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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30억년을 찾아서
고영구 외 지음 / 전남대학교출판부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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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는 크게 지질시대와 역사시대로 나뉜다. 별의 시대(cosmic age), 지질시대, 역사시대로 나누기도 한다. 최근에는 지질시대를 지구가 우주공간에서 형성되어 제 모습을 갖춘 시기와 지질학적인 작용이 일어나기 시작했던 때를 구분해 전자를 천문학상의 시대라는 의미의 星시대라 부르기도 한다. 역사시대는 대략 1만년전에 시작된 것으로 본다. 지질시대가 지구 역사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지구의 나이는 46억년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오랜 생물 화석은 오스트레일리아 와라우나 층군에서 발견된 약 35억년전의 스트로마톨라이트다. 지구 역사에서 거의 40억년을 차지하는 선캄브리아기는 매우 긴 시기이지만 화석기록은 매우 빈약하게 남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생대 생물의 주인공으로 주저하지 않고 삼엽충을 꼽는다. 중생대는 공룡, 암모나이트, 겉씨식물로 대표되는 시대다. 중생대에는 소철과 은행(銀杏)으로 대표되는 겉씨식물들이 번성하였다.

 

신생대는 중생대 백악기 이후에 등장한 속씨식물과 포유류로 대변되는 시대다. 많은 연구자들이 동의하는 것처럼 중생대 백악기 말의 소행성 충돌로 지구는 큰 재앙을 맞았다. 공룡들의 지배하에서 침묵하던 포유류들은 서서히 공룡들이 빠져나간 자리를 급속도로 차지하면서 신생대를 포유류의 시대로 만들었다. 신생대에 들어서서 속씨식물이 발전하여 외떡잎식물들이 등장하였고 진정한 의미의 초원이 만들어졌다.

 

지구의 나이 46억년은 지구 밖에서 지구로 떨어지는 미행성체의 잔해인 운석의 나이다. 스트로마톨라이트는 엽록상 남조류 집적체다. 이것이 지구에 산소를 공급해 동물이 출현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주었다. 소청도에서 우리는 스트로마톨라이트를 만날 수 있다.(조류는 藻類로 쓴다. 조는 마름 조자다. 마름이란 바늘꽃과에 속하는 한해살이의 수초를 말한다.) 소청도의 스트로마톨라이트는 선캄브리아기의 것이다.

 

태백의 것은 고생대 후기 바다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스트로마톨라이트는 과거 그곳이 수심이 얕은 바다이거나 호숫가였음을 말해준다. 원시 지구의 대기에 우세했던 이산화탄소는 석회암이 되어 바다에 퇴적되었다. 만일 이산화탄소가 엄청난 양의 석회암으로 지구 표피에 저장되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진화한 다양한 동물 및 인간이 태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임진강 상류 일대에는 석회암, 규암, 점판암, 결정편암 등을 중심으로 한 변성암류와 고생대 퇴적암류가 분포한다.

 

추가령 열곡(裂谷)대를 경계로 하여 남과 북이 현저한 차이를 드러낸다. 추가령 열곡대 북쪽에는 선캄브리아기 변성암류와 고생대 지층이 우세하게 분포한다. 이들이 임진강 벨트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최근 이곳이 중국에서 이어져 한반도의 한가운데에서 대륙과 대륙이 충돌한 곳일지도 모른다는 주장이 있다. 대륙 충돌을 확인해주는 결정적 증거는 다이아몬드나 석영이 고밀도로 뭉친 코어사이트 등 초고압 변성암대의 존재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다이아몬드나 뭉친 코어사이트가 발견되지는 않았지만 고압 변성광물인 각섬석을 포함하는 각섬암과 석류석이 발견된다. 각섬암은 임진강대의 남쪽 경계부에 해당하는 연천군 미산면 마전리와 포천군 관인면 중리 등 한탄강 부근 도로변에서 발견되었다. 이 각섬암을 분석한 결과 형성 당시 10-14kbar의 고압조건 즉 지하 50km에서 만들어져 지표로 올라온 것으로 밝혀졌다.

 

절대연령 측정 결과 이 각섬암의 원암인 반려암이 만들어진 것은 선(先) 캄브리아기 후기인 9억 5천만년전으로 드러났다. 석류석 결정이 만들어진 것은 2억 3천만년전으로 밝혀졌다. 이 2억 3천만년전은 중국을 이루는 두 대륙이 충돌한 시기와 일치하므로 임진강 벨트를 중심으로 충돌대가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암석의 주요 부분은 화강암과 화강편마암이다. 물론 우리나라는 광물의 표본실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옛날에 분출한 화산암이나 진흙, 모래 등의 퇴적물이 쌓여서 만들어진 당시의 지구자기의 방향을 알아볼 수 있는 단서가 있다. 광물이나 퇴적물 입자가 당시 지구 자기장의 방향에 따라서 배열되는 경우가 많아 그 때의 지구 자가의 방향뿐 아니라 시대까지도 추정하게 하는 것이다. 홍도가 붉은 이유는 규암 내에 얼마간 함유된 철 성분이 풍화, 침식될 때 산화되어 붉은 색을 띄게 되었기 때문이다.

 

즉 쇠가 녹슬면 붉은 색을 띄는 것과 같은 이치다. 석영은 무색 내지 흰색을 띠지만 규암이나 사암에 함유된 미량의 철 성분이 산화환경에서 암석이 되어 붉어진다. 홍도는 낮에는 밝은 홍색이 되고 석양 무렵에는 섬 전체가 붉게 물들이기에 붙은 이름이다. 석회암동굴은 지표수가 지하로 스며들고 그 물이 낮은 위치의 출구를 통해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통로로 형성된 지형이다. 석회암 동굴의 나이는 대개 부풀려 선전된다.

 

이 때의 연령은 모암(母巖)인 석회암의 것이지 동굴과는 무관하다. 자연은 강원도와 경상북도 일대의 석회암 지대에서는 땅속에 석회암으로 지하궁궐을 세웠지만 화산쇄설층으로 이루어진 제주도에서는 용암을 힘차게 흘려보내 무섭고 웅장한 용암동굴을 세워놓았다. 제주도에 용암동굴이 발달한 이유는 제주도의 용암이 유동성이 크고 점성이 적은 현무암질 용암이기 때문이다. 용암동굴은 용암 속에 포함되어 있는 탄산가스나 수증기 등 고온의 가스 압력 때문에 천장이 아치모양을 이루는 것이 보통이다.

 

미래의 에너지는 석탄이라고 말하는 학자들이 있다. 고생대 석탄기와 페름기 초는 따뜻하고 습윤하여 식물이 번성하여 큰 삼림을 이루었다. 이 시대의 식물(인목, 봉인목, 노목 등 양치식물)은 대체로 습지나 얕은 물밑에 뿌리를 내렸으며 죽은 후 쌓여 오랜 시간이 경과되고 대단히 두꺼운 식물의 충적층을 만들게 되었다. 이러한 식물층은 산소 부족으로 쉽게 썩지 않고 보존되어 석탄의 초기에 해당하는 토탄(peat)이 생성된다.

 

이 후 지각의 침강으로 그 위에 퇴적물이 두텁게 쌓여 위에서 가해지는 압력을 받는 동안 식물 구성성분인 수소, 질소, 산소의 대부분이 서서히 달아나버리고 후에는 탄소를 주성분으로 하는 석탄이 생성된다. 화석기록에 의하면 공룡은 트라이아스기 말기인 약 2억5천만년전에 지구상에 처음 나타났다. 퇴적암의 나이를 이야기할 때는 화성암, 변성암과는 다른 개념을 가져야 한다. 화성암은 지질학적으로는 일시에 만들어진다고 할 수 있다.

 

용암이 분출되어 굳은 시간, 지하 깊은 곳에서 마그마 물질이 식어 암석이 되는 시간이 암석의 나이가 된다. 변성암은 변성작용을 받아 변성 광물이 형성된 시간이 나이가 된다. 퇴적암의 경우 일반적으로 하나의 나이를 갖기는 어렵다. 100미터 두께의 퇴적암의 경우 하부에서 상부에 이르기까지 각각의 층의 나이가 전부 다르다. 수백 개의 나이를 갖는 것이다.

 

화강암은 석영과 알칼리 장석, 얼마간의 소다사장석과 유색광물로 이루어진 중립 내지 조립질 암석이다. 지하 약 50~60km의 심도 즉 하부지각이나 상부맨틀에 해당하는 깊이에서 만들어진 화강암질 마그마가 지각을 뚫고 올라오다가 천천히 식으면서 굳어 만들어지는 것으로 산성 심성암에 속한다. 추가령 열곡대는 원산 영흥만에서 시작하여 서울에 이르는 좁고 낮은 긴 골짜기다. 서쪽의 마식령 산맥과 동쪽의 광주산맥 사이에서 발달하였다.

 

지질학적 측면에서 토양단면은 통기대, 포화대, 기반암으로 구분된다. 통기대는 지하수면 상부에 위치하며 토양 공극이 공기로 채워져 있으며 지표수가 지하수면으로 이동하는 통로다. 포화대는 토양 공극이 지하수로 채워져 있다. 통기대와 포화대 사이에는 지하수면이 존재한다.

 

저자들은 “우리가 그랜드캐넌을 간다고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라고 묻는다. “웅장하고 아름다운 경치를 볼 수 있어도 그것이 진정한 지질여행이라고 할 수 있을까? 작은 것이라도 하나 하나 깊게 관찰하고 들여다보고 생각하고 상상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닐까?”라고 말한다. 저자들은 자연사박물관을 통해 약간의 지질여행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에는 제대로 된 자연사박물관이 별로 없다.(이 책의 출간 일자는 2003년 2월이다. 2003년 7월에 서대문자연사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지질 또는 지구과학은 갈증을 일으키는 대상이다. 좋은 책을 찾아 한 걸음 한 걸음 전진할 수밖에 없다. 지질공원 해설을 하며 내가 부족한 부분, 필요한 부분을 중심으로 책을 읽었다. 통독하지 않았으니 당연히 발췌식으로 읽을 다른 지질 또는 지구과학 책들을 찾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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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쓰는 고구려 역사
박경순 지음 / 내일을여는책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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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시대의 역사가 그렇겠지만 고대사는 헤아려보아야 할 것이 많다.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가장 강대한 나라이자 동아시아의 최대 강국이었던 고구려 역사야말로 특히 그렇다. 문제는 무엇인가? 광개토왕릉비와 삼국사기가 각기 많이 다르게 기술한 고구려사를 공부할 때 특히 유의할 것은 집필 배경을 헤아리는 것이다.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는 후기 신라 말 또는 고려 초기에 집필된 것으로 추론되는 구삼국사를 저본으로 편찬한 책이다.

 

삼국사기는 나름 중요한 몫을 하고 있지만 외세를 끌어들여 고구려를 멸망시킨 신라의 지배층이 당나라와 짜고 고구려와 백제의 역사를 의도적으로 조작한 책을 저본으로 한 책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 학계는 고구려의 건국 연대를 기원전 37년으로, 북한 학계는 기원전 277년으로 본다. 광개토왕릉비는 고구려 당대의 기록이고 삼국사기는 고려 중기인 1145년 김부식 등이 고려 인종의 명을 받아 편찬한 기전체 역사서다.

 

당연히 광개토왕릉비가 더 정확한 1차 사료다. 삼국사기 권 22 고구려 본기 끝에 실린 사론에는 고구려는 진나라, 한나라 이후 중국의 동북쪽 모서리에 끼어 있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중국 북송대의 역사서인 ’당회요(唐會要)‘에는 고구려가 천년에 미치지 못한다고 기술되어 있다. 기원전 277년에서 기원후 668년까지 계산하면 945년이 된다.

 

광개토왕릉비에는 광개토왕이 추모왕의 17세손이라고 나온다. 삼국사기에는 12세손으로 나온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유리명왕 33년(14년)에는 무휼(후의 대무신왕)을 태자로 삼으면서 군사와 국가에 관한 일을 위임했다는 기록이 있다. 대무신왕의 어머니는 다물국왕 송양의 딸로 기원전 17년에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무휼이 태자가 되었을 때 그의 나이는 적어도 31세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의 나이는 11세로 기록되어 있다.

 

37년과 277년은 240년 차이다. 고구려 건국이 기원전 277년이라면 고구려 정치와 문화의 기원을 중국의 영향에서 찾을 수 있는 논거는 사라진다. 당시 중국은 전국 칠웅이 다투는 내전 상태여서 우리나라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우리나라 철기문화는 중국과 관계 없이 기원전 2000년기 말부터 한반도에서 독창적으로 창조해 발전시킨 것이다.

 

어릴 적 아버지 금와왕의 궁전인 부여 궁전에 살면서 왕자 대우를 받았지만 자라면서 무예와 지략의 출중함이 드러나자 금와의 일곱 왕자들의 시기와 질투를 받은 끝에 말 목장의 목동으로 쫓겨난 추모왕은 오이, 마리, 협보 세 명의 친구와 함께 남쪽 지역으로 망명길에 올랐다. 그의 망명은 도피가 아닌 새 도전이었다. 추모왕이 만난 중요 인물들 중 둘을 빼놓을 수 없다. 비류국왕 송양과 소서노다.

 

부여왕 해부루의 서손인 우태의 처였던 소서노와의 만남은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우태를 잃은 소서노를 만난 추모왕은 그의 도움으로 매우 짧은 기간 안에 자신의 정치군사적 기반을 구축했다. 구려(句麗)라는 말은 위대하다, 성스럽다, 크다 등의 의미를 갖는다. 위대한 나라, 신성한 나라라는 의미다. 고와 해는 같은 의미다. 고구려는 태양의 나라, 신성한 나라, 태양(신)의 후손이 다스리는 신성한 나라라는 의미다.

 

추모왕은 송양을 다물후(다물국왕)로 봉(封)하고 그 땅을 다물도로 칭했다. 광개토왕릉비는 대주류왕을 고구려의 기초를 확립한 왕으로 칭송했다. 그는 부여국을 정벌했고 부여의 왕성이 있었던 길림 지역을 확보했다. 건국 초기 고구려와 부여는 약소국과 강대국 관계였다. 고구려에게 부여는 가장 큰 골칫거리였다. 추모왕이 부여의 망명세력이었기에 부여로부터 부단히 간섭과 설움을 받았다.

 

부여를 극복하는 것이야말로 고구려 발전에서 가장 큰 역사적 과업이었다. 이런 과업을 대주류왕이 해낸 것이다. 고구려는 이때 서 요하 부근까지 진출해 진나라, 한나라와 국경을 맞대는 큰 나라가 되었다. 유리명왕은 고구려의 홀본에서 압록강변 국내성으로 수도를 옮긴 왕이다. 홀본은 고구려의 첫 수도다. 홀본성은 산천이 좁고 큰 평야를 끼고 있지 못해 수도로서는 적합하지 못했다.

 

홀본성의 경우 평지성(하고성자성)과 산성(오녀산성)이 거의 10km나 떨어져 있어 유사시에 산성으로 들어가기 어렵고 공간도 좁았다. 한나라와의 전선도 가까워 불안 요소가 많았다. 국내성 일대는 당시 고구려의 중심 지역인 압록강 중류에서 가장 넓은 벌이 있는 곳이고 압록강을 끼고 있어 교통에도 좋았고 한나라 침략세력과의 거리가 홀본보다 300리 가까이 있는 것 말고 중간에 노령산 줄기의 험한 산들이 가로막고 있어서 군사상으로도 매우 유리했다.

 

고구려는 모든 수도를 평지성과 산성의 이원체제로 운영했다. 평소에는 궁성에서 활동하다가 유사시에는 군민이 모두 산성 안에 들어가 항전했다. 고구려 산성은 고로봉식 산성이다. 큰 골짜기를 끼고 3면이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한쪽 면만 트인 지형을 고로봉이라 한다. 이런 고로봉을 택해 3면 산 능선에 성벽을 둘러 쌓고 트인 쪽에 성문을 낸 산성을 고로봉식 산성이라 한다. 이 산성의 장점은 식수, 용수 등 수자원이 풍부하고 넓은 골짜기에 많은 사람이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국내성은 기원 3년부터 427년까지 425년 동안 고구려 수도 역할을 했다. 그 이후로도 668년까지 부수도로서 또 국내주의 중심지로서 중요 역할을 했다.(홀본성은 280년간 수도 역할을 했다.) 고구려군은 방어력만이 아니라 뛰어난 기동성과 공격력도 갖춘 무적 강군이었다. 고구려군의 공격력의 정수는 뛰어난 기마군단이었다. 고구려 기마군단은 개마무사로 이루어진 기마군단이다. 개마무사는 말까지 모두 철갑옷으로 무장한 군인이다.

 

낙랑군 재(在) 평양설은 역사적으로 파산되었다. 낙랑 무덤은 한식 묘제가 아니라 조선식 묘제며 유물도 대부분 조선식 유물이다. 중국의 한무제는 고조선 왕조를 무너뜨렸지만 고조선 유민들과 고구려 사람들의 완강한 저항으로 압록강 계선 북서쪽 요동반도 지역만을 장악했다. 고조선 수도가 있었던 평양을 중심으로 낙랑국이 들어섰다. 고구려 역사에서 가장 오래 왕위에 있었던 사람은 태조대왕이다. 그가 재위한 기간은 94년으로 장수왕의 79년보다 15년 길다.

 

태조대왕은 후한 세력과의 투쟁을 통해 고구려 발전의 토대를 구축했다. 그래서 시호를 고구려의 중흥 시조라는 의미에서 태조대왕이라 했다. 산상왕은 환도성으로 (임시로) 수도를 옮겼다. 환도성은 고구려가 국내성에 수도를 둔 시기 평지성인 국내성과 함께 도성을 이룬 산성이다. 평양으로 수도를 옮긴 사람은 동천왕이다. 고국원왕의 아들 소수림왕은 황제국가를 선언했다. 그가 율령을 반포했다는 말은 황제국가를 선언했다는 말이다.

 

소수림왕 이전에도 각종 법, 제도, 관료 기구가 존재했다. 전제군주권도 보장되어 있었다. 소수림왕은 중국 여러 나라에서 사용하던 황제라는 호칭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고구려가 황제 국가의 틀을 갖춘 것은 태학, 태묘 등을 둔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고구려는 소수림왕 때부터 독자 연호를 사용했다. 소수림왕은 남진 정책을 폈다. 광개토왕비는 414년 만들어졌다. 6.4미터 높이다.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고구려 시조 추모왕이 나라를 세운 경위, 그 후 역대 왕들의 계승 관계, 광개토왕의 치적에 대한 총평, 산릉의 축조와 능비 건립 목적(1단), 광개토왕의 공훈과 업적(2단), 수묘인(守墓人)들에 대한 내용(3단)이다. 논란 거리는 도해파(渡海波)란 말이다. 저자는 패하(浿河)의 패(浿)를 주목한다. 조금만 손 보아도 해(海)가 된다는 것이다. 해(海)를 패(浿)를 고친 것으로 보면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광개토왕 5년 8월 조에 나온 “고구려가 패수 가에서 백제와 싸웠다”는 기록과도 부합한다.

 

‘백잔’ 다음 글자는 초천부, 초균덕 부자의 탁출작업 저본에는 동(東)으로 돼 있다. 그렇다면 ‘왜’를 주격으로 볼 수 없다. 동이란 글자가 없다는 것을 전제하더라도 백제를 치고 신라를 신민으로 만든 주체는 왜가 아니라 고구려이며, 따라서 이 문장의 주격은 고구려라야 한다. 김정호의 대동지지 교하편에 관미성이 오두산성이라는 기록이 있다. 오두산을 오도산으로 표기한 고려 시대 기록을 볼 필요가 있다.(島; 섬 도).

 

광개토왕이 오두산성을 공격할 때 수군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오두산성은 섬, 정확하게 말해 육계도(陸繫島)라 해야 한다. 고구려군은 7개 방향으로 나누어 20일 동안이나 쉼 없이 오두산성을 공격해 성을 함락시켰다. 백제는 396년. 371년 전투에서 군사력을 과시했다. 이 과정에서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전사했다. 고국원왕은 광개토왕의 할아버지다. 광개토왕은 391년 왕위에 올라 백제를 주공격 대상으로 삼아 집중 타격하는 한편 신라를 견인하는 정책을 폈다.

 

“왜가 신묘년에 왔으므로 바다를 건너 백잔을 격파하고 동쪽으로 신라를 ... 하여 신민으로 삼았다.”는 비 신묘넌 조 기사에는 위와 같은 광개토왕의 전략에 따른 흐름이 잘 밝혀져 있다. 하지만 광개토왕도 즉위 초에는 백제 타격에 군사적 역량을 집중할 수 없었다.

 

391 - 395년까지 서북쪽 지역에서 소란을 피우는 거란족을 소탕해야 했기 때문이다. 비문에 따르면 광개토왕은 396년 예성강 하류 ? 임진강 중하류 일대 그리고 경기도와 충북 서부 일대의 전선에서 백제에 대한 대대적 공격을 가하도록 한 한편 자신은 수군을 이끌고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 하루 남쪽 기슭에 상륙했다.

 

기상천외한 우회전술이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지역으로 공격해 들어가 방비가 허술한 곳을 치고 백제 수도 한성을 공격하려는 작전이었다. 그 사이 주력군은 백제 수도의 북쪽, 한강 북쪽 기슭까지 진출해 공격 태세를 취했다. 이런 고구려군의 공세에 백제 군사들은 완강하게 저항하다가 결국 화의를 요청했다. 고구려는 광개토왕 이전에 이미 광대한 영토를 장악한 강대국이었다.

 

이 바탕 위에서 광개토왕은 서북으로는 의무려산 줄기, 서요하, 송화강 중하류, 동으로는 연해주, 동남으로는 경기도, 충북의 동북부, 강원도의 거의 전 지역을 장악했다. 413년 즉위한 장수왕은 427년 기본 수도를 평양으로 옮겼다. 이때 평양성은 247년 동천왕 때의 평양성이나 343년 고국원왕 때의 동황성이 아니라 새로 쌓은 안학궁과 대성산성이었다. 427년 천도는 평양이 갖는 정치적 상징성 활용, 원활한 통치에 유리한 교통운수 조건 충족시키기, 남진 정책 추진의 유리한 교두보 확보 등의 의미를 갖는다.

 

평양 천도는 광개토왕 때부터 준비된 국책 사업이었다. 안학궁은 평양 천도 직전 건설했다. 대성산성은 안학궁 북문에서 직선 거리로는 750미터, 산성 남문까지는 약 1500미터 밖에 안 되는 가까운 거리에 있다. 흥미로운 점은 대성산성은 붉은색 기와만 썼고 안학궁성은 청회색 기와를 썼다는 점이다.

 

고구려의 남하정책은 고국원왕 때부터 구상되었고 광개토왕 때부터 본격화되었다. 6세기 중엽인 550년대에 우리 역사에서 분수령을 이루는 사건이 발생했다. 삼국통일의 완성을 향해 거침없이 달리던 고구려의 전진을 가로막는 예기치 못한 사태였다. 백제 ? 신라 동맹 세력의 북상이었다. 550년 말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 남부 지역으로 밀고 올라갔다. 고구려는 이때 한강 유역을 빼앗겼을 뿐 아니라 동부 지역에서 수백리나 밀려났다.

 

553년 7월 신라는 불시에 백제가 차지하고 있던 한강 하류 지역을 점령하고 신주를 설치했다. 신라는 백제와의 동맹은 안중에도 없이 오로지 영토 확장에만 집중했다. 그러면서도 고구려에게는 고구려를 공격할 의사가 없다고 통지했다. 백제와 신라의 한강 유역 점령, 신라의 한강 하류 지역 탈취로 고구려는 일시적으로 남부 지역 영토의 상당 부분을 상실했다. 고구려의 역량이 분산된 틈을 이용해 북쪽으로 진격한 신라는 568년까지 함경남도 리원군의 마운령, 함경남도 영광군의 황초령 비 등 진흥왕순수비를 세웠다.

 

남한 지역의 진흥왕 순수비는 북한산비와 창녕비이다. 창녕비 외의 세 비에는 영토를 개척하고 그곳을 순행(巡行)한다는 의미의 순수관경(巡狩管境)이란 글자가 있어 순수비라는 이름을 얻었다. 고구려의 강력한 삼국통일 전략은 신라가 외세를 끌어들이는 바람에 완성을 보지 못하고 실패로 끝났다. 고구려는 산성의 나라다. 그런데 평양성(장안성)은 어떤가? 552년 착공해 586년까지 35년이 걸린 평양성 건설을 고구려 패망을 촉진시킨 중요 요인으로 지목하는 것은 단견이다.

 

이 공사는 550년대에 신라가 북진정책을 펼쳐 한강 유역을 점령하고 동해안을 따라 함경도 지역까지 치고 올라왔을 때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게 한 요인이 되었다는 것도 그렇다. 고구려 수도성의 기본 형태는 추모왕이 고안한 평지성 ? 산성 결합 형식이다. 전성기의 수도 평양은 100만 이상의 인구가 거주하던 도시였다. 이런 조건에서 과거처럼 전시에 평지성을 비워 놓고 모든 시설물과 재산들을 산성으로 옮기기는 불가능했다.

 

수도 사람들을 모두 좁은 산성 안에 수용할 수도 없었다. 수도 중심부 전체를 방어할 수 있는 수도 외곽 방어성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기존 수도성의 결정적 약점을 극복하려면 산성의 장점과 평지성의 장점을 다 갖춘 평산성을 건설해야 했다. 고구려는 기존의 대성산성 + 안학궁 체제를 보완하는 외성을 쌓는 대신 수도성을 아예 옮기기로 한 것이다. 고구려는 수, 당과 연이어 전쟁을 치렀다. 수와의 전쟁은 기본적으로 외세의 침략을 맞아 나라와 민족의 자주권을 수호하기 위한 전쟁이다.

 

저자는 고구려가 장기간 전쟁으로 상당한 인적, 물적 손실을 입었지만 연개소문 장군 때인 663년에서 665년 사이에 모두 수습하고 회복했다고 말한다. 저자가 파악하는 고구려 멸망의 주요 원인은 내부 분열이다. 중요한 사실은 당나라가 고구려의 영토를 점령하는 데 실패했다는 점이다. 당나라는 고구려의 수도 평양에 군사통치기구로서 안동도호부를 설치한 뒤 설인귀를 검교안동도호로 임명하고 2만명의 병력을 배치했다.

 

설인귀는 당나라 장군이지만 ‘고려사(高麗史)’에 신라 사람들이 감악산 산신으로 모신 존재로 나온다. ‘파주군지’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당의 장군 설인귀가 주월리(舟月里)에서 태어나 장성하여 용마와 갑옷, 투구, 칼을 얻은 후 적성 일대에서 훈련하였다. 그의 말발굽이 가장 많이 지나간 곳을 말발굽이란 의미의 마제리(馬蹄里)라 하였으나 후에 발음이 변하여 마지리가 되었다.

 

” 설인귀가 칠중성에서 태어나 말을 달려 훈련한 곳이라 하여 설마치(薛馬馳)라 했다.(치는 고개 치(峙)가 아닌 말 달릴 치(馳)다.) 설인귀가 추운 겨울에 눈이 쌓인 상봉을 거쳐 감악산봉으로 말을 달려 무예를 쌓았다 하여 설마리라 했다.“

 

연천 현감(1739 - 1743)을 지낸 신유한(申維翰; 1681~1752)은 1770년 ‘청천집(靑泉集)’, ‘감악산기(紺岳山記)’에서 설인귀가 본래 동인(東人) 즉 고구려인으로 아버지를 감악에 장사지냈고 스스로 안동도호가 되어 자주 와서 살펴봤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고 썼다. 조선시대 임꺽정이 활동했던 지역으로 유명한 감악산 아래에 설마리(雪馬里) 계곡이 있다. 이 계곡, 그리고 주변 야산은 서울과 평양 사이의 전략 요충지로 삼국시대에 신라, 고구려, 백제의 격전지다.

 

이 곳에 칠중성(七重城)이 있다. 신라가 고구려의 남진을 견제하기 위해 쌓은 성이다. 신라가 당나라군을 몰아낸 지 1,300년쯤 정도 지난 1951년 설마리에 나타난 중국 공산군을 영국군이 대적했다. 영국 글로스터셔 연대(Gloucestershire regiment) 연대 소속 제1대대 부대원 662명이 중공군 3만명과 싸우다 분패한 파주시 적성면 설마리에 설마리 전투비가 있다.

 

1952년 휴전 협상이 진행되면서 밀고 밀리는 싸움이 이어졌던 연천 금굴산 전투에서 벨기에군과 영국군의 사상자가 잇따라 발생하자 영국군이 임시로 화장장을 세웠다. 마을 주민의 말에 따르면 휴전 이후까지 영국군이 화장터를 운영했다. 한편 1951년 한국전쟁 당시 서부전선 격전지였던 경기 연천군 중면 마거리에 유엔군이 만들어 사용한 ‘유엔군 화장터’가 남아 있다.

 

1951년 마거리 화장터만 운영하다가 희생자가 많이 발생하자 미산면 동이리에 추가로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제 6장 고구려 사회의 올바른 이해를 위한 몇 가지 쟁점들은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고구려는 산성의 나라, 동아시아 최대의 군사 강국, 과학 및 문화 선진국이다. 고구려는 석각천문도로 유명하다. 평양성에 있다가 전란 중 없어졌으나 원본이 전해져 1395년 실정에 맞게 다수 수정해 만든 것이 천상열차분야지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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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강 기행 - 임진강, 더 이상 변방이 아니기를
이재석 지음 / 정보와사람 / 2010년 11월
평점 :
절판


아호비령 산줄기가 아스라이 사라지는 너머에서 임진강은 흘러온다. 임진강은 아호비령이 뻗어 나오는 두류산에서 시작된다. 검불랑의 전설이 있다. 궁예가 철원에서 평강을 거쳐 세포까지 피난할 때 자신을 망하게 했다고 인식하고 버린, 좋지 않은 칼을 뜻하는 검불량(劍不良) 이야기다. 검불랑역 주변의 물은 평안천을 거쳐 임진강으로 흘러든다. 평안이란 평강의 평과 안협의 안을 조합한 이름이다.

 

연천군 중면 횡산리의 필승교는 남쪽 임진강의 최상류 지점이다. 필승교는 미수 허목, 율곡 이이, 휴암 백인걸, 우암 송시열, 겸재 정선 등이 지난 곳이다. 겸재는 임술년(1742년) 임진강에서 우화정으로 배를 모는 장면('우화등선; 羽化登船')과 삼곶리 웅연(熊淵)에 배를 맨 장면('웅연계람; 熊淵繫纜')을 그렸다. 겸재는 임진강의 좌우안을 부감법(俯瞰法)으로 그렸다.(구부릴 부, 굽어볼 감)

 

경기도 관찰사 창애 홍경보가 임지 순시차 삭녕에 다다랐을 때 정선이 마중하며 그린 그림이다. 해마다 빙애 여울에는 두루미들이 찾아와 월동한다. 두루미가 산악지역에 올라와 서식하는 것은 드문 일이다. 율무밭이 두루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리라. 징파(澄波)는 둠밭이 원래 이름이다. 물이 맑아 징파라 한 것이 아니다.(澄; 맑을 징) 둠밭을 한자로 둔전(屯田)이라 옮긴 뒤 소리나는 대로 이두식으로 옮긴 것이 징파다. 둔전의 실존은 부인할 수 없다. 다만 물이 맑아서 징파라 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북녘땅이었다가 한국전쟁 이후 민통선 영역으로 경계지어진 북삼리에 입주가 이루어진 것은 1972년이다. 정책적 입주에 따라 강원도 화전민과 소양강댐 수몰민이 우선 입주했고 고향 사람들이 들어왔다. 징파나루는 미수가 자주 들러 미수나루라고도 한다. 무술년(1658년) 임진강을 유람한 미수가 배를 내린 곳도 징파나루다. 마을 사람들은 무등리 보루를 임진왜란 때 양편에서 투석전을 벌인 곳으로 본다.

 

한탄강과 임진강이 예각으로 만나는 뾰족한 삼각형 대지 위에 화진벌이 펼쳐져 있다. 남계리와 황지리의 너른 들판이 화진벌이다. 남계(楠溪)라는 호를 가진 영동 이씨의 묘가 있어서 남계리라 하였다가 1895년(고종 32년) 지방관제 개편에 따라 도감포리와 음대포리로 개편했으나 1914년 두 리를 묶어 다시 남계리라 하였다. 미강서원에서 내려다보이는 임진강은 미수가 배를 타고 지나가던 호구협(壺口峽)이다.

 

당포나루에서 도감포까지 석벽에 둘러싸인 강이 항아리 모양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다. 미수는 호구협을 통과해 마탄, 기탄을 거쳐 징파도(澄波渡)까지 배를 몰았다. 징파도는 은거당에 이르는 나루터다. 미강서원은 고랑포를 지나 안협까지 호구협을 내려다보았을 것이다. 학곡리를 지나 노곡리, 노곡리와 강 건너편 가월리 사이에는 비룡대교라는 높다란 다리가 놓여 있다. 주민들은 틸교라는 이름에 더 익숙하다.

 

대교 아래로 미군이 설치했던 낮은 다리가 있었다. 지금은 연천군 백학면과 파주시 적성면으로 나뉘어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모두 적성 땅이었다. 다리가 놓이기 전에는 나룻배를 이용하거나 다리 아래쪽 여울을 건넜다. 가여울 또는 개여울 이라고 부르던 여울은 가월리라는 이름으로 옮겨졌고 갈여울로 옮겨가 갈대 노자 노곡이라는 이름도 낳았다. 한자로 옮기면 술탄(戌灘)이 되기도 한다.

 

백학과 적성 사이에서 임진강은 적성 쪽으로는 현무암 석벽을 만들고 백학 쪽에서는 사미천과 석장천을 받는다. 두 하천은 임진강으로 들어오면서 하나가 되는데 마치 화살로 임진강을 찌르듯 진입한다. 이곳이 살여울, 전동리다. 풍부한 유량과 복잡한 지형으로 접근이 어려워 하천의 자연경관이 잘 보존되었다. 두 하천의 합류로 유속이 느려지면서 많은 퇴적물이 쌓이고 이로써 비룡대교와 사미천 사이에 넓은 여울(바닥이 얕거나 폭이 좁아 물살이 빠른 곳)이 만들어졌다.

 

노곡리는 삼팔선 마을로 알려진 곳이다. 군부대에서 세운 삼팔선이란 비석이 마을 도로 옆에 있어 지나가는 이들의 눈길을 머물게 한다. 칠중성에 오르면 가여울에서 크게 휘어져 두지리, 고랑포로 빠져나가는 임진강이 훤히 들어온다. 가월리 주월리로는 현무암 위에 펼쳐진 넓은 들이 있고 강 건너 골짜기로도 제법 넓은 들이 자리해 있다.

 

주월리는 큰 들을 뜻하는 한배미로 불리는 마을이다. 건너 노곡리도 한때 고려의 도읍지 후보로 거론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을 만큼 비옥한 들이다.(92 페이지) 가여울이 있어 임진강을 건너는데 유리했으므로 군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하류로는 도강이 가능한 여울이 호로탄 정도였고 무엇보다 이곳은 여울이 길어서 대규모 도강이 가능한 곳이었다. 그런만큼 임진강을 국경으로 삼던 삼국 시대에 이곳을 둘러싼 전쟁은 매우 치열했다.

 

무거운 역사를 담고 임진강은 흐른다. 그러나 고려조의 임진강은 변방이 아니었고 왕들은 자주 임진강을 찾았다. 응덕정이라는 정자가 있어 놀기도 하고 석벽을 따라 유람 하기로 했다. 주월리는 공민왕이 찾아와 밤 뱃놀이를 즐긴 곳이라 하여 주월리(舟月里)가 되었다고도 한다. 감악산을 낀 험준한 적성 지역에서 가월리 주월리 임진강 연안은 유일하게 넓은 벌이 발달한 곳이다.

 

살 여울에서 사미천과 석장천을 합천 물은 주월리와 원당리 석벽 사이를 돌아 흐른다. 다시 왼쪽으로 감악산에서 내려오는 설마천을 받아들이고는 두지리에 이른다. 이곳에는 적성면 두지리와 장남면 원당리를 잇는 장남교가 놓여 있다. 하류에서 임진강 유람선 황포돛배가 뜬다. 돛배는 두지나루에서 하류로 내려가며 강심이 얕아지는 호로탄까지 갔다가 나루로 돌아온다. 아름다운 자장리 석벽과 삭녕바위, 미수의 괘암, 호로고루 성지 등을 두루 조망할 수 있는 뱃길이다.

 

이곳 임진강 나루를 장단 나루라 한다. 장단 나루는 고려 시대 사람의 왕래가 가장 빈번했던 교통로였다. 고려 목종이 도망하다 피살된 곳도, 무신정권의 최충헌 형제들이 싸움을 벌이던 곳도 이 곳이다. 이성계는 왜구를 정벌하는 싸움에 나서기 전에 이곳에서 출정식을 가졌다. 공민왕을 비롯한 여러 왕이 뱃놀이를 즐기던 곳이기도 하다. 태조 왕건도 여러 차례 이곳을 찾았다.

 

장단 나루는 고려의 서울 개성으로 통하는 길목이었고 고려왕조는 이곳 민심을 얻는 일이 중요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장단곡을 불렀다. 왕건은 이곳에 나와 민간의 풍속을 순찰했다. 장단곡은 고려 말까지 꽤나 유행했다. 조선을 창업한 정도전은 어느 날 장단나루를 건너다가 이 노래를 들었다. 정도전은 새 나라가 세워졌음에도 고려 왕을 칭송하는 노래를 부르는 백성들 보고 안타까운 마음을 표했다 "사람들아 장단곡을 부르지 마라. 지금은 조선이 개국한 지 2년이 지났다."

 

고랑포는 장단 나루에서 하류로 2 ~ 3 km 거리에 있는 포구다. 자장리는 군부대의 통제를 받지 않고 임진강을 드나들 수 있는 가장 하류쪽 마을이다. 37번 국도가 확장되기 전 자장리는 꽤나 먼 길을 돌아가야 들어올 수 있는 곳이었다. 임진강 마지막 겨울 호로탄에서 강은 감조 구간이다. 바닷물이 들고 나는 영향을 받는다. 때문에 물때에 따라 큰 배들이 오갈 수 있었다.

 

전곡에서 선사인을, 칠중성에서 3국을, 장단 나루에서 고려를 만난 임진강은 눌노천이 합류하는 언저리에서 조선의 거학 두 사람을 만난다. 우계 성혼과 율곡 이이다. 두 사람은 우율 논변을 벌였다. 우계는 퇴계의 학설을 따랐다. 율곡은 자신의 결론을 제시했다. 우계는 학문에 전념했고 율곡은 적극적으로 정치에 나섰다.

 

임진강의 유별난 풍치를 보여주던 현무암 석벽은 임진나루를 앞두고 자취를 감춘다. 내소정 임진강 팔경시는 이 마지막 경치를 적벽 뱃놀이로 읊는다. 고려 8경은 이 곳을 박연폭포와 나란히 놓았다. 정선, 김홍도 같은 이는 석벽을 그림으로 그렸다. 본문에는 김낙중이란 분의 말이 인용되어 있다. "임진강 물이란 강원도 산속 나뭇잎 위에 떨어진 한 방울 한 방울이 흘러온 것이다. 바위에 부딪히기도 하고 동에서 서로, 때로는 남에서 북으로 갈피없이 흐르지만 바다를 향하는 자신의 뜻은 조금도 변함이 없기에 결국 서해에 이른다.“

 

강 건너가 이남에서 이북으로 바뀌고 얼마를 더 달리면 닿는 곳이 오두산 통일전망대다. 자유로 곁으로 오금리벌이 넓고 너머로 북녘의 산줄기가 눈앞이다. 벌이 끝나는 곳에 펄이 펼쳐진다. 여기까지 임진강이다. 2백여 킬로미터를 숨차게 달려온 강물은 한강을 마중하고 바다를 맞아들인다. 임진강은 거침없는 세월을 마무리하고 조강과 바다에 제 몸을 내준다.

 

동국여지승람에 이런 말이 있다. ”임진강의 근원은 함경도 안변(安邊)의 방장동(防墻洞)에서 나와 이천(伊川), 안협(安峽), 삭녕(朔寧)을 지나서 연천현의 서쪽에 이르러 징파도가 되고 마전군 남쪽에 와서는 큰 여울과 합치고 적성현의 북쪽에 와서는 이진(梨津)이 된다. 그리고 장단부의 동쪽에 와서는 두기진이 되고 임진현의 동쪽에 이르러서는 임진도(臨津渡)가 되고 동남으로 덕진이 되며 교하현의 북쪽에 이르러 낙하도(洛河渡)가 되고 봉황암을 지나 흐르다가 오도성에 이르러서 한수와 합류한다.“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는 곳, 물이 크게 어우러지는 이곳을 옛 사람들은 어울물이라 했고 다시 교하라 했다. 교하에서 흘러나가는 강을 조강이라 한다. 저자는 ”할아버지강, 긴 여정을 끝내는 늙은 강이란 뜻인가? 저 강에서 우리가 태어났다는 시원의 의미인가? 그저 바닷물 즉 조수가 드나드는 조강(潮江)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어떤 경우든 조상은 강물의 완성이자 바다의 시작이다.“라고 말한다.

 

현대의 산맥 분류체계와 북한의 산맥 분류체계를 참조하여 분수령을 설명한다면 임진강 유역은 아호비령산맥, 마식령산맥, 광주산맥으로 둘러싸여 있다. 아호비령산맥은 낭림산맥의 끝부분인 두류산에서 시작하여 남남서 방향으로 이어지는 산맥으로 황해도와 강원도의 경계를 따라서 개성 송악산까지 이어진다.

 

룡포리에서 물은 마전리로 흘러든다. 하류의 임진강가에도 마전리가 있다. 연천 마전리는 본래 마전군 군내면 월곡리 지역으로 마전군의 관아가 있어 마전읍내라 불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마전군이 연천군으로 편입되면서 읍내인 월곡리를 마전리로 개명하여 연천군 미산면에 편입시켰다. 북의 마전은 말이 굴렀다는 의미의 마전(馬轉)인데 비해 남쪽 마전은 삼베를 만드는 재료인 삼을 심는 밭이라는 의미의 마전(麻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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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700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을까 - 문답으로 이해하는 고구려 역사 지식과 정보가 있는 북오디세이 6
김용만 지음, 장선환 그림 / 주니어김영사 / 2005년 8월
평점 :
품절


고구려에 대한 책이지만 조선 등과 비교할 만한 여지가 있는 책이다. 조선 세조는 ’병요(兵要)‘라는 책을 읽으라고 하면서 “당 태종과 수 양제가 직접 고구려를 공격했어도 이기지 못한 일 등을 만약 사람들로 하여금 듣게 하기를 어제 일처럼 한다면 유익함이 있을 것”이라 말했다. 병요는 세종 때 정인지 등이 편찬한 병서다.

 

그런데 1593년 조선에 쳐들어온 왜군을 물리치는 문제로 조선을 찾은 명나라 사신 유원외는 선조에게 “귀국은 고구려 때부터 강국이라고 알려졌는데 근래에 와서 선비와 시민이 독서와 농사에만 치중한 탓으로 이와 같은 변란을 맞게 된 것”이라는 말을 했다. 그럼 고구려는 처음부터 강한 나라였을까? 그렇지 않다.

 

고구려는 서기 전 37년 추모(鄒牟)왕이 세운 나라다. 먼 옛날 존재했던 고구려를 아는 데 도움이 되는 자료는 고분 벽화다. 물론 벽화는 단지 그림일뿐이어서 시대별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자세히 알려주지는 못한다. 가장 중요한 자료는 고구려가 망한 지 500년 정도 지난 시점에 쓴 ’삼국사기‘라는 책이다. 고구려 사람들이 직접 쓴 ’신집‘, ’유기‘ 등은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동시대에 당나라, 일본의 역사책들에 고구려에 대한 기록이 있어 이런 책들을 서로 연결하여 살펴보면 고구려의 모습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책은 아니지만 고구려 사람들이 만든 성벽, 기와, 그릇, 무덤, 무덤 속 물건, 비석 등이 유용하다. 서울시와 구리시 사이에 있는 아차산에서 고구려 군사 기지가 15개 발견되었고 임진강변에서는 호로고루 등 고구려 유적지가 발견되었다. 광개토왕릉비문에는 고구려를 세운 사람이 주몽이 아니라 추모왕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주몽은 활을 잘 쏴서 얻은 별명이다.

 

대다수의 연구자들은 압록강 북쪽의 환인현 오녀산성을 고구려의 첫 수도로 보고 있다. 추모왕은 자신을 천손의 자손이라고 내세우며 고구려 사람들이 강한 자부심과 단결력을 갖도록 이끌었다. 추모왕은 동부여 금와왕과 유화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유화부인은 미혼모이자 집에서 버림받고 두 번째 부인 생활을 한 여자였으나 고구려 사람들은 그녀를 매번 동맹 행사에서 부여신(夫餘神)으로 섬겼다.

 

그것은 그녀가 아들 추모에게 말을 고르는 법, 활과 화살을 고르는 법, 곡식 고르는 법, 나라를 세울 때 필요한 많은 일들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녀는 지혜의 여신, 생명의 여신, 물의 여신, 풍요와 곡식의 여신이었던 셈이다. 고구려 여성들은 결혼, 상속, 외출 등에서 별다른 차별을 받지 않았다.

 

어떻든 마굿간지기를 하는 등 금와왕의 아들들에게 핍박을 받던 추모왕은 동부여를 떠나 새 출발을 했다. 추모왕이 동부여에서 만족했다면 고구려는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추모왕은 우리나라 최초의 벤처 사업가라 할 수 있다.(김수로왕을 우리나라 최초의 페미니스트라 한 경우가 기억난다.) 고구려 사람들은 평소에도 경당(扃堂)에서 배운 활쏘기를 열심히 익혔다.

 

고구려 사람들은 낮은 신분의 사람들까지 공부할 수 있었다. 공부란 책 읽기와 활쏘기 등이다. 조선 시대와 큰 차이가 나는 부분이다. 달리는 말 위에서 활쏘기를 잘하려면 엄청난 훈련이 필요했다. 부여와 고구려에서 주몽은 요즘 말로 스타였다. 고구려 사람들의 사냥은 군사훈련이었다. 추모왕의 두 번째 부인인 소서노가 비류, 온조를 데리고 고구려를 빠져나가자 국력이 약화된 고구려는 유리명왕이 결혼을 통해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을 모으려고 했다.

 

첫째 부인인 송씨 왕후가 1년만에 죽자 화희와 치희를 새 왕후로 맞이했다. 둘은 사이가 안 좋았다. 큰 힘을 가진 화희 세력에 눌린 유리명왕은 치희를 붙잡을 수 없었다. 궁궐을 빠져나간 치희를 데려오지 못한 유리명왕은 혼자 궁궐로 돌아오며 황조가를 불렀다. 당시 강국은 부여였다. 유리명왕은 수도를 국내성으로 옮겼다.(평지성인 국내성과 함께 도성을 이룬 산성이 환도성이다.)

 

이곳은 높은 산으로 둘러싸였고 물이 풍부했고 사냥과 농사 등에 모두 유리한 곳이었다. 장군총, 태왕릉 등이 국내성 일대의 유적들이다. 유리명왕의 아들 무휼은 고구려를 위협하는 부여에 맞서 승리를 거둔 뒤 대무신왕(大武神王)이 되었다. 대무신왕의 둘째 부인의 아들인 호동 왕자와 낙랑공주와 사이에 자명고 이야기가 전한다.

 

호동은 아버지의 첫 번째 부인의 모함 때문에 목숨을 끊었다. 왕위 계승을 둘러싼 갈등으로 인한 결과였다. 낙랑 공주를 죽게 한 자책 때문이기도 했다. 고구려는 다른 세력권의 사람들을 배척하거나 특정인들을 무시하지 않고 두루 포용한 나라였다. 광개토왕이 등장한 뒤 고구려가 대제국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런 포용력 때문이다.

 

고구려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영혼은 죽지 않고 무덤에 머문다고 생각했다. 장군총에 사용된 돌 가운데 무게가 수십 톤에 되는 것들이 있다. 이 돌들은 집안시 외곽의 채석장에서 캐내온 것들이다. 고구려 사람들은 사람이 죽었을 때 눈물을 흘리며 슬퍼했지만 막상 장례일에는 북 치고 춤 추고 노래하며 죽은 사람을 떠나 보내는 풍습을 가지고 있었다.

 

광개토왕릉비문의 1/3은 무덤을 지키는 사람들에 대한 규정이다. 330여 가구가 무덤을 지키는 사람으로 차출되었다. 고구려가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수도를 옮긴 이유 중 하나는 너무 많은 무덤 때문에 살 공간이 부족했기 때문이다.(반면 고구려가 수도를 홀본에서 국내성으로 옮긴 중요 이유 중 하나는 압록강을 이용한 수상 교통의 이점, 물고기 등의 수산 자원을 얻기가 편리했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초기에 좌식자라 불리는 소수의 전문 군사 집단이 전쟁을 담당했지만 나라가 커지면서 전쟁에 동원해야 할 군사 수가 많아짐으로써 일반 백성들에게도 군사 훈련을 시켜 군사로 썼다. 그래서 경당을 세워 글공부, 말 타기, 활쏘기 등을 가르쳤다. 391년에 등장한 광개토왕이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었던 것도 큰 아버지 소수림왕이 세운 교육기관인 태학에서 배출된 전문적 지식을 갖춘 관리들과 경당에서 교육 받은 백성들의 역할이 컸기 때문이다. 경당은 지방에도 세운 사립학교이고 태학은 서울에 세운 국립학교였다.

 

391년부터 412년까지 광개토왕이 재위한 21년 기간 고구려는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광개토왕의 최초 업적은 거란족을 정벌한 일이다. 당시 광개토왕은 엄청난 수의 소와 말을 끌고왔다. 이는 고구려 농업 발전의 큰 기반이 되었다. 잉여 생산물은 물자 교환으로 이어졌고 상업 및 국제무역을 이끌었다. 이웃 유목민들에게 식량을 공급하는 대신 그들을 용병으로 활용하게 되었다.(126 페이지)

 

광개토왕이 고구려의 영토를 빠르게 확장한 것은 전쟁을 승리로 이끈 최고 군사령관의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이고 철갑옷을 입은 군사들을 대량 육성하고 왕의 친위군인 왕당군과 수군을 별도로 육성하여 수륙 양면에서 입체 작전을 펼쳤기 때문이다. 법, 교육, 종교 등의 뒷받침도 빼놓을 수 없다. 광개토왕은 땅만 넓힌 것이 아니라 고구려를 잘 사는 나라, 당당한 대국으로 변모시켰다.

 

서기 400년 신라는 왜와 가야의 침략을 받자 고구려에 구원병을 요청했다. 광개토왕은 5만 군사를 보내 신라 지역에 쳐들어온 왜구는 물론 가야까지 공격하여 금관가야를 멸망시켰다. 이 사건으로 고구려는 신라를 속국으로 삼았다. 고구려는 신라 수도 경주에 100명 이상의 군대를 주둔시켜 신라의 왕위 계승 문제까지 간섭했다.

 

광개토왕은 신라, 백제를 완전히 통합할 의지가 없었다. 반면 왜국은 아주 철저하게 악당의 무리로 보았다. 고구려 사람들은 자신들과 같은 뿌리를 가진 나라와 문화적으로 다른 나라를 아주 분명히 구분했다. 일부 연구자들은 고구려, 백제, 신라, 동부여 사이에 동질감을 갖는 민족의식이 생겨났다고 본다.

 

광개토왕은 같은 뿌리를 가진 나라들이 배반하지 않고 조공을 바치며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 세계 질서에 따라주기만 한다면 굳이 멸망시킬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고구려는 신라, 백제뿐 아니라 중국의 여러 나라들과 계속 싸워야 했기 때문에 두 나라를 자국의 영토로 삼지 못했다. 신라, 백제는 후에 연합해 고구려를 공격해 땅을 빼앗기도 했다.(110 페이지)

 

고구려 사람들은 요하, 송화강, 눈강, 우수리강, 혼하, 태자하, 압록강, 두만강, 청천강, 대동강 등 수많은 하천을 누비면서 다량의 수산자원을 획득했고 풍부한 물을 이용해 농업을 크게 발전시켰다. 고구려가 동아시아 바다의 지배자로 등장한 것은 이전까지 바다의 왕으로 군림했던 백제를 물리치고 난 후다. 광개토왕은 백제 수군의 핵심 기지이자 난공불락의 성으로 알려진 관미성을 점령했다.

 

이어서 백제의 수도 한성을 공략하여 아신왕의 항복을 받아냈다. 관미성의 위치는 논란거리다. 경기도 파주시 오두산 통일전망대에 위치한 오두산성이라는 설과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도의 화개산성이라는 설이 유력하다.(나는 개인적으로 후자는 주장자 때문에라도 인정하고 싶지 않다.)

 

고구려가 수, 당과의 전쟁에서 거듭 이긴 것은 바다에서 벌어진 전쟁에서 이겼기 때문이다. 백제 개로왕을 상대로 스파이 역할을 한 고구려의 도림 스님은 장수왕 시절의 사람이다. 고구려 사람들이 주로 먹은 음식은 쌀, 조 같은 곡식이다. 고구려에서 가장 중요한 산업은 농업이다. 고구려의 전사들에게 필요한 것은 뛰어난 기동성을 가진 말이었지만 농민들에게 진정 필요했던 것은 소였다.

 

장수왕은 427년 수도를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옮긴 왕이다. 국내성은 압록강을 이용할 수 있지만 주변에 넓은 평야가 없다는 단점이 있었다. 평양 천도 이후 고구려는 적극적인 남진 정책을 펼쳤다. 물론 북쪽으로도 크게 영토를 넓혔다. 39세에 죽은 광개토왕과 달리 장수왕은 98세까지 살면서 고구려의 태평성대를 이루었다. 고구려는 자주 다른 나라와 전쟁을 해야 했기에 신분의 상하를 물론하고 같은편이라는 일체감이 무엇보다 필요했다. 동맹은 왕, 귀족, 일반 백성까지 함께 즐기는 거대한 축제 마당이었다.

 

임진강변의 무등리에서 5, 6세기 고구려 군량 창고에서 쌀과 조가 발견되었다. 고구려 사람들은 요즘 아파트에서 사는 것처럼 입식 생활을 했다. 고구려 사람들은 방 전체가 아닌 잠을 자는 공간만 온돌방으로 꾸몄다. 이를 쪽구들이라 한다. 나머지 공간에는 의자, 평상, 장방을 놓았다. 고구려 남자들은 바지와 저고리를 기본 복장으로 착용했다. 윗옷은 활을 쏠 때의 편의를 위해 옷을 여민 끈을 왼쪽에 두는 좌임(左) 형식이었다.

 

이는 중원 지역 사람들의 우임과는 크게 다른 모습이다. 바지 또한 말을 타기 편리한 복장으로 중원 지역 사람들의 치마와 다르다. 후기에는 점점 소매가 커지고 바지도 통이 넓어졌고 우임으로 옷을 입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고구려 남자들은 대부분 머리에 상투를 틀고 모자를 썼다. 가장 즐겨 쓴 것은 절풍이라는 고깔모자다.

 

한국인을 백의민족이라 하지만 고구려 고분 벽화에 흰옷 입은 사람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고구려 고분 벽화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무덤 네 벽에는 현실 세계를 그렸지만 천장에는 하늘 세계를 그렸다. 5세기 중엽 이후에는 생활 풍속 장면과 장식 무늬를 많이 그렸다. 막강 고구려는 551년 백제, 신라의 공격을 받고 한강 유역을 빼앗겼다.

 

장수왕과 문자명왕이 왕위에 있을 때는 고구려가 전성기를 누렸지만 귀족들이 권력을 잡은 만큼 왕의 힘은 상대적으로 약해졌다. 551년 돌궐이 유연을 무너뜨린 뒤 고구려를 침략했다. 돌궐의 침략으로 고구려는 많은 군대를 북쪽에 배치하게 되었다. 고구려와 돌궐은 양국 사이에 있는 거란, 말갈 등의 통제권을 놓고 이후에도 여러 차례 전쟁을 벌였다. 이때 백제에는 성왕, 신라에는 진흥왕이 있었다.

 

고구려는 순식간에 지금의 경기도, 강원도 일대에 해당하는 영역을 잃었다. 고구려는 평화 제의를 해온 신라에게 한강 유역을 내주어야 했다. 553년 신라는 백제를 공격해 한강 하류를 빼앗았다. 백제 성왕이 이 전쟁에서 죽임을 당했다. 삼국 가운데 가장 약했던 신라가 삼국간의 경쟁에서 가장 중요한 지역인 한강 유역을 전부 차지하는 승자가 되었다. 이는 결국 신라의 삼국 통일로 이어졌다.

 

신라가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과 가까운 한강 유역과 함흥 평야까지 차지하자 고구려는 35년에 걸친 대규모 공사로 장안성(현재 평양시 중심)을 만들어 586년 수도를 그곳으로 옮겼다. 평원왕의 사위 온달은 신라에게 빼앗긴 한강 북쪽 땅을 되찾으려다가 전사했다. 아무리 공주와 결혼했다 해도 온달 자신이 큰 공을 세우지 못했다면 왕의 사위로 인정받기 어려웠을 것이다. 온달은 행운아가 아니라 부단한 노력으로 신분마저 뛰어넘은 영웅이었다.

 

당나라의 무리한 요구를 들어주려는 영류왕을 죽인 연개소문은 당나라의 이세민과 전쟁을 벌였다. 고구려는 유목민들과 때로 연합하고 때로 일부 부족들을 고구려의 세력권 안에 두고 이들을 활용하여 적국과 싸워나갔다. 고구려는 유목민 제국을 존중하고 도움을 주고 받았다.

 

고구려 멸망의 원인은 1) 연개소문의 독재권력의 장기화, 2) 내분과 배반, 3) 변화에 대한 대응 지연 등이다. 당나라는 혼자 힘만으로 고구려를 이기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신라를 끌어들였고 고구려의 요동 방어망이 워낙 튼튼하여 공략하지 못하자 바다를 통해 고구려를 공격했다. 거란족, 말갈족 등을 꾀어내어 고구려를 약화시켰다.

 

668년 고구려는 공식적으로 멸망했지만 당시까지 산성, 요동성, 안시성, 북부여성 등 대부분의 성들을 신라 - 당 연합군이 점령하지 못했다. 고구려 사람들은 이 성들을 중심으로 고구려 부흥 전쟁을 시작했다. 남의 지배받는 것을 싫어한 고구려 사람들은 당군을 몰아내기 위해 때로 신라와도 손을 잡았다. “중국의 역사 왜곡에 흥분하기보다 우리부터 먼저 고구려를 바로 아는 것이 지금 우리들에게 매우 중요하다.“ 이것이 저자의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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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만난 한국사
김용만 지음 / 홀리데이북스(Holidaybooks)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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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사를 전공한 저자가 한국사에서 숲이 차지하는 위상에 대해 말한 책이다. 생태적 관점에서만 주목받았을뿐 문명사의 관점에서는 방치되었다는 것이 저자의 전제다. 이는 수렵 채집민에 대한 편견을 지양할 필요가 있음을 말하는 대목이다. 간단히 말해 수렵 채집민은 야만인이 아니다. 저자는 진정한 야만 사회는 문명사회인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나는 문명사회를 세련된 야만의 사회로 본다. 저자는 삼국시대를 기준으로 보면 전혀 다른 역사가 보일 수 있다고 진단한다. 이렇듯 숲을 키워드로 해 시대를 나누어 보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연장선상에서 볼 수 있는 사안이 조선 후기에 우리 역사 무대가 한반도에 불과한 반면 삼국시대에는 만주와 연해주를 포함한 드넓은 지역이었다는 점이다. 물론 삼국시대의 무대는 숲이 울창한 무대였다.

 

한편 조선 전기까지 수렵, 채집은 농민들에게도 중요한 생산 활동이었다.(19 페이지) 우리나라에서 숲은 행정 용어 또는 법률 용어로 산림이라 한다. 산이 국토의 70% 정도를 차지하는 우리나라에서 숲은 대개 산에 조성되어 있다. 그렇기에 산과 숲을 함께 말해야 한다. 물론 산지가 많다고 반드시 숲이 많은 것은 아니다.(28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숲은 배움의 공간이자 종교를 탄생시킨 장소였다. 숲속에서 살려면 엄청나게 많은 지식을 쌓아야 한다. 스톤헨지에 대해 알아보자. 스톤헨지는 영국 남부 윌트셔 주 솔즈베리(Salisbury) 평원과 에이브버리에 있는 선사 시대의 거석기념물에 있는 환상 열석 유적을 말한다. 이는 수렵 채집민의 천문학 지식이 반영된 유적이다. 천문학은 농민만이 아니라 수렵 채집민에게도 중요했다.

 

숲은 도시와 달리 인구 밀도가 낮아 병원균 전파 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전염병이 크게 유행할 수 없다. 7세기 지중해 세계를 휩쓸었던 페스트는 산림이 울창했던 중부유럽의 숲을 지나면서 쇠약해졌다. 이는 병원균을 전파하는 쥐들이 숲속에서 이리, 올빼미, 족제비 등을 만나면서 많이 죽었기 때문이다.

 

농경민은 유목민이나 수렵민보다 인구 증가 속도가 빠르다. 수렵민과 유목민은 아이가 걸을 수 있을 때까지 출산을 미루는 경향이 있다. 농경은 한 번 시작하면 중도 포기가 어려운 생업 활동이다. 투자한 것이 많기 때문이다. 노동력도 많이 필요하다. 집단 노동 과정에서 설계자, 지휘자, 잡일을 하는 사람 등이 구분됨으로써 집단 내에 계급, 신분, 빈부 등에서 차별이 생겨났고 주변 집단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자와 패배한 자의 구분이 생겼다. 이는 도시, 그리고 국가 탄생의 시발이 되었다.(40 페이지)

 

권력자들은 통제, 징세(徵稅) 등의 이유로 농경을 권장 또는 강요했다. "국가에서 비록 재인(才人)이나 화척(禾尺)의 무리들로 하여금 유이(流移)하지 못하도록 하더라도 호패가 있지 않은 까닭으로 이사하는 것이 무상하고 농업을 일삼지 않습니다.“란 태종실록의 한 구절이 단적으로 증명하는 바다.

 

저자는 말한다. 장벽 안에만 역사가 있는 것이 아니며 국가와 문명이 농경민의 전유물도 아니라고. 물론 농업, 유목, 수렵은 고정 불변의 대상이 아니다. 숲에서 성장한 고구려 추모왕에 대해 알아보자. 추모왕은 수렵민 출신이지만 그가 세운 고구려는 농업국가로 발전했다. 수렵민이 국가를 세웠지만 수렵과 채집만으로는 국가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를 보며 생각하게 되는 것은 말 위에서 천하를 얻을 수는 있어도 말 위에서 천하를 다스릴 수 없다는 말이다.

 

한 고조 유방이 항우를 격파하고 천하를 통일한 후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다고 자화자찬하자 육가(陸賈)라는 유생(儒生)이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다고 어찌 말 위에서 천하를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라는 말을 했다.

 

로마에서 숲이 사라지기 시작한 시점에서 일신교인 크리스도교가 수용되기 시작했다. 조선 후기에 숲이 감소한 원인 중 하나는 산신의 존재를 크게 의식하지 않는 유교의 이념이 사회 전반을 지배했기 때문이다.(93 페이지) 19세기에 등장한 동학 등 신흥 종교들이 유일신 신앙을 내세우고 일신교인 크리스트교가 조선 사회에 빠르게 수용될 수 있었던 원인의 하나는 숲이 사라져 백성들이 신앙하던 다양한 신성성이 크게 약화되었던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삼국시대에는 고정된 과녁이 아닌 움직이는 동물을 맞히는 활쏘기로 인재를 뽑았다. 강궁(强弓)을 빠르고 정확하게 어떤 자세에서도 쏘려면 오랜 세월 연습해야 한다. 물론 평상시 농사만 짓던 농민들이 쉽게 이를 수 있는 경지가 아닌 것이다. 추모(鄒牟)왕은 한 발에 맹수를 사냥할 수 있었다. 구석기 시대에 주먹 도끼를 잘 만드는 사람이 신랑감으로 인기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삼국시대에도 사냥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인기를 얻었다. 사냥 능력은 가족 부양 능력과 직결되었다. 수렵 채집 사회는 단순 수렵 채집 사회와 복합 수렵 채집 사회로 나눌 수 있다. 단순 수렵 채집 사회는 환경이 예측 불가능하고 가변적이어서 이동을 자주 하고 전쟁이 드물며 노예도 없고 종족간의 경쟁도 없으며 식량을 저장하는 것도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회다.

 

복합 수렵 채집 사회는 변동이 적고 예측 가능성이 높고 이동을 적게 하고 정주(定住) 경향이 강한 사회다. 숲은 전쟁 때문에 가장 크게 피해를 입는다. 전쟁터로 숲이 선택되는 순간 숲은 크게 훼손된다. 승리하기 위해 숲에 불을 지르고 무기나 목책 등을 만들기 위해 나무를 마구 베기도 한다. 군사들의 숙영(宿營)을 위해 땔감용 나무를 베어내기도 한다.

 

전쟁으로 숲이 파괴된 대표적인 곳이 평양이다. 고구려 후기 수도로 수십만 명이 모여 살았던 평양은 612년, 661 ~ 662년, 667~ 668년 3회에 걸쳐 수당 군의 침략을 받았다. 668년 당나라와 신라 연합군의 공격에 고구려가 멸망하면서 평양 일대가 크게 황폐해졌다. 아이러니한 것은 전쟁이 문명 발전을 촉진한 반면 숲은 빨리 훼손되었다는 점이다. 나무는 무기의 재료나 무기 제작을 위해 땔감으로 사라졌다.

 

7세기 동아시아는 대전쟁의 시대였다. 농사 짓고 평화롭게 살기가 어려운 시대였다. 이 때 필요한 것은 강인한 수렵민 전사였다. 하지만 그들이 야만인 무법자 살인자는 아니었다. 그들은 자기가 속한 집단을 지키기 위해 자연과 조화로운 삶을 지속하기 위해 활과 창을 든 사람들이었다. 자연을 거스르며 땅을 뒤엎고 세상의 질서를 인간 중심 특히 특정한 개인인 황제 중심으로 바꾸려고 했던 자들이야말로 잔인한 전쟁광, 살인마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권력에 아부한 자들이 기록한 역사서에서는 그러한 전쟁광을 성군, 영웅으로 기억하라고 강요해왔다.

 

강철이 등장하자 많은 것이 바뀌었다. 권력자의 힘은 커졌으며 대규모 벌목이 이루어졌다. 거대 국가가 등장했다. 벌목용 도구인 도끼는 권력자의 상징이 되었다. 권력자의 힘이 숲의 신보다 우월해지면서 숲에 대한 경외감이 사라졌다. 과거 소금은 바닷물을 끓여 만들었다.(현재는 바닷물을 햇빛에 말려 소금을 만든다.) 이 과정에서 나무가 많이 소비되었고 이보다 더 많이 금속 생산을 위해 나무가 소비되었다.

 

숯 생산지는 철산지 가까운 곳에 있다. 철 생산과 숯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목재가 부족해서 3~5세기 가야의 묘제가 나무를 사용한 목곽묘에서 석곽묘로 바뀌었다는 연구도 있다. 숲은 공기부족으로 인해 나무가 불완전연소되어 만들어진다. 숯은 1200도까지 타는 연료다. 기와집이 많아진 것도 숲에 치명적이었다. 기와도 높은 온도에서 구워야 하기 때문에 연료인 나무를 대량으로 소비하게 된다.

 

민둥산은 비가 오면 빗물을 저장하지 못 한다. 산 아래로 빗물이 마구 흘러가면서 흙이 평지로 쓸려 내려간다. 산에서 붕괴된 토사는 농경지를 파괴하고 강바닥을 높였고 결국 강을 범람하게 하여 홍수를 만들고 농사를 망치게 한다. 나무가 없는 숯은 구름을 만들지 못해 비도 적게 오게 하고 내린 빗물도 빨리 고갈시킨다. 이로 인해 큰 가뭄이 발생한다. 외적과 전쟁을 많이 했던 고구려는 초기부터 힘을 과시하기 위해 궁궐 건축에 집착했다.

 

고구려 사람들은 음식은 절약했지만 궁궐 치장은 좋아했다. 조선 중기 이후 백제 미륵사, 신라 황룡사, 고려 광통보제사와 같은 거대한 사찰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불교가 배척되었던 것도 원인이지만 숲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좋은 목재들이 사라진 탓에 거대 사찰이 만들어지기 어려웠다. 이기봉의 '임금의 도시'를 통해 조선의 건축물이 크지 않은 것은 유교의 검소 문화 때문이 아니라는 주장을 접한 기억이 난다.

 

유교 문화는 검소 문화일까? 그렇지 않아 보인다. 조선은 중종 시대를 거치며 사냥 횟수가 급격히 줄었다.(268 페이지) 인종, 명종, 선조는 사냥을 거의 하지 않았다. 왕이 무예를 연마하고 사냥하는 것을 신하들이 반대했기 때문이다. 왕이 사냥을 나가지 않은 것은 단순히 신하들의 반대 때문만은 아니었다. 조선 초기에 왕은 간편한 무복(武服)을 입고 소수의 호위 군사들을 이끌고 나갔으나 유교적 예법이 자리를 잡으면서 왕들이 궁궐 밖을 나갈 때 수많은 시종과 호위 군사들이 따라가면서 비용이 점점 늘었다. 사냥에 온갖 격식을 갖추다 보니 사냥으로 인한 피해도 커졌다. 군사 훈련이나 식량 마련을 위한 수렵민의 사냥과는 너무 거리가 멀었다.(269 페이지)

 

고려 시대에 흔했던 2층 건축물이 조선에서 많이 만들어지지 못했던 것은 그 시대에 숲이 훼손되어 기둥으로 사용할 좋은 목재를 구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사찰은 백성들로 하여금 불교를 신앙하도록 하기 위해 만든 인위적 성소다. 사찰이 많이 건립되고 거대화될수록 나무가 많이 잘려나갔다. 전생에 공덕을 쌓은 덕에 현세의 부귀를 얻게 되었다는 논리를 뒷받침하는 것이 불교의 연기설이다.(179 페이지)

 

흥미로운 점은 불교의 운판, 목어, 범종 등이 새, 물고기, 뭍짐승들에게 불법을 널리 알린다는 표면적 목적이 있지만 숲속에서 동물들의 접근을 막는 기능을 한다는 주장이다. 절에서 피우는 향(香)도 온갖 벌레를 쫓는 역할을 했다.(181 페이지) 사찰은 신도들의 숙박을 위해 원(院)을 만들었다. 다량의 땔나무가 필요했다. 숲이 우거진 곳에 자리한 사찰에서는 나무로 숯을 만들어 팔았다. 물론 스님들은 사찰 주변에 나무를 심어 아름다운 경치를 보존하는 것을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여겼다.

 

스님들은 고기를 먹지 않은 대신 과일, 버섯, 잣, 고사리, 칡, 도토리, 밤 등을 주요 식량으로 삼았다. 이를 위해서는 산림을 잘 관리해야 했다. 모든 생명을 존중하는 불교 교리는 숲의 생명을 함부로 해치지 않고 생태계를 보존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사찰에 따라 산감(山監) 스님을 두어 도벌꾼과 산불을 감시했다. 신라 말 이후 한반도의 숲이 참나무에서 소나무로 우세종이 바뀌면서 숲에서 돼지를 방목해 키우기가 어려워졌다.(소나무가 고려 시대 이후 우세종인 된 것은 인공 조림의 결과다.)

 

이에 돼지는 밭에서 나는 곡식 등을 먹고 살게 되어 사육 비용이 올라갔다.(도토리는 돼지가 가장 좋아하는 먹이다. 도토리라는 단어의 어원은 돼지의 옛말인 돝에서 왔다.) 돼지가 부정적 짐승이 된 것은 이렇듯 숲이 변했기 때문이다.

 

황제국을 자처한 고려는 제후국을 자처한 조선에 비해 건물이 크고 화려했다. 그 만큼 숲을 많이 훼손했다. 산림이 소수에게 편중된 문제를 개혁하려던 공민왕의 정책은 권문세가들의 저항에 부딪혀 실패를 거듭했다. 고려는 모피와 인삼 등의 공물을 잘 납부하는 사람들만의 나라였던 것이 아니라 숲에서 사는 사람들에 의해 굴러갔던 나라이기도 하다.

 

조선에서 나무 심기에 가장 큰 관심을 보인 임금은 정조였다. 영조가 청계천 준설 사업을 자신의 치적으로 삼았지만 정조는 준설 작업의 근본은 나무를 심는 것이라 하였다. 소나무의 가장 큰 단점은 생태계를 단순화하는 것이다. 소나무는 다른 식물의 생장을 억제하는 테르펜과 같은 타감(他感) 물질을 만들어 다른 나무들이 숲속에 자리 잡는 것을 막는다. 범과 같은 맹수가 사라지고 숲이 신의 거주지라는 외경심이 사라지면서 숲은 함부로 다루어졌다.

 

조선 후기에 온돌이 크게 보급되었다. 조선 전기에는 산에 먹을거리가 많아서 굳이 화전(火田)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후기는 사정이 달랐다. 17세기 세계적인 기온 저하로 조선에 대기근이 들었다. 1670 - 1671년 경신대기근은 무려 1백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조선 시대 최악의 재난이다. 갑인예송이 일어난 1674년은 경신대기근이 일어난 지 몇 년 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다.(현종은 기해예송이 일어난 1659년부터 갑인예송이 일어난 1674년까지 재위했다.)

 

조선 후기에 화전이 크게 는 것은 재해 탓만은 아니다. 인구가 늘면서 만성적으로 토지가 부족한 때문이었다. 화전은 국가에서 세금을 걷지 않고 왕실과 종친 소유의 궁방, 주요관청, 개인에게 세금 징수 권한을 떼어주는 절수(折受) 대상으로 적격이었다. 화전을 관아에 신고하면 신고자에게 경작하도록 하고 지세를 지방관청에 내게 된다. 왕실과 종친 소유의 궁방(宮房), 각 군영, 각급 관청 등 권력을 가진 기관들이 절수에 근거하여 화전을 적극 개발했다.

 

19세기 세도가의 권력이 강해지면서 절수 대상 토지는 더욱 늘어나고 숲의 사유화와 화전은 점점 확대되었다. 왕실 재정과 국가 재정이 분리된 조선에서 왕실이 앞장서서 절수를 옹호한 탓에 화전 확대를 막기 어려웠다. 생활이 어려워진 하층 농민들은 광산으로 몰렸다. 광물을 캐내려면 갱도가 필요하고 갱도를 지지하려면 목재가 필요하다. 또한 캐낸 광물을 정제하는 과정에 땔감이 필요하다. 조선은 광산 개발을 억제했다. 그런 만큼 숲의 변화에 미친 영향은 미미했다.

 

숲 파괴의 결정적 원인은 경작지 증가, 화전 개발 등이다. 숲이 줄어들자 사냥감이 부족해졌고 수렵채집민의 생활이 빈곤해졌다. 조선 후기에는 땔감을 채취한 곳이 화전으로 개간되며 시장이 차츰 줄어들어 연료 공급이 끊겨 자기 제작을 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조선은 화전의 악순환을 막을 근본 대책을 마련하지 못했다.

 

풍수지리에서 숲은 비보(裨補)와 염승(厭勝)에 이용된다. 비보는 지세의 부족한 점을 인위적으로 보완하는 것으로 연못을 파거나 인공 산을 만들거나 나무를 심어 보완하는 것이다. 염승은 외부의 흉한 기운을 차단하기 위해 장승, 사찰 등을 세우거나 나무를 심는 것이다. 서양인의 눈에 비친 조선은 자원은 풍부하지만 나무를 마구 베어내어 도성 주변에 나무가 없는 나라였다.

 

17세기 유럽 역시 숲이 극도로 파기되어 생태위기를 겪었다. 하지만 유럽은 석탄 발견, 신대륙 식민지 획득을 통해 대위기를 극복했다. 조선은 그런 행운이 없었다. 조선의 석탄은 쉽게 불이 붙지 않는 무연탄이다. 연탄을 만들어 사용할 수 있었지만 조선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못했다. 연료는 오직 나무와 풀뿐이었다. 철을 녹이고 선박을 만들고 공장을 돌리고 기선을 움직이고 각종 기계를 만들려면 나무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산업화에 가장 중요한 자원인 연료가 조선에 부족했다.

 

조선에서 소수자가 된 수렵민을 산척(山尺)이라 한다. 이들은 외세가 쳐들어왔을 때 나라를 지키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조선은 그들을 멸시하면서도 필요시에는 그들의 무력을 이용하고자 했다. 산척 대신 포수(砲手)가 등장했다.

 

숲은 생물다양성을 지키기 위해 대단히 중요하다. 저자는 앞으로도 숲은 인간에 의해 수없이 변화를 겪을 것이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인류가 아무리 신의 경지에 다가설 만큼 진화해도 인간은 숲 없이는 살 수 없다고 강조한다. ‘숲으로 본 한국사’는 새로운 관점이 돋보이는 책이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숲을 지켜야 한다는 당위를 강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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