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모더니스트 정지용 - 일본근대문학과의 비교고찰
시나다 히로코 지음 / 역락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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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다 히로코(眞田博子: 인하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최초의 모더니스트 정지용은 정지용에 대한 지금까지의 연구가 만들어놓은 권위 있는 통념에 구애받지 않고 문헌연구와 작품분석을 통해 나름대로 평가를 내리려고 시도한 책이다.(이 책은 인하대학 박사 논문을 수정, 봉환한 것이다.)

 

최초의 모더니스트 정지용이란 표현은 시인이자 평론가인 김기림(金起林: 1908 - ?)이 정지용(鄭芝溶: 1902 - 1950)에 대해 한 최초의 모더니스트라는 정의에서 비롯되었다. 정지용은 일본 교토에 유학한 존재로 도시샤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윤동주가 도시샤 대학을 선택한 것은 그가 스승으로 삼은 정지용이 다닌 학교였기 때문이다. 정지용은 일본에서 대시인 기타하라 하쿠슈(北原白秋: 1885 1942)의 큰 영향을 받았다. 하쿠슈는 다이쇼 말기에 동시(童詩)라는 말을 썼고 정지용이 최초기에 발표한 작품 중에서 동시 개념에 잘 맞는 게 많다.

 

지용 시 어디선가 하쿠슈 냄새가 풍기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하쿠슈가 애용했던 시어나 이미지가 지용 작품에 산견(散見)되기 때문이다.(51 페이지) 하쿠슈와 정지용 작품에 공통되는 또 하나의 특징은 화자(話者)의 존재가 시 뒤에 숨어 전경(前景)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정지용의 향수슬픈 인상화를 봐도 거기서 묘사되는 풍경과 화자와의 사이에 어쩔 수 없는 거리가 있어 마치 화자가 풍경 속으로 들어가지 못해 슬픈 눈으로 멀리에서 바라보기만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56 페이지) 하쿠슈가 일본에서 사상성, 사회비판성을 결여한 시인이라는 평을 받은 것처럼 정지용도 한국에서 비슷한 평을 받았다.(57 페이지)

 

하쿠슈가 형안(炯眼)으로 정지용을 뽑아 추천했듯 정지용은 공평하고 엄격한 전형으로 숨어 있는 신선한 재능을 발굴하려 했다.(58 페이지) 하쿠슈가 그가 편집한 문예 잡지인 근대 풍경의 투고 작품에 지나치게 하쿠슈 냄새가 풍긴다는 비판을 받은 것처럼 정지용은 양주동에 의해 지용의 시풍이 시단을 풍미하는 나머지 많은 신인 시인이 지용의 모방이 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58, 59 페이지)

 

정지용은 자신보다 앞선 한국 근대 시인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61 페이지) 저자는 정지용, 주요한, 김소월 등이 일본어로 시를 쓴 것은 불가피하게 거쳐야 했던 과정이라 말한다. 그들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당연한 것처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한국어 구어문체는 개척자들의 외로운 분투 끝에 얻어진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63 페이지)

 

저자는 고아는커녕 조혼한 정지용이 일본에서 고아의 꿈이란 시를 쓴 이유를 식민지 청년으로서 문화마저 크게 다른 일본에서 문화적 고아의식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라 말한다.(73 페이지) 정지용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 본명을 그대로 쓸 수 있었지만 발음은 일본 식으로 데이 시요라 했다.

 

같은 도시샤 대학이라 해도 태평양 전쟁 말기라는 억압이 가장 혹독한 시기에 유학 간 윤동주의 어렵고 고독한 상황과는 여러 면에서 큰 차이가 난다.(74 페이지) 정지용의 도시샤 대학 유학은 1923년에서 1929년 사이에 있었다.(윤동주의 경우는 1942년에서 1943년까지이다.)

 

정지용은 일제 강점기 조선민예 연구가로 광화문 철거를 공개적으로 반대했던 일본의 미학자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1889 - 1961의 제자였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윌리엄 블레이크연구자로 유명했다.(저자는 일본에서 블레이크의 선구적 연구자로 알려진 사람은 뜻 밖에도 야나기 무네요시라 말한다.: 116 페이지)

 

야나기 무네요시는 민화(民畵)라는 말을 만든 사람이다. 저자는 정지용을 모더니스트로 본 김기림의 말과 모더니즘은 이마지슴이라는 등식을 삼단논법으로 활용해 정지용 = 이마지스트로 본 이상한 논법이 있게 되었다고 주장한다.(91 페이지)

 

에즈라 파운드가 만든 이마지슴 3원칙을 보자. 1) 주관적이든 객관적이든 사물을 직접 취급할 것, 2) 제시(presentation)에 도움이 안 되는 말은 절대 쓰지 말 것, 3) 리듬에 관해서는 메트로놈에 의거하지 말고(틀에 박힌 운율을 쓰지 말고) 음악의 악구(樂句: phrase) 같은 흐름으로 시를 지을 것 등이다.

 

저자는 향수‘, ’카페 프란스등의 작품을 구체적으로 분석한다. 이 시에는 종려나무, 장명등, 루바쉬카, 보헤미안 넥타이, 페이브먼트, 울금향, 대리석(大理石) 이국종 등의 시어가 등장한다. 이 가운데 울금향은 무엇일까? 울금은 향신료이지만 울금(鬱金)향은 튤립이다. 저자의 야나기 무네요시(유종렬; 柳宗悅; 1889 - 1961) 언급은 정지용이 도시샤 대학 시절 야나기 무네요시의 강의를 들었다는 사실이 증언된 것과도 관련지어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부분이다.

 

저자는 야나기 무네요시에 대해 일본에서 윌리엄 블레이크의 선구적 연구자는 뜻 밖에도 야나기 무네요시라는 말을 한다.(116 페이지) 이 말만으로 부족했는지 사나다 히로코는 도시샤대학 영문과의 역사를 살펴보는 과정에서 우리는 너무나 의외로운, 그러나 낯익은 이름에 부딪힌다는 말을 한다.(154 페이지)

 

이는 영문학 전공자가 아닌 야나기 무네요시가 스물 다섯의 나이에 윌리엄 블레이크에 대한 선구적 연구로 큰 화제를 낳았기 때문에 나온 말이다. 무네요시의 파격은 뜻 밖이란 말, 너무도 의외롭다는 말로 설명해도 지나치지 않다.

 

정지용은 "'백록담'을 내놓은 시절이 내가 가장 정신이나 육체로 피폐한 때다.. 친일도 배일도 못한 나는 산수에 숨지 못하고 들에서 호미도 잡지 못하였다."는 말을 했다.(197 페이지) 당시 친일 강요는 조선총독부로부터 뿐 아니라 조선인 문사배(文士輩)들로부터도 있었다.(197 페이지)

 

저자는 조선의 민중예술에 관심이 깊었던 무네요시가 시인 지망생인 정지용을 어떤 눈으로 보고 있었는지 또 정지용이 야나기 교수를 어떻게 생각했었는지 그것에 관해서는 남겨진 글이 없어서 수수께끼로 남을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저자는 20년대 초기시에서 지용이 현실적 사회문제를 직접 묘사하지 않는 작품에 있어서도 사회적 문제를 개인화하고 내면화한 근대인의 고뇌라는 형태로 표현함으로써 현실을 그렸다고 할 수 있다고 말한다.(178 페이지)

 

저자는 우주의 질서를 카톨릭이라는 정연한 체계로 이해한다는 것은 암울한 시대에 시인이 정신적 건강을 유지하는 데에 많은 도움을 주었을 것이며 서양문명의 하나인 카톨릭을 믿는다는 것은 서양에 대한 절망이나 적의를 가질 계기를 없애고 서양제국의 식민지 상태에서 아시아를 해방한다는 대동아전쟁의 허무한 이론에 현혹당해서 친일로 흘러가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을 했을 것이라 말한다.(179 페이지)

 

해방 후 정지용의 심경은 참으로 참담한 것이었다. 해방 전 '문장'지가 폐간될 때까지는 혹독한 검열 아래에서 그래도 그는 훌륭한 작품을 써서 발표했는데 막상 광복을 맞이하고 나니까 어찌된 일인지 시를 쓸 능력이 다 고갈해 버린 것처럼 도무지 시를 쓰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222 페이지)

 

저자는 정지용의 좌경을 현실을 분석하고 작품에 반영시킴으로써 문학으로 사회현실에 개입하는 의도의 결과로 분석한다.(224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지용의 정치사상은 소박, 온건한 것이었다.(227 페이지)

 

정지용은 시작 활동을 시작했을 당초부터 문학에 사회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다만 그것을 직접 나타내는 것보다 개인적 차원으로 전환시켜서 시적으로 표현하는 게 적당하다고 믿었던 것이다.(229 페이지) 저자는 정지용과 같은 유명인사가 친일행위를 거절한다는 것만 해도 1930년대 후반 이후에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고 말한다.(230 페이지)

 

정지용에게 뚜렷한 친일 작품이 없었다면 그가 그런 대로 저항했었다고 평가해도 될 것이다.(230 페이지) 여태까지 감각 밖에 없는 시로 간주되어 온 작품도 선입견을 버리고 작품 자체를 보면 어떤 때는 강한 사회성을 읽을 수가 있으며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현실과 고투하는 자아를 찾을 수가 있다.(231 페이지)

 

1920년대 전반에 일본의 근대적 기제 속에 들어간 지용으로서는 새로운 언어를 창출할 필요가 있었다. 낡은 언어로는 근대 도시에 사는 자의 생활감정을 표현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스승 하쿠슈에게서 배운 것은 작품상의 기법만이 아니라 시인으로서의 삶 전체 즉 새로운 언어를 개척하는 단독자의 자세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지용에게 외국 문학의 영향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으며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거나 부정적으로 평가할 이유는 아무데도 없다. 그는 근대인의 감정을 구어 한국어에 담을 길을 거의 혼자서 개척했다.(231 페이지)

 

정지용 작품에 이르러서야 처음 한국인은 자기 감정의 구석구석까지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을 얻었다. 민족이라는 것이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은 이미 상식으로 되어 있지만 민족의 개념을 확고히 해서 민족의식을 가지기 위해서는 민족고유의 언어라는 것이 큰 역할을 할 것이다.

 

저자는 자기들의 사상이나 감정을 자유롭게 표할 수 있을 만큼 언어가 성숙해지면 사람들은 마치 먼 옛날부터 그런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해 온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고 말한다.(232 페이지)

 

감각적 표현이라는 것이 사람으로 하여금 추상적 사고를 할 수 있게 만든다고 생각하면 근대인 또는 도시인의 생활감정이나 식민지 지식인의 고뇌를 처음으로 남김없이 표현했을 뿐 아니라 근대인의 심리를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창출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시인 정지용은 한국 문학이 근대로 들어갈 결정적 계기를 마련한 시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235 페이지)

 

정지용은 문학조류의 하나인 협의의 모더니즘을 도입했을 뿐 아니라 문학의 근대화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김기림의 말대로 최초의 모더니스트라 할 수 있다.

 

사나다 히로코의 최초의 모더니스트 정지용은 설득력 높은 책이다. 일본인 연구자의 정지용 분석은 정교한 만큼 신선하다. 야나기하라 야스코란 이름을 윤동주와 관련하여 알게 된 이래 다시 한 사람의 참신하고 신뢰할 만한 연구자를 알게 되어 다행이고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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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다 히로코는 ‘최초의 모더니스트 정지용(鄭芝溶)‘에서 야나기 무네요시(유종렬; 柳宗悅; 1889 - 1961)를 언급한다.

이는 정지용이 도시샤 대학 시절 야나기 무네요시의 강의를 들었다는 사실이 증언된 것과도 관련지어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부분이다.

사나다 히로코는 야나기 무네요시에 대해 일본에서 윌리엄 블레이크의 선구적 연구자는 뜻 밖에도 야나기 무네요시라는 말을 한다.(116 페이지)

이 말만으로 부족했는지 사나다 히로코는 도시샤대학 영문과의 역사를 살펴보는 과정에서 우리는 너무나 의외로운, 그러나 낯익은 이름에 부딪힌다는 말을 한다.(154 페이지)

이는 영문학 전공자가 아닌 야나기 무네요시가 스물 다섯의 나이에 윌리엄 블레이크에 대한 선구적 연구로 큰 화제를 낳았기 때문에 나온 말이다.

무네요시의 파격은 뜻 밖이란 말, 너무도 의외롭다는 말로 설명해도 지나치지 않다.

잘 알듯 도시샤대학 영문과는 윤동주가 공부한 학과이다. 아니 이렇게 말하면 부족하다.

윤동주는 스승격인 정지용이 공부한 도시샤대학 영문과를 선택했다고 해야 충분할 것이다.

정지용의 도시샤 유학 시기는 1923년에서 1929년 사이고 윤동주의 도시샤 유학 시기는 1942년 즉 조선인 유학생들에게는 너무 엄혹했던 태평양 전쟁 말기였다.

상당한 사회적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부질 없는 가정이지만 윤동주가 한 15년 일찍 태어나 무사히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했다면 어떤 결과가 빚어졌을지 궁금하다.

히로코는 조선의 민중예술에 관심이 깊었던 무네요시가 시인 지망생인 정지용을 어떤 눈으로 보고 있었는지 또 정지용이 야나기 교수를 어떻게 생각했었는지 그것에 관해서는 남겨진 글이 없어서 수수께끼로 남을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야나기 무네요시가 윤동주에 대해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무네요시가 윤동주의 시를 알았는지도 그렇다.

‘시의 아포리아를 넘어서‘에서 이숭원 교수가 말했듯 ˝시 작품 속에는 시인이 미처 자각하지 못했던 수많은 의미가 은밀하게 감추어져 있˝기에 야나기 무네요시가 만일 윤동주의 시를 알았다면 어떤 생각으로 시들을 풀어냈을지, 우리가 헤아리지 못하고 윤동주도 의식하지 못한 부분을 야나기 무네요시가 읽어냈을지 궁금하다.(‘시의 아포리아를 넘어서‘에서 다루어진 윤동주 시인의 시는 ‘또다른 고향‘, ‘간(肝)‘, ‘참회록‘ 등 세 편이다.)

* 조선 미술을 비애감을 지닌 아름다움이란 말로 표현했던 사람, 민화(民畫)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 1922년 조선총독부의 광화문 철거 방침에 반대해 일본 잡지 ‘개조‘에 ‘사라지려는 한 조선 건축을 위하여‘란 글을 기고(이향우 지음 ‘궁궐로 떠나는 힐링 여행‘ 62 페이지)한 사람 야나기 무네요시를 뜻 밖의 지점에서 만나는 것은 예기치 못한 재미를 누리는 시간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야나기 무네요시의 두 얼굴‘ 읽기는 다음 기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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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6월 출간된 강판권 교수의 ‘회화나무와 선비문화’에서 실경(實景)산수라는 말을 만났다.

“정선의 작품에 등장하는 죽서루(竹西樓)는 그가 63세 때 그린 관동 지역의 실경산수 중 하나다.”(242 페이지)

지난 해 9월, 10월 해설에 쓰기 위해 산 책인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아 서재 한쪽에 꽂아두었다가 시간이 나 우연히 다시 보게 된 책이다.

요즘 정선의 그림과 관련해 논의가 꽤 활발한 것으로 알고 있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정선의 그림은 모두 진경산수인가 아닌가이다.

즉 진경산수만 있는가, 아니면 진경산수도 있고 실경산수도 있는가이다.

동국대 김병헌 교수는 겸재 정선(鄭敾)은 진경산수를 창시한 적이 없다는 말을 했다. 김 교수는 ‘진경’인가 아닌가는 관람자의 주관적 판단에 달린 것으로 주관적 판단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학술용어가 될 수 없다는 말을 이어서 했다.

문제(?)는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의 애매한 행동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정선의 그림을 보고 ‘동국진경(東國眞景)’이라는 찬사를 남긴 이후 이 용어가 학술용어로 굳어졌는데 실제로 표암은 강희언(姜熙彦)의 ‘인왕산도‘에 쓴 화찬에도 ‘동국진경’이라 했다는 점이다.(조선퍼브 12월 19일)

그런가 하면 한정희 교수는 ‘동아시아 회화 교류사‘(2012년 5월 출간)에서 “한국과 일본의 실경산수화는 진경산수라 불리며, 중국과는 다른 한국과 일본의 특징을 잘 드러내는 것으로 국수주의의 팽배와 더불어 그 의미가 부각되기도 했다.˝는 말을 했다.

실경산수를 실제 풍경을 보고 그린 그림, 진경산수를 실경을 중국풍의 기법으로 그린 그림이라 말하는 사람들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논의이다.

한정희 교수는 동아시아의 실경산수화는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 등 중국 화보의 화풍을 보고 그 스타일을 익혀, 기억 속 여행지의 느낌을 재구성하는 것이었으며 바로 이 재구성의 과정에서 한·중·일 회화가 각기 다른 방향으로 조금씩 틀어지게 됐다는 말을 했다.

참고로 이야기하면 ‘회화나무와 선비문화’의 저자 강판권 교수는 사학자, 김병헌 교수는 사학자, ‘동아시아 회화 교류사’의 저자 한정희 교수는 미술사학자이다.

점입가경(漸入佳境)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출간 당시 한정희 교수의 논의에 어떤 반응들이 있었는지 궁금하다. 내가 이미 철지난 논의를 되풀이하는 것은 아니리라..

한정희 교수의 책은 이미 출간 5년이 지났는데 당시 우리 문화풍토상 별 반응이 없었거나 있었다 해도 학술적인 또는 허심탄회한 반응이 오가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한정희 교수의 책은 도외시(度外視)하기에는 구체적이고 설득력이 있다. 물론 명칭보다 중요한 것은 그림을 자신만의 관점에 따라 새롭고 설득력 있게 보는 것이다.

나는 한정희 교수의 관점을 지지한다. 더욱 한정희 교수가 겸재 정선을 폄하하기 위해 책을 썼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겸재의 그림이 진경산수화가 아니라는 논의가 겸재를 폄하하는 것인가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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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정 관계상) 조금씩 틈을 내 책을 읽고 있어요. 막막하다는 말, 고독하다는 말이 심상하지 않게 나오고 영혼의 규칙이라는 말이 나오고 화물기가 추락한 바다, 그 인근의 섬, 펜션 등이 나오는 책.

일곱시의 커피 타임을 엄마가 독립적으로 자신을 어루만지는 시간으로 이야기하는 문장으로, 시간이 그 미세한 결까지 셀 수 있을 만큼 느리게 흐른다는 문장으로 시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소설.

남편이 추락한 바닷가에 펜션을 차린 이모를 찾아 나선 ‘나‘의 이야기..나를 따라 온 유령 여동생 미조 이야기..207mile이란 이름을 가진 펜션. 蔡賢璇 작가의 첫 장편 ‘207 mile‘..

작은 문제 또는 아픔 하나씩을 가진 남은 가족의 이야기를 그린 이 소설은 슬프고도 따뜻한 이야기, 단조로울 것 같지만 의외의 이야기거리들이 차례로 나오는 흥미로운 작품이지요.

정말이지 오랜만에 소설의 묘미를 느끼고 있어요. 어릴 적 부모를 잃고 오갈 데 없는 자매(나의 엄마와 이모)를 거둔 외할머니와 그이가 들려주는 이야기 부분까지 흥미를 돋우는 책..

아마 흥미의 주된 부분은 18세 여고생인 ‘나‘의 모험 때문인지도 모르겠어요. 현재로서는 이 정도만 이야기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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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9월 미래유산 해설대회 때 심사위원이셨던 법련사 소속의 한 스님(법련사; 송광사 서울 분원)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당시 나는 참가자가 아닌 참관인이었다. 오래 전 불교방송 라디오에 법련사 소속의 스님께서 신행상담을 하시기 위해 나오셨다는 말씀을 드리자 스님은 그 상담 스님의 법명을 바로 말씀하셨다.

10년도 더 전에 나오셨던 스님인데 바로 법명을 대시니 그 스님께 특별한 관심을 가졌던 것일 수도 있고 스승과 제자의 인연일 수도 있다.

그러다가 지난 12월 해설대회를 주관한 단체 대표께 그 심사위원 스님 안부를 여쭈었더니 현재 결제 중이라고 하셨다.

결제란 안거 즉 여름과 겨울의 몇 달간 수행만 하는 것을 말한다. 물론 지금이 겨울이니 당연히 동안거이다.

법련사는 경복궁을 마주 보고 있는 사찰이다. 외양만 보면 박물관이나 미술관 같다.

오래 전 안성의 도피안사에 다녀온 기억도 나는 남다르게 갖고 있다. 카페처럼 꾸며놓은 사찰이 참 특별하게 느껴졌었다.

1박 2일의 위빠사나 수행을 위해 장소를 빌린 것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논길을 통과해 절쪽으로 향하는데 유기농법으로 벼농사를 짓는 논이어서인지 오리떼가 뒤뚱뒤뚱 걸어가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지난 12월 길상사에 다녀왔다. 작고 아담한 길상사는 도심 속 휴식 공간으로 좋아 보인다.

아직 한 번도 가지 못한 법련사는 어떨까? 출판사와 미술관을 운영한다는 그 사찰에 대한 관심이 급상승한다.

1월 23일 국립민속박물관 모임이 있는데 예정 시간보다 한 시간 먼저 도착해 둘러볼 생각이다. 늘 그렇듯 내 기본 마인드인 공부하는 자세로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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