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 에세이 - 개정증보판 동녘선서 93
김교빈 지음, 이부록 그림 / 동녘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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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교빈 교수의 '한국 철학 에세이는 김선희 교수의 '동양철학 스케치 2'에 이어 읽은 책이다. 신라 시대의 원효(元曉), 고려 시대의 지눌(知訥), 조선 중기의 화담(花潭) 서경덕, 조선 중기의 회재(晦齋) 이언적, 조선 중기의 퇴계(退溪) 이황, 율곡(栗谷) 이이, 인조 시대에서 영조 시대를 살았던 하곡(霞谷) 정제두, 연암(燕巖) 박지원, 다산(茶山) 정약용, 수운(水雲) 최제우 등 10인의 철학자를 시대순으로 다루었다.

 

한국철학은 동양철학의 한 범주를 이루고 있다. 동양철학은 불교, 도교, 유교 등이 주종을 이룬다. 자생적인 우리 철학으로 내세울 수 있는 것이 동학이다. '한국철학 에세이'가 다룬 철학자들의 주종은 유교 그 가운데서도 성리학자들이다. 불교의 원효, 동학의 수운 최제우가 우리 자생의 철학자로 선택되었다.

 

원효의 철학은 화쟁(和諍; 논쟁을 조화시킨다는 의미)의 철학이다. 이는 일즉다 다즉일(一則多 多則一)의 화엄(華嚴) 사상에 기반을 둔 것이다. 목우자(牧牛自) 지눌은 교종(敎宗)의 원효와 쌍벽을 이루는 선종(禪宗)의 대가이다.

 

선종이 신라 후기에 자리 잡을 수 있었던 데는 두 가지 배경이 있다. 하나는 사람의 마음을 곧장 지적하여 깨달음을 얻도록 해주는 선종 자체의 가르침이고 신라의 왕권을 지탱시켜주는 이데올로기인 교종에 대항한 호족들의 이데올로기로서의 역할이다.(67 페이지)

 

선종과 교종의 관계에 대해 중요하게 거론해야 할 사람이 대각국사 의천(義天; 1055-1101)이다. 그는 옛 승려들은 으레 부처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선을 익혔는데 지금 승려들은 부처의 가르침을 버리고 입으로만 선을 떠들고 있다고 보았다. 가르침을 버리고 선만 하는 것을 경계하면서도 선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68 페이지)

 

오늘날 조계종은 선종이면서도 경전을 중시한다. 이는 지눌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지눌은 부처가 입으로 전한 교()와 마음으로 전한 선()을 합칠 수 있다고 보았다.(76 페이지) 서경덕의 철학은 기() 중심의 철학이다. ()가 특정 물건의 설계도라면 기()는 부품들로 비유할 수 있다.(92 페이지)

 

이와 기는 함께 한다. 이 지적은 이황과 기대승의 47정 논쟁에서 중요한 바탕으로 작용한다. 이 철학이 불변의 원리를 중시하는 철학이라면 기 철학은 변화를 중시하는 철학이다.(96 페이지) 모든 사물은 기로 이루어졌고 기는 끊임 없이 변한다.

 

성리학은 자연과 인간을 통일되게 설명하는 이론 체계이다. 성리학의 기반인 유학은 전통적으로 가치 문제가 중심이었다. 우주론이 상대적으로 약할 수 밖에 없었는데 송대 이후 존재론적 탐구가 강한 도교와 불교를 받아들여 좀더 강한 사유 체계로 무장했다.(90, 91 페이지)

 

()는 모든 사물의 원리이자 도덕 법칙이다. ()는 구체적 사물을 이루는 바탕이다. 기가 구체화되면 질()이 되고 그것은 형()으로 드러난다.(91 페이지) 서경덕은 변화의 원인을 기() 자체에서 찾았다. 서경덕의 존재론 철학에서는 죽음까지도 그저 바뀌는 것일 뿐 슬플 것도 기쁠 것도 없는 것이다.

 

서경덕의 다른 호는 복재(復齋)이다. 지뢰복(/)괘의 그 복이다.(괘의 변화는 아래줄에서부터 시작된다.) 서경덕은 복괘에서 천지 자연의 중심을 본다고 말했다. ()를 강조한 서경덕의 철학에 대해 이황은 전면 부정, (이와 기를 함께 강조한) 이이는 부분 부정했다.(물론 서경덕은 기 자체가 아닌 기의 변화를 강조했다.)

 

서경덕의 주요 제자들 중 하나가 토정(土亭) 이지함이다. 서경덕은 선생 없이 혼자 공부해 고생이 아주 심하다고 했지만 많은 제자를 남겼다.(107 페이지) 이적(李迪)이 본명이었던 이언적(李彦迪)은 동명이인이 있어 중종의 명으로 언()을 넣어 이언적이 되었다. 이언적은 태극이 초월적이지만 우리의 구체적 현실을 떠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했다.

 

한국 성리학의 핵심 논의는 이황과 이이의 논쟁에서 이루어졌지만 바탕은 서경덕과 이언적에 의해 마련되었다. 서경덕의 철학은 이이에게, 이언적의 철학은 이황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133 페이지)

 

이언적의 철학이 이황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니 회퇴변척(晦退辨斥)이 생각난다. 회는 회암(晦庵) 즉 이언적이고 퇴(退)는 퇴계(退溪) 즉 이황이다. 회퇴변척이란 정인홍이 무함을 받은 스승 남명 조식을 변호하기 위해 이언적과 이황을 배척한 사건을 말한다.

 

이언적처럼 이()를 변해서는 안 되는 도덕 원리로 보고 중시하는 철학은 보수적이 될 수 밖에 없다. 또한 이는 진리가 원래 인간의 마음에 있다고 보기에 사회 구조의 개혁보다는 개인의 수양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다.(137 페이지)

 

이황과 기대승의 47정 논쟁은 유명하다. 이황은 논쟁을 통해 이와 기가 함께 하지만 구별하지 않을 수 없다고 보는 관점을 고수했다. 이황은 기대승처럼 4(인의 단서인 측은지심, 의의 단서인 수오지심, 예의 단서인 사양지심, 지의 단서인 시비지심)이 모두 악이 될 수도 있는 기()에서 유래한다면 군자와 소인을 구분할 수 없다고 보았다.(163 페이지)

 

이이의 호인 율곡(栗谷)은 밤나무가 많은 처가인 파주에서 기원했다. 이황이 혼란한 현실에서 이상을 가려내어 그것을 지켜가기 위해 가장 높은 도덕적 원리를 강조한 반면 이이는 현실을 떠난 이상을 인정하지 않았다.(186 페이지) 이이는 모든 변화는 음양의 순환이며 음양 또한 하나의 기()일 뿐이라 보았다. 따라서 그런 변화는 모두 기의 변화이고 그런 점에서 이도 기를 떠나서는 말할 수 없다.(187, 188 페이지)

 

기호학파인 이이의 학문은 사계 김장생, 우암 송시열 등으로 이어진다.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 1649-1736)는 정몽주의 11대손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주자학을 배웠고 나이 들어서도 변함 없이 주자학을 공부하는 줄 알았지만 34세에 자신의 학문이 주자학이 아니라 양명학이라 선언했다.

 

송에서 명으로 시대가 바뀌며 일어난 변화 중 하나는 사물의 이치를 중시하는 이학(理學)에서 마음의 작용을 강조하는 심학(心學)으로 흐름이 바뀐 것이다.(215 페이지) 양명학의 시조 왕양명은 내 마음이 그대로 만물의 이치이기에 주희의 이론처럼 사물에서 이치를 탐구(격물치지; 格物致知)한다면 내 마음과 사물의 이치가 둘로 나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217 페이지)

 

왕양명에게 한 제자가 절벽의 꽃나무를 가리키며 선생님께서는 마음 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하셨는데 깊은 산속에서 저 혼자 피고 지는 이 꽃나무는 제 마음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라고 물었다.

 

이에 왕양명은 그대가 이 꽃을 보기 전에는 이 꽃이나 그대 마음이나 모두 고요할 뿐이었지만 그대가 와서 이 꽃을 보았을 때 비로소 꽃 빛깔이 일시에 또렷해졌으니 곧 이 꽃나무가 그대 마음 밖에 있는 것이 아님을 알지 않겠는가? 라고 답했다.(219 페이지)

 

우리나라에 양명학이 들어온 것은 중종 무렵이다. 양명학 도입 초기에는 호감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퇴계가 비판의 글을 몇 편 쓴 이래 상황이 바뀌었다. 퇴계의 글은 순수한 학문적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조선 후기 당쟁 격화와 함께 양명학은 기피 대상이 되었다.

 

정제두는 주자학을 긍정 평가했지만 격물치지에 대해서는 절대 주희의 생각을 수용하지 않았다. 정제두는 주희의 격물치지를 유학 근본의 가르침과도 어긋난다고 보았다. 왕양명은 이와 기를 나누어 보는 주희와 달리 이기일원론을 주장했다.

 

정제두는 소중화 의식에 사로잡혀 대의명분만을 강조하는 집권세력을 매섭게 비판했다. 정제두는 청나라(황제)에 무릎 꿇고 절하는 것이나 신하를 자칭하는 것이 치욕이라면 청의 연호도 받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제두는 일관성 없이 명분만 내세우는 지식인들의 허위의식을 비판한 것이다. 그는 이어 오랑캐인 청나라 역시 양지(良知; 날 때부터 가지는 아는 힘)를 가지고 있으므로 그들과 교류할 수 있다고 보았다.(237 페이지)

 

박지원은 출세를 위한 과거 시험과는 담을 쌓은 채 초야에 묻혀 살며 서얼 출신인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서이수 등을 아끼고 지도했다. 박지원은 평소 가장 큰 배척 대상인 불교에 대해 긍정 평가했는가 하면 주자학자들이 신주처럼 떠받드는 시경에 나오는 시들의 순수성을 의심하기도 했다.(251 페이지)

 

박지원은 귀족 세계의 신선놀음만을 그렸던 서포와 달리 양반들의 허위의식을 가차 없이 비판했다. 박지원은 문학가로서, 그리고 개혁사상가로서 살았다. 그의 사상이 담긴 '연암집'은 불온한 사상이 담긴 금서처럼 취급되었다. 개화사상의 대부 역할을 했던 손자 박규수마저도 할아버지의 문집을 발간하자는 동생의 제안을 공연히 말썽을 일으킬 필요가 없다며 거절할 정도였다.

 

그는 근본적으로 사회 구조를 바꾸려 했고 많은 젊은이들이 그를 따랐다. 다산의 호 가운데 열수(洌水)가 있다. 열수는 산수(汕水)라 불린 북한강과 습수(隰水)라 불린 남한강이 만나는 지점이다. 실제 그의 철학은 경세치용과 이용후생의 흐름을 종합한 철학이다.

 

경세치용 학파는 이이에서 시작해 유형원, 이익으로 이어진 흐름으로 실학과 주자학을 별 모순 없이 추구한 학파였고 박지원, 박제가, 홍대용 등의 이용후생 학파는 북학파로 불린 학파였다.(김정희 중심의 학파는 실사구시학파이다.)

 

정약용은 스스로 지은 비문에서 자신의 학문을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으로 나누었다. 물론 치인은 백성을 섬기는 것을 의미한다. 정약용은 시대의 요구에 부응해 문제를 드러낸 성리학을 넘어 실천을 중시했던 공맹 유학으로 돌아가려 했다.

 

정약용은 시문학에도 뛰어난 모습을 보였다. 형식면에서는 민중지향의 패관문학을 부정하고 한문으로 글을 썼지만 내용은 일반 민중들의 삶을 표현한 작품들이 주가 되었다. 정약용은 한문 시를 쓰면서도 중국식의 율, , 운 등을 따르지 않았다.

 

정약용은 음양이란 본래 밝은 곳과 어두운 곳을 뜻하며 오행이란 만물 가운데 다섯 가지 요소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따라서 한의사들이 음양오행 이론을 가지고 진맥을 해서 오장에 대해 말하는 것은 흘러가는 한강을 보고 저 물은 오대산에서 온 것이며 저 물은 금강산에서 온 것이라 말하는 것과 같다고 보았다.

 

정약용은 오행을 부정했다. 실험으로 증명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이다. 정약용은 1012, 60갑자 등을 부정했다. 주역의 경학적 측면은 중시했지만 점치는 행위는 비판했다.(286, 287 페이지)

 

정약용은 풍수지리, 관상 등도 부정했다. 정약용은 풍수지리는 고려장을 없애기 위해 좋은 자리에 장사지내면 복을 받는다고 한 것인데 남의 묘 자리를 파내고 제 부모를 묻는 폐단에까지 이르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정약용은 지역을 가지고 논하자면 공자가 이상시했던 주()나라도 오랑캐라고 주장했다. 정약용은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할 수 있는 능력을 하늘에 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주적 선택 의지에 두었다. 정약용은 인간의 욕망도 긍정했다. 정약용에게 욕망은 구체적 삶의 추동력이었다.

 

정약용은 인간을 형이상학적이며 보편적인 존재로 본 성리학에 반대한 것이다. 정약용은 생산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분배에도 참여하지 말라고 주장했다. 정약용은 명철보신(明哲保身)에 대해서도 세상의 흐름을 꿰뚫어 봄으로써 자신의 몸을 잘 지킨다는 전통적 풀이와 달리 명은 선악을 잘 분별하는 것이고 철은 옳고 그름을 잘 살피는 것이고 보는 약한 사람들을 돕고 지켜주는 것으로 풀이했다.(297 페이지)

 

위당 정인보 선생은 다산 선생 한 사람에 대한 연구는 곧 조선사의 연구요 조선 혼의 명암 또는 전 조선의 흥망성쇠에 관한 연구라 말했다. 일본 학자들도 다산은 조선의 영광이라고 말했다.

 

동학을 창시한 수운 최제우는 원래 이름인 제선(濟宣)을 버리고 어리석은 백성을 구하겠다는 뜻에서 35세에 이름을 제우(濟愚)로 바꿨다.(; 어리석을 우.) 2대 최시형의 뒤를 이어 손병희가 3대 교주가 되었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시에는 통령(統領)이라는 지위로 북접(北接) 농민군을 이끌고 전봉준이 이끄는 남접(南接)을 치러 내려왔다가 논산에서 남벌기(南伐旗)를 찢고 힘을 합쳐 외세에 대항해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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