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의 도시 - 서울의 풍경과 권위의 연출
이기봉 지음 / 사회평론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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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의 도시'는 지리학자의 책이다. 풍수를 연상하고 책을 접한 것은 아니다. 도시에 대한 관심이 주된 요인이다. 풍수는 정치적으로 이용된 경우가 많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새 나라를 세우는 것 만큼 어려운 것이 후속 작업이다. 정통성 확립을 말하는 것이다. 천도는 새 임금과 신하들의 이해관계가 다를 수 밖에 없는 사안이다.

 

풍수를 근거로 논전을 펴고 결론을 내린 과정이 조선 건국 이후 벌어졌다. 조선은 고려 백성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풍수를 주요 원리로 활용한 고려의 관례대로 풍수를 활용했다. 반면 고려와는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나라임을 보이기 위해 중국의 도시 조영 원리를 새롭게 도입했다.

 

저자는 종묘와 사직을 언급하며 궁궐 - - 하늘이 일직선상에 위치한 것을 3단계 풍경이라 정의한다. 일직선상에 위치시키기 위해 진입로가 정방향이 아니게 설정되었다는 것으로 종묘도 사직도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라는 것이다. 좌묘우사를 따르면서도 정확한 좌우대칭을 따르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다.

 

종묘는 외대문(정문)과 보현봉을 일치시키기 위해 진입로를 정북이 아닌 서북쪽으로 향하게 했고 사직은 인왕산과 일직선상에 놓이게 하기 위해 진입로를 서서북으로 향하게 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창경궁이 동향인 이유도 3단계 풍경을 설정하기 위해서였다고 설명한다.

 

저자에 의하면 진입로를 꺾고 정전의 방향을 달리하고 정전의 위치를 치우쳐 만든 것들은 모두 3단계 풍경을 구현하기 위한 필연의 산물이다. 인상적인 것은 보편과 특수가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94 페이지)

 

권위의 풍경을 만들고자 하는 목적(보편성)은 동일하지만 그 방법(특수성)은 각기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나라의 경우 삼국시대부터 거대 건축물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고 말한다.(106 페이지) 이는 권위를 시각화하려는 시도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구현방식을 달리하기 시작한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경우 산에서 궁궐을 내려다볼 수 있는 구조를 하고 있는데 이는 외국의 사례에서 찾아볼 수 없다. 우리의 경우 권위를 표현하는 중심은 경복궁 너머의 북한산, 관악산이고 건축물인 경복궁의 경우 그 자체가 별개의 시각대상이 아니라 북한산, 관악산과 얼마나 일치감을 줄 수 있는지의 관점에서 결정된다.(110 페이지)

 

이는 경복궁 뿐 아니라 우리의 주요 궁궐, 종묘, 사직, 성균관, 지방 고을의 관아, 향교, 사찰, 서원 등에 두루 해당한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높고 웅장한 건축물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세계의 풍경과 3단계 풍경의 차이는 산의 유무이다.(117 페이지) 저자는 명당을 살기 좋은 땅으로 이해하는 것은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를 바라본 낭만적이고 비학문적 시선일 뿐이라 말한다. 가령 서울 최고의 명당인 경복궁과 근정전의 터를 잡는 데 동원된 풍수 명당 논리는 사람이 살기에 편안한 땅을 찾기 위한 이론이 아니라 누구도 범접하기 어려운 권위 있는 공간 찾기 이론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흥미롭다. 창경궁이 남향이 아닌 동향인 이유가 지금껏 정치를 하는 군주들의 궁이 아니라 대비(大妃)들을 위해 지은 궁이기 때문이라는 설이 정답이라도 되는 듯 퍼져있는 상황에서 풍수에 근거 3단계 풍경 이론을 제시한 것만 보아도 그 점을 알 수 있다.

 

저자는 경복궁이 사람이 살기 좋은 땅을 고르려 한 결과 선정, 영건(營建)된 것이 아니라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권위 있는 공간을 찾은 결과 영건된 것이라 말한다. 그는 명당에 터를 잡은 것과 상서로운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우연의 일치일 뿐 실질적 인과관계는 전혀 없다는 말을 한다.

 

중요한 것은 풍수가 가진 실용적 측면과 사상으로서의 풍수란 말(144 페이지)이다. 간혹 풍수가 가진 실용적 측면이 주목되기도 했지만 이 경우 사상으로서의 풍수를 제대로 포착하지 못했다는 말이 중요하다.

 

책을 읽다가 뷔리당의 당나귀 생각을 했다. 모든 면에서 똑같은 두 개의 건초더미 앞에 서 어떤 선택도 할 수 없어 굶어죽는 당나귀이다. 나는 점서(占書)로서의 성격과 사상서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주역도 생각했다. 지금껏 나는 뷔리당의 당나귀처럼 결론을 내리지 못했었다. 풍수에 대해서도 주역에 대해서도. 결론은 둘 다 사상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실용적 측면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적어도 지금으로서는 고려 대상은 아니라는 의미다.

 

고려의 경우 건국 이후 임금풍수(임금과 관련된 모든 공간에 적용한 풍수; 172 페이지)가 역사의 전면에 다시 나타난 것은 110여년이 지난 문종, 숙종, 예종 시기이다. 고려시대의 정치가 가장 안정되고 문물이 가장 발달했다고 평가받는 때였다. 이는 거꾸로 말하면 건국과 통일의 긴장감이 사라져서 새로운 변화를 통해 긴장감을 다시 불어넣어야 하는 시기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때 이용되었던 것이 바로 풍수의 지기쇠왕설인데 수도로 정해진 지 오래되어 약해지기 시작했다고 여겨진 개성의 지기를 보완하기 위해 새로운 궁궐이나 작은 서울인 남경을 건립하고 서경의 역할을 강화시키는 현상으로 나타났다.(188 페이지)

 

저자는 풍수 이론가들이 득수국(得水局) 명당은 방어에 취약하고 장풍국(藏風局) 명당은 방어에 유리하다고 말하면서도 실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지레 방어를 포기하고 도망간 전력을 왜 고려하지 않는지 묻는다. 경회루 부분도 흥미롭다.

 

경회루는 다른 나라의 어떤 누각과 정자보다도 크다. 저자에 의하면 경회루는 연못이나 인공적으로 심은 나무보다 인왕산, 북악산, 경복궁의 전각 지붕과 남산을 바라볼 수 있게 설계되어 건물 자체가 클 수 밖에 없다.(261 페이지) 저자는 향원정도 천원지방의 영향이 아닌 경회루와 같은 차경(借景)의 원리에 따라 지어진 것이라 말한다.(268 페이지) 저자는 손가락이 아닌 달을 보아야 정원이 보인다고 말한다 .

 

저자는 새로운 상식을 만들어나갈 수 있는 연구자의 희망을 이야기한다. 멋진 말이다. 이런 책을 보면 기존의 논의가 참 공허하고 아무 의미도 없는 천원지방 등의 말을 해설 때 지양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릴케가 '말테의 수기'에서 말한 생각하는 법을 배운다는 말을 음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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