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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분석으로 발견한 상위 5% 리더의 습관
고시카와 신지 지음, 김정환 옮김 / 밀리언서재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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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으로 분석한 상위 5퍼센트 인재의 공통점을 밝힌 책이다. 저자는 기업 혁신 컨설팅 회사 설립자인 고시카와 신지다. 저자는 동정(同情)이 아닌 공감(共感), 일방 제안이 아닌 공궁(공동 궁리)을 강조한다. 리더십의 패러다임이 바뀌었다는 의미다. 상위 5퍼센트 사원과 상위 5퍼센트 리더의 차이가 중요하다.

 

개인을 생각하는가, 팀을 생각하는가가 차이다. 회사는 개인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유능한 리더가 이끄는 하나의 팀을 구축한다. 흥미로운 점은 상위 5퍼센트 리더는 걷는 속도가 상대적으로 느리다는 점이다. 단 의식적으로 엘리베이터가 아닌 계단을 이용했는데 이 경우는 걸음이 빨랐고 사무실이나 복도에서는 천천히 걸었다.

 

천천히 걸으면 육체 건강에는 좋지 않지만 좋은 생각을 많이 하게 하는 장점이 있다. 상위 5퍼센트 리더는 말하기보다 듣기를 더 많이 했다. 그들은 첫 한 마디와 마지막 5분에 집중한다. 그들은 의의와 목적을 선언하고 숫자를 언급하면서 상대방의 기억에 남도록 간결하게 이야기한다.

 

상위 5퍼센트 리더는 팀원보다 뛰어나지 않다. 팀원의 약점을 보완하는 것이 리더의 역량이다. 그들은 해야 할 것보다 하지 말아야 할 것에 집중한다. 그들은 무모한 결정을 내리지 않는다. 그들은 급격한 변화의 시대에 성공하는 공식을 그대로 흉내내서는 성과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그보다는 과거에 실패한 사례를 깊게 파고들어 원인을 파악함으로써 같은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으면 결과적으로 성공에 가까워진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다.

 

그들은 이성보다 감정을 중시한다. 그들은 팀원들의 감정에 가까이 다가가서 문제가 발생한 메커니즘을 함께 생각한다. 그들은 절대 답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그들은 답을 이끌어내도록 지원함으로써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팀원을 만든다. 그들은 모든 것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연간 목표와 행동 목표는 공유하되 실행 방법은 팀원에게 맡긴다. 그들은 회의에서 최대한 말을 아낀다. 리더가 말할수록 팀원은 침묵한다. 그들은 결과보다 관계구축에 초점을 맞추고 협력 체제를 만든다. 팀원들이 실패한 부분을 들어 질책하기보다 다시 실패하지 않을 방책을 궁리해 다음 계획을 세우고 새롭게 실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들은 의욕보다 시스템을 믿는다. 그들은 지속적 성과를 이루기 위해 애쓴다. 그들은 이질적 인재를 환영한다. 그들은 업무 처리 능력이 낮은 팀원을 우수한 팀원으로 메우는 것이 아니라 우수한 팀원의 약점을 파악하고 그 부분을 다른 팀원으로 보완하려 하기도 한다.

 

무작정 열심히 일하는 방식은 오히려 리스크가 더 크다. 리더가 지나치게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면 팀원들은 오히려 압박감을 느끼고 위축된다. 그들은 이런 점을 잘 안다. 그들은 전달하는 것이 아닌 전해지는 것을 지향한다. 그들은 그만둘 일을 결정하고 새로운 일에 도전한다. 그들은 팀원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준다. 그들이 맞장구 치는 가짓수는 5가지 이상이다. 말이 끝나지 않았을 때 말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들은 시간과 에너지가 유한하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래서 늘 한정된 시간과 에너지를 자신이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영역에 투입하려고 노력한다. 그들은 어제의 지식을 과감히 버린다. 그들은 의욕이나 피로감에 좌우되지 않도록 자기성찰의 시간을 통해 몸과 마음을 제어한다. 그들은 우연한 만남을 끌어들여서 자기 성장으로 연결한다.

 

약점을 드러내서 인맥을 넓힌다. 팀원이 어떨 때 일하는 보람을 느끼는지 알고 싶을 경우 “자네는 어디서 일하는 보람을 느끼는가?”라고 대뜸 물어보면 많은 사람이 답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한 뒤 “나처럼 일하는 보람을 느낀 적이 있는가?”라고 물어보면 많은 사람이 답한다고 한다. 의식을 바꾸기는 어려우니 행동을 먼저 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들은 절대 바쁘다고 말하지 않는다. 아이디어는 틈새 시간에 나온다. 그들은 이것, 저것, 그것 등 지시대명사를 사용하는 빈도가 매우 낮다. 명확히 전달할 필요를 느끼기 때문이다. 그들은 형용사나 부사를 많이 사용한다. 우리는 상대방에게 이미지를 전하기 위해 말이나 표정 등을 사용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들은 칭찬으로 에너지를 끌어올린다.

 

그들은 부정적 피드백도 기분 좋게 한다. 긍정적인 피드백을 먼저 함으로써 상대가 부정적 피드백을 받아들일 분위기를 충분히 만들 필요가 있다. 고개를 끄덕일수록 대화가 즐거워진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상위 5퍼센트 리더는 상대방이 말을 하도록 유도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상위 5퍼센트 리더는 열린 질문과 닫힌 질문을 상황에 맞춰 효과적으로 활용한다. 대화가 막힐 때는 닫힌 질문을 한다. 상위 5퍼센트 리더는 설득력이 뛰어나다. 글쓰기기 필요하다. 그들은 상황을 탓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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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살리는 논어 한마디 - 거친 물결에 흔들리는 삶을 잡아줄 공자의 명쾌한 해답
판덩 지음, 이서연 옮김 / 미디어숲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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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공자가 자신이 겪는 고통과 근심을 겪었다는 데에서 위안을 받았다. 공자는 도(道)와 먹을 것 사이에서, 도에 대한 걱정과 가난에 대한 걱정 사이에서 길을 찾지 못한 사람들에게 하나의 지침이 된 인물이다. 저자는 ‘논어’를 읽고 근심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일이 없어졌다고 말한다. 흔히 볼 수 있는 사례를 공자의 글에 비추어 이야기하고자 한다.

 

술처럼 달콤한 사이에도 반드시 지켜야 할 선이 있다는 구절이다. 청나라 대학사 장정옥은 일 중독에 빠진 황제 옹정제를 보필했다. 그들 사이에서 적절한 거리가 지켜졌다. 장정옥은 황제가 자신을 찾지 않으면 굳이 찾아가지 않았고 옹정제는 장정옥을 공적인 일에만 불렀고 사소한 일로 귀찮게 하지 않았다.

 

군자의 사귐은 물처럼 담백하고 소인의 사귐은 술처럼 달콤하다고 한다. 물처럼 담백한 사귐이 필요하다. 물 이야기가 나왔으니 인자요산 지자요수를 보자. 인자는 산을 좋아하고 지자는 물을 좋아한다는 말로 알려진 말이다. 하지만 저자는 다르게 본다. 어진 사람의 즐거움은 산과 같고 지혜로운 사람의 즐거움은 물과 같다는 말이라는 것이다.

 

사실 어진 사람은 왜 산을 좋아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왜 물을 좋아하는지? 누군가 묻는다면 답하기 어렵다. 저자는 인자요, 산.. 지자요, 수라고 읽는다. 어짊을 추구하는 사람은 내면의 덕을 쌓기에 산처럼 중후하고 포용적이며 관대하고, 지혜로움을 추구하는 사람은 배움을 좋아하며 즐기기 때문에 흐르는 물처럼 활달하고 역동적이다. 어진 사람은 안정을 좋아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행동을 좋아한다. 어진 사람은 오랜 시간 즐거움을 느낄 수 있고 지혜로운 사람은 다양한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

 

물론 어짊과 지혜로움은 함께 추구되어야 할 덕목이다. 산과 물이 어우러져야 아름답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공자는 ‘논어’에서 상반되는 두 어구 또는 사상을 내세워 주제를 강조하는 대조법을 많이 사용했다. 어짊과 지혜는 함께 추구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군자와 소인은 어떤가? 저자는 군자와 소인은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군자와 소인은 완전히 다른 두 유형의 사람이 아니며 단순히 누구는 군자이고 누구는 소인이라고 구분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사람에게는 군자적 면모와 소인적 면모가 두루 존재한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에게 소인적 면모가 더 많을 것이다. 공자는 방탕하게 행동하지도 않고 자신을 너무 구속하지도 않는 평온한 중용의 경지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했다.

 

중용은 논란이 있는 개념이다. 상론할 수 없고 다만 평온한 경지는 뿌리를 뽑는, 끝까지 하는, 용감한 태도가 없이는 이루기 어려운 덕목이라는 말을 할 수 있겠다. 군자는 염옹은 남면(南面)을 할 사람이라는 말을 했다. 군주가 될 사람이라는 말이다. 반면 자공은 호련(瑚璉)이라 평했다. 호련이란 기장과 피를 담아 종묘에 바치는 제기(祭器)다.

 

이는 자공이 고귀한 인물이지만 아주 비범한 인물은 아니라는 의미다. 공자는 자신이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솔직하게 또는 지혜롭게 말했다. 저자가 든 ‘나를 살리는 논어 한 마디’ 가운데 행불유경(行不由徑)을 빼놓을 수 없다.

 

지름길이 주는 욕망의 유혹에 발을 딛지 말라는 말이다. 군자대로행과 상응하는 말이다.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바른 길을 가는 사람이라는 의미의 인지생야직(人之生也直)과도 통한다. 저자의 책은 인자요산 지자요수가 아니라 인자요, 산, 지자요, 수라는 해석에서 가장 빛난다. 의문이 풀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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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이 만든 세계
션 B. 캐럴 지음, 장호연 옮김 / 코쿤북스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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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론과 창조론을 가르는 가장 핵심적인 단어는 우연(을 인정하는가 아닌가)이다. 이를 뒷받침할 말이 “그저 우연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신을 우주의 권좌에서 끌어내리기에 충분”하다는 말이다. 저자 션 캐럴은 ‘우연과 필연’의 저자 자크 모노가 말할 수 없었던 이야기들을 하려고 한다고 말한다. 자크 모노는 인간은 셀 수 없이 많은 우발적 사건들이 만들어낸 산물이라는 말을 한 분자생물학자다.

 

저자는 6600만년전 소행성 충돌로 지구에 살았던 종의 3/4이 멸종한 사건을 예로 들며 그 사건이 없었다면 우리는 여기에 있기 어려웠을 것이라 말한다. 소행성 충돌로 공룡이 멸종했는데 그 사건 이후 포유류 몸집의 평균 및 최대치가 가파르게 증가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승자와 패자는 우연이 판가름했다. 이 사건을 K - Pg(Cretaceous - Paleogene; 백악기 - 고제삼기; 古第三期) 멸종이라 부른다.

 

우주에서 날아온 거대한 돌이 마지막 1초 동안 5만 피트의 대기를 가르고 지구(멕시코 칙슬루브 총돌구)에 떨어졌다. 이 충돌로 진도 11이 넘는 지진(역사상 기록된 최악의 지진보다 100배 이상 강력한 지진)이 일어났고 유카탄 대륙붕이 내려앉았으며 높이 200미터 이상의 초대형 쓰나미가 멕시코만과 카리브해를 휩쓸었다. 화재로 인해 다량의 그을음이 생겨났고 여기에 충돌로 발생한 먼지, 엄청난 양의 유황 수증기까지 더해지면서 지표면에 도달하는 태양빛이 여러 해 동안 대거 감소했다.

 

그 결과 육지와 바다에서 광합성과 식량 생산이 끊어졌다. 육지의 기온은 금세 영하 7도까지 곤두박질쳤고 최소 수십년 동안 그런 수준이 이어졌다. 탄산염이 풍부한 충돌지에서 막대한 양의 이산화탄소가 대기로 방출되는 바람에 바다는 급격하게 산성화되었다. 생명은 뜨겁게 구워졌다가 차갑게 얼고 굶주림에 허덕였다.

 

세(世)와 세(世)의 경계는 일반적으로 암석을 살펴서 바다와 육지에서 생명의 조건이 바뀐 것을 반영하는 변화가 있는지를 보고 정한다.(56 페이지) 중요한 점은 지구 자전 속도(시속 1000마일)를 고려하면 소행성이 30분만 일찍 왔다면 대서양에 떨어졌고 30분 늦게 왔다면 태평양에 떨어져 공룡은 살아 남았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사람과(호미니드)는 80만년전에서 100만년전 사이에 불을 통제하는 법을 익혀서 그것으로 사냥하고 요리하고 몸을 따뜻하게 했다.(78 페이지) 누구보다 먼저 신의 섭리를 우연으로 대체한 사람이 다윈이다. 비판자들은 우발적 변이가 담고 있는 의미를 물고 늘어졌다. 조물주나 지성이 행하는 역할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많은 사람들이 다윈의 이론을 받아들이지 못한 이유였다.(109 페이지)

 

대부분의 돌연변이는 여러 이유에서 아무런 영향이 없다. 동물과 식물의 유전체에는 실질적 기능이 전혀 없는 DNA 서열이 많다.(인간의 경우 95퍼센트) 이런 부위에서 돌연변이가 일어나면 대체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같은 아미노산을 생산하도록 하는 유전 암호가 여러 개 존재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런 중복성은 유전자 돌연변이가 일어난다고 해서 단백질 서열이 바뀌는 것이 아닌 이유다. 단백질 서열을 바꾸는 돌연변이가 일어난다 해도 기능에 아무런 영향이 없을 수도 있다.

 

창조적 돌연변이는 소수이며 희귀하다. 우연은 창조하고 자연선택은 발명품을 확산시킨다. 포유류와 조류 같은 동물들 사이에서 완전하게 종분화가 일어나는 데 소요되는 시간은 대략 200만년으로 놀랄 만큼 일정하다. 생명의 나무에서 가지가 갈라지는 것은 개체군에서 무작위적 돌연변이가 꾸준하게 축적되어 나타나는 불가피한 결과다.(160 페이지) 모든 유기체, 모든 세포에서 DNA(이중나선 구조로 되어있는 고분자화합물)가 복제될 때마다 변화(치환, 삽입, ‘결실; 缺失‘)가 일어난다.

 

돌연변이는 피할 수 없는 필연의 현상이다. 저자는 우연이 지배하는 세상이라는 점은 심오한 깨달음이라고 말한다. “맹목적 우연이 생물권에서 일어나는 모든 새로움, 다양성, 아름다움의 원천이라는 사실은 참으로 놀랍다.”(212 페이지) 저자는 우리가 신의 뜻이 아니라 우연에 의해 여기 있는 것이라면 무엇을 해야 할까?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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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유학자, 조식
허권수 지음 / 뜻있는도서출판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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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南冥) 조식(曹植; 1501 - 1572)을 안 것은 2009년 나온 한형조의 ‘조선 유학의 거장들’을 통해서였다. 칼을 찬 유학자라는 점이 이례적으로 느껴졌지만 그 이상의 자료를 찾지 못한 채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조용미 시인의 ‘탐매행’이란 시에서 남명매(南冥梅)란 말을 들었다. 남명은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로 유명한 분이다. 대비 문정왕후를 과부, 그의 아들인 임금 명종(明宗)을 일개 고아로 표현한 부분이 있는 글이다.

 

때는 소윤 윤원형 일파가 일으키는 분탕(焚蕩) 패악질이 극에 달한 때였다. 같은 해에 태어난 이황, 2년 연상의 동고(東皐) 이준경(李浚慶)이 직언을 하지 못한 가운데 단성현감에 제수(除授)된 조식은 죽음을 무릅쓴 사직 상소를 올렸다.(단성은 조식이 태어난 경남 합천에서 가까운 곳이다. 조정에서 조식이 벼슬을 사양하지 못하도록 삼가현과 가까운 단성현 현감 자리를 내린 것이다.) 사직이 죽음을 무릅쓸 일이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나라의 폐단을 조목 조목 지적한 것으로 인해서였다는 말이다.

 

조식은 임금dl 인재를 등용하는 것은 마치 집 짓는 목수가 목재를 취해 쓰는 것과 같은 바 인재를 등용하려는 전하의 큰 은혜를 감히 독차지 할 수 없다고 아뢰었다. 조식은 전하께서는 과연 신을 어떤 사람으로 생각하시느냐, 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시냐, 문장을 잘 쓴다고 생각하시냐고 물었다. 조식은 문장을 잘 쓴다고 꼭 도를 지닌 사람은 아니고 도를 지닌 사람은 신처럼 이렇지 않다고 말했다.

 

전하는 물론 정승들 또한 신의 능력이나 사람됨을 잘 알지 못하는바 그 사람됨을 모르면서 등용한다면 훗날 나라의 수치가 될 것으로 그 죄가 어찌 보잘 것 없는 신에게만 있겠습니까?란 말을 했다. 나는 을묘사직소에서 가장 준엄한 부분은 과부, 고아 운운한 부분이 아니라 전하께서는 학문을 좋아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들어본 적이라도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전하께서는 군자를 좋아하십니까 소인을 좋아하십니까? 전하께서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따라 나라의 존망이 덜려 있습니다란 말이라 생각한다.

 

조식은 명종에게 밝은 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일을 요약해서 잘 간직한다면 사람을 알아보거나 판단하는 일이 거울처럼 맑고 저울처럼 공평하지 않음이 없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생각에 사악함이 없게 될 것이라는 말로 대안(代案)을 제시하기도 했다. 명종은 신하들이 간(諫)하는 말을 받아들여 조식에게 벌을 주지는 않았지만 끝내 바른 말을 한 조식을 공손하다고 여기지도, 옳다고 여기지도 않았다.

 

눈에 띄는 부분은 경연의 시강관으로 있던 정종영의 말과 사간원정언 이헌국의 말이다. 정종영은 조식은 세상에 숨어 사는 인물인지라 성격이 소탈하여 예를 차릴 줄 몰라 그런 것이니 거칠고 세련되지 못한 태도를 책망하기보다 물러나려는 욕심 없는 뜻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고 아뢰었다. 이헌국은 조식 같은 사람은 세련되지 못했고 옛 사람들의 책만 읽었으므로 말을 바르고 곧으나 문채(文彩)가 없으나 어려서부터 책을 읽은 사람인데 어찌 군신간의 의리를 모르기야 하겠습니까?라고 아뢰었다.

 

이헌국은 구양수가 황태후를 아낙네라고 했으나 벌을 받지 않은 송나라의 사례를 아울러 언급했다. 문질빈빈(文質彬彬)이란 말이 있는바 조식은 질(質)이 문(文)을 압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조식은 칼을 찬 유학자인 한편 성성자(惺惺子)라는 쇠 방울을 차고 다닌 분이기도 하다. 조식은 방울 소리를 들으면서 정신을 맑게 유지했다. 1519년 19세의 조식은 기묘사화를 목도한다. 조광조를 비롯 현사(賢士)들의 부고를 들은 조식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벼슬살이가 험난할 것이라 느꼈다.

 

조식이 평생 벼슬하지 않는 데에는 가장 절친한 벗인 성운(成運)의 형 성우가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죽은 영향이 컸다. 조식은 원나라 유학자 허영의 글을 읽고 과거(科擧)를 위한 공부가 그릇되었음을 깨달았다. ”이윤(伊尹)의 뜻과 안연의 학문을 모본으로 삼아 벼슬에 나아가서는 경륜을 펴서 업적을 이루고 초야에 있을 때는 지조를 지켜야 한다... 벼슬에 나아가서 아무 하는 일도 없고 초야에 있으면서 아무런 지조도 지키지 않는다면 뜻을 세우고 학문을 닦아 장차 무엇을 하겠는가?“란 글이다.

 

조식은 강직(剛直)했던 유학자다. 그는 아버지의 묘갈명을 쓰며 나의 아버지에게 일컬을 만한 덕이 없는데도 장황하게 미화한다면 그 글은 아첨하는 글이니 나의 아버지를 부끄럽게 만드는 결과가 된다고 생각했다. 조식은 낮에는 정신을 집중하고 길지 않은 시간 깊이 자는 것으로 정신을 맑게 유지했다. 조식은 제자들에게 한 구절 구절 자세히 풀어 설명하지 않았다. 그는 한 문장, 한 문장 뜯어가며 읽지 않고 마음으로 글 전체의 큰 뜻을 터득하고자 읽었다.

 

조식은 학문을 하는 목적은 낱낱의 지식을 얻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식견을 높이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식견을 높이면 태산에 올라섰을 때 사방의 높고 낮은 산이 다 눈에 들어와 지형을 정확하게 살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주자가례에 대해서도 같은 자세를 유지했다. 조식은 바다와 관련이 큰 사람이었다. 산해(山海) 선생으로도 불렸는데 이는 산해정(山海亭)에서 학문을 닦고 제자들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남명(南冥)은 장자(莊子)에서 취한 호로 남쪽의 아득한 바다를, 나아가 남녘 바다를 향해 날아가는 대붕을 뜻한다. 그가 거처하던 방은 계명실(繼明室)이란 이름을 가졌다. 옛 현인들의 밝은 덕을 계승하여 사방에 펼친다는 의미를 가진 방이다. 그의 시기는 한양에서 거주한 시기(26세 이전), 경남 김해에 산해정(山海亭)을 짓고 산 시기(30 - 45세), 경남 합천에 계부당(鷄伏堂)과 뇌룡사(雷龍舍)를 짓고 산 시기(48 - 61세), 경남 산청에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산 시기(61 - 72세)로 나눌 수 있다.

 

산해정은 높은 산에 올라 바다를 내려다 본다는 의미를 지닌 말이다. 계부당은 닭이 알을 품는 것처럼 자신을 함양(涵養)하는데 힘쓰고 제자들을 잘 가르치겠다는 의미가 담긴 이름이다. 뇌룡사(雷龍舍)란 시동(尸童)처럼 가만히 앉아 있다가 용처럼 승천하고 연못처럼 잠잠하다가 뇌성벽력이 치는 것처럼 한다는 의미로 실력을 쌓아 때를 기다림을 뜻했다. 산천재는 주역의 산천대축(山天大畜)에서 기인한 이름이다. 조식은 산천이라는 말을 통해 강건하고 독실하게 공부해 크게 덕을 쌓고자 하는 의지를 나타냈다.

 

그리고 자신의 시대에 경륜을 펼칠 기회를 얻지 못한다 해도 힘껏 제자를 길러 훗날에 큰 덕이 쌓이기를 기대했다. 조식과 이황은 동시대를 살았지만 편지를 주고받았을뿐 일평생 만난 적이 없다. 그들은 기질이나 학문적 경향이 달랐다. 조식은 공부하는 것은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과 같으니 한 치를 놓아두면 한 길이나 미끄러져간다는 말을 했다. 저자는 조식이 다른 사람은 권세를 자랑한다면 자신은 학문과 지조로써 긍지를 갖겠노라고 한 것을 언급하며 형식만을 위한 형식은 있을 수 없지만 내용을 담은 형식은 필요한 것이라 덧붙인다.

 

조식은 경상도 관찰사 이기를 장차 사람을 해칠 사람으로 보았다. 그런 그가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고자 학문에 대해 물어오자 병이 많아 한가하게 지내면서 요양이나 하고 있을 뿐으로 의리의 학문에 대해서는 공부한 것이 없다고 답한 것을 일러 조식이 아무리 학문을 좋아해도 사람 같지도 않은 자와 무슨 학문을 이야기하겠는가?란 말로 설명했다.

 

본문에는 조식의 절친 청송(靑松) 성수침(成守琛; 1493 - 1564) 이야기도 나온다. 기묘사화로 스승 조광조가 죽임을 당한 것을 보고 백악산 자락에 청송당을 짓고 숨어들었다가 파주로 간 사람이다. 파산서원(坡山書院)에 성수침, 성수종, 백인걸, 성혼의 위패가 모셔졌다. 조식의 문하에서 의병이 많이 나왔다. 가장 먼저 기의(起義)한 사람이 조식의 외손녀 사위였던 곽재우다. 1558년 58세의 조식은 지리산 유람에 나섰다. 진주 목사로 있었던 김홍, 자형 이공량(李公亮), 고령현감을 지낸 벗 이희안, 청주목사를 지낸 이정(李楨) 등과 함께. 고려 인종(재위; 1122 - 1146) 때의 은자(隱者) 한유한(韓惟漢)이 살던 삽암이란 곳이 나온다.

 

삽암은 꽂힌 바위라는 의미다. 섬진강가의 이곳에 모한대(慕韓臺)라는 석각(石刻)이 있다. 한유한을 그리워하는 곳이라는 대(臺)다. 조식의 실천 위주의 삶은 정여창(鄭汝昌)에게서 본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조식은 자신이 사는 삼가현은 산세가 너무 빈약하다고 생각하고 거처를 옮기기 위해 지리산 일대를 10여 차례 찾았다. 조식은 장중한 사람 즉 어진 사람으로 정적인 산을 좋아했다. 지혜로운 사람은 민첩한 사람이기에 늘 쉬지 않고 흐르는 물을 좋아한다.

 

조식은 바위에 이름을 새겨놓은 사람들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바위에 이름을 새겨 놓으면 천 년 만 년 썩지 않고 자기 이름이 전해질 것으로 생각해서 이렇게 해놓은 것이다. 대장부의 이름은 푸른 하늘의 밝은 해처럼 떳떳해야 한다. 훌륭하게 일생을 살았다면 사관이 역사책에 기록할 것이고 넓은 땅 위의 사람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할 것이다. 그런데 쩨쩨하게 날다람쥐나 살쾡이가 사는 수풀 속 바위에 이름을 새겨놓고는 없어지지 않고 전해지기를 바라고 있다. 이는 새 그림자를 보고서 후세 사람들이 무슨 새인지 알기를 바라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것이다.”

 

조식은 “산에 들어온 사람 중에 누가 그 마음을 깨끗이 씻지 않겠는가? 또 누가 스스로 소인이라고 생각하겠는가? 그러나 잠시 마음을 씻는다고 해서 소인이 군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란 생각도 했다. 중요한 것은 꾸준한 노력일뿐 단기간의 노력은 효과가 없다는 것이다. 조식은 무거운 부역과 세금에 신음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여유 있게 유람이나 하는 자신을 겸연쩍게 여겼다. 물론 선비들에게 유람은 단지 먹고 노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좋은 경치를 통해 사물의 이치를 깨닫고자 했다. 그리고 스승, 제자, 벗들의 학문적 태도와 삶의 방식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았다.

 

조식은 산천재의 왼쪽 벽에 경(敬)자를 써 붙이고 오른쪽 벽에 의(義)자를 써 붙였다. 경은 내면의 수양 방법이고 의는 경을 바탕으로 한 사회적 실천 원칙이다. 조식은 하늘에 닿아 있는 지리산 천왕봉을 사랑했다. 그리고 그 봉을 스승으로 여겨 배우고자 했다. 조식은 덕천강도 스승으로 삼았다. 조식에게 제자의 예를 갖추어 폐백(幣帛)을 가지고 찾아온 사람 가운데 정탁(鄭琢)이 있다. 윤원형의 악행을 서슴없이 탄핵한 사람이고 원균 등의 모함으로 옥에 갇혀 모진 고문을 당한 이순신의 무죄를 밝혀 죽음을 면하게 했다.

 

그는 성리학 이론에만 몰두한 문약한 유학자가 아니었다. 선비로서 병법을 모르면 큰 임무를 맡을 수 없다고 주장한 그는 병법에도 정통했다. 문무를 함께 갖추어 밖으로 나아가서는 무장이 되고 안으로 들어와서는 정승이 되어 세상을 구할 사람이었다. 조식은 황진이도 만났다. 조식은 임꺽정이 잡혀 처형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라를 위해 다행이라 여기면서도 홀로 가만히 앉아 눈물을 흘렸다. 선량한 백성들을 도적떼로 내모는 현실을 탄식하는 한편 근본 원인을 찾아 대책을 세우지 않는 벼슬아치들에게 분노를 느꼈다.

 

조식은 젊은 문인들이 공허한 말장난을 하는 쪽으로 공부 방향을 정해가는 것에 이황의 책임이 크다고 느꼈다. 조식은 요즘 공부하는 사람들이 쇄소응대의 예절도 모르면서 입으로 천리(天理)를 이야기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책에는 동서 분당(分黨) 이야기도 나온다. 동인은 김효원을 지지하는 사람들로 그의 집이 도성 동쪽 건천동에 있었기 때문에 동인이라 한 것이다. 서인은 심의겸을 지지하는 사람들로 그의 집이 도성 서쪽 정릉방에 있었기 때문에 서인이라 한 것이다.

 

조식은 친구 이준경이 영의정에 오르자 출사할 생각을 가졌다. 조식은 경의(敬義)를 주로 하여 지식보다 실천을 중시했다. 성리학 외에도 천문, 지리, 산술, 병법 등을 깊이 연구했고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조식은 스스로 벼슬길에 나서려고 설레발을 치며 부산을 떠는 것은 옳은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유학자에게 공부의 궁극적인 목적은 자신을 올바르게 수양한 후 백성을 교화하는 수기치인(修己治人)에 있다.

 

이양소(李陽昭)가 고려, 조선 두 왕조에 걸쳐 벼슬할 수 없어 친구 이방원의 부름을 거절한 것과 달리 강회백(姜淮伯)은 두 왕조에서 벼슬했다. 이에 조식은 강회백이 심은 매화(정당매; 政堂梅)를 보고 어제 꽃을 피우더니 오늘도 또 꽃을 피웠다고 했다. 변절을 풍자한 것이다. 조식은 학문의 근본이 선 다음 여러 가지 다른 분야에 관심을 갖는 것은 괜찮지만 처음부터 이것저것에 관심을 쏟다 보면 올바른 학문을 이루기 어려울 것이라 보았다.

 

조식과 이황에게서 배운 정구(鄭逑)의 학문은 제자 허목에게로 이어졌다. 허목은 성리학을 중심으로 한 당대의 학문적 분위기와는 달리 원시유학의 육경을 중시했다. 이런 학풍은 이익, 정약용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을묘사직소(1555년) 이후 11년만에 조식은 다시 명종의 부름을 받고 임금을 만나 명종이 능동적으로 정치를 펼 인물은 아니라고 판단하고 지리산 덕산동으로 돌아왔다. 조식은 한 인사가 그릇된 이기론을 펼치자 지인에게 자신은 평생 다른 기술은 없고 다만 책 읽는 일만 했으니 입으로 성리학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어찌 다른 사람들보다 못할까만은 오히려 말하고 싶지 않았을뿐이라고 말했다.

 

조식은 분신처럼 아낀 정인홍에게 평소 차던 경의검(敬義劍)을 물려주었다. 조식은 ”정인홍이 있으면 내가 죽지 않을 것“이라 말할 정도였다. 정인홍은 임진왜란 때 58세의 적지 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의병을 일으켰다. 그리고 조식의 문인들은 물론 자신의 제자들을 의병에 참여하도록 해 충의를 실천했다. 조식은 은거하면서도 나라와 백성에 대한 관심을 잠시도 놓은 적이 없었다. 조식은 김종직, 김굉필, 조광조 등이 사화로 비참한 최후를 마쳤고 그들과 뜻을 함께 한 이들이 죽임을 당하거나 귀양간 것은 간신들의 탓이 근본적인 원인이었지만 시대의 기미를 보고 출처(出處; 나아감과 물러남)를 바로 하지 못한 데에도 그 원인이 없지 않다고 보았다.

 

조식은 곽재우에게 유학자로서 읽어야 할 경서와 함께 병법에 관한 책도 두루 읽게 했다. 조식은 ”학문을 통해 세상을 구제하기를 원하는 사람”인 자신이 출사하지 않은 것은 때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라 답했다. 조식은 인재 등용은 임금이 직접 해야 한다고 말했다. 임금이 자신을 닦는 수양이 부족하면 자신만의 저울도 거울도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조식은 임금의 덕을 밝히지 않은 채 나라를 다스리려고 하는 것은 배도 없이 바다를 건너려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조식은 전하(선조)께서 만약 신의 말을 버리지 않고 관대하게 받아들인다면 신은 전하의 용상 아래에 있는 것과 같은 바 어찌 신의 늙고 추한 모습을 만나 본 후에라야 신을 썼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란 말을 했다. 또한 전하께서 만약 신이 한 말을 좋아하지 않으면서 신을 만나려고 한다면 헛일을 하는 것이라 말했다. 조식은 출처의 절조를 중요시하여 임금이 아무리 불러도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조식은 죽고 사는 일은 평범한 이치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한 채 세상을 떠났다.

 

선조는 처사(處士)를 자처한 조식에게 정3품 대사간을 추증했다. 평소 조식에게 맡기고 싶어했던 관직이다. 조식은 저술에 있어서는 기발하고 고상한 것을 좋아하고 형식에 구애받지 않았다. 조식을 모신 덕천서원도 대원군의 서원 철폐 대상이 되었다. 대원군은 문묘에 배향되었거나 나라에 큰 공이 있는 인물을 모신 서원이나 사당 47개소를 제외한 나머지 서원들을 모두 없앴다, 조식의 문묘 종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수제자 정인홍이 처형당한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회퇴변척(晦退辨斥)에 대해 알아보아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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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발견 - 한국 고대사의 재구성을 위하여
이희진 지음 / 동아시아 / 2004년 9월
평점 :
절판



고구려에 대한 관심이 전쟁에 대한 흥미를 돋우웠다. ‘전쟁의 발견’은 그 연장선상에서 접하게 된 책이다. 물론 고구려 이야기에 관심을 모을 이유는 없다. ‘한국 고대사의 재구성을 위하여’란 부제를 통해 알 수 있듯 책은 신라, 왜, 백제, 고구려의 전쟁 이야기와 전쟁 일반에 대한 논의를 담았다. 저자 이희진은 한국사를 전공한 분이다.

 

저자에 의하면 전쟁은 기본적으로 정치의 연장이다. 저자는 전쟁의 역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일부 몰지각한 역사가들 때문에 조상들이 바보로 몰린다고 말한다. 고대사의 전쟁과 현대사의 전쟁은 다르다. 고대 전쟁에서는 전 국토를 방어한다는 개념이 성립하기 어렵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성(城)을 위주로 한 전략 거점을 집중 방어하고 나머지 지역은 유사시 방어하는 형태의 전략을 구사하는 경우가 많다.

 

현대전은 성벽 대신 지하 요새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현대는 전략차원의 재고를 쌓아놓을 수는 있지만 자원의 소모 속도가 근대 이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빠르기에 전투에서 그 많은 탄약, 연료, 장비 등의 수요를 감당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현대전은 수송망과 통신망을 지키기 위해 영토 전체를 지킨다는 발상이 일상적이다. 적이 영토 안으로 진입해 자국 수송망이나 통신망을 마음대로 휘젓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다.

 

한국 고대 국가의 전투에서 동원 병력 규모는 대개 수천 명이다. 기록상 최대 규모는 백제가 4만, 신라가 5만, 고구려가 10만이다. 당시에는 동원 병력 자체가 현대전과는 달랐다. 고대에는 방어는 고사하고 모든 전선에 병력을 배치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당시 전투는 전선이 아닌 전략거점인 성을 중심으로 벌어졌다. 공성(攻城)은 성을 공격하는 것이다.

 

농성(籠城)은 성을 지키는 것이다. 시위(示威)대들이 한자리를 떠나지 않고 지키는 것을 비유하는 점거 농성이란 말이 기억난다. 고대 전쟁의 주력은 보병과 기병으로 나눌 수 있다. 보병은 대열 유지가 생명이다. 기병은 정찰과 돌파가 주요 임무다. 한국 전쟁사에서 기병의 비중은 적다. 개활지(開豁地; 탁 트인 공간)가 드물기 때문이다. 저자는 신라와 왜의 전략적 차이를 이야기한다. 신라에게 왜는 큰 전략적 가치를 지닌 지역이 아니었다.

 

국운을 걸고 장악해야 할 만큼 노력과 희생을 치를 의욕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는 의미다. 왜군은 주로 변경을 약탈하는 전략을 썼다, 신라는 고대 전쟁의 일반적 양상인 전면전을 치를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서 왜가 오랜 세월 주도권을 잡았던 것처럼 보인 것이다. 왜는 신라 성을 함락시킨 경우가 드물었고 함락시켰다 해도 얼마 지나지 않아 빼앗겼다.

 

성의 소재지인 산 자체가 천연 요새이기 때문에 공격측에서는 평지 성을 공격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웠다. 그래서 한반도에서 벌어지는 공성전에서는 대체로 성을 함락시키기 어려웠다. 그래서 포위만 해놓고 성안 물자가 떨어져서 방어측이 지치기를 기다렸다. 이게 바로 지리적 특성의 영향이다. 물론 농성은 방어에 유리한 대신 활동 범위에 제약을 받는다. 농성이 장기화될 경우 물자가 떨어져 아예 생존 자체에 위협이 되었다는 의미다.

 

그래서 성문을 열고 나가 싸웠던 것이다. 청야 전술(淸野 戰術)이 있다. 주변에 적이 사용할 만한 모든 군수물자와 식량 등을 없애 적군을 지치게 만드는 전술이다. 견벽청야(堅壁淸野)라고도 한다. 전쟁사를 재구성하는 데에 고고학적 증거만으로는 부족하다. 문헌 자료도 있어야 하는 것이다.(4~5세기 야마토 왜는 수수께끼의 대상이다.) 그들이 4세기 이후 급성장했다는 기록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고구려가 왜를 몰아내기 위해 5만 대군을 투입했다는 광개토왕릉비문(기록)이 있다. 물론 ‘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에는 왜에 관한 기록이 전혀 없고 ‘일본서기’에도 수백 년 넘게 이어져왔어야 하는 고구려와의 대립과 갈등에 대한 신빙성 있는 기록이 없다. ‘일본서기’식 시각에서 보면 당시 고구려가 가장 많은 분쟁을 빚은 나라는 백제였다. 4세기 이후 고구려와 백제의 분쟁은 열거하기 어려울 만큼 자주 나타난다.

 

광개토왕 비문에는 백제를 백잔(百殘)이라 부를 만큼 증오심이 강하게 나타났다. 저자는 전쟁의 역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역사적으로 중요한 문제가 이상하게 왜곡될 수 있다고 말한다.(59 페이지) ‘손자병법’에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선이라는 말이 있다. 싸우지 않고 상대가 가진 자원을 고스란히 차지할 수 있는데 굳이 상대를 박살내야 직성이 풀린다는 자가 있다면 그는 전략가로서의 자질이 없다고 보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의 격언이 강조되는 이유는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 자체가 매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근초고왕은 격변기에 활약했으면서도 싸우지 않고 이기는 전략을 찾아 실행한 인물이다. 그리고 이 점이 마한과 가야를 동시에 정복하면서 고구려와도 전쟁을 치를 수 있었던 이유다. 백제의 고유 역사서가 사라진 지금 남은 기록만으로 근초고왕의 업적과 의도를 총체적으로 전달할 수 없다.

 

4세기의 역사는 왜곡되었다. 강력한 고구려 세력에 맞서 남방에 반(反) 고구려 세력권을 형성한 중심이 마치 야마토 왜였던 것으로 보이게 하는 것이다. 저자는 신라와 왜의 전쟁 부분만 따로 떼어내 보면 퍼즐의 일부분만 보고 전체 그림을 제멋대로 그려내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광개토왕이 즉위할 무렵 동아시아 국제정세는 백제와 고구려가 양축을 형성했다. 백제는 혼자가 아니라 유사시 가야와 왜까지 조정 가능했다.

 

광개토왕 즉위 이전 시기는 백제는 근초고왕에서 근구수왕대에 해당한다. 고국원왕(광개토왕의 할아버지)대의 고구려는 남과 북의 적에게 줄곧 당하기만 한 시기였다. 그렇지만 고구려도 잠재력이 있는 나라였다. 나름의 반성과 재정비 시기를 거쳐 재기했다. 광개토왕대에 그럴 수 있었다. 고구려는 백제의 팽창을 막기 위해 반 백제 세력을 규합했다. 고구려와 신라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다.

 

신라가 고구려에 접근해 얻은 결실 중 하나는 내물왕 22년 신라 사신이 고구려의 소개로 전진(前秦)에 간 사건이다. 신라는 고구려 덕분에 국제무대에 데뷔한 셈이다. 당시 국제관계에서 중국과 교류한다는 것은 하나의 나라로 인정받는 것을 의미했다.

 

사실 광개토왕이 왜를 의식해 5만 병력을 동원한 것은 아니다.(121 페이지) 남방의 백제는 물론 북방의 연(燕)나라도 염두에 두어야 했던 고구려가 이해관계가 맞은 신라를 침공하는 왜를 물리치기 위해 5만 병력을 동원한 것은 왜가 강해서가 아니라 속전속결을 염두에 둔 결과다. 저항 못할 대군을 동원한 것이다.

 

‘백제 멸망의 비화’라는 부제를 가진 ‘편견으로 얼룩진 전쟁‘에서 저자는 의자왕 이야기를 한다. 의자왕은 한때 중국측에 의해 해동증자(海東曾子)라 불렸던 왕이다. 태자 때부터 어버이를 잘 섬기고 형제들 우애도 보여 그렇게 불린 것이다. 공자 만년의 제자로 이름이 삼(參)이었던 증자는 중국의 사상가이다. 이문회우(以文會友) 이우보인(以友輔仁)이란 말을 한 사람이다. 저자는 백제군이 최소한 백강(白江) 지역에는 배치되어 있었다는 기록이 있음을 언급한다.

 

백강은 부여 북부를 흐르는 강이다. 백제가 백강 지역에 군사를 배치하지 않아 나당 연합군이 이 지역을 쉽게 통과했다는 말은 허구인 것이다. 삼국사기를 비판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유교적 합리주의 사관에 의해 쓰인 삼국사기는 왜곡도 불사했다. 도덕성으로만 세상을 판단하면 기본적으로 색안경을 끼고 세상을 볼 수밖에 없게 된다. 또한 삼국사기는 철저하게 신라의 시각으로 쓰인 역사서다.

 

고구려의 역사를 잇는다고 자처했던 고려 시대에 쓰인 역사서이지만 고구려를 비난하는 내용이 은근히 많다. 훈요십조에서부터 역적의 땅이라고 비난했던 백제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도 없다. 나당연합군의 기본 전략은 당나라 군대는 서해안을 따라 해로로 진격하고 신라군은 육로로 진격하였다가 백제 수도인 사비에서 합류해 공격하는 것이었다.

 

당과 백제 사이에는 고구려가 자리하고 있었다. 당나라 군대가 사이가 좋지 않은 고구려를 통과하겠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당나라가 백제에 군대를 투입하기 위해서는 해로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당나라는 보급에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신라군이 그 역할을 했다. 이런 전략은 백제 멸망 이후 고구려를 공격하는 데에도 적용되었다.

 

당시 당나라는 1900척의 배로 13만 병력을 수송했다. 당나라는 후에 고구려 정벌 시에 신라가 보급에 적극적이지 않자 시비를 걸었다. 단순 비교는 무리이지만 현대전에서는 통상적으로 전투부대보다 지원 병력의 비중이 크다.

 

나당연합군이 같이 육로로 이동하는 것은 해로를 이용하는 것과는 격이 다르다. 배로는 며칠 버티기에도 곤란한 수준의 보급품 밖에 수송할 수 없어서 나머지 물량은 육로를 이용해 운반해야 했다. 백제는 결국 나당연합군의 백강 상륙을 막아내지 못했고 김유신 부대가 육로로 진입하여 당나라 군대와 합류하는 것도 막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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