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벨로퍼 윤선도 - 정원으로 서남해안을 경영하다
이태겸 지음 / 픽셀하우스(Pixelhouse)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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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는 시조 시인으로 먼저 알았고 예송논쟁을 통해 알았다. 이 외에 어떤 면모로 만나볼 수 있을까? 정원으로 서남해안을 경영했던 인물이리라. 물론 서남해안 경영을 시작한 시기보다 예송논쟁이 후다. 고산은 해남 윤씨로 그의 집안은 막대한 재산을 가지고 고조부인 윤효정에게 시집온 해남 정씨로 인해 내리 내리 부유한 삶을 살았다.

 

디벨로퍼란 이름으로 윤선도를 규정한 책이 있다. 조경학 박사 이태겸의 ’디벨로퍼 윤선도‘란 책이다. 내가 디벨로퍼란 명칭을 안 것은 기농 정세권(鄭世權) 선생을 통해서다. 이 분은 일제 강점기 우리나라 최초의 디벨로퍼로 활약한 분으로 북촌 한옥 마을 조성의 주역이기도 하다. 디벨로퍼란 땅 매입부터 기획, 설계, 마케팅, 사후관리까지 총괄하는 부동산 개발업자를 말한다.

 

그럼 17세기 인물인 윤선도를 디벨로퍼로 규정하는 것은 타당한가? 타당하리라 본다. 당시 그런 개념은 없었지만 그런 역할은 있었기 때문이다. ’디벨로퍼 윤선도‘의 부제는 정원으로 서남해안을 경영하다이다. 윤선도는 유년기에 임진왜란을 겪었고 장년기에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겪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의병을 조직하여 해남에서 강화도로 향하던 중 인조가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상심하여 배를 돌려 제주도로 향했다.

 

당시 보길도는 제주도로 향하던 윤선도가 풍랑을 피해 잠시 들른 곳이었다. 하지만 그는 보길도가 풍수명당이라는 사실에 마음을 돌려 그곳에 머물렀다. 윤선도는 전쟁 중 강화까지 갔다가 임금께 문안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유배를 가기도 했다. 윤선도는 1637년 보길도에 자리를 잡은 이래 1671년 6월 생을 마감할 때까지 약 13년 동안 모두 7차례에 걸쳐 보길도에 머물렀다.

 

그가 노년에 조성한 해남 일대의 정원들은 일생에 걸친 역경 이후에 세속적 삶에서 벗어나 이상향을 현실세계에 구현하려 했던 곳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디벨로퍼 윤선도'는 윤선도의 자연관이나 풍수지리 등에 기반을 둔 해석에 국한된 기존 윤선도 정원 해석에 관한 책과 달리 정원을 윤선도의 경제활동과 연관지은 책이다.

 

정조가 풍수에 관한 한 무학대사와 견줄 정도였다고 본 윤선도는 효종 승하 후에는 산릉을 정하는 직책을 맡기도 했다. 윤선도는 자연을 최고의 경지로 보았고 이상적인 물아일체의 환경이라 생각했다. 더불어 인간세상에서 자신을 격리할 수 있는 은둔의 장소이자 모든 근심을 털어내고 즐겁게 놀 수 있는 평온한 장소로 인식했다.

 

이상향에 대한 윤선도의 동경은 보길도에 정원을 만들기 전부터 이미 잠재되어 있었고 보길도의 아름다운 풍경을 접하면서 비로소 현실에 실현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윤선도는 소학의 가르침을 중시하여 현실에서의 실천과 예악을 통한 수련을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그에게 예악과 경세치용은 같은 맥락으로 이어져 있다. 

 

부용동 정원은 윤선도가 섬에 들어간 1637년 2월부터 1668년까지 30여년의 오랜 기간에 걸쳐 만들어졌다. 연구자들은 전통정원의 공간적 가치를 다음의 세 가지에서 찾고 있다. 첫째 정원은 도교, 유교와 성리학, 음양오행론, 풍수지리 등 동양사상이 물리적 형태로 표현된 곳이며 이러한 사상들의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다. 둘째 후세에 발복(發福)을 지원하는 풍수지리가 정원에 입지를 결정하는 것에서부터 공간구성에 이르기까지 매우 폭넓게 직접 적용된다는 것이다.

 

셋째 건축물과 일체화된 외부 공간으로서 마당이나 뜰을 정(庭), 숲과 물 등의 자연물과 자연지형을 원(園)으로 보고 전통정원의 형태적 가치를 분석했다. 정원은 일차적으로 자연 형과 지세 등의 물리적 특성에 의해 좌우되고 2차적으로는 정원주의 경제력과 같은 사회적 배경에 의해 좌우된다. 조선조 선비들에게 은둔은 자연에 대한 희구와 현실적 역경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어려운 현실을 피해 세상에서 격리된 명승을 찾아 자연 속에서 유유자적하는 것이었다.

 

부용동과 금쇄동 권역은 섬과 깊은 산속이라는 지리적 요건으로 인해 세상과 떨어져 있으며 경치 역시 뛰어나 은거지의 요건을 잘 갖추고 있다. 대부분의 섬은 식수와 농업용수를 구하기가 어렵다. 보길도 역시 1980년대 보길저수지가 만들어지기 전까지 물 확보가 어려워 살기에 척박한 곳이었다. 그러나 기존 연구에서 부용동 원림은 분지로 물 확보에 유리하며 농사를 지을 수 있고 육지와 적당한 거리에 있어 어느 정도 자급자족할 수 있는 환경을 갖추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런 생활의 제약에도 불구하고 윤선도 원림은 도가적 이상향 같은 빼어난 경치를 지니고 있으며 동시에 기본적 요건을 잘 갖춘 곳으로 평가된다. 부용동 원림을 도교적 이상향을 현실세계에 구현하여 은둔하며 자연을 즐기고자 했던 공간으로 보는 이유다. 부용동 정원은 윤선도가 현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자연에 대한 자신만의 상징적 의미를 부여한 공간으로 해석된다.

 

자신의 이상향인 신선세계를 현실세계에 구현하기 위해 정원으로 만들고 사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 윤선도가 세연정 일대를 향유한 모습은 예악을 통한 소학의 실천이라는 측면보다 유희 공간으로만 와전되어 현대에는 윤선도가 세연정 일대에서 사치스러운 위락 공간을 만들고 향락을 즐겼다고 비난받기도 한다.

 

윤선도의 원림 조성 목적을 은거라고 보는 시각이 있지만 짧은 시간 다수의 원림을 조영하여 동시에 경영한 점과 지속적으로 간척지 개간 등의 경제활동을 했다는 점에서 원림의 조영을 다른 측면으로 해석해 볼 필요가 있다. 산림천택이란 단순하게 산과 임야, 내와 못이라는 문자 그대로의 지시 대상을 넘어 바다, 갯벌 등을 포함한 농경지 이외의 여러 형태로 직접 산출물을 낳는 대지를 총칭한다.

 

조선사회는 초기에 산림천택의 사점 금지를 법제화 하여 산림천택을 공유적 성격의 토지로 묶어 두었다. 그러나 16세기 중반부터 산림천택의 사적 소유가 심화되었고 17, 18세기에는 사회 지배층에 의한 산림천택의 분할이 주요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다. 해남 윤씨 가문은 일차적으로는 부의 증대를 위해 간척지를 개간하여 농토를 확충했다.

 

진도 굴포리 간척지는 윤선도 때까지 약 200 정보(60만평) 가량의 간척이 이루어졌다. 진도 지역 간척의 목적은 가문의 전장 획득뿐 아니라 영토가 없어 굶주림에 시달리는 주민들을 구제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실제로 그들은 간척 후 농지 일부를 주민에게 나눠주었다. 진도 굴포리에는 지금도 윤선도의 간척을 기념하는 굴포신당유적비가 세워져 있다.

 

해남 윤씨 가문에서 섬 지역에 입안(立案; 개간을 위해서 미리 허가를 받는 일종의 임시적인 개간권)을 받은 목적은 간척지를 개간하여 농경지를 획득하고자 한 점도 있었지만 도서지역은 특산물을 획득하려는 목적이 더 컸다. 윤선도를 포함하여 가문의 종손들은 해안 가까운 곳이나 섬 지역에 별서정원을 짓고 예술 작품을 창작하며 원림 생활을 즐겼다. 그러나 그러한 입지를 선택한 이유는 서남 해안 곳곳에 있는 경작지와 섬을 경작하기 위한 교두보 확보라는 실질적인 목적 때문으로 판단된다.

 

녹우당에 남겨진 고문서에 의하면 가문에서 개간한 간척지를 백성이 점유하고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에 대한 입안 기록을 들어 가문의 땅임을 확인하는 기록들을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가문의 전장 관리가 용이한 곳에 원림을 조성하고 가문의 경작지를 경영하였다.(녹우당은 해남 윤씨 가문의 종택으로 효종이 윤선도에게 내려준 경기도 수원의 사랑채를 해체하여 해로를 통해 해남으로 옮긴 건물이다. 윤선도는 효종의 ’대군; 大君’시절 스승이었다.)

 

윤씨 가문의 경작지는 해안과 도서지역에 위치하여 육로보다 해로를 통해 관리하기가 용이했으므로 별서정원은 주로 해안가 또는 섬에 조성하였다. 보길도의 윤선도 원림은 세연정, 동천석실, 낙서재, 곡수당의 영역으로 나눌 수 있다. 세연(洗然)이란 주변 경관이 매우 깨끗하고 단정하여 기분이 상쾌하다는 의미다.

 

윤선도는 부용동 안산(案山) 중턱 위 석함 속에 정자를 지어 동천석실이라 부르고 수시로 방문하며 부용동 제일의 절승(絶勝)이라 하였다. 병자호란 직후인 1637년 2월 윤선도가 처음 입도할 당시 보길도는 공도(孔島)였다. 윤선도가 보길도에 간 것이 우연이었는지 이전에 알고 있었던 곳이어서 간 것인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보길도 입도 19년 후인 1655년(효종 7년) 소나무 보호를 위해 섬 주민을 모두 몰아내자는 논의가 있자 윤선도는 사람이 사는 것이 송금(松禁)에 이롭다는 상소를 올렸다. 윤선도는 상소에서 “신은 보길도를 사랑합니다. 그곳은 천석(川石)의 경치가 뛰어나서 귀신이 깎고 새긴 듯하니 인간 세상에서는 볼 수 없습니다.”라 했다.

 

윤선도는 자신이 보길도에 원림을 조영한 것이 소나무 보호, 관리에 도움이 된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보길도는 소금을 만들 수 있는 여건을 지니고 실재 소금을 생산하였던 만큼 경제적 가치가 높았다. 윤선도의 입도를 헤아리게 하는 대목이다. 해남 윤씨 가문은 해언전(海堰田) 간척과 도서(島嶼) 지역 경영을 통해 부를 축적하였다. 윤선도가 가주였을 시기에 윤씨 가문은 이미 화산 죽도와 맹골도를 경영하고 있었다.

 

세연지는 지금까지 위락공간으로 알려져 왔으며 부가적인 기능으로는 보길도 지역 농사를 위한 저수지로 잘못 알려져 있다. 조선 시대에 보길도는 금산(禁山)이었다. 금산 주변으로는 화전 등의 경작이 엄히 금지되었다. 윤선도는 보길도에 염전을 만들어 소금을 생산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밀물과 썰물을 이용해 염전에 바닷물을 끌어들이고 농축시킨 뒤 그 물을 가마솥에 끓이는 자염(煮鹽) 방식으로 소금을 생산했다.

 

이 방법으로는 소량의 소금만을 얻을 수 있었다. 안정적인 목재 확보와 민물 공급이 관건이었다. 윤선도는 세연지에 연못과 보를 축조함으로써 제염을 위한 일정량의 수량을 상시 확보할 수 있었다. 윤선도는 많은 간척사업을 통해 수리시설을 잘 이해하고 이를 원림에 활용했다. 윤선도 말년 보길도에는 가족과 제자들이 함께 거주했다. 곡수당의 연지를 통해 늘어난 사람들에게 필요한 식수를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윤선도는 문소동을 미래지향적인 풍수명당으로 여겼다. 이곳에 자신의 묘를 쓴다면 자손 대대로 번창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의 사후 묘지로서 낙점한 곳을 생전에 지키기 위해 그 일대를 정원으로 꾸민 것이다. 해남 윤씨 가문은 선박 건조 후 대여세를 받기도 하였고 경제적 가치가 높았던 제염 활동도 활발히 했다.

 

조선 시대 토지 제도에 따르면 윤선도가 금산이었던 보길도에 정원을 만들고 거주한 것은 사회적으로 허락받지 못한 행위였다. 그런데 윤선도는 병자호란 직후 금산 관리라는 명분으로 보길도에 거주했다. 보길도지에 세연정의 정자에 앉으면 앞의 솔숲 너머로 바다가 보인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는 숲이 무성하여 보이지 않지만 그 시절에는 바다로 전망이 열려 있어 배가 들고 나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

 

윤선도는 풍수 길지인 문소동을 자신의 사후 묫자리로 선택했으나 죽음에 이르기까지 30여년의 시간 자신의 풍수길지를 지켜야 했다. 윤선도는 매일 금쇄동, 문소동, 수정동을 산책했다. 산림자원 및 풍수길지를 감시, 관리하기 위한 목적에 따른 행동이었다.

 

윤선도의 정원은 미학적 측면에서 무릉도원의 은일(隱逸) 공간이 아니라 원림 경영(經營) 차원의 공간이었다. 이중환은 지리, 생리, 인심, 산수를 가거지(可居志)의 입지조건으로 꼽았다. 지리는 풍수설에 의한 입지와 관련된 항목이다. 생리는 기름진 땅과 물자의 활반한 교역과 수운(水運)이 가능한 것과 관련된 항목이다. 넷 중 하나라도 모자라면 살기 좋은 곳이 아니다.

 

이중환은 스스로 사회적 이상향을 이 땅에는 없는 곳<비지지지; 非地之地>으로 꼽았다. 하지만 윤선도는 이상향을 부분적으로나마 실현했다. 윤선도가 만든 정원, 그리고 그것을 통해 이룬 행위는 도교적 이상향과 사회적 이상향의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사회경제적 공동체로서의 이상향의 조건을 갖추었다.

 

윤선도는 가문의 전장(田莊) 경영, 지리와 해양, 자원에 대한 완벽한 이해를 바탕으로 가문의 경작지를 간직하고 관리하기 위한 최적의 장소에 원림들을 조성했다. 그곳에서 그는 꿈꿔왔던 이상향으로서 금쇄동과 부용동 원림을 꾸몄고 유학자로서 소학(小學)을 실천하는 공간으로 삼아 노래와 시를 지으며 정원을 향유하였다.

 

그간 단편적으로만 알던 윤선도를 확연히 알게 되었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윤선도와 소학의 관계도 새롭게 다가왔다. 사놓고 읽지 않고 있었던 ‘윤선도 평전’을 읽어야겠다.

 

역사와 관련이 깊음에도 읽지 않은 평전을 조경학 박사의 글을 읽고 읽어야겠다고 다짐하는 것은 왠지 낯설다. 그럼에도 좋은 자극을 받았음에 감사한다. 미수 허목의 십청원을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얻지는 못했다. 경제와 생거(生居)의 의미를 음미한 시간이었다. 빼놓을 수 없는 사실은 그의 가문이 중국을 통해 입수한 새로운 분야의 책이 윤선도의 행보에 큰 영향을 미쳤으리란 점이다. 그의 호 고산(孤山)은 독야청청의 다른 이름이 아니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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