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쓰는 고구려 역사
박경순 지음 / 내일을여는책 / 2019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모든 시대의 역사가 그렇겠지만 고대사는 헤아려보아야 할 것이 많다.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가장 강대한 나라이자 동아시아의 최대 강국이었던 고구려 역사야말로 특히 그렇다. 문제는 무엇인가? 광개토왕릉비와 삼국사기가 각기 많이 다르게 기술한 고구려사를 공부할 때 특히 유의할 것은 집필 배경을 헤아리는 것이다.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는 후기 신라 말 또는 고려 초기에 집필된 것으로 추론되는 구삼국사를 저본으로 편찬한 책이다.

 

삼국사기는 나름 중요한 몫을 하고 있지만 외세를 끌어들여 고구려를 멸망시킨 신라의 지배층이 당나라와 짜고 고구려와 백제의 역사를 의도적으로 조작한 책을 저본으로 한 책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 학계는 고구려의 건국 연대를 기원전 37년으로, 북한 학계는 기원전 277년으로 본다. 광개토왕릉비는 고구려 당대의 기록이고 삼국사기는 고려 중기인 1145년 김부식 등이 고려 인종의 명을 받아 편찬한 기전체 역사서다.

 

당연히 광개토왕릉비가 더 정확한 1차 사료다. 삼국사기 권 22 고구려 본기 끝에 실린 사론에는 고구려는 진나라, 한나라 이후 중국의 동북쪽 모서리에 끼어 있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중국 북송대의 역사서인 ’당회요(唐會要)‘에는 고구려가 천년에 미치지 못한다고 기술되어 있다. 기원전 277년에서 기원후 668년까지 계산하면 945년이 된다.

 

광개토왕릉비에는 광개토왕이 추모왕의 17세손이라고 나온다. 삼국사기에는 12세손으로 나온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유리명왕 33년(14년)에는 무휼(후의 대무신왕)을 태자로 삼으면서 군사와 국가에 관한 일을 위임했다는 기록이 있다. 대무신왕의 어머니는 다물국왕 송양의 딸로 기원전 17년에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무휼이 태자가 되었을 때 그의 나이는 적어도 31세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의 나이는 11세로 기록되어 있다.

 

37년과 277년은 240년 차이다. 고구려 건국이 기원전 277년이라면 고구려 정치와 문화의 기원을 중국의 영향에서 찾을 수 있는 논거는 사라진다. 당시 중국은 전국 칠웅이 다투는 내전 상태여서 우리나라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우리나라 철기문화는 중국과 관계 없이 기원전 2000년기 말부터 한반도에서 독창적으로 창조해 발전시킨 것이다.

 

어릴 적 아버지 금와왕의 궁전인 부여 궁전에 살면서 왕자 대우를 받았지만 자라면서 무예와 지략의 출중함이 드러나자 금와의 일곱 왕자들의 시기와 질투를 받은 끝에 말 목장의 목동으로 쫓겨난 추모왕은 오이, 마리, 협보 세 명의 친구와 함께 남쪽 지역으로 망명길에 올랐다. 그의 망명은 도피가 아닌 새 도전이었다. 추모왕이 만난 중요 인물들 중 둘을 빼놓을 수 없다. 비류국왕 송양과 소서노다.

 

부여왕 해부루의 서손인 우태의 처였던 소서노와의 만남은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우태를 잃은 소서노를 만난 추모왕은 그의 도움으로 매우 짧은 기간 안에 자신의 정치군사적 기반을 구축했다. 구려(句麗)라는 말은 위대하다, 성스럽다, 크다 등의 의미를 갖는다. 위대한 나라, 신성한 나라라는 의미다. 고와 해는 같은 의미다. 고구려는 태양의 나라, 신성한 나라, 태양(신)의 후손이 다스리는 신성한 나라라는 의미다.

 

추모왕은 송양을 다물후(다물국왕)로 봉(封)하고 그 땅을 다물도로 칭했다. 광개토왕릉비는 대주류왕을 고구려의 기초를 확립한 왕으로 칭송했다. 그는 부여국을 정벌했고 부여의 왕성이 있었던 길림 지역을 확보했다. 건국 초기 고구려와 부여는 약소국과 강대국 관계였다. 고구려에게 부여는 가장 큰 골칫거리였다. 추모왕이 부여의 망명세력이었기에 부여로부터 부단히 간섭과 설움을 받았다.

 

부여를 극복하는 것이야말로 고구려 발전에서 가장 큰 역사적 과업이었다. 이런 과업을 대주류왕이 해낸 것이다. 고구려는 이때 서 요하 부근까지 진출해 진나라, 한나라와 국경을 맞대는 큰 나라가 되었다. 유리명왕은 고구려의 홀본에서 압록강변 국내성으로 수도를 옮긴 왕이다. 홀본은 고구려의 첫 수도다. 홀본성은 산천이 좁고 큰 평야를 끼고 있지 못해 수도로서는 적합하지 못했다.

 

홀본성의 경우 평지성(하고성자성)과 산성(오녀산성)이 거의 10km나 떨어져 있어 유사시에 산성으로 들어가기 어렵고 공간도 좁았다. 한나라와의 전선도 가까워 불안 요소가 많았다. 국내성 일대는 당시 고구려의 중심 지역인 압록강 중류에서 가장 넓은 벌이 있는 곳이고 압록강을 끼고 있어 교통에도 좋았고 한나라 침략세력과의 거리가 홀본보다 300리 가까이 있는 것 말고 중간에 노령산 줄기의 험한 산들이 가로막고 있어서 군사상으로도 매우 유리했다.

 

고구려는 모든 수도를 평지성과 산성의 이원체제로 운영했다. 평소에는 궁성에서 활동하다가 유사시에는 군민이 모두 산성 안에 들어가 항전했다. 고구려 산성은 고로봉식 산성이다. 큰 골짜기를 끼고 3면이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한쪽 면만 트인 지형을 고로봉이라 한다. 이런 고로봉을 택해 3면 산 능선에 성벽을 둘러 쌓고 트인 쪽에 성문을 낸 산성을 고로봉식 산성이라 한다. 이 산성의 장점은 식수, 용수 등 수자원이 풍부하고 넓은 골짜기에 많은 사람이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국내성은 기원 3년부터 427년까지 425년 동안 고구려 수도 역할을 했다. 그 이후로도 668년까지 부수도로서 또 국내주의 중심지로서 중요 역할을 했다.(홀본성은 280년간 수도 역할을 했다.) 고구려군은 방어력만이 아니라 뛰어난 기동성과 공격력도 갖춘 무적 강군이었다. 고구려군의 공격력의 정수는 뛰어난 기마군단이었다. 고구려 기마군단은 개마무사로 이루어진 기마군단이다. 개마무사는 말까지 모두 철갑옷으로 무장한 군인이다.

 

낙랑군 재(在) 평양설은 역사적으로 파산되었다. 낙랑 무덤은 한식 묘제가 아니라 조선식 묘제며 유물도 대부분 조선식 유물이다. 중국의 한무제는 고조선 왕조를 무너뜨렸지만 고조선 유민들과 고구려 사람들의 완강한 저항으로 압록강 계선 북서쪽 요동반도 지역만을 장악했다. 고조선 수도가 있었던 평양을 중심으로 낙랑국이 들어섰다. 고구려 역사에서 가장 오래 왕위에 있었던 사람은 태조대왕이다. 그가 재위한 기간은 94년으로 장수왕의 79년보다 15년 길다.

 

태조대왕은 후한 세력과의 투쟁을 통해 고구려 발전의 토대를 구축했다. 그래서 시호를 고구려의 중흥 시조라는 의미에서 태조대왕이라 했다. 산상왕은 환도성으로 (임시로) 수도를 옮겼다. 환도성은 고구려가 국내성에 수도를 둔 시기 평지성인 국내성과 함께 도성을 이룬 산성이다. 평양으로 수도를 옮긴 사람은 동천왕이다. 고국원왕의 아들 소수림왕은 황제국가를 선언했다. 그가 율령을 반포했다는 말은 황제국가를 선언했다는 말이다.

 

소수림왕 이전에도 각종 법, 제도, 관료 기구가 존재했다. 전제군주권도 보장되어 있었다. 소수림왕은 중국 여러 나라에서 사용하던 황제라는 호칭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고구려가 황제 국가의 틀을 갖춘 것은 태학, 태묘 등을 둔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고구려는 소수림왕 때부터 독자 연호를 사용했다. 소수림왕은 남진 정책을 폈다. 광개토왕비는 414년 만들어졌다. 6.4미터 높이다.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고구려 시조 추모왕이 나라를 세운 경위, 그 후 역대 왕들의 계승 관계, 광개토왕의 치적에 대한 총평, 산릉의 축조와 능비 건립 목적(1단), 광개토왕의 공훈과 업적(2단), 수묘인(守墓人)들에 대한 내용(3단)이다. 논란 거리는 도해파(渡海波)란 말이다. 저자는 패하(浿河)의 패(浿)를 주목한다. 조금만 손 보아도 해(海)가 된다는 것이다. 해(海)를 패(浿)를 고친 것으로 보면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광개토왕 5년 8월 조에 나온 “고구려가 패수 가에서 백제와 싸웠다”는 기록과도 부합한다.

 

‘백잔’ 다음 글자는 초천부, 초균덕 부자의 탁출작업 저본에는 동(東)으로 돼 있다. 그렇다면 ‘왜’를 주격으로 볼 수 없다. 동이란 글자가 없다는 것을 전제하더라도 백제를 치고 신라를 신민으로 만든 주체는 왜가 아니라 고구려이며, 따라서 이 문장의 주격은 고구려라야 한다. 김정호의 대동지지 교하편에 관미성이 오두산성이라는 기록이 있다. 오두산을 오도산으로 표기한 고려 시대 기록을 볼 필요가 있다.(島; 섬 도).

 

광개토왕이 오두산성을 공격할 때 수군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오두산성은 섬, 정확하게 말해 육계도(陸繫島)라 해야 한다. 고구려군은 7개 방향으로 나누어 20일 동안이나 쉼 없이 오두산성을 공격해 성을 함락시켰다. 백제는 396년. 371년 전투에서 군사력을 과시했다. 이 과정에서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전사했다. 고국원왕은 광개토왕의 할아버지다. 광개토왕은 391년 왕위에 올라 백제를 주공격 대상으로 삼아 집중 타격하는 한편 신라를 견인하는 정책을 폈다.

 

“왜가 신묘년에 왔으므로 바다를 건너 백잔을 격파하고 동쪽으로 신라를 ... 하여 신민으로 삼았다.”는 비 신묘넌 조 기사에는 위와 같은 광개토왕의 전략에 따른 흐름이 잘 밝혀져 있다. 하지만 광개토왕도 즉위 초에는 백제 타격에 군사적 역량을 집중할 수 없었다.

 

391 - 395년까지 서북쪽 지역에서 소란을 피우는 거란족을 소탕해야 했기 때문이다. 비문에 따르면 광개토왕은 396년 예성강 하류 ? 임진강 중하류 일대 그리고 경기도와 충북 서부 일대의 전선에서 백제에 대한 대대적 공격을 가하도록 한 한편 자신은 수군을 이끌고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 하루 남쪽 기슭에 상륙했다.

 

기상천외한 우회전술이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지역으로 공격해 들어가 방비가 허술한 곳을 치고 백제 수도 한성을 공격하려는 작전이었다. 그 사이 주력군은 백제 수도의 북쪽, 한강 북쪽 기슭까지 진출해 공격 태세를 취했다. 이런 고구려군의 공세에 백제 군사들은 완강하게 저항하다가 결국 화의를 요청했다. 고구려는 광개토왕 이전에 이미 광대한 영토를 장악한 강대국이었다.

 

이 바탕 위에서 광개토왕은 서북으로는 의무려산 줄기, 서요하, 송화강 중하류, 동으로는 연해주, 동남으로는 경기도, 충북의 동북부, 강원도의 거의 전 지역을 장악했다. 413년 즉위한 장수왕은 427년 기본 수도를 평양으로 옮겼다. 이때 평양성은 247년 동천왕 때의 평양성이나 343년 고국원왕 때의 동황성이 아니라 새로 쌓은 안학궁과 대성산성이었다. 427년 천도는 평양이 갖는 정치적 상징성 활용, 원활한 통치에 유리한 교통운수 조건 충족시키기, 남진 정책 추진의 유리한 교두보 확보 등의 의미를 갖는다.

 

평양 천도는 광개토왕 때부터 준비된 국책 사업이었다. 안학궁은 평양 천도 직전 건설했다. 대성산성은 안학궁 북문에서 직선 거리로는 750미터, 산성 남문까지는 약 1500미터 밖에 안 되는 가까운 거리에 있다. 흥미로운 점은 대성산성은 붉은색 기와만 썼고 안학궁성은 청회색 기와를 썼다는 점이다.

 

고구려의 남하정책은 고국원왕 때부터 구상되었고 광개토왕 때부터 본격화되었다. 6세기 중엽인 550년대에 우리 역사에서 분수령을 이루는 사건이 발생했다. 삼국통일의 완성을 향해 거침없이 달리던 고구려의 전진을 가로막는 예기치 못한 사태였다. 백제 ? 신라 동맹 세력의 북상이었다. 550년 말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 남부 지역으로 밀고 올라갔다. 고구려는 이때 한강 유역을 빼앗겼을 뿐 아니라 동부 지역에서 수백리나 밀려났다.

 

553년 7월 신라는 불시에 백제가 차지하고 있던 한강 하류 지역을 점령하고 신주를 설치했다. 신라는 백제와의 동맹은 안중에도 없이 오로지 영토 확장에만 집중했다. 그러면서도 고구려에게는 고구려를 공격할 의사가 없다고 통지했다. 백제와 신라의 한강 유역 점령, 신라의 한강 하류 지역 탈취로 고구려는 일시적으로 남부 지역 영토의 상당 부분을 상실했다. 고구려의 역량이 분산된 틈을 이용해 북쪽으로 진격한 신라는 568년까지 함경남도 리원군의 마운령, 함경남도 영광군의 황초령 비 등 진흥왕순수비를 세웠다.

 

남한 지역의 진흥왕 순수비는 북한산비와 창녕비이다. 창녕비 외의 세 비에는 영토를 개척하고 그곳을 순행(巡行)한다는 의미의 순수관경(巡狩管境)이란 글자가 있어 순수비라는 이름을 얻었다. 고구려의 강력한 삼국통일 전략은 신라가 외세를 끌어들이는 바람에 완성을 보지 못하고 실패로 끝났다. 고구려는 산성의 나라다. 그런데 평양성(장안성)은 어떤가? 552년 착공해 586년까지 35년이 걸린 평양성 건설을 고구려 패망을 촉진시킨 중요 요인으로 지목하는 것은 단견이다.

 

이 공사는 550년대에 신라가 북진정책을 펼쳐 한강 유역을 점령하고 동해안을 따라 함경도 지역까지 치고 올라왔을 때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게 한 요인이 되었다는 것도 그렇다. 고구려 수도성의 기본 형태는 추모왕이 고안한 평지성 ? 산성 결합 형식이다. 전성기의 수도 평양은 100만 이상의 인구가 거주하던 도시였다. 이런 조건에서 과거처럼 전시에 평지성을 비워 놓고 모든 시설물과 재산들을 산성으로 옮기기는 불가능했다.

 

수도 사람들을 모두 좁은 산성 안에 수용할 수도 없었다. 수도 중심부 전체를 방어할 수 있는 수도 외곽 방어성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기존 수도성의 결정적 약점을 극복하려면 산성의 장점과 평지성의 장점을 다 갖춘 평산성을 건설해야 했다. 고구려는 기존의 대성산성 + 안학궁 체제를 보완하는 외성을 쌓는 대신 수도성을 아예 옮기기로 한 것이다. 고구려는 수, 당과 연이어 전쟁을 치렀다. 수와의 전쟁은 기본적으로 외세의 침략을 맞아 나라와 민족의 자주권을 수호하기 위한 전쟁이다.

 

저자는 고구려가 장기간 전쟁으로 상당한 인적, 물적 손실을 입었지만 연개소문 장군 때인 663년에서 665년 사이에 모두 수습하고 회복했다고 말한다. 저자가 파악하는 고구려 멸망의 주요 원인은 내부 분열이다. 중요한 사실은 당나라가 고구려의 영토를 점령하는 데 실패했다는 점이다. 당나라는 고구려의 수도 평양에 군사통치기구로서 안동도호부를 설치한 뒤 설인귀를 검교안동도호로 임명하고 2만명의 병력을 배치했다.

 

설인귀는 당나라 장군이지만 ‘고려사(高麗史)’에 신라 사람들이 감악산 산신으로 모신 존재로 나온다. ‘파주군지’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당의 장군 설인귀가 주월리(舟月里)에서 태어나 장성하여 용마와 갑옷, 투구, 칼을 얻은 후 적성 일대에서 훈련하였다. 그의 말발굽이 가장 많이 지나간 곳을 말발굽이란 의미의 마제리(馬蹄里)라 하였으나 후에 발음이 변하여 마지리가 되었다.

 

” 설인귀가 칠중성에서 태어나 말을 달려 훈련한 곳이라 하여 설마치(薛馬馳)라 했다.(치는 고개 치(峙)가 아닌 말 달릴 치(馳)다.) 설인귀가 추운 겨울에 눈이 쌓인 상봉을 거쳐 감악산봉으로 말을 달려 무예를 쌓았다 하여 설마리라 했다.“

 

연천 현감(1739 - 1743)을 지낸 신유한(申維翰; 1681~1752)은 1770년 ‘청천집(靑泉集)’, ‘감악산기(紺岳山記)’에서 설인귀가 본래 동인(東人) 즉 고구려인으로 아버지를 감악에 장사지냈고 스스로 안동도호가 되어 자주 와서 살펴봤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고 썼다. 조선시대 임꺽정이 활동했던 지역으로 유명한 감악산 아래에 설마리(雪馬里) 계곡이 있다. 이 계곡, 그리고 주변 야산은 서울과 평양 사이의 전략 요충지로 삼국시대에 신라, 고구려, 백제의 격전지다.

 

이 곳에 칠중성(七重城)이 있다. 신라가 고구려의 남진을 견제하기 위해 쌓은 성이다. 신라가 당나라군을 몰아낸 지 1,300년쯤 정도 지난 1951년 설마리에 나타난 중국 공산군을 영국군이 대적했다. 영국 글로스터셔 연대(Gloucestershire regiment) 연대 소속 제1대대 부대원 662명이 중공군 3만명과 싸우다 분패한 파주시 적성면 설마리에 설마리 전투비가 있다.

 

1952년 휴전 협상이 진행되면서 밀고 밀리는 싸움이 이어졌던 연천 금굴산 전투에서 벨기에군과 영국군의 사상자가 잇따라 발생하자 영국군이 임시로 화장장을 세웠다. 마을 주민의 말에 따르면 휴전 이후까지 영국군이 화장터를 운영했다. 한편 1951년 한국전쟁 당시 서부전선 격전지였던 경기 연천군 중면 마거리에 유엔군이 만들어 사용한 ‘유엔군 화장터’가 남아 있다.

 

1951년 마거리 화장터만 운영하다가 희생자가 많이 발생하자 미산면 동이리에 추가로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제 6장 고구려 사회의 올바른 이해를 위한 몇 가지 쟁점들은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고구려는 산성의 나라, 동아시아 최대의 군사 강국, 과학 및 문화 선진국이다. 고구려는 석각천문도로 유명하다. 평양성에 있다가 전란 중 없어졌으나 원본이 전해져 1395년 실정에 맞게 다수 수정해 만든 것이 천상열차분야지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