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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운몽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2
김만중 지음, 송성욱 옮김 / 민음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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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이 숙종(肅宗) 15년인 1689년 쓴 구운몽(九雲夢)‘은 불후의 소설이다. ’구운몽을 불후의 작품으로 보는 이유는 1) 저자의 문장이 세련되었고, 2) 주인공 성진(性眞)의 천상계에서 인간계로의 여정, 인간계에서 다시 천상계로의 여정이 리얼하게 그려졌기 때문이고, 3) 유교, 불교, 도교의 가치관을 적절히 혼합해낸 솜씨가 정묘(精妙)하기 때문이고, 4) 인생무상의 진리를 자연스럽게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또한 최초의 한글 소설이라는 점, 귀양지에서 어머니의 병환을 위로하기 위해 지은 소설이라는 점, 저자의 학식이 잘 드러난 소설이라는 점 등의 특징을 가진 작품이다. 구운이란 아홉(주인공 성진 + 8선녀)개의 구름을 뜻한다. 구름 같은 꿈이라는 의미로 성진과 8선녀의 허망한 세상사를 꿈으로 표현한 것이다.

 

천상계의 성진은 용왕에게 사례하고 올 사람을 찾는 스승 육관대사의 부름에 자청해 응한다. 용왕을 만난 성진은 그가 권하는 술 석 잔에 취해 돌아오는 길에 남악(南岳)의 위부인이 대사에게 보낸 8선녀를 만나 꽃을 꺾어 던져 명주(明紬)로 만드는 등의 희롱을 하다가 염라(閻邏國)을 거쳐 지상으로 유배된다.

 

8선녀 역시 유배되는데 유배란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숙종이 장희빈을 왕후로 책봉하는 것을 반대하다가 유배당한 저자의 생이 반영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티벳 사자(死者)의 서()’에는 중음신이 자신이 태어날 어머니를 골라 그의 태()에 드는 장면이 있다. 성진은 유()씨 부인의 태로 들어가 남자 아이로 태어난다.

 

()처사(處士)가 아버지인데 그는 아들이 분명 하늘 사람이었다고 확신하고 성진에게 소유(少遊)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자신은 소임을 다했다며 하늘로 돌아간다. 소유란 천상계에서 지상계로 오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8선녀 역시 인간으로 태어난다. 진채봉, 계섬월, 정경패, 난양공주, 가춘운, 적경홍, 백릉파, 심요연 등으로 태어난 8선녀는 결국 인간계에서 소유의 여자들이 된다.

 

소유는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고 할 일을 다하고 말년에 깨달음을 얻는다. 그것은 자신의 삶이 하룻밤 꿈 같은 것이었다는 인식이다. ‘구운몽이 일부다처의 문제점을 환기시킨 작품이라는 말이 있는가 하면 교묘히 그런 점을 합리화하는 작품이라는 말도 있다.

 

소설의 말미에 8선녀가 관음보살께 한 낭군(郎君)을 모시게 되었음을 아뢰며 백년해로 후에 함께 극락으로 가게 해달라고 비는 장면이 나오는데 8선녀들은 소설에서 일부다처제도를 불편해 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함께 백년해로하고 극락으로 가게 해달라고 빌기까지 하니 소설이 일부다처제도를 합리화하는 것이라 볼 여지가 충분하다.

 

구운몽이 한국 최초의 한글 소설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세종이 한글을 창제한 지 300년 정도가 지난 영, 정조대에 이르러 소설이 널리 유행했다. 처음 한글이 창제되었을 당시 문자를 조합하는 원리 정도만 알려졌을 뿐이었으니 문장으로 표현되고 소설에 쓰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으리라는 점은 충분히 상상할 만하다.

 

소유와 8선녀는 말년까지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인생은 허망하다는 깨달음을 얻고 극락으로 간다. 제목이 같지만 시대 차이가 300년 정도 나는 최인훈의 구운몽과 비교해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한문 소설을 쓰지 않고 한글 소설을 쓴 김만중은 우리 것을 사랑하고 우리 것의 진정성을 높이 산 진정한 한글 전도사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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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서울을 찾는다 - 홍성태의 서울 만보기
홍성태 지음 / 궁리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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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국동, 인사동, 정동, 광화문로 등을 주로 걷고 창경궁로, 돈화문로, 창덕궁길 등은 궁궐에 가는 길에 걷곤 했는데 어제 충정로(忠正路)를 걸었다. 충정로란 이름은 1905년 을사(乙巳)늑약(勒約) 때 순국한 충정공(忠正公) 민영환(閔泳煥)의 시호에서 유래했다.

한성전기회사의 미국인 기사장 맥렐란의 사택이었던 충정각, 프랑스 대사관, 1937년에 지어진 현존 최고(最古)의 아파트인 충정아파트(토요타아파트), 돈의문(서대문), 적십자병원(경기감영京畿監營터), 감리교신학대학, 영천시장, 독립문 등을 보았다.

이 거리만의 특징은 아니겠지만 큰 길가의 고층 건물들과, 그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골목길의 사뭇 다른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물론 아기자기한 정감(情感)을 느끼려면 골목길과 전통 시장 등을 찾는 것이 제격이다.

도시와 타운을 나누는 기준은 행정 기능의 소유 여부이다. 도시는 행정 기능을 가지고 있고 행정 기능이 없는 타운은 농경 지역과 상대되는 상업적, 문화적 중심지이다. 사학자 박진빈 교수는 그런 사전적 정의들과 다르게 더 포괄적이고 감성적인 부분을 담고 있는 곳을 도시로 풀이한다.(‘도시로 보는 미국사’ 11 페이지)

그제 정동길 순례 후 서울역사박물관에 들러 영화 상영 정보를 알게 되었다. 제 9회 서울 건축영화제 일정으로 서울역사박물관 야주개홀(9월 4일 – 9월 10일. 무료), 이화여대 아트하우스 모모2관(9월 11일 – 9월 17일. 유료), 문화비축기지 탱크6 다목적 강의실(9월 22일 – 9월 24일. 무료) 등에서 도시와 건축 영화가 상영되는 것이다.

구세군회관빌딩 자리에 있던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興化門)이란 현판 글씨는 어두운 밤에도 빛이 날 정도로 명필이었다. 이에 그 앞은 야조가(夜照街)라 불렸고 후에 야주현, 야주개 등으로 불렸다. 야주개홀이란 이름은 이에서 유래한다.

재건축과 젠트리피케이션(공간 고급화. 1964년 독일 출신의 영국 사회학자 루스 글라스가 런던 시내의 노동자 계급 거주지에 중상층이 유입되는 바람에 기존 거주자들인 노동자들이 밀려나는 현상을 보고 붙인 용어. gentry는 상류사회를 의미.) 등의 이슈들을 다룬 영화들이 상영된다.

우리나라도 젠트리피케이션에서 예외가 아니고 그런 모습이 빚어지는 데에는 지역 차이도 별로 없다. 인근에 조선시대 관리들의 숙소인 객사(客舍)가 있고 서울 이태원 경리단길과 비슷하다고 해서 붙은 전주 객리단길도 최근 치솟는 임대료 때문에 문제가 되고 있다. 이는 지방을 예로 들기 위해 하는 말이다.

미국도시사학회 회장을 역임한 도시사학자 마이클 카츠는 ‘왜 미국 도시들은 불타지 않는가(Why American Cities Don’t Burn)’란 책에서 1950 – 1960년대보다 훨씬 더 심해진 불평등과 가난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미국 도시들이 불타지 않는(차별받는 흑인 노동자들이 폭동을 일으키지 않는) 이유를 분석했다.

20 세기 내내 지속된 인종간 분리 정책으로 흑인들 입장에서 분노를 쏟을 상대(백인)가 존재하지 않아 자신들끼리 총구를 겨누기 때문이고, 소비주의의 만연으로 사회 구조 변화를 위한 투쟁의 의지가 약해졌기 때문이고, 경찰의 군대화 즉 약자에 대한 집중적 관리 때문이다.(박진빈 지음 ‘도시로 보는 미국사’ 272, 273 페이지)

우리는 물론 이와 상황이 많이 다르다. 다만 홍성태 교수의 문제제기 같은 것은 들어볼 만하다. 홍 교수는 도시를 난민의 도시와 시민의 도시로 나눈다. 난민의 도시는 더 많은 이윤을 향한 이기적 경쟁 논리에 사로잡힌 도시이다. 시민의 도시는 사람을 위한 도시이다.

홍 교수는 난민의 도시를 시민의 도시로 바꾸려면 네 가지가 필요하다고 본다. 1) 난개발을 막아야 한다. 2) 자동차 중심의 거리를 보행자 중심의 거리로 바꾸어야 한다. 3) 제멋대로 들어선 전봇대와 전깃줄을 모두 깔끔하게 정리해야 한다. 4) 건물을 어지럽게 만드는 간판들을 정리하고 어디서나 쏟아져 나오는 소음들을 막아야 한다.

홍 교수는 세종로를 감시(監視)의 거리로 규정하고 세운상가는 폭압적 근대화의 상징으로 본다. 홍 교수에 의하면 정동(貞洞)은 슬픈 공간이다. 정동은 대한제국 즉 식민지 근대의 공간이다. 정동의 대표적 낭만지인 경운궁(덕수궁) 돌담길도 우아한 곳이기보다 경찰들이 곳곳에서 감시의 눈초리를 번득이는 곳이다.(세종로가 그렇듯)

홍 교수의 책에는 미국 정부가 미국 대사관과 삼청동의 미국 대사관 직원 숙소를 정동으로 옮기려 한다는 내용이 있다.(홍 교수의 책은 2004년 발간된 책이다.) 경기여고터에 새 대사관을 짓겠다는 것이었는데 다행히 사적(史蹟)지로 보존하기로 결정되었다.(2005년 1월) 현재 미국 대사관은 용산으로 이전하기로 결정되었다.(2010년 6월)

종묘(宗廟)의 경우는 어떤가. 세계문화유산 알림 표지판에서 불과 100 미터 정도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쓰레기 적치장이 있다. 이 사실은 안타까울 뿐이다. 저자는 전주 이씨 화수회(花樹會)에서 정말로 해야 할 일은 종묘의 담장과 그 둘레의 모습을 종묘에 어울리게 다듬는 것이라 말한다.(227 페이지)

대학로는 어떤가. 대학로란 이름은 폭력 통치에서 문화통치로 전술을 바꾼 전두환의 기만책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국풍 81이 대학생들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만든 엉터리 축제이듯. 대학로는 사이비 낭만과 젊음의 거리이다. 대학로는 유흥의 거리일 뿐이다.

낙산(駱山)으로 오르는 길이 있는 동숭아트센터 옆 골목까지 유흥의 물결에 의해 잠식되었다.(242 페이지) 낙산(駱山)은 풍수에서 좌청룡(左靑龍)이다. 우백호(右白虎)는 인왕산(仁王山)이다. 남주작(南朱雀)은 남산(南山)이다. 북현무(北玄武)는 북악산(北岳山)이다. 일제 강점기에 인왕산(仁旺山)으로 개명되었으나 1995년 본래 이름인 仁旺山으로 환원되었다. 해방 후 50년이나 지나 환원되었다는 것이 씁쓸하게 여겨진다.

우백호인 인왕산에 비해 좌청룡인 낙산은 아주 작아 조선시대에서는 이곳에 숲을 울창하게 조성해 모자란 부분을 채우려 했다. 그런데 일제때 이곳에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들어 토막(土幕)을 짓고 살기 시작하는 바람에 조금씩 숲이 없어졌고 박정희때는 그 꼭대기에 시민 아파트를 짓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낙산은 더 이상 자연공간의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245 페이지)

낙산은 해발 125미터, 인왕산은 해발 338미터이다. 한양 천도 초기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주산(主山)으로 삼고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光化門)을 동쪽으로 내자고 주장했지만 정도전과 그 지지 세력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풍수에서 좌청룡은 남자와 장자(長子)를, 우백호는 여자와 차자(次子)를 상징한다. 유교는 적장자(嫡長子)을 우선시한다. 한편 하륜은 안산(鞍山: 무악毋嶽)을 주산으로 삼자고 했었다. 무학대사의 주장대로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으면 좌청룡은 북악산이 된다.(북악산은 342미터이다.)

저자는 우리로서는 불행한 일이지만 한국의 근대화는 식민지 시기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고 말한다.(284 페이지) 저자는 명동(明洞)을 어두운 동네로 표현한다. 일제 시대에 명동은 명치정(明治町)이라 불렸다. 정(町)은 마치(まち)이다. 제국주의의 길을 닦은 일왕의 이름을 슬쩍 바꿔 밝은 동네라는 뜻으로 고친 것이다.

명동은 사실 언제나 어두운 동네이다. 높다란 건물들로 둘러싸여 햇빛이 제대로 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담이지만 풍수에서 말하는 명당은 명당(明堂)이다. 명당(名堂)이 아니다. 도시가 생명의 공간으로 다시 태어나려면 녹지공간을 시내 곳곳에 조성해야 한다. 당연히 그것은 엄청난 땅값과 싸워야 하는 어려운 일이다.(311 페이지)

경우가 다르지만 서울 도심의 선정릉(宣靖陵)을 보면 서울에 이렇게 넓은 녹지가 들어서 있다니, 하고 놀라게 된다. 저자는 희망의 사례로 난지도를 든다. 쓰레기산이었던 난지도는 이제 생태공원이 되었다. 주변에는 상암 올림픽 경기장이 있다.

난초(蘭草)와 지초(芝草)를 아우르는 은은한 행기를 지닌 난지도는 철따라 온갖 꽃이 만발해 꽃섬이라 불리던 아이들의 놀이동산이었는데 이후 육지와 연결되었고 사람들이 이곳에 쓰레기를 매립하기 시작했었다고 말한다.(‘풍경의 감각’ 141 페이지)

2017 서울 세계건축대회 팜플렛을 보니 건축문화 투어로 몇 가지 프로그램이 소개되어 있다. 경향신문 사옥, 돈의문터, 경교장, 한양성곽, 홍난파 가옥, 권율 도원수 집터, 딜쿠샤, 독립문, 독립관,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을 순례하는 ‘공간 속 역사, 그 흔적을 찾아가다’가 이미 지나갔고 예정된 것들 가운데는 후암초등학교, 독일문화원, 남산중앙교회, 해방촌교회, 해방촌성당, 해병대초대교회, 보성여고, 남산교회 등을 답사하는 ‘서울의 역사와 기억을 보존하다. 해방촌과 서울로 7017’(9월 15일. 18시 30분 – 21시 30분)이 있다.

물론 신청은 이미 마감되었다. 다만 나는 정독도서관에서 열리는 ‘우리가 몰랐던 궁궐 이야기’ 강의를 들을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한다. 이 강의는 조선궁궐과 음양오행, 조선궁궐과 풍수지리, 조선궁궐과 조선왕릉의 구조는 똑같다? 실록으로 읽는 조선궁궐 등으로 이루어진 강의이다.( 9월 19, 21, 26, 28일. 19시 – 21시)

서울을 말하는 여러 책들이 있다. 그 책들을 크게 둘로 나누면 홍성태 교수의 ‘서울에서 서울을 찾는다’처럼 비판적 안목을 바탕으로 한 책과 낭만에 초점을 맞춘 책이 될 것이다. 두 경우 모두 도움이 된다. 비판과 낭만을 적절히 유지하는 것이 순리가 아닐지?

‘서울에서 서울을 찾는다’는 공동체 의식과 바른 지향점을 생각하게 하고 낭만에 초점을 둔 책은 소중한 느낌을 간직하게 한다. 많이 읽고(다독多讀), 많이 듣고(다청多聽), 많이 돌아다녀야(다순多巡) 할 것이다. 박태원의 소설에 소설가로 나오는 구보는 서울 거리를 배회하며 느끼는 내면 의식의 변화를 드러낸다.

지금 내 모습은 세태를 비판적으로 인식하기만 할 뿐인 구보를 닮은 듯 하다. 당시(1930년대)에는 지식인만이 도시 거리를 걸으며 비판 정신을 가질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지금은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세상은 문제적으로 보인다. 다만 박태원의 소설은 몽타주 기법과 의식의 흐름 기법을 사용한 작품이지만 나를 비롯한 많은 평범한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다는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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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꽃의 비밀
김환희 지음 / 새움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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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은행나무 출판사가 미당 서정주 전집(20)을 완간했다. 미당 문학상 심사위원인 황현산 평론가는 미당은 명백하게 친일시를 썼고 광복 이후에도 몇 차례에 걸친 정치적 과오를 저질렀지만 미당이 한국어를 아름답게 일으켜 세운 공로는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라는 말을 했다.

 

미당이 한국어가 말살될 위기에 처했던 1930년대와 40년대에 한국어에 새로운 생기를 불어넣고 새로운 깊이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미당은 찬반이 분명하게 나뉘는 시인이다. 유종호, 이남호 등의 평론가가 미당 마니아라 할 수 있고 반대 진영에서는 미당의 시가 대단한 성취를 이루었다고 볼 수 없으며 그렇다 해도 그의 친일, 친독재를 도외시하고 시만을 푱가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는 입장을 보인다.

 

함돈균 교수는 최근 황현산 평론가가 미당의 시를 인정한다고 해서 그가 친일을 한 것은 아니라는 말을 했다. 미당의 시가 윤동주, 소월, 백석, 김수영, 김춘수 등의 시보다 못하다는 말이 있다. 나는 이를 정교하게 분석할 여력이 없다. 다만 지금보다 많은 시를 읽을 필요가 있고 거장 시인들의 시를 본격적으로 읽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김환희의 국화꽃의 비밀(서정주의 국화 옆에서를 비롯 서정주 시세계 전반을 분석한 책. 2001년 출간)을 지난 20138월 읽은 이래 4년여만에 다시 읽고 내용을 정리한다.

1. 일본제국주의 시대에 황국(黃菊)은 일본 왕실과 태양 상징.(국화 옆에서)

2. 시인들은 그냥 꽃이라 말하지 한 송이의 꽃이라 말하지 않음.(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는 예외적.) 한 송이 꽃: 일왕.

3. 일제 강점기에 경성부의 남산에 세워졌던 신사(神社)인 조선신궁(朝鮮神宮)에 청동 거울이 있었음. 청동 거울, 청동검, 곡옥(曲玉)은 삼종신기(三種神器)라 불림.(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4. 일왕의 인간 선언 시점은 194611. 국화 옆에서의 창작 시기는 19471. 인간선언으로 현인신(現人神)에서 인간으로 돌아온 히로히토왕의 이미지와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이란 구절의 이미지 비슷. 술술술술 시를 쓰는 서정주도 엄청난 상징과 비밀이 깃든 시를 쓰는데 1년이 걸릴 수 밖에 없었다는...

5. 아마테라스(일본 신화의 태양의 여신) 신화에 최초의 주인공으로 나오는 신() 이자나기의 아내 이자나미는 불의 신 카쿠쓰치를 낳다가 너무 뜨거워 타 죽고 만다. 이자나기는 죽은 신들이 사는 황천으로 간 아내 이자나미를 따라 간다. 이자나미는 저승의 음식을 먹은 탓에 돌아갈 수 없자 남편인 이자나기에게 저승의 신들과 의논할 테니 그때까지는 자기 모습을 보아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시간이 오래 걸리자 이자나기는 참지 못하고 머리에 꽂았던 빗을 뽑아 불을 붙여 안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충격적이게도 불빛에 비친 이자나미의 온몸에는 온갖 구더기들이 들끓는다. 이자나미의 모습에 충격을 받아 이자나기는 도망친다. 일본서기(日本書紀)와 함께 일본의 가장 오래된 역사서인 고사기(古事記)는 이를 번개의 신(뇌신: 雷神)으로 표현.(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6. 사별한 아내가 그리워 황천국으로 여행하는 남편, 몸의 부패, 천둥신 등의 시상은 미당 시의 소쩍새와 천둥이 형성하는 모티브와 상응, 고사기에 등장하는 동굴 칩거, 누님의 귀환, 거울 앞에 선 여인 등의 여러 모티브들은 국화 옆에서의 천둥, 거울, 무서리 등의 시어들과 맞물림.

7. 고사기에는 아마테라스가 남동생인 스사노오의 잘못으로 베틀을 짜는 자신의 하녀가 죽자 동생을 피해 동굴로 숨는 장면이 나온다. 천상계와 지상계가 암흑에 빠지고 각종 재앙이 생겨난다. 신들이 지혜를 모아 거울로 아마테라스의 호기심을 자극해 아마테라스를 동굴 밖으로 나오게 한다.(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 누님의 귀환) 아마테라스는 손자 니니기에게 자신을 동굴 밖으로 나오게 한 거울을 징표로 주며 그것을 자신의 혼으로 여기고 자신을 모시는 것처럼 우러러 모시라고 말한다.

8. 일본 신화 속의 대모들(이자나미, 목화(木花), 토요타마비메)은 하나 같이 소복하고 거울 앞에 우두커니 홀로 앉아 있는 모습을 연출한다. 서정주의 시집 귀촉도에 수록된 시 목화는 목화(木花) 즉 코노하나노사쿠야비메이다.

9. 야마토 민족과 한민족이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는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은 아마테라스의 남동생 스사노오를 단군 내지 신라인으로 간주. 국화 옆에서, 누님, 목화등 서정주의 시들에 나오는 누님은 일본 또는 아마테라스로, 남동생은 우리나라 또는 서정주로 해석하는 것이 가능.

10. 아마테라스 신화를 구성하는 사별한 님을 향한 통곡, 수를 놓거나 베를 짜는 지고지선한 누나, 여인의 고독한 은둔, 천상계에서 추방되어 세상을 떠도는 탕아 등은 서정주의 시세계 전반에 걸쳐 반복적으로 발견되는 이미지들이다.

4년 전에 비해 열의가 더한 느낌이다. 당시에는 나만을 위해 불친절하게 정리했지만 이번에는 다른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친절하게 정리했다. 나는 김환희의 입장에 적극 공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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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의 감각 - 파리 서울 두 도시 이야기
이나라.티에리 베제쿠르 지음, 류은소라 옮김 / 제3의공간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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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의 감각'은 프랑스인 남편이 본 서울과 한국인 아내가 본 파리 이야기를 1, 2부로 배치한 플라뇌르(flaneur) 에세이이다. 플라뇌르는 어슬렁거리는 눈으로 도시를 걷는 만보객(漫步客)을 의미한다. 책의 1부는 프랑스인 남편의 이야기인 파리의 눈으로 본 서울이고 2부는 한국인 아내의 이야기인 도시라는 공동체이다.

두 저자는 서문격의 글인 '들어가며'에서 플라뇌르를 언급한다. 자신들은 천천히 걸어다니는 산보객인 플라뇌르일 것이지만 플라뇌르의 산책이 꼭 우연한 산책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 말은 호시우행(虎視牛行)이란 말을 생각하게 한다. 호시우행이란 호랑이처럼 관찰하고 소처럼 끈기있고 신중하게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두 단어는 맥락이나 의미면에서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다만 느슨하게 걷고 즐기듯 다소 흐트러지게 움직이는 걸음 속에 예리한 시각을 갖춘 것은 두 저자를 생각하게 하기에 충분하다. 어떻게 보면 정중동(靜中動)이라고도 할 여지도 있다.

'풍경의 감각'은 두 저자가 취한 그런 남다름의 산물이다. 사실 프랑스인 남편이 서울에 대해 논하고, 한국인 아내가 파리에 대해 논하는 것 자체가 예사롭지 않은 포석이다. 표지 이야기도 하지 않을 수 없다. 구스타브 카유보트의 그림인 파리의 거리, 비오는 날을 생각하게 하는 그림인 표지는 우산 쓴 두 저자 중 한 사람은 지구의 북반구 같은 곳에서 아래로 머리를 두고 있고 다른 한 사람은 남반구 같은 곳에서 바로 서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현대는 글로벌한 시대이다. 여행 자체가 일상화되었고 그런 흐름에 따라 해외 여행도 더 이상 낯설지 않다. 그럼에도 프랑스인 남편은 서울에 대해 이방인이고 한국인 아내 역시 파리에 대해 이방인이다. 그렇기에 두 저자는 낯선 곳을 알기 위해 독서로 철저 준비를 했다. 그 가운데는 풍수 책도 있다.

파리의 눈으로 본 서울이라는 제목에 어울리게 프랑스인 남편(티에리 베제쿠르)은 우리의 풍경들과 다른 파리의 풍경들을 이야기한다. 서울의 일상이 파리의 일상보다 우월하기도 하고 그렇지 못하기도 하다. 우월한 것은 우리의 카페에서는 노트북을 펼쳐 검색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파리의 카페는 테이블이 너무 작아서 노트북을 올려놓을 수 없다.

그러나 프랑스 대혁명을 낳은 것은 자유로운 생각들이 만나고 부딪히고 강화되고 확산된 파리의 카페들이었다.(34 페이지) 병렬적 나열이겠지만 파리의 카페들에서 생각을 나눈 지식인들이 멋지게 보인다. 베제쿠르는 우리의 공동묘지, 장례의식과 파리의 공동묘지, 장례의식이 가진 뚜렷한 차이를 언급한다.

도시가 변하는 속도도 주요 비교 사안이다. 파리를 비롯한 유럽의 도시들은 완전히 바뀌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인간의 세대들이 그 뒤를 잇는 데 반해 한국에서는 한 세대 안에서조차 도시가 여러 번 다시 태어난다. 한국에서 고궁들이, 서울이 오래된 도시임을 환기하는 장치가 된다. 한국은 아파트 공화국이다. 한국에서 주택은 우리가 거주하는 삶의 공간 이상으로 사고 다시 파는 재화나 주택 임대업의 아이템이다.(105 페이지)

베제쿠르는 한국의 것도 분류를 한다. 절과 교회가 그것이다. 베제쿠르는 절에서 가장 편안함을 느낀다고 말한다.(풍수 책을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한국인 아내 이나라는 대학생 시절 홀로 떠났던 유럽 여행에서 순전히 숙박비를 아끼기 위해 밤기차를 탔다는 이야기로 서두를 장식한 뒤 기차의 의미를 짚는다. 기차는 대륙을 가로지르는 최초의 근대적 운송수단이라는 것이다.(187 페이지) 기차에 얽힌 인간과 사회의 이야기가 풍성하게 드러나는 순간이다. 한국인 아내가 이야기하는 것은 속도의 차이가 낳은 정서의 차이, 세상의 변화이다.

이나라도 파리와 서울을 나란히 놓는다. 한국에서는 꽃이 너무 공식적인 반면 프랑스에서는 꽃도 자유분방하다.(206 페이지) 이나라가 파리를 이야기하는 것은 그곳이 유학(留學)지이기 때문이다. 이나라는 랜드마크 건축물은 무용하지 않지만 어떤 랜드마크가 도시의 정체성을 대단하게 창조하거나 상징할 것이라는 기대는 호들갑이라 지적한다.(243 페이지)

베제쿠르가 문이 그렇듯 다리도 인간을 연결하고 분리시키는 능력의 기호(29 페이지)라고 말했다면 이나라는 다리는 한편으로는 나누는 장소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연결하는 장소라 말한다.(247 페이지) 다리는 두 사람, 두 세계를 연결짓기도 하지만 적대적인 사람, 적대적인 세계를 분리한다.

이나라가 한국에서는 꽃이 너무 공식적이라는 말을 했다면 베제쿠르는 서울의 풍경은 과히 준법의 풍경에 가깝다는 말을 했다.(262 페이지) 이나라는 시민의 최우선 윤리는 무조건적인 준법정신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라 말한다.(265 페이지) 준법정신은 경직을 의미하는 것인가? 이나라는 서울 이야기도 많이 한다. 프랑스 이야기를 하려면 당연하다.

비교 없는 이야기는 무의미하다. 비교는 우리 것들 사이에서도 프랑스의 것들 사이에서도 행해진다. 우리가 은밀한 별실을 좋아한다면 서유럽의 유명 식당들은 대체로 전망을 제안한다.(291 페이지) 베제쿠르가 절이 개신교 교회보다 더 한국적이라는 의미는 아니라고 말했다면(73 페이지) 이나라는 은밀함의 공간이 무조건적인 배제나 궁극적인 차별의 공간은 아니고 보여주기의 공간이 무조건 자유의 생산지가 되는 것은 아니라 말한다.(295 페이지)

플라뇌르를 목적을 갖는 것으로 보는 두 사람의 시각을 확인할 수 있는 글이다. 자신만의 독특하고 예리한 관점을 가질 필요가 있음을 말해주는 시각이다. 깊게 보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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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주침의 발명 - 김행숙이 만난 시인들
김행숙 지음 / 케포이북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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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바람이 움직임 속에서 현현하듯이 마음은 무정형의 운동 속에서 언어를 고르고 만지고 굴절시키며 배달한다.” ‘김행숙이 만난 시인들이란 부제가 달린 마주침의 발명의 주요 전언(傳言)이다. 김행숙은 시인이고 국문과 교수이다. 이 책에 실린 시인들(저자가 만난 시인들)은 이성복, 황병승, 이원, 진은영, 박상순, 박형준, 김명인, 강정, 이수명, 김언 등이다.

 

마음이 무정형의 운동 속에서 언어를 고르고 만지고 굴절시키며 배달한다는 말은 열 명의 시인들에 대한 논의의 진입로 격인 프롤로그에 나온다. 그러니 책에 나오는 전 시인에 해당하는 말이고 나아가 시 자체의 특성을 아우르는 말이다.

 

세잔의 사과에서 저자 전영백은 D. H 로렌스가 세잔을 40년 동안의 긴 분투 끝에 하나의 사과를 충분히 아는 데 성공한 화가로 정의했음을 지적한다. 세잔은 사과의 본질을 포착하기 위해 40년을 바쳤다. 저자에 의하면 세잔의 사과는 그림(표상)으로 인해 실제(대상)의 근본 속성이 발현되는 것이다.

 

즉 세잔이 사과를 그림으로써 실재의 사과가 진실로 그 자체가 될 수 있었다는 의미이다. 중요한 것은 시니피에(기의); 실재/ 대상, 시니피앙(기표): 그림/ 표상이라는 등식이다. 김행숙 시인이 말한 관계도에서 마음은 시니피에이고 언어는 시니피앙이다. 김행숙 시인은 종종 배달사고가 일어날 것이라 말한다.

 

배달 사고란 언어가 마음을 정확하게 표현하지 못하는 경우를 말한다. “세상의 어떤 어떤 모퉁이에서 시인들을 만나고” “썼다는 저자는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자신이 오독하고 변형한 부분이 있음을 알고 그것을 지우고 새로 쓰게 되었음을 알게 될 것이라 말한다. 새로 쓴다는 것은 오독하고 변형한 부분을 바르게 배달한다는 의미이다.

 

이성복 시인편에 은유는 계속적으로 쇄신되어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 이 말 역시 오독하고 변형한 부분을 바르게 배달한다는 말과 차원이 같다. 황병승 시인도 비유를 한다. 나이에 대해. 새가 나뭇가지에 와서 앉으면 늘어진 나뭇가지가 (새를) 조금 무겁다고 느끼다가 새가 날아가면 그 존재를 잊어버리는 것 같은 것이 나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시인들과 대화(인터뷰)를 하며 시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이야기에는 어떤 유형의 시를 써보려 했으나 도무지 되지 않아 포기했다는 내용도 있다. 이원 시인은 자신에게 가장 부조리하게 느껴지는 것은 몸이라고 말한다. 이상한 생각들이 수도 없이 일어났다가 스러지는데 통제할 수도 없고 열어볼 수도 없는 몸에게 우리는 쩔쩔매는 꼴이라는 것이다.(63 페이지)

 

이원 시인은 욕망과 함께 언어가 움직여주어야 하고 자신이 전적으로 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시가 자신을 일으켜주기도 한다고 말한다.(68 페이지) 앞에서 세잔 이야기를 했는데 이원 시인은 들뢰즈의 감각의 논리를 인용해 세잔이 수행한 사과 하나와의 전쟁, 베이컨이 말한 머리 하나와의 전쟁에 대해 이야기한다.(74 페이지)

 

진은영 시인은 뭘 해도 지루한데 시를 쓸 때만큼은 완전한 몰두가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명징해진다는 것이다. 온전히 자기 정신으로 있는 순간들을 경험한다는 것이다.(89 페이지) 진은영 시인은 예전에 접속사, 조사 같은 것을 다 없애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한동안 시달렸다고 한다. 조사는 단어와 단어를 연결하는 기능을 하는데 단어와 단어를 자유롭게 내버려두고 싶었다는 것이다.(96 페이지)

 

언어는 어떤 감응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지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은 아니라 말하는 진은영 시인은 비평가들이 우리 시를 읽으면서 헤매는 이유는 이 시는 어떤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 나는 분석을 통해 그것을 찾아내야 한다. 만일 내가 그것을 찾아낼 수 없다면 시인인 네가 그 메시지의 전달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고, 너만 알 수 있는 방식으로 그걸 은폐하고 있기 때문이다. 너는 적어도 한 둘을 알 수 있는 방식으로 네가 말하고자 하는 본질을 전달할 의무가 있다는 고답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 말한다.(99 페이지) 감각의 ()문법을 가지고 있는 시를 의미의 문법으로 읽으면 안된다는 것이 진은영 시인의 전언이다.

 

박상순 시인은 고종석이 자신의 시를 언어로 만든 놀이공원이라 정의한 것에 동의한다.(108 페이지) 박상순 시인의 시관(詩觀)과 진은영 시인의 시관(詩觀)은 맥락이 같다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시를 쓰는 박상순은 문제를 푸는 사람이 아니라 문제를 만들어내는 사람이라 말할 수 있다고 말한다.(124 페이지) 그런데 박상순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시인들이 문제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닐지?

 

박형준 시인은 자신을 둔재로 표현하며 둔재에게는 끈질김, 지독함 같은 것이 있어야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라 말한다.(139 페이지) 김명인 시인은 시의 바탕이 진정성으로 이해될수록 그 감동의 자리는 불가해한 시쓰기의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자리이기도 했는데 그 고통은 삶의 실체를 확인하는 데서 오는 막막한 느낌들과 통하는 것이었다고 말한다.(154 페이지)

 

김명인 시인은 내게 시쓰기란 나를 알아가는 길이었다고 말한다.(159 페이지) “실존적 질문을 넘어서려고 애쓴 것이 나의 시쓰기였다면 너무 거창한 고백이 될까.“라 말하는 김명인 시인의 시 새벽까지의 끝 구절(”이 밤의 책들 다 사르리라, 나는/ 불꽃을 뛰어넘는 새벽의 사람이 되어서!“)을 음미하게 된다. 실존 이야기를 한 것을 통해 나는 시인의 새벽까지의 끝 구절이 이해하게 된다.

 

김명인 시인이 시와 삶을 나란히 이야기했지만 저자는 강정 시인은 시를 쓰는 몸으로 삶을 살고 싶어 한다는 말을 한다.(174 페이지) 록커인 강정은 짐 모리슨 때문에 랭보도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184 페이지) 나라면 짐 모리슨을 올더스 헉슬리 때문에, 아니면 올더스 헉슬리를 짐 모리슨 때문에 알게 되었다고 말할 것 같다.

 

저자는 저항이 없는 곳에 자유가 없다는 김춘수 시인의 말을, 김춘수 시인과 시적 코드가 많이 다른 강정 시인의 삶을 수식하는 데 쓴다.(189 페이지) 개인적인 이야기이지만 마주침의 발명에 나오는 시인들 가운데 이수명 시인에 대해 관심이 가장 많이 간다. 어렵기 때문이고 시도 쓰고 시평론도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시를 쓰는 이수명과 시를 말하는(논하는) 이수명은 놀랍도록 날카로운 접점을 가지고 있지만 각각 딴 세계에 있다고 말한다.(196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시를 쓰는 이수명은 무지이거나 미지인 세계에 던져져 있는 자이다.

 

이수명 시인은 시를 쓰는 일은 무엇을 원하지 않는 상태가 되는 일이다. 혹은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하는 상태가 되는 일이다. 시를 쓰기 위해서는 눈앞에 펼쳐지는 시간과 공간, 사물들, 현실의 이름들을 거부하고 그것들로부터 멀어지기를 계속해야 한다,“고 말한다.(197 페이지)

 

낯설게 보기이자 놀이라 할 수 있다. 이수명 시인은 시나 문학은 지금 현재의 혼돈하고 표류하는 것을 현재진행형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말한다.(202 페이지) 저자는 시를 쓰는 이수명은 모르는 자이지만 시를 말하는 이수명은 들여다보는 자이며 정확하게 근접해나가는 자이며 글쓰기의 공간을 인식해내려고 하는 또 다른 두뇌이자 시선이라 말한다.(204 페이지) 시를 쓰며 시를 말하는 서동욱, 김승희, 정끝별 등의 이름이 떠오른다.

 

저자는 가라타니 고진 이야기를 한다. 고진은 근대문학의 기원이라는 지점에서 내면을 말했다. 맨 얼굴의 발견과 함께, 풍경의 발견과 함께 문학에서 작동하기 시작한 내면이 그 기원을 잊고 자명해졌다는 것, 이 내면이 문학의 제도 속으로 깊숙이 들어와 버려서 어떤 전도(顚倒)가 자연물처럼 정착했다는 것을 그의 책은 포착해낸다는 것이다.(211 페이지)

 

전도란 내면이라는 것이 원래 주어져 있는 것이라는 관념, 내면이 그 자체로서 존재한다는 환상을 말한다. 이수명 시인은 자의식적으로 들어온 것이든 외부에서 심어진 것이든 구축된 자아에 전적으로 기대는 서정시는 무반성적이라는 점에서 지극히 자족적이라 말한다.

 

반성적 비판적 매개 없이 구축되어 있는 것을 배포하는 것, 그 방식으로 자기의 고통이나 깨달음을 특별히 의미 있는 것인 양 전파하는 것, 시가 그런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이수명 시인은 말한다.(211 페이지)

 

김언 시인의 전공은 공학이다. 공학도의 필수 과목인 물리학을 네 번째 수강에서야 A학점으로 정복(?)한 이력이 그에게 있다.(D F F A)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의 원리를 더듬고 상상하는 지점에서 물리학이 시와 뜻밖의 조우를 하는 경험을 했다고 한다.(218 페이지)

 

김언 시인은 자신은 시인이나 예술가보다는 굳이 말하자면 학자 타입(체질)이지 싶다고 말한다. 혼자 방에 틀어박혀 세계와 언어에 관한 모델을 세우고 허물고 또 곰곰 궁리하면서 노는 걸 좋아한다고 말한다.(219 페이지)

 

저자는 멈출 수 없다는 것이 계속해서 쓰고 많이 쓰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것은 목소리가 새어나오지 않는 저 바닥 없는 바닥으로 고요하게 내려가는 일일 수도 있으며 그러므로 그것은 침묵에 깊숙이 격정적으로 온몸을 담그는 것일 수 있으며 한없이 산만해지는 정신의 상태를 가리킬 수도 있고 너를 사랑하는 것일 수도 있고 지금 쓸 수 밖에 없는 상태에 빠졌다는 현재적인 글쓰기의 경험에 찍히는 숨찬 느낌표들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248 페이지)

 

마주침의 발명은 관념적이고 추상화 같은 글들의 모음이다. 각기 다른 개성 있는 시인 열 사람을 인터뷰한 책이지만 묘하게 그 각자의 글들이 하나로 수렴하는 듯 하다. 시와 삶의 불가분리성, 그러면서도 놀이로서의 성격을 갖는 시로 수렴되는 듯 하다. 시 자체가 감성적이고 예술적이어서 그런 관념적이고 놀이로서의 성격을 갖는 것이겠지만 저자인 김행숙의 깊이 있는 문학적 시선이 내공으로 작용한 결과라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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