서정의 가락이 유창하게 늘어서 있는 문장들이 특히 좋은데 명확한 의미가 선뜻 다가오지 않아 직접 물으니 김수영 시인은 사회주의에 대한 노스탤지어라고 말했다.(73 페이지) 김현경 여사는 황무지 같았던 서강 언덕에 삶의 자리를 잡았을 무렵 "농사라고 할 것은 없지만 500평의 채소밭을 가꾸"었다고 한다.

 

"그는 농부요 나는 알뜰한 농부의 아내를 자처했다. 그는 또한 매일 같이 읽고 쓰고 또 읽고 쓰고 했다. 농부와 시인이 하나였던 시절이었다."(77 페이지) 김현경 여사는 김수영 시인이 삶의 여유를 반기면서도 끊임 없이 경계하는 의식을 드러냈다고 말한다.(132 페이지) '풀은 김수영 시인이 작고하던 해 529일 쓴, 김수영 시인의 마지막 작품이다. 김현경 여사는 '' 역시 수식 없이 수영의 온몸에서 울려 나온 듯한 소리로 꽉 차 있다고 말한다.

 

김수영 시인은 새로운 시를 쓰느라 꼭 몸부림 같은 진통을 겪었다.(135 페이지) 김수영 시인은 개인으로서 시인의 행복이란 있을 수 없는 것으로 여기고 안일(安逸)과 무위(無爲)를 극도로 거부했다. 오직 존재의 참되고 아름다운 정신의 지표를 바랐다. 김수영 시인은 작고(作故) 무렵 단호한 자신감을 가지고 시와 에세이에 자기만의 시론을 멋지게 정리하려고 마음 먹고 있었다.(143 페이지)

 

김수영 시인은 예술가는 끝까지 고독을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김현경 여사는 김수영 시인과 자신의 자랑이라면 가끔 대화로 밤을 지새울 수 있는 열정을 잃지 않고 살아온 것이라 말한다.(145 페이지) 김현경 여사는 김수영 시인의 죽음을 "48년 생애를 마치고 조각처럼 희고 단정한 얼굴로 무()의 세계로 들어간 것이라 표현한다.(149 페이지)

 

김수영 시인이 운명(殞命)의 날 마지막으로 집을 나선 것은 번역 원고료를 받기 위해서였다. 김수영 시인은 술이라도 한잔 한 날이면 "부끄러움도 없이"(김현경 여사의 표현) "시를 쓰는 일은 바로 인류를 위한 일이야. 나는 인류를 위해 시를 쓴다"는 말을 했다.(152 페이지)

 

김현경 여사는 김수영 시인과 함께 박인환 시인의 서점 '마리서사'에 드나들었던 시절을 이야기한다. 한 일본인 시인의 시를 박인환 시인이 일본어로 낭송했는데 음독이 너무 틀려 그 후로 그를 철저하게 무시했다고 말한다. 김수영 시인은 초현실주의 예술이나 전위예술에 무서운 비평을 가했고 거기에 취해 있는 시인들을 뒤떨어진 시인이라며 경멸했다.

 

김수영 시인은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된 뒤 무척 당황했다고 한다. 갑자기 자유의 몸이 되어 길 한복판에 서서 어디로 갈 것인가 하고 한참이나 망설였다고 한다.(166 페이지) 그것은 어머니한테 먼저 가야 하나, 아내와 아들한테 먼저 가야 하나의 문제였다. 김수영 시인이 택한 곳은 아내와 아들이 있는 곳이었다.

 

김수영 시인은 포로수용소에서 살아야겠다는 의지를 매순간 다짐했다. 김수영 시인은 포로수용소의 답답한 시간을 이를 흔들어 빼는 것으로 달랬다. 김수영 시인에게 그 고통은 살아 있음의 징표였다. 김수영 시인은 소리에 극히 민감했다. 특히 글을 쓸 때 그랬다. 그래서 소음이 없는 곳을 찾다 보니 황무지 같은 서강(西江) 언덕에 자리하게 되었고 호구지책으로 양계를 했다.

 

김현경 여사는 김수영 시인이 늘 그늘과 비애를 삼킨 위대한 서정을 깔고 시를 썼다고 표현한다. 김수영 시인은 일 년에 평균 10편에서 13편 정도 시를 썼다. 김현경 여사가 한 일은 초고(草稿) 정서(淨書)였다. 김수영 시인은 비위에 거슬린 술을 마신 날 김현경 여사에게 심한 주사를 부려 여사로 하여금 이혼을 생각하고 별거를 하게 만들기도 했다.

 

안일과 무위를 싫어한 김수영 시인은 무위도식하는 사람의 술은 마시지 않은 염결(廉潔)성을 보였다. 김수영 시인은 집에서는 절대 술을 마시지 않았다. 집과 서재를 엄숙한 일터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김수영 시인은 앞서 가는 시 정신을 갖기 위해 철학서는 물론 새로운 문학 책을 숙독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김현경 여사는 김수영 시인이 문명과 서울과 인간정신과 인류의 온갖 오염을 시와 행동으로 구체적으로 밀어붙이고 살다 간, 끈질긴 의지의 시인이었다고 말한다. 김수영 시인은 예술가로서의 자신의 삶을 자발적 또는 적극적 감금생활로 정의했다. 김수영 시인은 사람은 죽을 곳을 알아야 한다는 말을 시에 적용해 시인은 자기만의 스타일을 가지고 죽어야 한다는 말로 정리했다.

 

김수영 시인은 고독이나 절망이 용납되지 않는 생활도 그것이 자신의 현실이라면 조용히 받아들이는 것이 오히려 순수하고 남자다운 일이라 생각했다. 김수영 시인은 시는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나가는 것이라 말했다. 김수영 시인은 시는 문화와 민족과 인류를 염두에 두지 않지만 문화와 민족과 인류에 공헌한다는 말을 했다.

 

김수영 시인은 그것을 형식이 내용이 되고 내용이 형식이 되는 것이라 표현했다. 김수영 시인은 새로움은 자유고 자유는 새로움이란 말도 했다. 김수영 시인은 시인의 스승은 현실이고 시인에게는 현실에 정직할 수 있는 과단과 결의가 필요하다는 말을 했다.

 

김수영 시인은 진정한 시의 테두리 속에서 살아 있는 낱말들이 진정 아름다운 우리 말이라는 말을 했다. 김현경 여사는 시를 쓰고 책을 읽으면서 번역도 쉴 사이 없이 부지런히 한 수영의 정진하는 자세를 정말 좋아했다고 말한다.

 

김수영 시인은 잔병치레를 많이 했다. 그 중 하나가 기관지염이다. 김현경 여사는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을 읽으면 수영의 기침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는 말을 한다. 김수영 시인은 술에 취하면 애교가 대단해질 때도 있었지만 울분과 불만의 분화구로 변할 때도 있었다. 울분과 불만 이후에 새로운 시들이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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