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한참 지난 내 글을 다시 보면 아, 내가 이런 글을 썼나? 싶은 때가 있다.

이런 글이란 소재면에서 최근 내 행보와는 어울리지 않는 글이라는 의미이기도 하고 문장의 연결성, 시선, 유려함 등에서 다시 쓸 수 없을 것 같은 글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동순 시인의 시집인 ‘그 바보들은 더욱 바보가 되어간다‘는 나에게 해당하는 제목인 듯 하다. 진심으로 그렇게 느껴진다.

유명 저자들 역시 자신의 지난 글을 보며 변화를 실감할까? 한다 해도 그들은 소재면에서의 변화나 수준의 차이보다 생각의 변화를 느끼지 않을까 싶다.

유종호 교수는 지난 1995년 나온‘시란 무엇인가‘란 책에서 <가령 시인이 “나를 키운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라고 했을 때 팔할이라는 언뜻 비시적(非詩的)인 말이 이례적인 참신성과 의외성과 박력을 획득하고 있음을 본다>는 말을 했다.

누구나 알 듯 유종호 교수가 말한 시인은 서정주 시인이다. 나는 “나를 키운건 팔할이 바람”이란 문장이 참신하다는 주장에 공감한다.

시적 파격이 돋보이는 문장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이나 거의 등의 부사와 달리 정확히 계량한 수치인 팔할이라는 말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제 미당의 시어는 너무 흔하게 인용된다는 생각이 든다. 인용자들은 생소함이나 참신함을 의도하고 그러는지 모르겠으나 너무 많이 인용되다 보니 죽은 비유가 되고 있다.

궁금한 것이 있다. 유종호 교수는 지금도 미당의 저 시어가 참신하고 의외성을 내고 박력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할까?

시인 이승하 교수는 지난 2009년 ‘새로운 시와 지루한 시‘란 글에서 ˝신인의 등단작을 갖고 타박하여 미안하지만 우리 시의 앞날이 밝게 느껴지지 않아 고언을 한 것이니 이해해 주시기를˝이란 말을 했다.

나는 지금 이승하 교수는 우리 시의 면모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궁금하다.

애프터 서비스를 하듯 자신의 과거 글들을 들춰 생각의 변화를 진술하는 것도 의미 있으리라 생각한다. 무리한 기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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