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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악원, 우주의 선율을 담다 - 처음으로 읽는 조선 궁중음악 이야기
송지원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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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공자(孔子)가 순() 임금에 의해 전래된 것으로 알려진 음악의 일종인 소()를 듣고 석 달동안 음식 맛을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 반면 박지원의 열하일기 '망양록(忘羊錄)'에 의하면 박지원은 귀한 손님이 오신다기에 양 한 마리를 통째 쪄 준비해 놓고 그 손님과 진지하고도 재미 있는 음악 이야기를 하느라 양을 쪄놓은 사실을 잊었다고 한다.

 

송지원 교수는 '장악원, 우주의 선율을 담다'에서 박지원이 그럴 정도로 나눈 이야기는 조선과 중국의 음악 이야기였다고 말한다. 제목에 나오는 장악원(掌樂院)은 조선시대 궁중에서 연주되는 음악과 무용에 관한 일을 맡은 관청이다.

 

조선 성종대에는 1000여명의 음악인들이 장악원에 속해 음악을 연주했다. 조선시대에 왕실 행사가 있는 곳에는 어디든 장악원 음악인들이 있었다. 조선의 악()은 예()와 함께 의례의 핵심이었다. 장악원은 숭정원, 사간원, 홍문원, 예문관, 성균관, 춘추관과 함께 정3품 관청이었다.

 

1년 중 장악원이 가장 많이 출연하는 행사는 제사 의례이다. 장악원의 최고 책임자는 제조(提調)였다. 당상관 두 명이 맡았는데 전문 음악인이 아니라 행정관리였다. 이는 성리학자들이 임금의 몸과 관련된 정보의 총책임자를 맡았던 것과 맥락이 같다.(어의들은 진맥 외의 방법으로 임금의 몸을 진찰할 수 없었다.)

 

성리학은 조선 시대의 여성 음악인들을 남성이 주축이 되는 외연에 출현하지 못하게 했다. 인조반정 이후의 일이다. 본문에는 차비(差備)란 말이 나온다. 자비(自備) 또는 척()의 의미이고 우리 말로 잡이라 한다. 장구 잡이 등의 말을 통해 알 수 있다. 정조대의 화원을 자비대령화원이라 했다. 한문으로는 차비대령화원(差備待令畵員)으로 썼다. 정조는 귀가 밝았다.

 

세종, 세조처럼 정조는 장악원 음악인들의 연주를 다그쳤다. 특히 정조는 제사 지낼 때 연주하는 음악의 선율을 잘 알고 있었다. 정조는 사직제에서 연주되는 제례악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고 음악을 소홀히 연주하는 것을 지적하고 엄히 다스렸다. 정조는 의례와 음악의 조화를 중시했다.

 

소현세자가 청나라에서 귀국할 때 함께 온 굴씨(屈氏) 또는 굴저(屈姐)라는 궁녀가 있었다. 명나라가 쓰러져 갈 무렵 숭정제 황후의 궁녀로 일하던 여자였다. 숭정 말년에 이자성이 황도를 함락시키자 황제와 황후가 자살했다.

 

굴씨는 민간으로 몸을 피했으나 청나라 군사에 발각되었다. 청의 실권자였듼 예친왕 다르곤은 굴씨를 심양에 볼모로 있었던 소현세자에게 넘겼다. 소현세자가 귀국할 때 함께 조선에 들어온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를 모시게 되었다. 굴씨는 비파를 잘 타 장악원 소속 음악인들에게 비파를 가르쳤다.

 

이때는 조선이 전란 후유증으로 종묘/ 사직 제례악도 연주하지 못하던 때였다. 음악이 무너진 상황이었다. 굴씨는 70세까지 살다가 숙종대에 생을 마감했다. 조선은 예악정치를 구현했다. 예는 인간의 차별적 질서를 강조했고 악은 인간의 조화와 공존을 강조했다. 종묘제례시의 춤은 제후국의 위격인 육일무였다. 일수 6, 열수 6으로 36명이 추는 춤이란 말이 있고 일수 6, 열수 8 48명이 추는 춤이라는 말이 있다.

 

공자의 논어 '팔일(八佾)'편에 주자가 주석한 내용에 본인도 어느 것이 맞는지 모른다는 글이 있다. 조선 전기는 48, 중기, 후기는 36명이 했다는 기록이 있다. 종묘 제례는 조상(선왕)의 혼을 만나는 기쁜 의례 즉 길례(吉禮)이다. 장례는 흉례(凶禮)이다. 이때는 진이부작(陳而不作)했다. 악대는 진설(陳設)하고 음악은 연주하지 않은 것이다.

 

물론 3년 동안 연주를 하지 않으면 제례악을 다시 연주할 때 어려움이 생기거나 새로 만들어진 음악을 연주하지 않으면 전승이 끊어지므로 그런 것을 우려해 악생들의 연습은 허용했다. 궁중 연향에서 연행되는 춤을 정재(呈才)라 한다. 재주를 드리다, 재예를 올리다란 뜻이다.

 

조선은 무너진 예를 악으로 일으키려 했다. 유교를 국시로 한 조선은 <세종실록> '오례'로 국가례의 기틀을 마련했고 성종대의 <국조오례의>로 전모를 정리했다. 맹사성은 악인이기도 했다. 장악원의 전신인 관습도감의 제조로서 맹사성의 업적은 눈부셨다. 조선 초기 궁중 음악은 그로부터 정비되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맹사성은 세종대의 박연과 함께 지악지신(知樂之臣) 즉 악을 잘 아는 신하로 불렸다. 박연은 세종의 뛰어난 음악 비서였다. 성종대의 장악원 제조였던 성현을 빼놓을 수 없다. 성현은 '악학궤범'의 저자이다.

 

김용겸(金用謙)은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끈 정조의 기대주였다. 김용겸은 악서인 '율려신서(律呂新書)'를 읽었느냐는 정조의 물음에 그 책을 보았고 종과 석경 소리를 들으면 높고 낮음 정도는 분별할 수 있다고 답했다.

 

예와 악의 조화를 중요하게 여긴 정조는 음률과 예학에 두루 깊은 인재 김용겸을 장악원 제조로 임명했다. 김용겸은 박지원, 홍대용, 이서구, 정철조 같은 연암 그룹 구성원들과 자주 어울렸다. 정조 대의 학자 출신 관료들은 조선의 어느 시기보다도 음악 교육에 비중을 두었다.

 

정조가 집권 초반 규장각을 설치하면서 아악기인 종, , , 슬을 규장각에 하사한 것은 악을 중시한다는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예와 악을 함께 갖추기 위한 정조의 노력 덕에 정조 시대는 문화융성기로 자리매김했다. 이는 정조 자신의 음악 실력과 무관하지 않다.

 

정조는 1776년 즉위하자마자 생부 사도세자의 시호를 장헌으로 올리고 사도세자를 모셨던 수은묘를 경모궁(오늘날 서울대 의대 자리)으로 승격시켰다. 경모궁의 제례를 정하고 경모궁제례악도 만들었다. 고종황제가 장헌세자를 장종으로 추존하며 경모궁의 신주를 종묘로 옮긴 이후부터 경모궁 제례는 열리지 않는다.

 

조선시대에는 풍류를 아는 선비들은 누구나 왠만큼 거문고를 연주했다. 옛 선비들은 거문고를 삿된 마음을 금하여 인심을 바르게 하는 것으로 여겼다. 거문고는 단순히 악기가 아니라 마음을 다잡고 성정(性情)을 기르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 때문에 거문고 음악이 예술성을 추구하거나 기교를 자랑하는 음악으로 나아가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두 줄의 악기이지만 표현 영역은 거의 무한대인 해금은 현악기 중심인 음악에도 관악기 중심인 음악에도 두루<> 어울려 비사비죽(非絲非竹)의 악기 즉 현악기도 아니고 관악기도 아닌 악기로 불렸다.(비사비죽은 18세기 유명 해금 악사 유우춘의 표현이다.)

 

그러나 저자는 다른 현악기는 현을 뜯거나 튕기고 나서 일정 시간이 지나면 음이 끊어지지만 해금은 줄을 마찰시키는 한 계속 소리가 나기에 관악기로도 볼 여지가 있어 관악기이면서 현악기라 해야 더 정확한 표현이 될 듯 하다고 말한다.

 

예전에 왕이 죽으면 명기(明器) 악기라 해서 소형 악기를 만들어 왕의 무덤에 묻었다. 조선 전기부터 경종의 무덤까지 아쟁을 묻었는데 정조대 이후에는 아악기만을 묻었다. 비파(批把)라는 이름은 악기 연주법에서 유래했다. 손을 앞으로 내밀어 타는 것을 비, 안으로 끌어 당기며 연주하는 것을 파라 한다. 오늘날 비파는 비파(琵琶)로 쓴다.

 

맹사성, 박연, 정약대, 김계선 등이 대금의 명인이었다. 특히 정약대는 '정약대의 대금'(조용미 시인의 시)이란 시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마지막 연에 이런 구절이 있다. "..청아하고 신묘하고 장쾌한 소리를 향해 대금을 지고/ 사막을 건너야 할 운명을 火印처럼 몸에 새기고 태어난/ 사람, 그의 귀는 10리 밖에서도 대금 소리를 잡아냈을까// 정약대는 낙타였다"

 

저자의 책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옛 조상들은 예()와 악()을 함께 추구했다는 점이다. 특히 무너진 예를 악으로 바로 세우려 했다. 늘 연마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던 장악원 악인들을 통해 연습의 의미를 음미하게 된다. 특히 의례와 음악의 조화를 중시했던 정조를 다시 보게 되었음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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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의 도시 - 서울의 풍경과 권위의 연출
이기봉 지음 / 사회평론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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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의 도시'는 지리학자의 책이다. 풍수를 연상하고 책을 접한 것은 아니다. 도시에 대한 관심이 주된 요인이다. 풍수는 정치적으로 이용된 경우가 많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새 나라를 세우는 것 만큼 어려운 것이 후속 작업이다. 정통성 확립을 말하는 것이다. 천도는 새 임금과 신하들의 이해관계가 다를 수 밖에 없는 사안이다.

 

풍수를 근거로 논전을 펴고 결론을 내린 과정이 조선 건국 이후 벌어졌다. 조선은 고려 백성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풍수를 주요 원리로 활용한 고려의 관례대로 풍수를 활용했다. 반면 고려와는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나라임을 보이기 위해 중국의 도시 조영 원리를 새롭게 도입했다.

 

저자는 종묘와 사직을 언급하며 궁궐 - - 하늘이 일직선상에 위치한 것을 3단계 풍경이라 정의한다. 일직선상에 위치시키기 위해 진입로가 정방향이 아니게 설정되었다는 것으로 종묘도 사직도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라는 것이다. 좌묘우사를 따르면서도 정확한 좌우대칭을 따르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다.

 

종묘는 외대문(정문)과 보현봉을 일치시키기 위해 진입로를 정북이 아닌 서북쪽으로 향하게 했고 사직은 인왕산과 일직선상에 놓이게 하기 위해 진입로를 서서북으로 향하게 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창경궁이 동향인 이유도 3단계 풍경을 설정하기 위해서였다고 설명한다.

 

저자에 의하면 진입로를 꺾고 정전의 방향을 달리하고 정전의 위치를 치우쳐 만든 것들은 모두 3단계 풍경을 구현하기 위한 필연의 산물이다. 인상적인 것은 보편과 특수가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94 페이지)

 

권위의 풍경을 만들고자 하는 목적(보편성)은 동일하지만 그 방법(특수성)은 각기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나라의 경우 삼국시대부터 거대 건축물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고 말한다.(106 페이지) 이는 권위를 시각화하려는 시도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구현방식을 달리하기 시작한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경우 산에서 궁궐을 내려다볼 수 있는 구조를 하고 있는데 이는 외국의 사례에서 찾아볼 수 없다. 우리의 경우 권위를 표현하는 중심은 경복궁 너머의 북한산, 관악산이고 건축물인 경복궁의 경우 그 자체가 별개의 시각대상이 아니라 북한산, 관악산과 얼마나 일치감을 줄 수 있는지의 관점에서 결정된다.(110 페이지)

 

이는 경복궁 뿐 아니라 우리의 주요 궁궐, 종묘, 사직, 성균관, 지방 고을의 관아, 향교, 사찰, 서원 등에 두루 해당한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높고 웅장한 건축물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세계의 풍경과 3단계 풍경의 차이는 산의 유무이다.(117 페이지) 저자는 명당을 살기 좋은 땅으로 이해하는 것은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를 바라본 낭만적이고 비학문적 시선일 뿐이라 말한다. 가령 서울 최고의 명당인 경복궁과 근정전의 터를 잡는 데 동원된 풍수 명당 논리는 사람이 살기에 편안한 땅을 찾기 위한 이론이 아니라 누구도 범접하기 어려운 권위 있는 공간 찾기 이론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흥미롭다. 창경궁이 남향이 아닌 동향인 이유가 지금껏 정치를 하는 군주들의 궁이 아니라 대비(大妃)들을 위해 지은 궁이기 때문이라는 설이 정답이라도 되는 듯 퍼져있는 상황에서 풍수에 근거 3단계 풍경 이론을 제시한 것만 보아도 그 점을 알 수 있다.

 

저자는 경복궁이 사람이 살기 좋은 땅을 고르려 한 결과 선정, 영건(營建)된 것이 아니라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권위 있는 공간을 찾은 결과 영건된 것이라 말한다. 그는 명당에 터를 잡은 것과 상서로운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우연의 일치일 뿐 실질적 인과관계는 전혀 없다는 말을 한다.

 

중요한 것은 풍수가 가진 실용적 측면과 사상으로서의 풍수란 말(144 페이지)이다. 간혹 풍수가 가진 실용적 측면이 주목되기도 했지만 이 경우 사상으로서의 풍수를 제대로 포착하지 못했다는 말이 중요하다.

 

책을 읽다가 뷔리당의 당나귀 생각을 했다. 모든 면에서 똑같은 두 개의 건초더미 앞에 서 어떤 선택도 할 수 없어 굶어죽는 당나귀이다. 나는 점서(占書)로서의 성격과 사상서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주역도 생각했다. 지금껏 나는 뷔리당의 당나귀처럼 결론을 내리지 못했었다. 풍수에 대해서도 주역에 대해서도. 결론은 둘 다 사상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실용적 측면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적어도 지금으로서는 고려 대상은 아니라는 의미다.

 

고려의 경우 건국 이후 임금풍수(임금과 관련된 모든 공간에 적용한 풍수; 172 페이지)가 역사의 전면에 다시 나타난 것은 110여년이 지난 문종, 숙종, 예종 시기이다. 고려시대의 정치가 가장 안정되고 문물이 가장 발달했다고 평가받는 때였다. 이는 거꾸로 말하면 건국과 통일의 긴장감이 사라져서 새로운 변화를 통해 긴장감을 다시 불어넣어야 하는 시기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때 이용되었던 것이 바로 풍수의 지기쇠왕설인데 수도로 정해진 지 오래되어 약해지기 시작했다고 여겨진 개성의 지기를 보완하기 위해 새로운 궁궐이나 작은 서울인 남경을 건립하고 서경의 역할을 강화시키는 현상으로 나타났다.(188 페이지)

 

저자는 풍수 이론가들이 득수국(得水局) 명당은 방어에 취약하고 장풍국(藏風局) 명당은 방어에 유리하다고 말하면서도 실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지레 방어를 포기하고 도망간 전력을 왜 고려하지 않는지 묻는다. 경회루 부분도 흥미롭다.

 

경회루는 다른 나라의 어떤 누각과 정자보다도 크다. 저자에 의하면 경회루는 연못이나 인공적으로 심은 나무보다 인왕산, 북악산, 경복궁의 전각 지붕과 남산을 바라볼 수 있게 설계되어 건물 자체가 클 수 밖에 없다.(261 페이지) 저자는 향원정도 천원지방의 영향이 아닌 경회루와 같은 차경(借景)의 원리에 따라 지어진 것이라 말한다.(268 페이지) 저자는 손가락이 아닌 달을 보아야 정원이 보인다고 말한다 .

 

저자는 새로운 상식을 만들어나갈 수 있는 연구자의 희망을 이야기한다. 멋진 말이다. 이런 책을 보면 기존의 논의가 참 공허하고 아무 의미도 없는 천원지방 등의 말을 해설 때 지양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릴케가 '말테의 수기'에서 말한 생각하는 법을 배운다는 말을 음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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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철학 에세이 - 개정증보판 동녘선서 93
김교빈 지음, 이부록 그림 / 동녘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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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교빈 교수의 '한국 철학 에세이는 김선희 교수의 '동양철학 스케치 2'에 이어 읽은 책이다. 신라 시대의 원효(元曉), 고려 시대의 지눌(知訥), 조선 중기의 화담(花潭) 서경덕, 조선 중기의 회재(晦齋) 이언적, 조선 중기의 퇴계(退溪) 이황, 율곡(栗谷) 이이, 인조 시대에서 영조 시대를 살았던 하곡(霞谷) 정제두, 연암(燕巖) 박지원, 다산(茶山) 정약용, 수운(水雲) 최제우 등 10인의 철학자를 시대순으로 다루었다.

 

한국철학은 동양철학의 한 범주를 이루고 있다. 동양철학은 불교, 도교, 유교 등이 주종을 이룬다. 자생적인 우리 철학으로 내세울 수 있는 것이 동학이다. '한국철학 에세이'가 다룬 철학자들의 주종은 유교 그 가운데서도 성리학자들이다. 불교의 원효, 동학의 수운 최제우가 우리 자생의 철학자로 선택되었다.

 

원효의 철학은 화쟁(和諍; 논쟁을 조화시킨다는 의미)의 철학이다. 이는 일즉다 다즉일(一則多 多則一)의 화엄(華嚴) 사상에 기반을 둔 것이다. 목우자(牧牛自) 지눌은 교종(敎宗)의 원효와 쌍벽을 이루는 선종(禪宗)의 대가이다.

 

선종이 신라 후기에 자리 잡을 수 있었던 데는 두 가지 배경이 있다. 하나는 사람의 마음을 곧장 지적하여 깨달음을 얻도록 해주는 선종 자체의 가르침이고 신라의 왕권을 지탱시켜주는 이데올로기인 교종에 대항한 호족들의 이데올로기로서의 역할이다.(67 페이지)

 

선종과 교종의 관계에 대해 중요하게 거론해야 할 사람이 대각국사 의천(義天; 1055-1101)이다. 그는 옛 승려들은 으레 부처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선을 익혔는데 지금 승려들은 부처의 가르침을 버리고 입으로만 선을 떠들고 있다고 보았다. 가르침을 버리고 선만 하는 것을 경계하면서도 선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68 페이지)

 

오늘날 조계종은 선종이면서도 경전을 중시한다. 이는 지눌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지눌은 부처가 입으로 전한 교()와 마음으로 전한 선()을 합칠 수 있다고 보았다.(76 페이지) 서경덕의 철학은 기() 중심의 철학이다. ()가 특정 물건의 설계도라면 기()는 부품들로 비유할 수 있다.(92 페이지)

 

이와 기는 함께 한다. 이 지적은 이황과 기대승의 47정 논쟁에서 중요한 바탕으로 작용한다. 이 철학이 불변의 원리를 중시하는 철학이라면 기 철학은 변화를 중시하는 철학이다.(96 페이지) 모든 사물은 기로 이루어졌고 기는 끊임 없이 변한다.

 

성리학은 자연과 인간을 통일되게 설명하는 이론 체계이다. 성리학의 기반인 유학은 전통적으로 가치 문제가 중심이었다. 우주론이 상대적으로 약할 수 밖에 없었는데 송대 이후 존재론적 탐구가 강한 도교와 불교를 받아들여 좀더 강한 사유 체계로 무장했다.(90, 91 페이지)

 

()는 모든 사물의 원리이자 도덕 법칙이다. ()는 구체적 사물을 이루는 바탕이다. 기가 구체화되면 질()이 되고 그것은 형()으로 드러난다.(91 페이지) 서경덕은 변화의 원인을 기() 자체에서 찾았다. 서경덕의 존재론 철학에서는 죽음까지도 그저 바뀌는 것일 뿐 슬플 것도 기쁠 것도 없는 것이다.

 

서경덕의 다른 호는 복재(復齋)이다. 지뢰복(/)괘의 그 복이다.(괘의 변화는 아래줄에서부터 시작된다.) 서경덕은 복괘에서 천지 자연의 중심을 본다고 말했다. ()를 강조한 서경덕의 철학에 대해 이황은 전면 부정, (이와 기를 함께 강조한) 이이는 부분 부정했다.(물론 서경덕은 기 자체가 아닌 기의 변화를 강조했다.)

 

서경덕의 주요 제자들 중 하나가 토정(土亭) 이지함이다. 서경덕은 선생 없이 혼자 공부해 고생이 아주 심하다고 했지만 많은 제자를 남겼다.(107 페이지) 이적(李迪)이 본명이었던 이언적(李彦迪)은 동명이인이 있어 중종의 명으로 언()을 넣어 이언적이 되었다. 이언적은 태극이 초월적이지만 우리의 구체적 현실을 떠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했다.

 

한국 성리학의 핵심 논의는 이황과 이이의 논쟁에서 이루어졌지만 바탕은 서경덕과 이언적에 의해 마련되었다. 서경덕의 철학은 이이에게, 이언적의 철학은 이황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133 페이지)

 

이언적의 철학이 이황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니 회퇴변척(晦退辨斥)이 생각난다. 회는 회암(晦庵) 즉 이언적이고 퇴(退)는 퇴계(退溪) 즉 이황이다. 회퇴변척이란 정인홍이 무함을 받은 스승 남명 조식을 변호하기 위해 이언적과 이황을 배척한 사건을 말한다.

 

이언적처럼 이()를 변해서는 안 되는 도덕 원리로 보고 중시하는 철학은 보수적이 될 수 밖에 없다. 또한 이는 진리가 원래 인간의 마음에 있다고 보기에 사회 구조의 개혁보다는 개인의 수양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다.(137 페이지)

 

이황과 기대승의 47정 논쟁은 유명하다. 이황은 논쟁을 통해 이와 기가 함께 하지만 구별하지 않을 수 없다고 보는 관점을 고수했다. 이황은 기대승처럼 4(인의 단서인 측은지심, 의의 단서인 수오지심, 예의 단서인 사양지심, 지의 단서인 시비지심)이 모두 악이 될 수도 있는 기()에서 유래한다면 군자와 소인을 구분할 수 없다고 보았다.(163 페이지)

 

이이의 호인 율곡(栗谷)은 밤나무가 많은 처가인 파주에서 기원했다. 이황이 혼란한 현실에서 이상을 가려내어 그것을 지켜가기 위해 가장 높은 도덕적 원리를 강조한 반면 이이는 현실을 떠난 이상을 인정하지 않았다.(186 페이지) 이이는 모든 변화는 음양의 순환이며 음양 또한 하나의 기()일 뿐이라 보았다. 따라서 그런 변화는 모두 기의 변화이고 그런 점에서 이도 기를 떠나서는 말할 수 없다.(187, 188 페이지)

 

기호학파인 이이의 학문은 사계 김장생, 우암 송시열 등으로 이어진다.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 1649-1736)는 정몽주의 11대손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주자학을 배웠고 나이 들어서도 변함 없이 주자학을 공부하는 줄 알았지만 34세에 자신의 학문이 주자학이 아니라 양명학이라 선언했다.

 

송에서 명으로 시대가 바뀌며 일어난 변화 중 하나는 사물의 이치를 중시하는 이학(理學)에서 마음의 작용을 강조하는 심학(心學)으로 흐름이 바뀐 것이다.(215 페이지) 양명학의 시조 왕양명은 내 마음이 그대로 만물의 이치이기에 주희의 이론처럼 사물에서 이치를 탐구(격물치지; 格物致知)한다면 내 마음과 사물의 이치가 둘로 나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217 페이지)

 

왕양명에게 한 제자가 절벽의 꽃나무를 가리키며 선생님께서는 마음 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하셨는데 깊은 산속에서 저 혼자 피고 지는 이 꽃나무는 제 마음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라고 물었다.

 

이에 왕양명은 그대가 이 꽃을 보기 전에는 이 꽃이나 그대 마음이나 모두 고요할 뿐이었지만 그대가 와서 이 꽃을 보았을 때 비로소 꽃 빛깔이 일시에 또렷해졌으니 곧 이 꽃나무가 그대 마음 밖에 있는 것이 아님을 알지 않겠는가? 라고 답했다.(219 페이지)

 

우리나라에 양명학이 들어온 것은 중종 무렵이다. 양명학 도입 초기에는 호감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퇴계가 비판의 글을 몇 편 쓴 이래 상황이 바뀌었다. 퇴계의 글은 순수한 학문적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조선 후기 당쟁 격화와 함께 양명학은 기피 대상이 되었다.

 

정제두는 주자학을 긍정 평가했지만 격물치지에 대해서는 절대 주희의 생각을 수용하지 않았다. 정제두는 주희의 격물치지를 유학 근본의 가르침과도 어긋난다고 보았다. 왕양명은 이와 기를 나누어 보는 주희와 달리 이기일원론을 주장했다.

 

정제두는 소중화 의식에 사로잡혀 대의명분만을 강조하는 집권세력을 매섭게 비판했다. 정제두는 청나라(황제)에 무릎 꿇고 절하는 것이나 신하를 자칭하는 것이 치욕이라면 청의 연호도 받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제두는 일관성 없이 명분만 내세우는 지식인들의 허위의식을 비판한 것이다. 그는 이어 오랑캐인 청나라 역시 양지(良知; 날 때부터 가지는 아는 힘)를 가지고 있으므로 그들과 교류할 수 있다고 보았다.(237 페이지)

 

박지원은 출세를 위한 과거 시험과는 담을 쌓은 채 초야에 묻혀 살며 서얼 출신인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서이수 등을 아끼고 지도했다. 박지원은 평소 가장 큰 배척 대상인 불교에 대해 긍정 평가했는가 하면 주자학자들이 신주처럼 떠받드는 시경에 나오는 시들의 순수성을 의심하기도 했다.(251 페이지)

 

박지원은 귀족 세계의 신선놀음만을 그렸던 서포와 달리 양반들의 허위의식을 가차 없이 비판했다. 박지원은 문학가로서, 그리고 개혁사상가로서 살았다. 그의 사상이 담긴 '연암집'은 불온한 사상이 담긴 금서처럼 취급되었다. 개화사상의 대부 역할을 했던 손자 박규수마저도 할아버지의 문집을 발간하자는 동생의 제안을 공연히 말썽을 일으킬 필요가 없다며 거절할 정도였다.

 

그는 근본적으로 사회 구조를 바꾸려 했고 많은 젊은이들이 그를 따랐다. 다산의 호 가운데 열수(洌水)가 있다. 열수는 산수(汕水)라 불린 북한강과 습수(隰水)라 불린 남한강이 만나는 지점이다. 실제 그의 철학은 경세치용과 이용후생의 흐름을 종합한 철학이다.

 

경세치용 학파는 이이에서 시작해 유형원, 이익으로 이어진 흐름으로 실학과 주자학을 별 모순 없이 추구한 학파였고 박지원, 박제가, 홍대용 등의 이용후생 학파는 북학파로 불린 학파였다.(김정희 중심의 학파는 실사구시학파이다.)

 

정약용은 스스로 지은 비문에서 자신의 학문을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으로 나누었다. 물론 치인은 백성을 섬기는 것을 의미한다. 정약용은 시대의 요구에 부응해 문제를 드러낸 성리학을 넘어 실천을 중시했던 공맹 유학으로 돌아가려 했다.

 

정약용은 시문학에도 뛰어난 모습을 보였다. 형식면에서는 민중지향의 패관문학을 부정하고 한문으로 글을 썼지만 내용은 일반 민중들의 삶을 표현한 작품들이 주가 되었다. 정약용은 한문 시를 쓰면서도 중국식의 율, , 운 등을 따르지 않았다.

 

정약용은 음양이란 본래 밝은 곳과 어두운 곳을 뜻하며 오행이란 만물 가운데 다섯 가지 요소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따라서 한의사들이 음양오행 이론을 가지고 진맥을 해서 오장에 대해 말하는 것은 흘러가는 한강을 보고 저 물은 오대산에서 온 것이며 저 물은 금강산에서 온 것이라 말하는 것과 같다고 보았다.

 

정약용은 오행을 부정했다. 실험으로 증명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이다. 정약용은 1012, 60갑자 등을 부정했다. 주역의 경학적 측면은 중시했지만 점치는 행위는 비판했다.(286, 287 페이지)

 

정약용은 풍수지리, 관상 등도 부정했다. 정약용은 풍수지리는 고려장을 없애기 위해 좋은 자리에 장사지내면 복을 받는다고 한 것인데 남의 묘 자리를 파내고 제 부모를 묻는 폐단에까지 이르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정약용은 지역을 가지고 논하자면 공자가 이상시했던 주()나라도 오랑캐라고 주장했다. 정약용은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할 수 있는 능력을 하늘에 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주적 선택 의지에 두었다. 정약용은 인간의 욕망도 긍정했다. 정약용에게 욕망은 구체적 삶의 추동력이었다.

 

정약용은 인간을 형이상학적이며 보편적인 존재로 본 성리학에 반대한 것이다. 정약용은 생산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분배에도 참여하지 말라고 주장했다. 정약용은 명철보신(明哲保身)에 대해서도 세상의 흐름을 꿰뚫어 봄으로써 자신의 몸을 잘 지킨다는 전통적 풀이와 달리 명은 선악을 잘 분별하는 것이고 철은 옳고 그름을 잘 살피는 것이고 보는 약한 사람들을 돕고 지켜주는 것으로 풀이했다.(297 페이지)

 

위당 정인보 선생은 다산 선생 한 사람에 대한 연구는 곧 조선사의 연구요 조선 혼의 명암 또는 전 조선의 흥망성쇠에 관한 연구라 말했다. 일본 학자들도 다산은 조선의 영광이라고 말했다.

 

동학을 창시한 수운 최제우는 원래 이름인 제선(濟宣)을 버리고 어리석은 백성을 구하겠다는 뜻에서 35세에 이름을 제우(濟愚)로 바꿨다.(; 어리석을 우.) 2대 최시형의 뒤를 이어 손병희가 3대 교주가 되었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시에는 통령(統領)이라는 지위로 북접(北接) 농민군을 이끌고 전봉준이 이끄는 남접(南接)을 치러 내려왔다가 논산에서 남벌기(南伐旗)를 찢고 힘을 합쳐 외세에 대항해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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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록 - 내 붓을 들어 한의 세월을 적는다 서해문집 오래된책방 4
혜경궁 홍씨 지음, 이선형 옮김 / 서해문집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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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란 많은 한중록(閑中錄)을 읽고 리뷰를 쓰게 되었다. 이덕일 저자의 '사도세자의 고백'을 읽고 궁금증에 읽게 된 책이다. 잘 알려졌듯 '한중록'의 저자는 혜경궁 홍씨다. 뜻 밖에도 '한중록'의 한은 한()이 아니라 한()이다. 왜 이런 단어를 썼을까? 첨예한 이해관계의 현장에서 물러나 쓴 한가한 즉 여유롭게 관조하듯 쓴 객관적인 글임을 강조하기 위해 쓴 것일까?

 

기록에 의하면 '한중록'은 본집에 혜경궁 홍씨의 필적이 남은 것이 없으니 잘 간수하여 대대로 전할 글을 써달라는 조카 홍수영(洪守榮; 혜경궁의 큰 오빠 홍낙인의 큰 아들)의 제안을 받아들여 쓴 책이다.

 

본집에 혜경궁의 필적이 없는 것은 혜경궁 홍씨가 열 살의 어린 나이에 세자빈이 되어 입궐했기에 친정 부모를 그리워해 편지를 자주 주고받던 차에 친정 아버지 홍봉한(洪鳳漢)이 외간 편지가 궁 안에 돌아다니는 것은 조심해야 할 일이라며 자신들(아버지 홍봉한과 어머니 한산 이씨)은 안부만을 묻는 편지를 보냈고 딸이 보낸 편지는 세초(洗草)했기 때문이다.

 

혜경궁 호씨의 시호는 헌경혜빈(獻敬惠嬪)이고 혜경궁은 정조가 내린 궁호(宮號)이다. 이태준은 "내 좁은 눈으로는"이란 단서를 달아 '한중록''인현왕후전'과 함께 조선 산문의 고전이라 평했다.(창비 출간 '문장강화' 328 페이지)

 

이태준은 "뜻을 전하는 것 외에 어디 무엇이 있는가?"란 말을 하며 산문은 오직 뜻(내용)에 충실해야 하는데 낭독하기 좋아야 좋은 글이라 여기는 것 때문에 산문 발달이 더디게 된 것이라는 말을 했다.(창비 출간 '문장강화' 103-105 페이지) 나는 이 말을 내용의 충실성은 안중에 없고 세련되게 쓰려는 사람들이 참고해야 할 말이라 생각한다.

 

각설하고 '한중록'은 전 여섯 권으로 된 책으로 기록 연대도 다르고 내용도 차별적이다. 가령 1, 4권은 혜경궁 홍씨의 회갑에, 사도세자의 비극인 임오화변을 기록한 2, 3권은 71세에, 5권은 67세에, 1-5권을 간추려 정리한 6권은 68세에 쓴 글이다. 핵심인 2, 3권 외의 나머지 권은 사소하거나 기록적 가치가 없는 것들까지 장황하게 기록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뭐니 뭐니 해도 '한중록'은 기록자인 혜경궁 홍씨가 주(). 영조, 사도세자, 정조, 인원왕후(숙종의 두 번째 계비), 정성왕후(영조의 정비), 정순왕후(영조의 계비), 순조, 홍봉한, 홍인한, 홍국영, 효장세자, 화순, 화평, 화협, 사도세자의 정적이었던 화완(옹주), 선희궁(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 등은 보조 인물들이다.

 

'한중록'은 누가 뭐래도 혜경궁 홍씨가 자신과 자신의 집안은 사도세자의 죽음에 아무런 책임이 없음을 말하기 위해 쓴 글이고 조카에게 쓰는 편지 형식의 글이다. 그래서 그런지 당쟁 또는 당파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사건을 영조와 사도세자의 개인적 갈등으로 환원시켜 설명했다는 아쉬움을 준다.

 

이태준이 우리 산문의 고전이라 평한 만큼 '한중록'은 꼼꼼하고 세밀하다. 인상적인 것은 언급된 많은 사람들이 부모, 임금 등을 생각하는 마음이 간절하고 깊으며 사도세자나 정조를 통해 알 수 있듯 어린 나이에 철이 들고 조숙했다는 점 등이다.

 

영조는 화평과 화완을 편애하고 사도세자와 화협, 화순 옹주는 극도로 미워하는 등 편벽된 성격, 성향을 보였다. 혜경궁 홍씨는 영조가 어린 사도세자를 경종을 모셨던 궁녀들로 하여금 모시게 했다는 말을 한다. 궁녀들은 명확한 정치적 성향을 가진 인물들이다. 경종의 궁녀들은 소론 성향이었다.

 

영조는 노론의 도움으로 왕이 되었다. 탕평책의 일환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사도세자를 소론 성향의 궁녀들로 하여금 돌보게 한 것은 영조의 실수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이중 구속(double bund) 상태에 빠지게 했고 날씨가 나쁜 것도 사도세자 탓이라 말하기까지 했다.

 

이중 구속이란 상대를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게 만드는 악습이다. 영조가 쓸데 없이 양위 소동을 벌여 사람들 특히 사도세자를 힘들게 했거니와 사도세자가 조정 신하의 상서(上書)를 보고하면 그만한 일을 스스로 결단하지 못하고 나를 번거롭게 하냐고 했고, 보고하지 않으면 그런 일을 내게 묻지 않고 혼자 결정했느냐고 꾸중했다.

 

영조는 사도세자에 대해 조용히 타일러도 될 일을 신하들 앞에서 큰 소리로 꾸짖고 부모를 모르는 것이 자식을 알겠느냐며 물러가라고 하는 등 함부로 대했다. 영조가 인원왕후에게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한다고 하자 귀가 어두운 인원왕후가 그러라고 하니 영문도 모르는 사도세자는 얼음 위에서 석고대죄를 했고 머리를 조아려 피가 나기까지 했다.

 

영조는 신임을 잃은 사도세자의 말을 듣지 않아 사도세자로 하여금 하지도 않은 일을 했다고 아뢰도록 했고 실수를 고의로 간주하기도 했다. 혜경궁 홍씨는 남편 사도세자를 정신 이상자라 썼다. 영조의 편벽된 성격이 사도세자의 정신 이상을 초래했다고 썼다. 물론 중간중간 정신 이상자로서는 할 수 없는 일과 말을 사도세자가 했다고 썼다.

 

혜경궁 홍씨는 아버지와 영조 사이를 옛 사적(史籍)에도 없는 아주 드문 최고의 관계, 인연으로 그렸다. 혜경궁 홍씨는 임오화변을 뼈에 사무친 지극한 원한(296 페이지)이라 표현했지만 뒤주에 갇혀 고통 속에 죽어간 사도세자에 대한 감정은 표출하지 않고 간략하게 사건 위주로 기록했을 뿐이다.

 

영조실록에는 뒤주란 말이 나오지 않고 안에다 엄중히 가두었다고만 나와 있고 한중록에 뒤주라고 나오고 정조실록에는 한 물건이라고 나온다.(윤정란 지음 '왕비로 보는 조선왕조' 406 페이지) 혜경궁 홍씨는 영조에게 자신과 정조가 살아 있는 것은 마마의 은혜 덕분이라 아뢴 한편(217 페이지) 영조가 아들한테도 그랬는데 손자에게는 또 어떠실지 누가 알겠는가란 말을 했다.(296 페이지)

 

혜경궁 홍씨는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가 아들의 병이 망극하여 성궁과 종사(宗社)가 위태위태한 것이 경각에 달렸으니 영조가 애통망극하지만 어쩔 수 없이 아들을 죽인 것이라고 했다고 썼다. 선희궁은 영조에게 성궁을 보호하고 세손(정조)을 건져 종사를 평안히 하는 것이 옳으니 대처분을 하고 다만 은혜를 끼쳐 세손 모자는 평안케 할 것을 간청했다.(196 페이지)

 

후에 선희궁은 자신이 아들에게 한 일은 종사와 임금을 위한 일이었으나 모질고 흉한 일, 아들에게 차마 못할 일이라 말했다.(218 페이지) 혜경궁 홍씨는 사도세자가 (영조가) 자신을 폐하고 세손을 효장세자의 양자로 삼으시면 어찌하겠나? 세손이 있는 이상 자신이 없다고 한들 크게 상관을 하시겠는가?란 말을 했다고 전하며 사도세자가 미래의 일을 능히 헤아린 것이라 말한다.(182, 183 페이지)

 

혜경궁 홍씨는 작은 아버지 홍인한이 세손은 나랏 일과 이조판서와 병조판서, 노론과 소론을 알 필요가 없다고 말한 것에 대해 정조가 1804년에 홍인한의 일도 풀 것이라고 했지만 불의에 승하한 탓에 안타깝게 되었다는 말을 했다. 끝까지 변명으로 일관했음을 알 수 있다.

 

사도세자는 경종을 모셨던 궁녀들로부터 경종이 노론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말을 듣고 영조와 노론에 반감을 갖게 되었다. 노론은 소론 중심의 정치를 하는 사도세자를 제거할 수 없자 동궁 하인 나경언을 시켜 세자가 반역을 꾀하고 있다는 거짓 고변을 하게 했다. 영조는 깜짝 놀라 홍봉한으로 하여금 조사를 하도록 지시했고 홍봉한 역시 노론이기에 사도세자가 반역을 꾀한다는 말이 사실인 것으로 얼버무려 보고했다.

 

물론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 곳곳에서 아버지를 다정다감하고 공정한 사람으로 묘사했다. 홍봉한의 말만 듣고 더 이상의 조사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고 사도세자에게 자결을 명한 영조의 잘못은 크다. 이상 성격 이전에 그렇게 중대한 사안을 서둘러 결론낸 것이 잘못인 것이다.

 

홍봉한은 노론 세력으로서 계속 사도세자를 무고했다. 혜경궁 홍씨가 '한중록'을 쓴 시점은 사도세자와 영조는 물론 정조까지 죽은 후이다. 사도세자 사건의 생생한 목격자를 자처하고 나선 것이다. ()이란 말이 수비가 하나도 없는 오픈 찬스를 의미하는 것에 비유하고 싶다. 혜경궁 홍씨는 주상(정조)이 사도세자의 자손으로 그때 일을 망연히 모르는 것이 망극하고 시비를 분별하지 못함이 민망하여 마지못해 기록하게 된 것(222 페이지)이라 썼다.

 

그리고 임오화변에 대해 누가 나만큼 알겠냐(219 페이지)고 썼다. 누가 나만큼 알겠냐는 말은 논란을 방증하는 말이고 굳이 할 필요가 없는 말이다. 슬프고 안타깝고 아프다. ‘한중록은 관점이 다른 글이 아니라 사실을 왜곡하거나 모른 척 한 글이다. 역사적 사건을 구구절절하게 기록한 책이란 점에서 고전이라 할 수 있겠지만 문학성이나 진실의 관점에서는 고전이라는 생각을 하게 하지는 않는 책이 한중록이다.

 

혜경궁 홍씨가 아들을 간신히 길러 구오(九五)에 오르시게 했다며 어미의 마음으로 귀하고 기쁘게 여긴다는 말에 대해 편저자가 한 설명을 이야기하고 싶다. 구오를 단지 임금의 자리를 뜻하는 주역의 말이라고 설명한 것은 아쉽다. 주역 64괘의 첫 괘인 중천건(重天乾)의 다섯번째 양효인 구오(중천건괘는 여섯 효가 모두 양효이다.)의 효사(爻辭)는 하늘에 용이 나는 것 즉 임금의 자리에 오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와 다르게 여섯 번째(상구; 上九) 효사는 항룡유회(亢龍有悔)로 높이 나는 용은 후회할 것이란 의미이다. 구오라고만 설명한 것은 아쉽다. 별것 아니지만 저자가 주역 괘의 효사를 이야기했으니 자세한 배경 설명을 해야 했다. 끝으로 혜경궁 홍씨의 책은 한중록(恨中錄)이라 해도 좋을 책이란 말을 덧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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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미래 - 소멸과 진화의 갈림길에서 책의 운명을 말하다
로버트 단턴 지음, 성동규.고은주.김승완 옮김 / 교보문고(단행본) / 2011년 6월
평점 :
절판


'독서 시장을 주도하는 것은 여전히 가장 오래된 기계인 책이다...도서관은 가장 구식 기관인 것처럼 보이지만 과거의 도서관은 미래에도 그대로 존재할 것이다. 도서관들은 언제나 학습의 중심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는 로버트 단턴의 책의 미래의 주요 전언(傳言)이다.

 

단턴은 '고양이 대학살'의 저자다. 단턴은 현재의 문제들과 씨름하면서 미래를 내다보려고 한다면 과거를 연구하면서 파악해야 하기에 책의 구성을 과거, 현재, 미래의 세 부분으로 나누었다고 말한다. 실제 순서는 미래, 현재, 과거이다.

 

책은 20051000만 권이 넘는 도서들을 디지털화한 구글이 미국 저자협회와 미국 출판인협회로부터 소송을 당한 사건을 전한다. 단턴은 구글이 종이책의 디지털화 작업으로 초거대 (전자) 도서관이 될 것을 예상하며 이로 인해 있게 될 두 가지 상반된 반응을 제시한다. 하나는 유토피아적 열광이고 다른 하나는 정보 접근권을 통제하는 권력의 집중에 대한 우려다.

 

정보 교환 방식의 4단계가 있다. 문자 발명, 두루마기를 대체한 코덱스, 인쇄술 발명, 전자 커뮤니케이션이다. 이를 전하며 단턴은 매 시대가 나름으로는 정보의 시대였고 정보는 언제나 불안정했다고 주장한다.

 

2007년 하버드대 도서관장이 된 단턴은 하버드대 신입생 시절이던 1957년의 추억을 떠올린다. 희귀 도서와 원고가 있는 하버드대의 호턴(Houghton) 도서관에서 허먼 멜빌이 가지고 있던 에머슨의 '에세이'를 사서에게 찾아 달라고 해 받은 단턴은 멜빌이 고통이란 일순간 왔다가 사라지는 것 즉 선원들이 흔히 말하듯 폭풍우처럼 사그라지는 것이라는 에머슨의 글에 경탄을 금치 못해 신랄한 메모를 해두었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단턴은 그 메모를 읽으면서 에머슨의 철학이 지나칠 정도로 낙천적이라는 것을 배웠다고 말한다. 단턴은 책을 사랑하고 더욱 구식 책을 좋아하고 오래된 것일수록 좋아하는 사람이다. 단턴은 정보는 지식이 아니라 말한다.

 

과거를 알기 위해 우리는 유적을 파헤쳐야 하고 유적을 이해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부분 유적을 파는 작업은 역사가에게 맡겨놓고 학자들이 써놓은 책들을 이해하는 데서 만족한다고 말한다. 단턴은 책이 싼 값에 매각, 폐기되고 어처구니 없는 책 보존 실험에 사용되어 끔찍한 손상을 입고 있다고 말한다.

 

단턴에 의하면 책의 도살자들이 어찌 된 노릇인지 도서관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단턴은 1850년 이후 발전되어 온 제조공정에 따라 펄프목재로 만든 종이는 싸구려 소설책을 만드는 데 쓰이는 가장 저렴한 것조차도 내구성이 좋다고 말한다.

 

단턴은 도서관측이 공간 확보를 위해 마이크로필름을 해결책으로 제시하며 오래된 책들이 타들어가고 분해되고 썩어가고 부스러진다는 등의 과장된 거짓 표현을 하고 있음을 개탄한다. 단턴은 책의 역사는 인쇄를 통한 커뮤니케이션의 사회문화사라고까지 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단턴은 세익스피어의 오리지널 텍스트는 무엇이었는가? 프랑스 혁명의 원인은 무엇이었는가? 같은 문제들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에서 연구자들이 자신이 넘어온 영역이 대여섯 개의 학문 분야가 교차하는 지점이되 누구의 영역이라고도 말할 수 없는 지점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런 지점에서 혼자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도 함께 서로 교차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말한다.

 

물론 책의 역사에 관한 연구는 르네상스 시대까지 간다. 단턴은 독서의 심리학, 현상학, 텍스트학, 서지학 등에 대한 저술 작업이 상당수 이루어졌음에도 독서는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고 말한다.

 

단턴은 과거 위대한 인물들의 도서 다시 읽기를 떠올려보는 것은 가능할지 몰라도 평범한 독자들의 내적 체험에 대해서는 도통 감을 잡기 어려울 것이지만 우리는 적어도 독서가 이루어졌던 사회적 맥락의 상당 부분은 재구성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책의 미래는 이렇듯 잔잔하고 차분하게 책의 미래에 대해 말하는 단턴의 인문학적 정서를 깊이 체험할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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