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유학자, 조식
허권수 지음 / 뜻있는도서출판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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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南冥) 조식(曹植; 1501 - 1572)을 안 것은 2009년 나온 한형조의 ‘조선 유학의 거장들’을 통해서였다. 칼을 찬 유학자라는 점이 이례적으로 느껴졌지만 그 이상의 자료를 찾지 못한 채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조용미 시인의 ‘탐매행’이란 시에서 남명매(南冥梅)란 말을 들었다. 남명은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로 유명한 분이다. 대비 문정왕후를 과부, 그의 아들인 임금 명종(明宗)을 일개 고아로 표현한 부분이 있는 글이다.

 

때는 소윤 윤원형 일파가 일으키는 분탕(焚蕩) 패악질이 극에 달한 때였다. 같은 해에 태어난 이황, 2년 연상의 동고(東皐) 이준경(李浚慶)이 직언을 하지 못한 가운데 단성현감에 제수(除授)된 조식은 죽음을 무릅쓴 사직 상소를 올렸다.(단성은 조식이 태어난 경남 합천에서 가까운 곳이다. 조정에서 조식이 벼슬을 사양하지 못하도록 삼가현과 가까운 단성현 현감 자리를 내린 것이다.) 사직이 죽음을 무릅쓸 일이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나라의 폐단을 조목 조목 지적한 것으로 인해서였다는 말이다.

 

조식은 임금dl 인재를 등용하는 것은 마치 집 짓는 목수가 목재를 취해 쓰는 것과 같은 바 인재를 등용하려는 전하의 큰 은혜를 감히 독차지 할 수 없다고 아뢰었다. 조식은 전하께서는 과연 신을 어떤 사람으로 생각하시느냐, 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시냐, 문장을 잘 쓴다고 생각하시냐고 물었다. 조식은 문장을 잘 쓴다고 꼭 도를 지닌 사람은 아니고 도를 지닌 사람은 신처럼 이렇지 않다고 말했다.

 

전하는 물론 정승들 또한 신의 능력이나 사람됨을 잘 알지 못하는바 그 사람됨을 모르면서 등용한다면 훗날 나라의 수치가 될 것으로 그 죄가 어찌 보잘 것 없는 신에게만 있겠습니까?란 말을 했다. 나는 을묘사직소에서 가장 준엄한 부분은 과부, 고아 운운한 부분이 아니라 전하께서는 학문을 좋아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들어본 적이라도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전하께서는 군자를 좋아하십니까 소인을 좋아하십니까? 전하께서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따라 나라의 존망이 덜려 있습니다란 말이라 생각한다.

 

조식은 명종에게 밝은 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일을 요약해서 잘 간직한다면 사람을 알아보거나 판단하는 일이 거울처럼 맑고 저울처럼 공평하지 않음이 없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생각에 사악함이 없게 될 것이라는 말로 대안(代案)을 제시하기도 했다. 명종은 신하들이 간(諫)하는 말을 받아들여 조식에게 벌을 주지는 않았지만 끝내 바른 말을 한 조식을 공손하다고 여기지도, 옳다고 여기지도 않았다.

 

눈에 띄는 부분은 경연의 시강관으로 있던 정종영의 말과 사간원정언 이헌국의 말이다. 정종영은 조식은 세상에 숨어 사는 인물인지라 성격이 소탈하여 예를 차릴 줄 몰라 그런 것이니 거칠고 세련되지 못한 태도를 책망하기보다 물러나려는 욕심 없는 뜻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고 아뢰었다. 이헌국은 조식 같은 사람은 세련되지 못했고 옛 사람들의 책만 읽었으므로 말을 바르고 곧으나 문채(文彩)가 없으나 어려서부터 책을 읽은 사람인데 어찌 군신간의 의리를 모르기야 하겠습니까?라고 아뢰었다.

 

이헌국은 구양수가 황태후를 아낙네라고 했으나 벌을 받지 않은 송나라의 사례를 아울러 언급했다. 문질빈빈(文質彬彬)이란 말이 있는바 조식은 질(質)이 문(文)을 압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조식은 칼을 찬 유학자인 한편 성성자(惺惺子)라는 쇠 방울을 차고 다닌 분이기도 하다. 조식은 방울 소리를 들으면서 정신을 맑게 유지했다. 1519년 19세의 조식은 기묘사화를 목도한다. 조광조를 비롯 현사(賢士)들의 부고를 들은 조식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벼슬살이가 험난할 것이라 느꼈다.

 

조식이 평생 벼슬하지 않는 데에는 가장 절친한 벗인 성운(成運)의 형 성우가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죽은 영향이 컸다. 조식은 원나라 유학자 허영의 글을 읽고 과거(科擧)를 위한 공부가 그릇되었음을 깨달았다. ”이윤(伊尹)의 뜻과 안연의 학문을 모본으로 삼아 벼슬에 나아가서는 경륜을 펴서 업적을 이루고 초야에 있을 때는 지조를 지켜야 한다... 벼슬에 나아가서 아무 하는 일도 없고 초야에 있으면서 아무런 지조도 지키지 않는다면 뜻을 세우고 학문을 닦아 장차 무엇을 하겠는가?“란 글이다.

 

조식은 강직(剛直)했던 유학자다. 그는 아버지의 묘갈명을 쓰며 나의 아버지에게 일컬을 만한 덕이 없는데도 장황하게 미화한다면 그 글은 아첨하는 글이니 나의 아버지를 부끄럽게 만드는 결과가 된다고 생각했다. 조식은 낮에는 정신을 집중하고 길지 않은 시간 깊이 자는 것으로 정신을 맑게 유지했다. 조식은 제자들에게 한 구절 구절 자세히 풀어 설명하지 않았다. 그는 한 문장, 한 문장 뜯어가며 읽지 않고 마음으로 글 전체의 큰 뜻을 터득하고자 읽었다.

 

조식은 학문을 하는 목적은 낱낱의 지식을 얻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식견을 높이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식견을 높이면 태산에 올라섰을 때 사방의 높고 낮은 산이 다 눈에 들어와 지형을 정확하게 살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주자가례에 대해서도 같은 자세를 유지했다. 조식은 바다와 관련이 큰 사람이었다. 산해(山海) 선생으로도 불렸는데 이는 산해정(山海亭)에서 학문을 닦고 제자들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남명(南冥)은 장자(莊子)에서 취한 호로 남쪽의 아득한 바다를, 나아가 남녘 바다를 향해 날아가는 대붕을 뜻한다. 그가 거처하던 방은 계명실(繼明室)이란 이름을 가졌다. 옛 현인들의 밝은 덕을 계승하여 사방에 펼친다는 의미를 가진 방이다. 그의 시기는 한양에서 거주한 시기(26세 이전), 경남 김해에 산해정(山海亭)을 짓고 산 시기(30 - 45세), 경남 합천에 계부당(鷄伏堂)과 뇌룡사(雷龍舍)를 짓고 산 시기(48 - 61세), 경남 산청에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산 시기(61 - 72세)로 나눌 수 있다.

 

산해정은 높은 산에 올라 바다를 내려다 본다는 의미를 지닌 말이다. 계부당은 닭이 알을 품는 것처럼 자신을 함양(涵養)하는데 힘쓰고 제자들을 잘 가르치겠다는 의미가 담긴 이름이다. 뇌룡사(雷龍舍)란 시동(尸童)처럼 가만히 앉아 있다가 용처럼 승천하고 연못처럼 잠잠하다가 뇌성벽력이 치는 것처럼 한다는 의미로 실력을 쌓아 때를 기다림을 뜻했다. 산천재는 주역의 산천대축(山天大畜)에서 기인한 이름이다. 조식은 산천이라는 말을 통해 강건하고 독실하게 공부해 크게 덕을 쌓고자 하는 의지를 나타냈다.

 

그리고 자신의 시대에 경륜을 펼칠 기회를 얻지 못한다 해도 힘껏 제자를 길러 훗날에 큰 덕이 쌓이기를 기대했다. 조식과 이황은 동시대를 살았지만 편지를 주고받았을뿐 일평생 만난 적이 없다. 그들은 기질이나 학문적 경향이 달랐다. 조식은 공부하는 것은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과 같으니 한 치를 놓아두면 한 길이나 미끄러져간다는 말을 했다. 저자는 조식이 다른 사람은 권세를 자랑한다면 자신은 학문과 지조로써 긍지를 갖겠노라고 한 것을 언급하며 형식만을 위한 형식은 있을 수 없지만 내용을 담은 형식은 필요한 것이라 덧붙인다.

 

조식은 경상도 관찰사 이기를 장차 사람을 해칠 사람으로 보았다. 그런 그가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고자 학문에 대해 물어오자 병이 많아 한가하게 지내면서 요양이나 하고 있을 뿐으로 의리의 학문에 대해서는 공부한 것이 없다고 답한 것을 일러 조식이 아무리 학문을 좋아해도 사람 같지도 않은 자와 무슨 학문을 이야기하겠는가?란 말로 설명했다.

 

본문에는 조식의 절친 청송(靑松) 성수침(成守琛; 1493 - 1564) 이야기도 나온다. 기묘사화로 스승 조광조가 죽임을 당한 것을 보고 백악산 자락에 청송당을 짓고 숨어들었다가 파주로 간 사람이다. 파산서원(坡山書院)에 성수침, 성수종, 백인걸, 성혼의 위패가 모셔졌다. 조식의 문하에서 의병이 많이 나왔다. 가장 먼저 기의(起義)한 사람이 조식의 외손녀 사위였던 곽재우다. 1558년 58세의 조식은 지리산 유람에 나섰다. 진주 목사로 있었던 김홍, 자형 이공량(李公亮), 고령현감을 지낸 벗 이희안, 청주목사를 지낸 이정(李楨) 등과 함께. 고려 인종(재위; 1122 - 1146) 때의 은자(隱者) 한유한(韓惟漢)이 살던 삽암이란 곳이 나온다.

 

삽암은 꽂힌 바위라는 의미다. 섬진강가의 이곳에 모한대(慕韓臺)라는 석각(石刻)이 있다. 한유한을 그리워하는 곳이라는 대(臺)다. 조식의 실천 위주의 삶은 정여창(鄭汝昌)에게서 본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조식은 자신이 사는 삼가현은 산세가 너무 빈약하다고 생각하고 거처를 옮기기 위해 지리산 일대를 10여 차례 찾았다. 조식은 장중한 사람 즉 어진 사람으로 정적인 산을 좋아했다. 지혜로운 사람은 민첩한 사람이기에 늘 쉬지 않고 흐르는 물을 좋아한다.

 

조식은 바위에 이름을 새겨놓은 사람들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바위에 이름을 새겨 놓으면 천 년 만 년 썩지 않고 자기 이름이 전해질 것으로 생각해서 이렇게 해놓은 것이다. 대장부의 이름은 푸른 하늘의 밝은 해처럼 떳떳해야 한다. 훌륭하게 일생을 살았다면 사관이 역사책에 기록할 것이고 넓은 땅 위의 사람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할 것이다. 그런데 쩨쩨하게 날다람쥐나 살쾡이가 사는 수풀 속 바위에 이름을 새겨놓고는 없어지지 않고 전해지기를 바라고 있다. 이는 새 그림자를 보고서 후세 사람들이 무슨 새인지 알기를 바라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것이다.”

 

조식은 “산에 들어온 사람 중에 누가 그 마음을 깨끗이 씻지 않겠는가? 또 누가 스스로 소인이라고 생각하겠는가? 그러나 잠시 마음을 씻는다고 해서 소인이 군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란 생각도 했다. 중요한 것은 꾸준한 노력일뿐 단기간의 노력은 효과가 없다는 것이다. 조식은 무거운 부역과 세금에 신음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여유 있게 유람이나 하는 자신을 겸연쩍게 여겼다. 물론 선비들에게 유람은 단지 먹고 노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좋은 경치를 통해 사물의 이치를 깨닫고자 했다. 그리고 스승, 제자, 벗들의 학문적 태도와 삶의 방식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았다.

 

조식은 산천재의 왼쪽 벽에 경(敬)자를 써 붙이고 오른쪽 벽에 의(義)자를 써 붙였다. 경은 내면의 수양 방법이고 의는 경을 바탕으로 한 사회적 실천 원칙이다. 조식은 하늘에 닿아 있는 지리산 천왕봉을 사랑했다. 그리고 그 봉을 스승으로 여겨 배우고자 했다. 조식은 덕천강도 스승으로 삼았다. 조식에게 제자의 예를 갖추어 폐백(幣帛)을 가지고 찾아온 사람 가운데 정탁(鄭琢)이 있다. 윤원형의 악행을 서슴없이 탄핵한 사람이고 원균 등의 모함으로 옥에 갇혀 모진 고문을 당한 이순신의 무죄를 밝혀 죽음을 면하게 했다.

 

그는 성리학 이론에만 몰두한 문약한 유학자가 아니었다. 선비로서 병법을 모르면 큰 임무를 맡을 수 없다고 주장한 그는 병법에도 정통했다. 문무를 함께 갖추어 밖으로 나아가서는 무장이 되고 안으로 들어와서는 정승이 되어 세상을 구할 사람이었다. 조식은 황진이도 만났다. 조식은 임꺽정이 잡혀 처형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라를 위해 다행이라 여기면서도 홀로 가만히 앉아 눈물을 흘렸다. 선량한 백성들을 도적떼로 내모는 현실을 탄식하는 한편 근본 원인을 찾아 대책을 세우지 않는 벼슬아치들에게 분노를 느꼈다.

 

조식은 젊은 문인들이 공허한 말장난을 하는 쪽으로 공부 방향을 정해가는 것에 이황의 책임이 크다고 느꼈다. 조식은 요즘 공부하는 사람들이 쇄소응대의 예절도 모르면서 입으로 천리(天理)를 이야기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책에는 동서 분당(分黨) 이야기도 나온다. 동인은 김효원을 지지하는 사람들로 그의 집이 도성 동쪽 건천동에 있었기 때문에 동인이라 한 것이다. 서인은 심의겸을 지지하는 사람들로 그의 집이 도성 서쪽 정릉방에 있었기 때문에 서인이라 한 것이다.

 

조식은 친구 이준경이 영의정에 오르자 출사할 생각을 가졌다. 조식은 경의(敬義)를 주로 하여 지식보다 실천을 중시했다. 성리학 외에도 천문, 지리, 산술, 병법 등을 깊이 연구했고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조식은 스스로 벼슬길에 나서려고 설레발을 치며 부산을 떠는 것은 옳은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유학자에게 공부의 궁극적인 목적은 자신을 올바르게 수양한 후 백성을 교화하는 수기치인(修己治人)에 있다.

 

이양소(李陽昭)가 고려, 조선 두 왕조에 걸쳐 벼슬할 수 없어 친구 이방원의 부름을 거절한 것과 달리 강회백(姜淮伯)은 두 왕조에서 벼슬했다. 이에 조식은 강회백이 심은 매화(정당매; 政堂梅)를 보고 어제 꽃을 피우더니 오늘도 또 꽃을 피웠다고 했다. 변절을 풍자한 것이다. 조식은 학문의 근본이 선 다음 여러 가지 다른 분야에 관심을 갖는 것은 괜찮지만 처음부터 이것저것에 관심을 쏟다 보면 올바른 학문을 이루기 어려울 것이라 보았다.

 

조식과 이황에게서 배운 정구(鄭逑)의 학문은 제자 허목에게로 이어졌다. 허목은 성리학을 중심으로 한 당대의 학문적 분위기와는 달리 원시유학의 육경을 중시했다. 이런 학풍은 이익, 정약용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을묘사직소(1555년) 이후 11년만에 조식은 다시 명종의 부름을 받고 임금을 만나 명종이 능동적으로 정치를 펼 인물은 아니라고 판단하고 지리산 덕산동으로 돌아왔다. 조식은 한 인사가 그릇된 이기론을 펼치자 지인에게 자신은 평생 다른 기술은 없고 다만 책 읽는 일만 했으니 입으로 성리학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어찌 다른 사람들보다 못할까만은 오히려 말하고 싶지 않았을뿐이라고 말했다.

 

조식은 분신처럼 아낀 정인홍에게 평소 차던 경의검(敬義劍)을 물려주었다. 조식은 ”정인홍이 있으면 내가 죽지 않을 것“이라 말할 정도였다. 정인홍은 임진왜란 때 58세의 적지 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의병을 일으켰다. 그리고 조식의 문인들은 물론 자신의 제자들을 의병에 참여하도록 해 충의를 실천했다. 조식은 은거하면서도 나라와 백성에 대한 관심을 잠시도 놓은 적이 없었다. 조식은 김종직, 김굉필, 조광조 등이 사화로 비참한 최후를 마쳤고 그들과 뜻을 함께 한 이들이 죽임을 당하거나 귀양간 것은 간신들의 탓이 근본적인 원인이었지만 시대의 기미를 보고 출처(出處; 나아감과 물러남)를 바로 하지 못한 데에도 그 원인이 없지 않다고 보았다.

 

조식은 곽재우에게 유학자로서 읽어야 할 경서와 함께 병법에 관한 책도 두루 읽게 했다. 조식은 ”학문을 통해 세상을 구제하기를 원하는 사람”인 자신이 출사하지 않은 것은 때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라 답했다. 조식은 인재 등용은 임금이 직접 해야 한다고 말했다. 임금이 자신을 닦는 수양이 부족하면 자신만의 저울도 거울도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조식은 임금의 덕을 밝히지 않은 채 나라를 다스리려고 하는 것은 배도 없이 바다를 건너려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조식은 전하(선조)께서 만약 신의 말을 버리지 않고 관대하게 받아들인다면 신은 전하의 용상 아래에 있는 것과 같은 바 어찌 신의 늙고 추한 모습을 만나 본 후에라야 신을 썼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란 말을 했다. 또한 전하께서 만약 신이 한 말을 좋아하지 않으면서 신을 만나려고 한다면 헛일을 하는 것이라 말했다. 조식은 출처의 절조를 중요시하여 임금이 아무리 불러도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조식은 죽고 사는 일은 평범한 이치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한 채 세상을 떠났다.

 

선조는 처사(處士)를 자처한 조식에게 정3품 대사간을 추증했다. 평소 조식에게 맡기고 싶어했던 관직이다. 조식은 저술에 있어서는 기발하고 고상한 것을 좋아하고 형식에 구애받지 않았다. 조식을 모신 덕천서원도 대원군의 서원 철폐 대상이 되었다. 대원군은 문묘에 배향되었거나 나라에 큰 공이 있는 인물을 모신 서원이나 사당 47개소를 제외한 나머지 서원들을 모두 없앴다, 조식의 문묘 종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수제자 정인홍이 처형당한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회퇴변척(晦退辨斥)에 대해 알아보아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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