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발견 - 한국 고대사의 재구성을 위하여
이희진 지음 / 동아시아 / 2004년 9월
평점 :
절판



고구려에 대한 관심이 전쟁에 대한 흥미를 돋우웠다. ‘전쟁의 발견’은 그 연장선상에서 접하게 된 책이다. 물론 고구려 이야기에 관심을 모을 이유는 없다. ‘한국 고대사의 재구성을 위하여’란 부제를 통해 알 수 있듯 책은 신라, 왜, 백제, 고구려의 전쟁 이야기와 전쟁 일반에 대한 논의를 담았다. 저자 이희진은 한국사를 전공한 분이다.

 

저자에 의하면 전쟁은 기본적으로 정치의 연장이다. 저자는 전쟁의 역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일부 몰지각한 역사가들 때문에 조상들이 바보로 몰린다고 말한다. 고대사의 전쟁과 현대사의 전쟁은 다르다. 고대 전쟁에서는 전 국토를 방어한다는 개념이 성립하기 어렵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성(城)을 위주로 한 전략 거점을 집중 방어하고 나머지 지역은 유사시 방어하는 형태의 전략을 구사하는 경우가 많다.

 

현대전은 성벽 대신 지하 요새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현대는 전략차원의 재고를 쌓아놓을 수는 있지만 자원의 소모 속도가 근대 이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빠르기에 전투에서 그 많은 탄약, 연료, 장비 등의 수요를 감당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현대전은 수송망과 통신망을 지키기 위해 영토 전체를 지킨다는 발상이 일상적이다. 적이 영토 안으로 진입해 자국 수송망이나 통신망을 마음대로 휘젓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다.

 

한국 고대 국가의 전투에서 동원 병력 규모는 대개 수천 명이다. 기록상 최대 규모는 백제가 4만, 신라가 5만, 고구려가 10만이다. 당시에는 동원 병력 자체가 현대전과는 달랐다. 고대에는 방어는 고사하고 모든 전선에 병력을 배치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당시 전투는 전선이 아닌 전략거점인 성을 중심으로 벌어졌다. 공성(攻城)은 성을 공격하는 것이다.

 

농성(籠城)은 성을 지키는 것이다. 시위(示威)대들이 한자리를 떠나지 않고 지키는 것을 비유하는 점거 농성이란 말이 기억난다. 고대 전쟁의 주력은 보병과 기병으로 나눌 수 있다. 보병은 대열 유지가 생명이다. 기병은 정찰과 돌파가 주요 임무다. 한국 전쟁사에서 기병의 비중은 적다. 개활지(開豁地; 탁 트인 공간)가 드물기 때문이다. 저자는 신라와 왜의 전략적 차이를 이야기한다. 신라에게 왜는 큰 전략적 가치를 지닌 지역이 아니었다.

 

국운을 걸고 장악해야 할 만큼 노력과 희생을 치를 의욕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는 의미다. 왜군은 주로 변경을 약탈하는 전략을 썼다, 신라는 고대 전쟁의 일반적 양상인 전면전을 치를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서 왜가 오랜 세월 주도권을 잡았던 것처럼 보인 것이다. 왜는 신라 성을 함락시킨 경우가 드물었고 함락시켰다 해도 얼마 지나지 않아 빼앗겼다.

 

성의 소재지인 산 자체가 천연 요새이기 때문에 공격측에서는 평지 성을 공격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웠다. 그래서 한반도에서 벌어지는 공성전에서는 대체로 성을 함락시키기 어려웠다. 그래서 포위만 해놓고 성안 물자가 떨어져서 방어측이 지치기를 기다렸다. 이게 바로 지리적 특성의 영향이다. 물론 농성은 방어에 유리한 대신 활동 범위에 제약을 받는다. 농성이 장기화될 경우 물자가 떨어져 아예 생존 자체에 위협이 되었다는 의미다.

 

그래서 성문을 열고 나가 싸웠던 것이다. 청야 전술(淸野 戰術)이 있다. 주변에 적이 사용할 만한 모든 군수물자와 식량 등을 없애 적군을 지치게 만드는 전술이다. 견벽청야(堅壁淸野)라고도 한다. 전쟁사를 재구성하는 데에 고고학적 증거만으로는 부족하다. 문헌 자료도 있어야 하는 것이다.(4~5세기 야마토 왜는 수수께끼의 대상이다.) 그들이 4세기 이후 급성장했다는 기록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고구려가 왜를 몰아내기 위해 5만 대군을 투입했다는 광개토왕릉비문(기록)이 있다. 물론 ‘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에는 왜에 관한 기록이 전혀 없고 ‘일본서기’에도 수백 년 넘게 이어져왔어야 하는 고구려와의 대립과 갈등에 대한 신빙성 있는 기록이 없다. ‘일본서기’식 시각에서 보면 당시 고구려가 가장 많은 분쟁을 빚은 나라는 백제였다. 4세기 이후 고구려와 백제의 분쟁은 열거하기 어려울 만큼 자주 나타난다.

 

광개토왕 비문에는 백제를 백잔(百殘)이라 부를 만큼 증오심이 강하게 나타났다. 저자는 전쟁의 역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역사적으로 중요한 문제가 이상하게 왜곡될 수 있다고 말한다.(59 페이지) ‘손자병법’에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선이라는 말이 있다. 싸우지 않고 상대가 가진 자원을 고스란히 차지할 수 있는데 굳이 상대를 박살내야 직성이 풀린다는 자가 있다면 그는 전략가로서의 자질이 없다고 보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의 격언이 강조되는 이유는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 자체가 매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근초고왕은 격변기에 활약했으면서도 싸우지 않고 이기는 전략을 찾아 실행한 인물이다. 그리고 이 점이 마한과 가야를 동시에 정복하면서 고구려와도 전쟁을 치를 수 있었던 이유다. 백제의 고유 역사서가 사라진 지금 남은 기록만으로 근초고왕의 업적과 의도를 총체적으로 전달할 수 없다.

 

4세기의 역사는 왜곡되었다. 강력한 고구려 세력에 맞서 남방에 반(反) 고구려 세력권을 형성한 중심이 마치 야마토 왜였던 것으로 보이게 하는 것이다. 저자는 신라와 왜의 전쟁 부분만 따로 떼어내 보면 퍼즐의 일부분만 보고 전체 그림을 제멋대로 그려내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광개토왕이 즉위할 무렵 동아시아 국제정세는 백제와 고구려가 양축을 형성했다. 백제는 혼자가 아니라 유사시 가야와 왜까지 조정 가능했다.

 

광개토왕 즉위 이전 시기는 백제는 근초고왕에서 근구수왕대에 해당한다. 고국원왕(광개토왕의 할아버지)대의 고구려는 남과 북의 적에게 줄곧 당하기만 한 시기였다. 그렇지만 고구려도 잠재력이 있는 나라였다. 나름의 반성과 재정비 시기를 거쳐 재기했다. 광개토왕대에 그럴 수 있었다. 고구려는 백제의 팽창을 막기 위해 반 백제 세력을 규합했다. 고구려와 신라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다.

 

신라가 고구려에 접근해 얻은 결실 중 하나는 내물왕 22년 신라 사신이 고구려의 소개로 전진(前秦)에 간 사건이다. 신라는 고구려 덕분에 국제무대에 데뷔한 셈이다. 당시 국제관계에서 중국과 교류한다는 것은 하나의 나라로 인정받는 것을 의미했다.

 

사실 광개토왕이 왜를 의식해 5만 병력을 동원한 것은 아니다.(121 페이지) 남방의 백제는 물론 북방의 연(燕)나라도 염두에 두어야 했던 고구려가 이해관계가 맞은 신라를 침공하는 왜를 물리치기 위해 5만 병력을 동원한 것은 왜가 강해서가 아니라 속전속결을 염두에 둔 결과다. 저항 못할 대군을 동원한 것이다.

 

‘백제 멸망의 비화’라는 부제를 가진 ‘편견으로 얼룩진 전쟁‘에서 저자는 의자왕 이야기를 한다. 의자왕은 한때 중국측에 의해 해동증자(海東曾子)라 불렸던 왕이다. 태자 때부터 어버이를 잘 섬기고 형제들 우애도 보여 그렇게 불린 것이다. 공자 만년의 제자로 이름이 삼(參)이었던 증자는 중국의 사상가이다. 이문회우(以文會友) 이우보인(以友輔仁)이란 말을 한 사람이다. 저자는 백제군이 최소한 백강(白江) 지역에는 배치되어 있었다는 기록이 있음을 언급한다.

 

백강은 부여 북부를 흐르는 강이다. 백제가 백강 지역에 군사를 배치하지 않아 나당 연합군이 이 지역을 쉽게 통과했다는 말은 허구인 것이다. 삼국사기를 비판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유교적 합리주의 사관에 의해 쓰인 삼국사기는 왜곡도 불사했다. 도덕성으로만 세상을 판단하면 기본적으로 색안경을 끼고 세상을 볼 수밖에 없게 된다. 또한 삼국사기는 철저하게 신라의 시각으로 쓰인 역사서다.

 

고구려의 역사를 잇는다고 자처했던 고려 시대에 쓰인 역사서이지만 고구려를 비난하는 내용이 은근히 많다. 훈요십조에서부터 역적의 땅이라고 비난했던 백제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도 없다. 나당연합군의 기본 전략은 당나라 군대는 서해안을 따라 해로로 진격하고 신라군은 육로로 진격하였다가 백제 수도인 사비에서 합류해 공격하는 것이었다.

 

당과 백제 사이에는 고구려가 자리하고 있었다. 당나라 군대가 사이가 좋지 않은 고구려를 통과하겠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당나라가 백제에 군대를 투입하기 위해서는 해로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당나라는 보급에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신라군이 그 역할을 했다. 이런 전략은 백제 멸망 이후 고구려를 공격하는 데에도 적용되었다.

 

당시 당나라는 1900척의 배로 13만 병력을 수송했다. 당나라는 후에 고구려 정벌 시에 신라가 보급에 적극적이지 않자 시비를 걸었다. 단순 비교는 무리이지만 현대전에서는 통상적으로 전투부대보다 지원 병력의 비중이 크다.

 

나당연합군이 같이 육로로 이동하는 것은 해로를 이용하는 것과는 격이 다르다. 배로는 며칠 버티기에도 곤란한 수준의 보급품 밖에 수송할 수 없어서 나머지 물량은 육로를 이용해 운반해야 했다. 백제는 결국 나당연합군의 백강 상륙을 막아내지 못했고 김유신 부대가 육로로 진입하여 당나라 군대와 합류하는 것도 막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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