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강 기행 - 임진강, 더 이상 변방이 아니기를
이재석 지음 / 정보와사람 / 2010년 11월
평점 :
절판


아호비령 산줄기가 아스라이 사라지는 너머에서 임진강은 흘러온다. 임진강은 아호비령이 뻗어 나오는 두류산에서 시작된다. 검불랑의 전설이 있다. 궁예가 철원에서 평강을 거쳐 세포까지 피난할 때 자신을 망하게 했다고 인식하고 버린, 좋지 않은 칼을 뜻하는 검불량(劍不良) 이야기다. 검불랑역 주변의 물은 평안천을 거쳐 임진강으로 흘러든다. 평안이란 평강의 평과 안협의 안을 조합한 이름이다.

 

연천군 중면 횡산리의 필승교는 남쪽 임진강의 최상류 지점이다. 필승교는 미수 허목, 율곡 이이, 휴암 백인걸, 우암 송시열, 겸재 정선 등이 지난 곳이다. 겸재는 임술년(1742년) 임진강에서 우화정으로 배를 모는 장면('우화등선; 羽化登船')과 삼곶리 웅연(熊淵)에 배를 맨 장면('웅연계람; 熊淵繫纜')을 그렸다. 겸재는 임진강의 좌우안을 부감법(俯瞰法)으로 그렸다.(구부릴 부, 굽어볼 감)

 

경기도 관찰사 창애 홍경보가 임지 순시차 삭녕에 다다랐을 때 정선이 마중하며 그린 그림이다. 해마다 빙애 여울에는 두루미들이 찾아와 월동한다. 두루미가 산악지역에 올라와 서식하는 것은 드문 일이다. 율무밭이 두루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리라. 징파(澄波)는 둠밭이 원래 이름이다. 물이 맑아 징파라 한 것이 아니다.(澄; 맑을 징) 둠밭을 한자로 둔전(屯田)이라 옮긴 뒤 소리나는 대로 이두식으로 옮긴 것이 징파다. 둔전의 실존은 부인할 수 없다. 다만 물이 맑아서 징파라 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북녘땅이었다가 한국전쟁 이후 민통선 영역으로 경계지어진 북삼리에 입주가 이루어진 것은 1972년이다. 정책적 입주에 따라 강원도 화전민과 소양강댐 수몰민이 우선 입주했고 고향 사람들이 들어왔다. 징파나루는 미수가 자주 들러 미수나루라고도 한다. 무술년(1658년) 임진강을 유람한 미수가 배를 내린 곳도 징파나루다. 마을 사람들은 무등리 보루를 임진왜란 때 양편에서 투석전을 벌인 곳으로 본다.

 

한탄강과 임진강이 예각으로 만나는 뾰족한 삼각형 대지 위에 화진벌이 펼쳐져 있다. 남계리와 황지리의 너른 들판이 화진벌이다. 남계(楠溪)라는 호를 가진 영동 이씨의 묘가 있어서 남계리라 하였다가 1895년(고종 32년) 지방관제 개편에 따라 도감포리와 음대포리로 개편했으나 1914년 두 리를 묶어 다시 남계리라 하였다. 미강서원에서 내려다보이는 임진강은 미수가 배를 타고 지나가던 호구협(壺口峽)이다.

 

당포나루에서 도감포까지 석벽에 둘러싸인 강이 항아리 모양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다. 미수는 호구협을 통과해 마탄, 기탄을 거쳐 징파도(澄波渡)까지 배를 몰았다. 징파도는 은거당에 이르는 나루터다. 미강서원은 고랑포를 지나 안협까지 호구협을 내려다보았을 것이다. 학곡리를 지나 노곡리, 노곡리와 강 건너편 가월리 사이에는 비룡대교라는 높다란 다리가 놓여 있다. 주민들은 틸교라는 이름에 더 익숙하다.

 

대교 아래로 미군이 설치했던 낮은 다리가 있었다. 지금은 연천군 백학면과 파주시 적성면으로 나뉘어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모두 적성 땅이었다. 다리가 놓이기 전에는 나룻배를 이용하거나 다리 아래쪽 여울을 건넜다. 가여울 또는 개여울 이라고 부르던 여울은 가월리라는 이름으로 옮겨졌고 갈여울로 옮겨가 갈대 노자 노곡이라는 이름도 낳았다. 한자로 옮기면 술탄(戌灘)이 되기도 한다.

 

백학과 적성 사이에서 임진강은 적성 쪽으로는 현무암 석벽을 만들고 백학 쪽에서는 사미천과 석장천을 받는다. 두 하천은 임진강으로 들어오면서 하나가 되는데 마치 화살로 임진강을 찌르듯 진입한다. 이곳이 살여울, 전동리다. 풍부한 유량과 복잡한 지형으로 접근이 어려워 하천의 자연경관이 잘 보존되었다. 두 하천의 합류로 유속이 느려지면서 많은 퇴적물이 쌓이고 이로써 비룡대교와 사미천 사이에 넓은 여울(바닥이 얕거나 폭이 좁아 물살이 빠른 곳)이 만들어졌다.

 

노곡리는 삼팔선 마을로 알려진 곳이다. 군부대에서 세운 삼팔선이란 비석이 마을 도로 옆에 있어 지나가는 이들의 눈길을 머물게 한다. 칠중성에 오르면 가여울에서 크게 휘어져 두지리, 고랑포로 빠져나가는 임진강이 훤히 들어온다. 가월리 주월리로는 현무암 위에 펼쳐진 넓은 들이 있고 강 건너 골짜기로도 제법 넓은 들이 자리해 있다.

 

주월리는 큰 들을 뜻하는 한배미로 불리는 마을이다. 건너 노곡리도 한때 고려의 도읍지 후보로 거론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을 만큼 비옥한 들이다.(92 페이지) 가여울이 있어 임진강을 건너는데 유리했으므로 군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하류로는 도강이 가능한 여울이 호로탄 정도였고 무엇보다 이곳은 여울이 길어서 대규모 도강이 가능한 곳이었다. 그런만큼 임진강을 국경으로 삼던 삼국 시대에 이곳을 둘러싼 전쟁은 매우 치열했다.

 

무거운 역사를 담고 임진강은 흐른다. 그러나 고려조의 임진강은 변방이 아니었고 왕들은 자주 임진강을 찾았다. 응덕정이라는 정자가 있어 놀기도 하고 석벽을 따라 유람 하기로 했다. 주월리는 공민왕이 찾아와 밤 뱃놀이를 즐긴 곳이라 하여 주월리(舟月里)가 되었다고도 한다. 감악산을 낀 험준한 적성 지역에서 가월리 주월리 임진강 연안은 유일하게 넓은 벌이 발달한 곳이다.

 

살 여울에서 사미천과 석장천을 합천 물은 주월리와 원당리 석벽 사이를 돌아 흐른다. 다시 왼쪽으로 감악산에서 내려오는 설마천을 받아들이고는 두지리에 이른다. 이곳에는 적성면 두지리와 장남면 원당리를 잇는 장남교가 놓여 있다. 하류에서 임진강 유람선 황포돛배가 뜬다. 돛배는 두지나루에서 하류로 내려가며 강심이 얕아지는 호로탄까지 갔다가 나루로 돌아온다. 아름다운 자장리 석벽과 삭녕바위, 미수의 괘암, 호로고루 성지 등을 두루 조망할 수 있는 뱃길이다.

 

이곳 임진강 나루를 장단 나루라 한다. 장단 나루는 고려 시대 사람의 왕래가 가장 빈번했던 교통로였다. 고려 목종이 도망하다 피살된 곳도, 무신정권의 최충헌 형제들이 싸움을 벌이던 곳도 이 곳이다. 이성계는 왜구를 정벌하는 싸움에 나서기 전에 이곳에서 출정식을 가졌다. 공민왕을 비롯한 여러 왕이 뱃놀이를 즐기던 곳이기도 하다. 태조 왕건도 여러 차례 이곳을 찾았다.

 

장단 나루는 고려의 서울 개성으로 통하는 길목이었고 고려왕조는 이곳 민심을 얻는 일이 중요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장단곡을 불렀다. 왕건은 이곳에 나와 민간의 풍속을 순찰했다. 장단곡은 고려 말까지 꽤나 유행했다. 조선을 창업한 정도전은 어느 날 장단나루를 건너다가 이 노래를 들었다. 정도전은 새 나라가 세워졌음에도 고려 왕을 칭송하는 노래를 부르는 백성들 보고 안타까운 마음을 표했다 "사람들아 장단곡을 부르지 마라. 지금은 조선이 개국한 지 2년이 지났다."

 

고랑포는 장단 나루에서 하류로 2 ~ 3 km 거리에 있는 포구다. 자장리는 군부대의 통제를 받지 않고 임진강을 드나들 수 있는 가장 하류쪽 마을이다. 37번 국도가 확장되기 전 자장리는 꽤나 먼 길을 돌아가야 들어올 수 있는 곳이었다. 임진강 마지막 겨울 호로탄에서 강은 감조 구간이다. 바닷물이 들고 나는 영향을 받는다. 때문에 물때에 따라 큰 배들이 오갈 수 있었다.

 

전곡에서 선사인을, 칠중성에서 3국을, 장단 나루에서 고려를 만난 임진강은 눌노천이 합류하는 언저리에서 조선의 거학 두 사람을 만난다. 우계 성혼과 율곡 이이다. 두 사람은 우율 논변을 벌였다. 우계는 퇴계의 학설을 따랐다. 율곡은 자신의 결론을 제시했다. 우계는 학문에 전념했고 율곡은 적극적으로 정치에 나섰다.

 

임진강의 유별난 풍치를 보여주던 현무암 석벽은 임진나루를 앞두고 자취를 감춘다. 내소정 임진강 팔경시는 이 마지막 경치를 적벽 뱃놀이로 읊는다. 고려 8경은 이 곳을 박연폭포와 나란히 놓았다. 정선, 김홍도 같은 이는 석벽을 그림으로 그렸다. 본문에는 김낙중이란 분의 말이 인용되어 있다. "임진강 물이란 강원도 산속 나뭇잎 위에 떨어진 한 방울 한 방울이 흘러온 것이다. 바위에 부딪히기도 하고 동에서 서로, 때로는 남에서 북으로 갈피없이 흐르지만 바다를 향하는 자신의 뜻은 조금도 변함이 없기에 결국 서해에 이른다.“

 

강 건너가 이남에서 이북으로 바뀌고 얼마를 더 달리면 닿는 곳이 오두산 통일전망대다. 자유로 곁으로 오금리벌이 넓고 너머로 북녘의 산줄기가 눈앞이다. 벌이 끝나는 곳에 펄이 펼쳐진다. 여기까지 임진강이다. 2백여 킬로미터를 숨차게 달려온 강물은 한강을 마중하고 바다를 맞아들인다. 임진강은 거침없는 세월을 마무리하고 조강과 바다에 제 몸을 내준다.

 

동국여지승람에 이런 말이 있다. ”임진강의 근원은 함경도 안변(安邊)의 방장동(防墻洞)에서 나와 이천(伊川), 안협(安峽), 삭녕(朔寧)을 지나서 연천현의 서쪽에 이르러 징파도가 되고 마전군 남쪽에 와서는 큰 여울과 합치고 적성현의 북쪽에 와서는 이진(梨津)이 된다. 그리고 장단부의 동쪽에 와서는 두기진이 되고 임진현의 동쪽에 이르러서는 임진도(臨津渡)가 되고 동남으로 덕진이 되며 교하현의 북쪽에 이르러 낙하도(洛河渡)가 되고 봉황암을 지나 흐르다가 오도성에 이르러서 한수와 합류한다.“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는 곳, 물이 크게 어우러지는 이곳을 옛 사람들은 어울물이라 했고 다시 교하라 했다. 교하에서 흘러나가는 강을 조강이라 한다. 저자는 ”할아버지강, 긴 여정을 끝내는 늙은 강이란 뜻인가? 저 강에서 우리가 태어났다는 시원의 의미인가? 그저 바닷물 즉 조수가 드나드는 조강(潮江)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어떤 경우든 조상은 강물의 완성이자 바다의 시작이다.“라고 말한다.

 

현대의 산맥 분류체계와 북한의 산맥 분류체계를 참조하여 분수령을 설명한다면 임진강 유역은 아호비령산맥, 마식령산맥, 광주산맥으로 둘러싸여 있다. 아호비령산맥은 낭림산맥의 끝부분인 두류산에서 시작하여 남남서 방향으로 이어지는 산맥으로 황해도와 강원도의 경계를 따라서 개성 송악산까지 이어진다.

 

룡포리에서 물은 마전리로 흘러든다. 하류의 임진강가에도 마전리가 있다. 연천 마전리는 본래 마전군 군내면 월곡리 지역으로 마전군의 관아가 있어 마전읍내라 불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마전군이 연천군으로 편입되면서 읍내인 월곡리를 마전리로 개명하여 연천군 미산면에 편입시켰다. 북의 마전은 말이 굴렀다는 의미의 마전(馬轉)인데 비해 남쪽 마전은 삼베를 만드는 재료인 삼을 심는 밭이라는 의미의 마전(麻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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