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중 있는 문예 계간지 ‘문예중앙‘이 사실상 폐간되었다고 한다. 통간 150호인 이번 여름호를 마지막으로 휴간에 들어갔으나 복간 일정을 제시하지 못하니 사실상 폐간인 셈이다.

정기 구독자의 수가 고작 몇 십명이었다고 하니 길이 없었을 것이다.

요즘의 문학의 무력을 감안하면 150호를 냈다는 사실이 놀랍게 느껴질 정도이다.

내가 이렇듯 문예중앙 이야기를 하는 것은 중요한 무언가가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유료 구독을 하지 않은 것은 물론 내가 사는 동네의 도서관에서 무료로 볼 수 있는데도 잡지에 눈길도 주지 않았던 입장으로서 중요한 무언가가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이 든다고 말하는 것은 진정성이 없는 처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휴간이 좋지 않은 상황인 것은 분명하다. 지난 해 여름 문예중앙에서 시집을 낸 성윤석 시인이 쓴 관련 글도 페북에서 접했다.

출판사가 문을 닫을 경우 시집의 저작권과 출판권은 누구에게 귀속되는가란 글이다.

현역 교수로 부지런히 강의를 하시는 한 페친이 쓴 이런 글도 보았다. 문예창작과 대학생의 고민과 갈등이라며 쓴 글로 ˝월 30만원만 벌어도 글만 쓰겠는데...˝란 것이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이지만 절박한 글을 쓴 그 문예 창작과 대학생에게 그것 가지고 어떻게 생활할 수 있냐고 묻지는 못하겠다.

모두 우울한 소식 뿐인 듯 하다. 모종의 흑막에 의해 문예지들이 쏟아지기도 한다니 악화가 양화를 몰아낸다고 해야 할까?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문예지를 바람직하게 만들 수 없는 것인가?

나와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지는 않지만 문학계가 처한 환경이 참 빡빡하고 각박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제 복간 전문 출판사인 최측의 농간 블로그에서 읽은 이야기를 해야겠다.

어떤 계기로 연(緣)이 닿았는지 기억하지 못하지만 지난 해 여름 이후 출판사로부터 허만하 시집 ‘낙타는 십리 밖 물 냄새를 맡는다‘, 고형렬 시인의 ‘은빛 물고기‘, 여림 시집 ‘비 고인 하늘을 밟고 가는 일‘, 이연주 시전집, 서정인 작가의 장편 소설‘달궁‘, 박서원 시집 ‘아무도 없어요‘ 등을 받았다.

부지런한 문학 독자가 아님에도 귀한 책들을 받아 죄송하다.(더욱 리뷰는 허만한 시인의 ‘낙타는 십리 밖 물 냄새를 맡는다‘ 단 한 권만 썼을 뿐이어서 리뷰를 써줄 것을 바라고 책을 보내준 것은 아니지만 많이 미안한다.)

어제는 조연호 시인의 시집 ‘저녁의 기원‘을 소개하는 글을 메일로 받았다. 문학과 사회에 대한 관심을 놓지 말라는 의미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늘 문장에 신경을 쓰는데 전에도 그랬지만 최측의 농간의 대표 신동혁 님의 짧은 시평이 참 좋다는 생각을 한 뒤 더욱 그랬다.

오늘 읽은 ‘길을 잃지 않기 위해 길을 잊는 일‘이란 글도 그런 점을 확인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신동혁 님 본인의 글로 시작해 정화진 시인이 이연주 시인에 대해 언급한 내용, 김정란 시인이 이연주 시인에 대해 언급한 내용들이 이어진 글이다.

그런데 정화진 시인이 이연주 시인에 대해 언급한 부분은 설명이 되어 있었지만 김정란 시인이 이연주 시인에 대해 언급한 부분은 글의 서두에 설명이 되어 있지 않아 ‘글 잘 쓰는데...‘란 생각을 하며 한참을 읽었다.

대단한 감수성과 정교한 필치의 글이 인상적인데 중요한 것은 누가 썼는지보다 이런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다.

김승희 시인이 클라리사 에스테스의 ‘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인들‘을 평하며 쓴 ˝원초적 야성 즉 신성(神性)의 점화를 성대하게 베풀어 주는 혈액의 혁명을 일으키는 책˝이란 생각을 하며 읽었다.

가령 이런 글들.

<죽은 이연주가 내 꿈속에서 “철사로 된 빽빽한 말다발”이라고 말하던 모습을 나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꿈에서 깨어나 나는 한참 동안 가슴을 누르고 있어야 했다.....내 울음이 저승까지 이르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너를 위해서 내가 잘 말할 수 있을까? 허공에 목을 매달아 버린 네 잘린 말 대신?....>

‘영혼의 역사‘라는 시인의 평론집 날개에 적힌 ˝심리몽환적이며 신화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가지고 있으면서도 매우 지적˝이라는 글을 생각하게 된다.

˝자연과학이 주도하는 비신화화의 시대에 신화를 말하고, 합리적 개념 언어의 시대에 신비하고 풍성한 상징 언어에 주목˝(양명수 지음 ‘폴 리쾨르의 ‘해석의 갈등‘ 읽기‘ 7 페이지)했다는 리쾨르를 생각하게 하지만 중요한 것은 시인은 이연주 시인을 만난 꿈에서의 대화 이후 진혼곡 같은 말을 했다는 데 있다.

다양한 글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다시 시를 부지런히 읽어야겠다. 느끼기 위해서는 시를, 알기 위해서는 평론을 읽어야 하니 읽을 거리가 늘어날 수 밖에 없다. 물론 즐거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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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한 연구‘의 박상륭 작가께서 돌아가셨다. 내공이 깊지 않은 사람으로서는 표류(漂流)하기 딱 좋은 그 분의 문학적 깊이와 사상의 폭을 늦게나마 제대로 따라 가보자고 다짐했던 것이 얼마 전인데...

죽음이라는 슬픈 사건을 추모하며 그 분이 남기신 책의 한 단락이나마 음미하고 싶다.

돌이켜 보면 김현 평론가의 글을 읽고 내가 ’죽음의 한 연구‘를 읽었기에 이런 저런 추억들을 단편적으로나마 떠올릴 수 있는 것이리라.

‘죽음의 한 연구‘의 도입부에 나오는 “공문(空門)의 안뜰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바깥뜰에 있는 것도 아니어서, 수도도 정도에 들어선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세상살이의 정도에 들어선 것도 아니어서, 중도 아니고 그렇다고 속중(俗衆)도 아니어서, 그냥 걸사(乞士)라거나 돌팔이중이라고 해야 할 것들 중의 어떤 것들은...”이란 길고 긴 주부(主部)를 읽는 것만으로도 나는 유쾌하다.

요즘 책이 최고의 명함이라는 인식이 형성되고 있는데 그 훨씬 이전부터 나는 누군가의 책을 읽고 간직하는 것으로 그 누군가를 기억하고 책을 명함처럼 소장해오고 있었다.

읽지 못하고 명함처럼 소장하고만 있는 책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참 오래 전 빌려 읽고 말았을 뿐인 ’죽음의 한 연구‘를 사야겠다.(내가 읽은 것은 한 권 짜리 버전인데 지금은 두 권으로 분책되었다.)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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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7-13 14: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벤투의스케치북 2017-07-13 15: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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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보는 적은 그대 자신에 불과하다‘...고미송의 책.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자명하다는 의미에서 데카르트가 한 말(코기토).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내가 누군지는 확실하지 않다.‘ 폴 리쾨르가 데카르트의 코기토를 겨냥해 한 말.

‘자아 연출의 사회학‘... 어빙 고프만의 책.

나를 다스려야 할 때 접하는 책이자 구절들.... 사회 차원의 글을 써야 할 필요가 있을 때 터를 닦듯 들춰보는 책과 개념들..

내가 속한 단체에서 낭패감이나 소외감이 들 때 읽는 책이자 구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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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은(素隱) 박홍규 선생(철학자)의 사상을 해설한 제자 소운(逍雲) 이정우 교수의 책 ‘소은 박홍규와 서구 존재론사‘를 읽고 있다.

서구 존재론의 두 축인 플라톤과 베르그손의 사상을 다룬 책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이정우 교수의 책은 열 여덟 권이다. ‘소은 박홍규와 서구 존재론사‘, ‘가로지르기‘, ‘담론의 공간‘, ‘접힘과 펼쳐짐‘, ‘주름 갈래 울림‘, ‘탐독(耽讀)‘, ‘주체란 무엇인가‘, ‘세계의 모든 얼굴‘, ‘천 하나의 고원‘, ‘진보의 새로운 조건들‘, ‘인간의 얼굴‘ 등 모든 책이 고투하며 읽은 책들이다.

내가 처음 읽은 이정우 교수의 책은 ‘가로지르기‘이다. 20년 전의 일이니 1997년 이후 거의 1년에 한 권씩 이 교수의 책을 만난 셈이다.

소은(素隱)과 소운(逍雲)이란 호가 눈에 띈다. 한문은 다르지만 한글로는 발음이 같은 ‘소‘라는 글자를 보며 나도 소자를 넣어 호는 아니고 별칭을 하나 하나 짓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소윤(宵贇)은 어떨까? (드물고 어려운 글자이지만) 밤 소(宵)와 예쁠 윤/ 빛날 윤(贇)을 쓰는 이름이다.

밤과 빛남은 밤과 낮처럼 완전히 반대되는 말은 아니지만 상대어라 할 수 있다.

그럼 반대되는 이름을 넣어 별칭을 지으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나의 속성으로 이름이 모두 채색되지 않게 하려 하기 때문이다.

윤(贇)은 빛남과 예쁨 외에 문채(文彩) 즉 아름다운 문장의 빛남을 뜻하기도 한다. 그리고 문(文)과 무(武)가 모두 들어 있는 멋진 글자이다.
나는 윤(贇)이란 글자로부터 문질빈빈(文質彬彬; 외양의 아름다움과 내면의 아름다움이 조화롭게 어울리는 것)을 생각한다.

다만 문과 무의 관계를 내면의 아름다움과 외양의 아름다움의 관계로 볼 수 있는지는 미지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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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읽은 책들 가운데 김용만 소장의 ‘조선이 가지 않은 길’과 이은선 교수의 ‘다른 유교 다른 기독교‘를 함께 말하고 싶다.

김용만 소장의 책 내용들 가운데서는 종법(宗法) 제도와 사대봉사(四代奉祀)의 문제점을 지적한 ‘양반들이 집착한 진짜 이유’란 글이 기억에 남는다. 고려 때만 해도 여자의 인권 상황이 좋았다는 주장이 담긴 글이다.

이은선 교수의 ‘다른 유교 다른 기독교’란 책에서 내가 알게 된 것은 로버트 커밍스 네빌의 ‘보스턴 유교’라는 개념(책)이다. 기독교 또는 서양 사상과 접목된 유교를 말하는 보스턴 유교는 연구자들의 근거지가 보스턴인 데서 붙은 이름이다.

‘다른 유교 다른 기독교‘가 유교와 기독교, 유교와 페미니즘의 대화를 추구하는 책이듯 ’보스턴 유교‘는 기독교와 유교의 생산적 대화를 추구한 책이다.

유교와 페미니즘의 대화를 큰 틀에서의 유교와 기독교의 대화로 진단하는 이은선 교수는 최근 서구 기독교 여성신학자들이 가부장적 전통을 여성해방적으로 재해석하여 다른 관계를 맺고 있듯 유교 진영에서도 그런 일이 가능하다고 본다.
저자는 조선에 비해 여성 인권 면에서 앞섰다는 평가를 받는 고려 시대가 당면했던 문제로 혼인이 성립하면 신랑이 신부의 집에서 일정 기간 거주하는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을 든다.

그리고 ’한국의 유교화 과정‘의 저자인 마르티나 도이힐러의 논의를 참고해 너무 단기적인 과정과 정태적인 개별 대상에 대한 집중에서 벗어나 좀 더 긴 기간에 대한 장기적인 전망과 역사의식을 가지고 실상을 판단하면 다른 측면을 볼 수 있다고 말한다.

남귀여가혼의 문제점은 여자 집에서 혼수를 마련하고 사위를 거주시켜야 하는 제도였기에 실제 상황에서 경제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집안의 여성들은 버림받을 위험에 노출된다는 점이다.

도이힐러의 논의란 조선 사회에서 16세기 중반과 17세기 후반의 큰 인구 증가로 효율적인 식량 공급을 위해서 토지가 더 이상 작게 나뉘어서는 안 되었기에 출가한 딸에게까지 상속을 해줄 수 없었다는 것이다.

너무 여자와 남자의 대결 구도로만 사태를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물론 저자도 페미니즘에 동의하고 그 대의(大義)를 지지한다. 페미니즘도 여러 갈래와 지향성으로 나뉘고 있기에 특정할 수 없지만 여성의 말이 수용되는 세상을 만드는 것 정도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모든 역사적 추세를 진화가 없는 부동(不動)의 것으로 파악하는 역사의 정태(靜態)주의는 물론 역사에서 오직 끊임 없는 변화만을 보고 그런 변화의 기저에 있는 질서와 역학 구조와 방향 등을 무시하는 역사 상대주의(相對主義)도 배격한다.

저자가 의거하는 관점은 장기간에 걸친 역사적 경험을 실증적으로 살펴본다면 분명 뚜렷한 포괄적인 사회발전의 방향과 구조가 드러난다고 역설한 노르베르트 엘리아스의 관점이다.

1930년대에 주로 활약했던 엘리아스는 1970년대 아날학파(Annales School)에 의해 재발견된 이후 빛을 보았다.

아날 학파는 사건들로 시끄러운 역사의 표면 아래에서 거의 무의식과도 같은 평형들을 밝혀냈다.

즉 시원으로부터의, 그리고 시원으로의 목적론적 과정이 아닌, 오랜 시간 동안의 평형 뒤에 찾아오는 급격한 변환의 모델을 사용함으로써 변증법적 역사 철학의 패러다임을 파기시켰다.(이정우 지음 ‘담론의 공간’ 146 페이지)

‘시원으로부터의, 그리고 시원으로의‘란 말을 들으니 베르그손이 거부한 기계론과 목적론이 생각난다.

엘리아스는 유럽인들의 삶의 변화를 문명화 과정으로 보았다. 이에 영감을 받은 저자는 조선조(朝鮮朝)가 성립한 이래 유교적 예(禮)를 국가 삶의 전 영역으로 확산시키고자 한 조선의 예치(禮治) 노력이 조선 사회를 유교화해 갔고 그 과정 안에 여성들의 삶과 살림살이도 포괄되었다고 말한다.(92 페이지)

저자는 조선조 이전에는 여성들이 문화의 각 분야에서 그렇게 폭넓게 활동한 적이 없었다는 한국 여성사 연구를 소개한다.(수긍할 수 있지만 여성들의 활동이 기록보다 더 크고 많았을 수도 있지 않을까, 란 의문이 든다.)

거칠지만 김용만 소장의 논의는 특정 프레임으로 사실들을 보기보다 개별 사실들에 주목한 연구의 소산이고 이은선 교수의 논의는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사실보다 특정 프레임(노르베르트 엘리아스의 문명화 과정)으로 세상을 본 결과란 말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개별 사실에 주목했다는 말이 그런 사실들을 파편적으로 바라보았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취합 없는 연구는 무의미하다.

저자는 문해력을 갖추고 외국어 성서를 번역하거나 여신도들을 계몽한 조선 여성들을 거론한다.

저자가 말하려는 바는 조선사 이전에 미미했던 여성들의 활동을 감안하면 조선은 특히 여성의 주체적 능력면에서 발전했다는 말이다.

이를 보면 내가 점입가경을 누리고 있는 것인지 진퇴양난에 빠진 것인지 묘연하다. 소박(?)한 문화유산의 세계로 돌아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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