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도 장례식장에 간다 - 동물들의 10가지 의례로 배우는 관계와 공존
케이틀린 오코넬 지음, 이선주 옮김 / 현대지성 / 202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저자 케이틀린 오코넬은 세계적인 코끼리 연구가다. 나미비아 잠비아 지역에서 코끼리 개체 수를 연구하는 일자리를 제안받은 저자는 ’코끼리도 장레식장에 간다‘에서 주된 연구 대상인 코끼리뿐 아니라 침팬지, 오랑우탄, 늑대, 개, 사자, 얼룩말, 고래, 홍학, 물고기, 곤충 등을 폭넓게 논했다. 이 동물들 가운데 코끼리, 돌고래, 침팬지는 장례를 치른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동물의 의례와 인간의 의례는 다르지 않고 다르지 않아야만 한다.“ 다르지 않다는 말은 본성이 그렇다는 것이다. 다르지 않아야만 한다는 말은 그럼에도 다르게 보거나 다르게 행하는 사회를 염두에 둔 표현이다. 파편화된 듯 보이는 인간을 여전히 사회적 동물로 보는 저자는 바나나와 인간의 유전자가 50% 일치한다는 사실을 언급하며 우리가 다른 동물들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알고 기뻐할 수 없을까?라고 말한다.

 

저자에 의하면 넓은 의미로 의례는 종교, 숭배, 영적 관습의 경계를 훌쩍 뛰어넘는다. 평범한 행동에 의미가 깃들면 의례가 된다. 의례는 참여자의 호르몬에 엄청난 영향을 준다. 인간과 동물에게 사회적 고립이란 죽음까지 이르게 하는 주된 위협 요인이기에 우리는 의례를 통해 하나의 공동체 속에서 건강을 유지한다. 저자는 의례를 더 원활한 소통을 가능하게 하고 서로를 잘 보살핌으로써 공동체를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열쇠로 본다. 물론 우리는 의례 기술을 잃은 지 오래다.

 

책은 열 가지 의례를 말한다. 인사 의례, 집단 의례, 구애 의례, 선물 의례, 소리 의례, 무언 의례, 놀이 의례, 애도 의례, 회복 의례, 여행 의례 등이다. 잘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다른 문화의 인사 의례를 접하면 오해가 생길 수 있다. 서로 다른 문화의 공존을 받아들여야 한다. 인사시 겸손을 표해야 한다. 인간의 의례는 다양하고 동물의 인사 의례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런데 저자에 의하면 인간의 인사 의례는 줄어들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코끼리의 예다. 그들의 인사는 정보를 수집하던 방식에서 진화했다. 서로 입에 코를 가져다 대어 다른 코끼리가 무엇을 먹었는지 알아내는 것으로 먹어도 되는 식물과 그렇지 않은 식물을 가려낼 수 없을 때 하는 행동이다. 주둥이를 핥는 늑대의 인사도 같은 차원에서 발전한 것이다.

 

18세기 미국의 퀘이커 교도들은 계층, 권위, 지위를 암묵적으로 드러내는 고개 숙이기, 허리나 무릎 구부리기 대신 악수로 인사를 대신했다. 모든 사람이 평등함을 강조하려는 차원이었다. 저자는 진심을 담아 인사할 것을 권한다. 영장류 동물학자들은 인간 사회의 집단 의례가 사냥을 위해 협력하는 과정에서 발전했다고 믿는다.

 

창으로만 잡을 수 없는 매머드나 마스토돈 같은 거대 동물을 사냥하려면 고도의 조직적 노력이 필요하다. 인류는 오래전부터 집단의례를 치러왔다. 그 증거는 동굴벽화와 고고학 유적지에 영구히 남아 있다. 지난 몇백만년 동안 인간의 뇌 크기는 세 배로 커졌다. 집단의 규모가 커졌고 생활에 혁신이 일어났고 사회적으로 학습했고 문화가 발달한 덕이다.

 

언어로 소통하기 시작하면서 인간 진화는 유인원과는 다른 길로 들어섰다. 이 부분에서 인간이 불을 사용해 고기 요리를 해먹음으로써 양질의 단백질을 섭취한 것은 어떻게 된 것인가, 하는 궁금증이 든다. 연구에 따르면 똑같은 동작을 취하면서 함께 움직이거나 노래를 부르면 유대감이 샘솟고 신뢰가 쌓인다. 신체 동작을 되풀이 하면 사랑과 행복을 일으키는 옥시토신 호르몬의 분비가 촉진된다.

 

코끼리는 반복된 울음소리를 통해 무리를 모으는 동시에 계획과 행동을 조절한다. 구애 의례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인간의 구애 의례 목적은 동물들과 다르지 않아서 그것을 통해 여성은 남성의 특성을 판단할 기회를 갖는다는 점이다. 선물 의례를 특별히 관심 있게 읽었다. 갈라파고스제도 이야기가 나와서다. 그곳의 에스파뇰라섬에는 멸종 위기종인 코끼리거북이가 산다.

 

이들의 절반 정도는 110세 코끼리거북인 디에고의 후손이다. 디에고는 구애할 때 야생 토마토를 선물로 준다. 초창기 인류가 수렵채집을 하던 사회에셔는 음식을 나누는 일이 특별한 의미를 가졌다. 식량 확보는 불안정한 상황을 대비하는 보험인 셈이었다. 수컷 코끼리는 실랑이를 한 뒤 화해를 청하기 위해 다른 코끼리의 입에 자신의 코를 가져다 댄다.

 

소리 의례편에서도 코끼리 이야기가 나온다. 저자의 전공 분야이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코끼리가 진흙 목욕을 좋아하지만 우르술라(암컷 코끼리)의 진흙 목욕 사랑은 특별하다. 가뭄 때문에 물웅덩이를 찾는 일이 중차대한 일이 된 상황에서 코끼리들은 평소와 달리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낸다. 저자는 말하기는 너무나 중요한 활동인데 진화론적으로 인간과 가장 가까운 침팬지는 왜 말을 하도록 진화하지 않았는지 궁금하지만 동물들은 굳이 말을 하지 않더라도 뛰어난 소통 기능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코끼리는 저주파로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낸다. 코끼리가 으르렁거리는 것은 존재감을 드러내는 행동이다. 코끼리의 소리는 공기를 통해 몇 킬로미터까지 전파된다. 그래서 코끼리는 먹이를 찾는 동안 서로 어디에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음악은 소리의 한 영역이다. 저자는 인지과학자 데이비드 휴런의 주장이 타당하다고 말한다. 즐거움을 찾는 행동 역시 진화론적인 적응 행동이라는 것이다.

 

휴런은 인간이 구석기시대부터 음악을 만들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소리 의례와 대조적인 무언(無言) 의례가 다음으로 이어진다. 늑대들은 무언 의례로 자신의 낮은 서열을 증명하지만 어떤 동물은 무언으로 자신의 높은 서열을 내세운다. 동물 세계처럼 인간 세계도 무언 의례가 존재한다. 무언 의례에는 힘을 과시하고 짝을 찾기 위해 냄새를 풍기는 행동도 포함된다.

 

미소, 가만히 바라보기 등은 중요 무언 의례다. 코끼리는 절대 잊지 않는다는 속담이 있다. 코끼리는 세대에서 세대로 전해지는 이동 경로를 기억한다. 건기가 끝날 때쯤 코끼리들은 신선한 음식과 물을 얻기 위해 비가 오는 길을 찾아 수백 킬로미터를 이동하는데 이때 그들이 걸어가는 길은 항상 똑같다. 매번 좋아하는 과일나무 앞을 똑같이 지나간다.

 

저자는 코끼리가 자신이 볼 수 없는 것에 대한 그림을 머릿속으로 그릴 수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놀이 의례편에서 호모 에렉투스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꺼낸다. 저자는 호모 에렉투스가 놀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 수 없지만 더 많이 놀기를 즐겼다면 생존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고 말한다. 환경이 사막으로 바뀌었을 때 호모 에렉투스는 적응하지 못했다. 그들이 도구를 발전시켰다는 증거는 하나도 없다.

 

연구자들은 그들이 게으르고 혁신 정신이 부족해서 멸종했다고 설명한다. 놀이는 위험을 감수하는 생존 기술을 익히게 한다. 잘 놀지 못하면 새로운 경험에 대처하는 능력이 부족해지고 어려움이 닥칠 때 성공적으로 헤쳐 나가기 어려워진다. 호모 에렉투스가 멸종한 것은 환경 변화 때문이 아니라 위험을 감수할 생존 기술을 갖추는 데 필요한 놀이에 소홀한 탓으로 변화한 환경에 적응할 능력을 갖추지 못한 것임을 알게 하는 글이다.

 

놀이를 과소평가해서는 안 될 것이다. 어린 시절에 충분히 놀지 못하면 신경세포가 비정상적으로 발달한다. 놀이를 하면 ADHD 증세가 약해진다. 저자에 의하면 우리의 생존은 얼마나 잘 노느냐에 달려 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놀이는 새로운 것들을 말한다. 애도 의례편에서는 애도 행동에 육체적이고도 심리적인 커다란 대가가 따른다는 말이 눈길을 끈다.

 

B. J 킹은 ‘동물은 어떻게 슬퍼하는가’에서 그것은 동물들이 애도 기간에 혼자 지내면서 충분히 쉴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애도 의례편에 책의 제목이기도 한 ‘코끼리도 장례식장에 간다’란 챕터가 있다. 저자는 나미비아의 에토샤 국립공원의 동물 무리에 탄저병이 돌았을 때 죽은 친척을 보러 오는 코끼리들은 지켜보았다. 코끼리는 아프거나 다쳤을 때 물 가까이에서 지내므로 강이나 물 웅덩이 바로 옆에서 죽는 경우가 많다.

 

학자들은 코끼리들이 죽은 코끼리 앞에서 꽤 긴 시간을 보내는 것을 보면 단순한 호기심 때문에 누가 죽었는지 확인하는 행동은 아니라고 말한다. 암컷 코끼리의 측두샘에서는 스트레스를 느끼거나 헤어진 가족이나 친구를 다시 만날 때 액체가 분비되는데 죽은 코끼리를 발견했을 때도 동일한 액체를 분비했다. 코끼리의 생리적인 변화는 그가 강렬한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코끼리들이 죽은 코끼리를 찾아가는 의식(儀式)은 인간이 장례식에 가는 것과 비슷하다. 야생 코끼리가 죽은 코끼리의 몸에 흙을 뿌리거나 나뭇가지를 덮어 매장한다는 보고서가 많다. 초기 인류도 매장을 중요시했다. 구석기 시대를 연구하는 인류학자들이 증거를 찾아낸 결과 40만년전부터 부장(副葬) 풍습이 있었고 30만년전부터 특별히 죽은 사람을 위해 땅을 마련했다.

 

자신의 가족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며 저자는 놀랍도록 회복력이 뛰어난 동물인 인간은 슬픔을 받아들이고 의례를 행하면서 스스로를 치유할 수 있다고 덧붙인다. 회복 의례편에서 저자는 동물들도 예민한 감각으로 계절의 변화를 알아차리고 시간의 흐름을 파악한다고 말한다. 고래나 새와 같은 동물들처럼 인간의 하루 리듬도 낮의 길이와 햇빛이 노출된 양에 영향을 받는다.

 

마지막 편은 여행 의례다. 여행은 사치로 여길 수도 있지만 많은 연구에서 밝혀졌듯 육체적, 정신적 건강을 지키는 데 도움을 준다. ‘불타는 숲은 동물을 이동하게 한다‘란 챕터에서 저자는 자연 발화로 인한 화재는 생태계에서 흔히 일어난다고 설명한다. 현대인이 이산화탄소를 대량으로 배출하면서 기온이 상승한 탓에 많은 곳에서 큰 화재가 자주 일어난다. 화재가 나면 자연에서는 식물의 분포가 달라지므로 새의 이동 방식도 영향을 받는다.

 

화재는 이동하는 동물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주기도 하고 긍정적인 유익을 제공하기도 한다. 자연과 직접 연결되는 느낌을 체험하는 방법으로는 자연 속에 오롯이 들어가보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 말하는 저자는 자연보호주의자이기도 하다. 인간은 여행을 계획하는 것만으로도 쉽게 행복해진다고 한다. 저자는 코끼리들의 재회를 지켜보는 일은 특권처럼 느꼈다고 말한다.

 

인간은 코끼리, 고래, 늑대 등 의식이 있는 모든 존재들과 연결되어 있다. 자연에 빠져드는 것도 여행이라는 저자의 책을 통해 여러 동물들에 대해 알았다. 무엇보다 코끼리에 대해 많이 알 수 있어서 좋았다. 자연에 빠져드는 것, 거기에 지질(地質) 공부에 깊이 들어가는 것도 포함되리라 생각한다. ’깃털 달린 여행자‘도 읽어야겠고 읽다가 놓아둔 ’그랜드 캐니언, 오래된 지구의 기념비‘도 마저 읽어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친구와 송어회를 먹었다. 설 당일에 밖에서 음식을 먹은 것은 처음이 아닌가 싶다. 송어의 송이 소나무 송(松)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왜 소나무 송자를 쓰는 것일까? 송어의 속살이 소나무의 붉은 속살 같다고 해서 그렇다. 겉 껍질은 거북등처럼 갈라진 검은색이고 속살은 송어처럼 붉은 소나무는 참 특별한 듯 하다.

 

소나무는 특별한 위상을 차지한다. 그런 점을 헤아리게 하는 단어가 의송산(宜松山)이란 말이다. 의송산이란 소나무가 잘 자라는 산을 말한다. 조선 시절 이런 곳은 당연히 금산(禁山)으로 지정되었었다. 금산이 곧 소나무를 베지 못하게 조치를 취한 산인 것은 아니지만 금산의 대종(大宗)을 이루던 것은 소나무다.

 

소나무, 하면 고산(孤山) 윤선도가 떠오른다. 고산의 후손인 윤위가 고산 윤선도의 보길도에서의 행적을 기록한 ‘보길도지(甫吉島誌)’에는 소나무 이야기가 빈번하다. 1616년 권세가 이이첨을 고발한 병진소로 인해 최북단인 함경북도 경원(慶源)으로 유배를 가게 된 고산은 1618년 최남단격인 경상남도 기장(機張)으로 이배(移配)되었다.

 

이동에만 1년이 걸렸다는 이 조치를 추위와 더위를 고루 겪게 하려는 의도라 말하는 이도 있다.(고미숙 지음 ‘윤선도 평전’ 98 페이지) 윤선도가 소나무를 가리켜 ‘ 너는 어찌 눈서리를 모르는가‘라고 말했지만, 그리고 우리는 습관적으로 소나무는 사시사철 푸르다고 말하지만 소나무에게도 위험 요소는 있다. 그것은 추위이라기보다 온난화일 것이다.

 

검을 현(玄)자를 써서 송현(松玄), 현송(玄松) 등의 아호를 사용하는 사람도 있다. 검을 현자와 바위 암자를 쓰는 현암서원(玄巖書院)도 있다. 현암(玄巖)과 현무암(玄武巖)의 차이는 무엇일까? 내 주된 관심거리는 소나무도 아니고 거북도 아닌 바위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새해(음력 1월 초하루)가 간다. 송어회로 육의 양식은 물론 생각 거리까지 준 친구에게 감사드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어른이 되기 전에 꼭 한 번은 논어를 읽어라 1 - 청소년을 위한 논어 어른이 되기 전에 꼭 한 번은 논어를 읽어라 1
판덩 지음, 하은지 옮김 / 미디어숲 / 2023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난 해 논어 관련 책을 몇 권 읽었다. 지치고 힘들 때 위안을 얻으려는 차원에서였다. 보기에 공자는 불우한 사람이었다. 가장 눈에 띄는 구절은 군자는 도를 지키지 못할까 걱정할뿐 가난을 근심하지 않는다(‘군자우도불우빈; 君子憂道不憂貧‘)는 말이다. 청소년을 위한 논어‘ 어른이 되기 전에 꼭 한 번은 논어를 읽어라’는 그런 문제의식을 이어가기 위해 읽을 책이다.

 

저자인 판덩은 ‘나는 불안할 때 논어를 읽는다’를 통해 만난 인물이다. 물론 청소년을 위한 논어 해설서이지만 어른이 읽기에도 유용할 것이다. 이 책이 비록 청소년들이 가장 관심 있어 하는 공부에 대한 부분만을 다룬 책이지만 공부는 청소년만의 것은 아니다. 저자는 논어는 공부를 위한 책이라고 말한다. 사실 학이시습지 불역열호란 논어의 첫 구절이 말해주는 바이리라.

 

공자는 한 걸음에 정상에 도달하려는 욕심을 버릴 것을 조언했다. 누구나 한 걸음에 정상에 도달할 수 없다. 그러니 아마도 공자는 한 걸음에 정상에 도달하려고 조급해 하는 마음을 경계한 것이리라. 평생 배워야 한다. 공자는 아는 것을 안다고 말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인정할 줄 아는 것이 진정한 지혜라고 말했다. 그런 지혜는 쉽게 얻을 수 없다.

 

조금 다르게 보고 싶다. 진정으로 공부하지 않으면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도 모르게 된다.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 아는 것은 충분한 공부가 전제되어야 하는 바다. 공자는 자공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질문해서 지혜와 학식을 얻기를 바랐다. 군자모도불모식(君子謨道不謨食)이란 말이 있다. 군자는 도를 추구하지 먹을 것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매일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자신을 혹사하지 않아도 된다는 가르침이라고 말한다.

 

공자는 자신은 태어날 때부터 지식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공자는 사람을 몇 단계로 나누었다. 1) 태어날 때부터 아는 사람, 2) 배워서 아는 사람, 3) 곤경에 처해야 배우는 사람 등이다. 공자는 가슴에 궁금한 것이 가득 차서 답답해 하지 않으면 그를 계도해 주지 않고('불분불계; 不憤不啓') 표현하고 싶으나 잘 몰라서 더듬거리지 않는 한 그를 일깨우지 않으며('불비불발; 不悱不發') 한 방면을 가르쳤을 때 세 방면을 스스로 생각해 내지 않으면 반복해서 그를 가르쳐주지 않는다('거일우불이삼우반; 擧一隅 不以三隅反')라고 말했다.

 

공자의 이런 말과 취지가 비슷한 것이 맹자의 인이불발이다. 사람을 가르치되 그 방법만 지시하고 스스로 진수(眞髓)를 터득하게 함을 이르는 말, 세력을 축적하여 시기를 기다림을 이르는 말이다. 인이불발은 引而不發이다. 공자의 이런 교육방식과 선명한 대비를 이루는 것이 주입식 교육이다. 저자는 교육이란 구멍 안으로 물을 한꺼번에 들이붓는 게 아니라 학생들의 마음속에 있는 작은 불씨가 활활 타오르도록 도와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불비불발을 다르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친구 사이에서 또는 사람을 상대할 때 묻지 않으면 말하지 않는 것이다. 물으면 답하는 것이다. 아는 척 하지 않는 기본이다. 온고(溫故)란 과거의 것을 반복적으로 뜯어보고 씹어보고 탐구하는 것을 말한다. 그 결과는 셋이다. 1) 그렇게 했으나 얻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하는 온고이부득(溫故而不得), 2) 속의 숨은 뜻을 깨닫는 것을 의미하는 온고이유소감(溫故而有所感), 3) 천천히 과거의 경험을 곱씹어보고 그 경험에 새것을 접목하여 새 아이디어를 발견하는 것을 의미하는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다.

 

온고이지신은 공부만이 아니라 삶에도 적용할 수 있다. 자공은 갱야 인개앙지(更也 人皆仰之)란 말을 했다. 군자가 만일 저지를 잘못을 뉘우치고 수정하면 사람들이 모두 그를 우러러보고 그러한 행동에 감탄하고 박수를 보낸다는 뜻이다. 공자의 말 가운데 묵이식지(默而識之)가 마음에 든다. 묵묵히 지식을 익힌다는 의미다. 기억력이 매우 좋았던 공자는 다양한 지식을 머릿속에 쌓고 묵묵히 그것을 익혔다.

 

다르게 볼 필요가 있다. 기억력이 좋지 않아도 공부를 많이 하면 두루 통하는 사고력을 통해 박람강기(博覽强記)할 수 있으리라. 두 번 세 번 곱씹은 뒤 질문하라는 말이 있다. 신중할 필요를 느끼는 나에게 가장 와닿는 말이다. 학이불사즉망 사이불학즉태(學而不思則罔,思而不學則殆)란 말이 있다. 배우기만 하고 스스로 사색하지 않으면 학문의 체계가 없고 사색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오류나 독단에 빠질 위험이 있다는 말이다.

 

배운다는 것은 자신의 생각이 잘못될 수 있음을 알고 고치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가 직면한 문제는 2천년전 공자가 만났던 문제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아는 것과 행하는 것 사이에서 균형 잡기는 중요하다. 자로유문 미지능행 유공유문(子路有聞 未之能行 唯恐有聞)이란 말이 있다. 자로는 가르침을 듣고 그것을 실행하지 못한 상태에서 새로운 가르침을 듣게 될까 걱정했다는 의미의 말이다. 새겨들을 말이다.

 

그런데 삶에는 실천과 관계 없는 지식을 배우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는 가르침을 미처 이해하지 못한 채 새 지식을 듣게 될까 걱정하는 것으로 바꾸면 어떨까? 저자는 섬세하게 상황을 살피는 매의 눈을 가지라고 말한다. 저자는 공자의 술이부작(述而不作)이란 말을 즉해 거인의 어깨 위에 서서 세상을 바라보라는 말을 들려준다.

 

술이부작이란 공자가 전해져오는 것을 말하였지 새로운 것을 창작하지 않았다는 의미의 말이다. 저자는 아직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면 포기하지 말라고 말한다. 스스로 한계를 긋지 말라는 공자의 말에 즉한 말이다. 전체 4장 가운데 4장의 마지막 세 챕터는 인상적이다. 배움의 끝판왕 락지자, 시간의 흐름이 멈추는 몰입의 경지, 목표 달성을 위한 두 가지; 초심으로, 한결같이 등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진수성찬이란 말의 한자 표기를 처음 확인했다. 산해진미가 아닌 산해진수라고 쓴 글을 읽고 진수가 무엇인지 궁금해 찾아 보니 진수는 珍羞였다. 문제는 수(羞)가 부끄러울 수로 많이 쓰이고 음식 또는 음식을 내놓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는 잘 쓰지 않는다는 점이다. 진수성찬은 珍羞盛饌이다. 리(理)가 기본적으로 나무, 구슬, 돌의 무늬를 의미하는 한편 이성(理性)이나 이치(理致)를 의미하는 것은 큰 단절이라 볼 수 없지만 羞가 부끄러움을 의미하기도 하고 음식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은 진폭이 너무 크게 보인다. 비보(裨補)란 말의 반대격인 염승(厭勝)이란 말도 그렇다. 승(勝)은 이긴다는 의미, 좋은 경치의 의미 외에 넘치다/ 지나치다를 의미하기도 한다. 염승은 지나친 부분을 누르는 것을 의미한다. 한자의 매력이라 해야 할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디벨로퍼 윤선도 - 정원으로 서남해안을 경영하다
이태겸 지음 / 픽셀하우스(Pixelhouse) / 202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는 시조 시인으로 먼저 알았고 예송논쟁을 통해 알았다. 이 외에 어떤 면모로 만나볼 수 있을까? 정원으로 서남해안을 경영했던 인물이리라. 물론 서남해안 경영을 시작한 시기보다 예송논쟁이 후다. 고산은 해남 윤씨로 그의 집안은 막대한 재산을 가지고 고조부인 윤효정에게 시집온 해남 정씨로 인해 내리 내리 부유한 삶을 살았다.

 

디벨로퍼란 이름으로 윤선도를 규정한 책이 있다. 조경학 박사 이태겸의 ’디벨로퍼 윤선도‘란 책이다. 내가 디벨로퍼란 명칭을 안 것은 기농 정세권(鄭世權) 선생을 통해서다. 이 분은 일제 강점기 우리나라 최초의 디벨로퍼로 활약한 분으로 북촌 한옥 마을 조성의 주역이기도 하다. 디벨로퍼란 땅 매입부터 기획, 설계, 마케팅, 사후관리까지 총괄하는 부동산 개발업자를 말한다.

 

그럼 17세기 인물인 윤선도를 디벨로퍼로 규정하는 것은 타당한가? 타당하리라 본다. 당시 그런 개념은 없었지만 그런 역할은 있었기 때문이다. ’디벨로퍼 윤선도‘의 부제는 정원으로 서남해안을 경영하다이다. 윤선도는 유년기에 임진왜란을 겪었고 장년기에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겪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의병을 조직하여 해남에서 강화도로 향하던 중 인조가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상심하여 배를 돌려 제주도로 향했다.

 

당시 보길도는 제주도로 향하던 윤선도가 풍랑을 피해 잠시 들른 곳이었다. 하지만 그는 보길도가 풍수명당이라는 사실에 마음을 돌려 그곳에 머물렀다. 윤선도는 전쟁 중 강화까지 갔다가 임금께 문안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유배를 가기도 했다. 윤선도는 1637년 보길도에 자리를 잡은 이래 1671년 6월 생을 마감할 때까지 약 13년 동안 모두 7차례에 걸쳐 보길도에 머물렀다.

 

그가 노년에 조성한 해남 일대의 정원들은 일생에 걸친 역경 이후에 세속적 삶에서 벗어나 이상향을 현실세계에 구현하려 했던 곳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디벨로퍼 윤선도'는 윤선도의 자연관이나 풍수지리 등에 기반을 둔 해석에 국한된 기존 윤선도 정원 해석에 관한 책과 달리 정원을 윤선도의 경제활동과 연관지은 책이다.

 

정조가 풍수에 관한 한 무학대사와 견줄 정도였다고 본 윤선도는 효종 승하 후에는 산릉을 정하는 직책을 맡기도 했다. 윤선도는 자연을 최고의 경지로 보았고 이상적인 물아일체의 환경이라 생각했다. 더불어 인간세상에서 자신을 격리할 수 있는 은둔의 장소이자 모든 근심을 털어내고 즐겁게 놀 수 있는 평온한 장소로 인식했다.

 

이상향에 대한 윤선도의 동경은 보길도에 정원을 만들기 전부터 이미 잠재되어 있었고 보길도의 아름다운 풍경을 접하면서 비로소 현실에 실현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윤선도는 소학의 가르침을 중시하여 현실에서의 실천과 예악을 통한 수련을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그에게 예악과 경세치용은 같은 맥락으로 이어져 있다. 

 

부용동 정원은 윤선도가 섬에 들어간 1637년 2월부터 1668년까지 30여년의 오랜 기간에 걸쳐 만들어졌다. 연구자들은 전통정원의 공간적 가치를 다음의 세 가지에서 찾고 있다. 첫째 정원은 도교, 유교와 성리학, 음양오행론, 풍수지리 등 동양사상이 물리적 형태로 표현된 곳이며 이러한 사상들의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다. 둘째 후세에 발복(發福)을 지원하는 풍수지리가 정원에 입지를 결정하는 것에서부터 공간구성에 이르기까지 매우 폭넓게 직접 적용된다는 것이다.

 

셋째 건축물과 일체화된 외부 공간으로서 마당이나 뜰을 정(庭), 숲과 물 등의 자연물과 자연지형을 원(園)으로 보고 전통정원의 형태적 가치를 분석했다. 정원은 일차적으로 자연 형과 지세 등의 물리적 특성에 의해 좌우되고 2차적으로는 정원주의 경제력과 같은 사회적 배경에 의해 좌우된다. 조선조 선비들에게 은둔은 자연에 대한 희구와 현실적 역경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어려운 현실을 피해 세상에서 격리된 명승을 찾아 자연 속에서 유유자적하는 것이었다.

 

부용동과 금쇄동 권역은 섬과 깊은 산속이라는 지리적 요건으로 인해 세상과 떨어져 있으며 경치 역시 뛰어나 은거지의 요건을 잘 갖추고 있다. 대부분의 섬은 식수와 농업용수를 구하기가 어렵다. 보길도 역시 1980년대 보길저수지가 만들어지기 전까지 물 확보가 어려워 살기에 척박한 곳이었다. 그러나 기존 연구에서 부용동 원림은 분지로 물 확보에 유리하며 농사를 지을 수 있고 육지와 적당한 거리에 있어 어느 정도 자급자족할 수 있는 환경을 갖추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런 생활의 제약에도 불구하고 윤선도 원림은 도가적 이상향 같은 빼어난 경치를 지니고 있으며 동시에 기본적 요건을 잘 갖춘 곳으로 평가된다. 부용동 원림을 도교적 이상향을 현실세계에 구현하여 은둔하며 자연을 즐기고자 했던 공간으로 보는 이유다. 부용동 정원은 윤선도가 현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자연에 대한 자신만의 상징적 의미를 부여한 공간으로 해석된다.

 

자신의 이상향인 신선세계를 현실세계에 구현하기 위해 정원으로 만들고 사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 윤선도가 세연정 일대를 향유한 모습은 예악을 통한 소학의 실천이라는 측면보다 유희 공간으로만 와전되어 현대에는 윤선도가 세연정 일대에서 사치스러운 위락 공간을 만들고 향락을 즐겼다고 비난받기도 한다.

 

윤선도의 원림 조성 목적을 은거라고 보는 시각이 있지만 짧은 시간 다수의 원림을 조영하여 동시에 경영한 점과 지속적으로 간척지 개간 등의 경제활동을 했다는 점에서 원림의 조영을 다른 측면으로 해석해 볼 필요가 있다. 산림천택이란 단순하게 산과 임야, 내와 못이라는 문자 그대로의 지시 대상을 넘어 바다, 갯벌 등을 포함한 농경지 이외의 여러 형태로 직접 산출물을 낳는 대지를 총칭한다.

 

조선사회는 초기에 산림천택의 사점 금지를 법제화 하여 산림천택을 공유적 성격의 토지로 묶어 두었다. 그러나 16세기 중반부터 산림천택의 사적 소유가 심화되었고 17, 18세기에는 사회 지배층에 의한 산림천택의 분할이 주요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다. 해남 윤씨 가문은 일차적으로는 부의 증대를 위해 간척지를 개간하여 농토를 확충했다.

 

진도 굴포리 간척지는 윤선도 때까지 약 200 정보(60만평) 가량의 간척이 이루어졌다. 진도 지역 간척의 목적은 가문의 전장 획득뿐 아니라 영토가 없어 굶주림에 시달리는 주민들을 구제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실제로 그들은 간척 후 농지 일부를 주민에게 나눠주었다. 진도 굴포리에는 지금도 윤선도의 간척을 기념하는 굴포신당유적비가 세워져 있다.

 

해남 윤씨 가문에서 섬 지역에 입안(立案; 개간을 위해서 미리 허가를 받는 일종의 임시적인 개간권)을 받은 목적은 간척지를 개간하여 농경지를 획득하고자 한 점도 있었지만 도서지역은 특산물을 획득하려는 목적이 더 컸다. 윤선도를 포함하여 가문의 종손들은 해안 가까운 곳이나 섬 지역에 별서정원을 짓고 예술 작품을 창작하며 원림 생활을 즐겼다. 그러나 그러한 입지를 선택한 이유는 서남 해안 곳곳에 있는 경작지와 섬을 경작하기 위한 교두보 확보라는 실질적인 목적 때문으로 판단된다.

 

녹우당에 남겨진 고문서에 의하면 가문에서 개간한 간척지를 백성이 점유하고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에 대한 입안 기록을 들어 가문의 땅임을 확인하는 기록들을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가문의 전장 관리가 용이한 곳에 원림을 조성하고 가문의 경작지를 경영하였다.(녹우당은 해남 윤씨 가문의 종택으로 효종이 윤선도에게 내려준 경기도 수원의 사랑채를 해체하여 해로를 통해 해남으로 옮긴 건물이다. 윤선도는 효종의 ’대군; 大君’시절 스승이었다.)

 

윤씨 가문의 경작지는 해안과 도서지역에 위치하여 육로보다 해로를 통해 관리하기가 용이했으므로 별서정원은 주로 해안가 또는 섬에 조성하였다. 보길도의 윤선도 원림은 세연정, 동천석실, 낙서재, 곡수당의 영역으로 나눌 수 있다. 세연(洗然)이란 주변 경관이 매우 깨끗하고 단정하여 기분이 상쾌하다는 의미다.

 

윤선도는 부용동 안산(案山) 중턱 위 석함 속에 정자를 지어 동천석실이라 부르고 수시로 방문하며 부용동 제일의 절승(絶勝)이라 하였다. 병자호란 직후인 1637년 2월 윤선도가 처음 입도할 당시 보길도는 공도(孔島)였다. 윤선도가 보길도에 간 것이 우연이었는지 이전에 알고 있었던 곳이어서 간 것인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보길도 입도 19년 후인 1655년(효종 7년) 소나무 보호를 위해 섬 주민을 모두 몰아내자는 논의가 있자 윤선도는 사람이 사는 것이 송금(松禁)에 이롭다는 상소를 올렸다. 윤선도는 상소에서 “신은 보길도를 사랑합니다. 그곳은 천석(川石)의 경치가 뛰어나서 귀신이 깎고 새긴 듯하니 인간 세상에서는 볼 수 없습니다.”라 했다.

 

윤선도는 자신이 보길도에 원림을 조영한 것이 소나무 보호, 관리에 도움이 된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보길도는 소금을 만들 수 있는 여건을 지니고 실재 소금을 생산하였던 만큼 경제적 가치가 높았다. 윤선도의 입도를 헤아리게 하는 대목이다. 해남 윤씨 가문은 해언전(海堰田) 간척과 도서(島嶼) 지역 경영을 통해 부를 축적하였다. 윤선도가 가주였을 시기에 윤씨 가문은 이미 화산 죽도와 맹골도를 경영하고 있었다.

 

세연지는 지금까지 위락공간으로 알려져 왔으며 부가적인 기능으로는 보길도 지역 농사를 위한 저수지로 잘못 알려져 있다. 조선 시대에 보길도는 금산(禁山)이었다. 금산 주변으로는 화전 등의 경작이 엄히 금지되었다. 윤선도는 보길도에 염전을 만들어 소금을 생산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밀물과 썰물을 이용해 염전에 바닷물을 끌어들이고 농축시킨 뒤 그 물을 가마솥에 끓이는 자염(煮鹽) 방식으로 소금을 생산했다.

 

이 방법으로는 소량의 소금만을 얻을 수 있었다. 안정적인 목재 확보와 민물 공급이 관건이었다. 윤선도는 세연지에 연못과 보를 축조함으로써 제염을 위한 일정량의 수량을 상시 확보할 수 있었다. 윤선도는 많은 간척사업을 통해 수리시설을 잘 이해하고 이를 원림에 활용했다. 윤선도 말년 보길도에는 가족과 제자들이 함께 거주했다. 곡수당의 연지를 통해 늘어난 사람들에게 필요한 식수를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윤선도는 문소동을 미래지향적인 풍수명당으로 여겼다. 이곳에 자신의 묘를 쓴다면 자손 대대로 번창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의 사후 묘지로서 낙점한 곳을 생전에 지키기 위해 그 일대를 정원으로 꾸민 것이다. 해남 윤씨 가문은 선박 건조 후 대여세를 받기도 하였고 경제적 가치가 높았던 제염 활동도 활발히 했다.

 

조선 시대 토지 제도에 따르면 윤선도가 금산이었던 보길도에 정원을 만들고 거주한 것은 사회적으로 허락받지 못한 행위였다. 그런데 윤선도는 병자호란 직후 금산 관리라는 명분으로 보길도에 거주했다. 보길도지에 세연정의 정자에 앉으면 앞의 솔숲 너머로 바다가 보인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는 숲이 무성하여 보이지 않지만 그 시절에는 바다로 전망이 열려 있어 배가 들고 나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

 

윤선도는 풍수 길지인 문소동을 자신의 사후 묫자리로 선택했으나 죽음에 이르기까지 30여년의 시간 자신의 풍수길지를 지켜야 했다. 윤선도는 매일 금쇄동, 문소동, 수정동을 산책했다. 산림자원 및 풍수길지를 감시, 관리하기 위한 목적에 따른 행동이었다.

 

윤선도의 정원은 미학적 측면에서 무릉도원의 은일(隱逸) 공간이 아니라 원림 경영(經營) 차원의 공간이었다. 이중환은 지리, 생리, 인심, 산수를 가거지(可居志)의 입지조건으로 꼽았다. 지리는 풍수설에 의한 입지와 관련된 항목이다. 생리는 기름진 땅과 물자의 활반한 교역과 수운(水運)이 가능한 것과 관련된 항목이다. 넷 중 하나라도 모자라면 살기 좋은 곳이 아니다.

 

이중환은 스스로 사회적 이상향을 이 땅에는 없는 곳<비지지지; 非地之地>으로 꼽았다. 하지만 윤선도는 이상향을 부분적으로나마 실현했다. 윤선도가 만든 정원, 그리고 그것을 통해 이룬 행위는 도교적 이상향과 사회적 이상향의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사회경제적 공동체로서의 이상향의 조건을 갖추었다.

 

윤선도는 가문의 전장(田莊) 경영, 지리와 해양, 자원에 대한 완벽한 이해를 바탕으로 가문의 경작지를 간직하고 관리하기 위한 최적의 장소에 원림들을 조성했다. 그곳에서 그는 꿈꿔왔던 이상향으로서 금쇄동과 부용동 원림을 꾸몄고 유학자로서 소학(小學)을 실천하는 공간으로 삼아 노래와 시를 지으며 정원을 향유하였다.

 

그간 단편적으로만 알던 윤선도를 확연히 알게 되었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윤선도와 소학의 관계도 새롭게 다가왔다. 사놓고 읽지 않고 있었던 ‘윤선도 평전’을 읽어야겠다.

 

역사와 관련이 깊음에도 읽지 않은 평전을 조경학 박사의 글을 읽고 읽어야겠다고 다짐하는 것은 왠지 낯설다. 그럼에도 좋은 자극을 받았음에 감사한다. 미수 허목의 십청원을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얻지는 못했다. 경제와 생거(生居)의 의미를 음미한 시간이었다. 빼놓을 수 없는 사실은 그의 가문이 중국을 통해 입수한 새로운 분야의 책이 윤선도의 행보에 큰 영향을 미쳤으리란 점이다. 그의 호 고산(孤山)은 독야청청의 다른 이름이 아니었을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