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상식 바로잡기 - 한국사 상식 44가지의 오류, 그 원인을 파헤친다!
박은봉 지음 / 책과함께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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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正史) 또는 실록(實錄)도 비판적으로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사 상식 바로잡기‘는 주목할 책이다. 이런 책은 역사 전공자만이 아니라 양식 있는 사람이라면 읽어야 할 책이다. 역사를 잘못 알고 있는 것은 무지한 것만 못하기 때문이다. 책은 다섯 부로 이루어져 있다. 어원 관련 부분(1부), 인물 관련 부분(2부), 유물. 유적 관련 부분(3부), 책/문헌, 사진 관련 부분(4부), 정치/ 사회/ 생활 관련 부분(5부) 등이다.

 

우리는 조선(朝鮮)에 대해 오해한다.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 등 3 조선에 대해서 그렇다. 단군조선 무시 내지 왜곡은 조선의 성리학 중심주의(사대주의)와 맥을 같이 한다. 17세기 호란 후 주자학적 정통론이 등장하면서 기자조선을 정통의 시발로 삼고 우리 역사를 기자조선, 마한, 신라, 고려, 조선으로 체계화하는 사고 방식을 정초(定礎)했다. 대한(大韓)이란 이름 자체가 기자조선 - 마한을 정통으로 삼은 데서 유래한다.

 

왕건은 성(姓)이 없었다. 왕건이 이름이었다. 후에 왕을 성으로 삼고 건을 이름으로 삼았다. 왕건 아버지는 용건, 할아버지는 작제건이었다. 백성은 100 가지 성을 가진 집단으로 고려시대에 백성은 지배집단을 일컬었다. 고려 초에 이름과 본관이 등장했다. 왕건은 이름과 본관을 만들어 주었다. 능산을 신숭겸으로, 사괴를 복지겸으로, 홍술을 홍유로, 백옥삼을 배현경으로 삼은 것이다.

 

본관을 주었다는 의미는 해당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해주었다는 의미다. 본관은 국가가 민에게 역(役)을 부과하려는 목적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다. 노비에게는 해당 무(無)였던 것이다. 왕건은 지명도 부여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936년 후백제를 정벌하기 위해 나선 왕건이 이천의 복하천에서 큰 홍수를 만나 곤란에 처하자 서희의 선대조 서목(徐穆)이 도와 무사히 내를 건너 천하를 도모하게 하였다. 후일 왕건이 큰 강을 건너는 것이 유리하다는 의미의 주역의 이섭대천(利涉大川)에서 이와 천을 가져와 이천이라는 지명을 하사했다.

 

고려 시대의 백정은 도살업 종사자가 아니라 일반 농민이었다. 백의민족의 백의가 흰옷이 아니라 염색하지 않은 옷이라는 의미이듯 백정(白丁)은 정(丁; 향리, 군인)이 아니라는 의미다. 고려 때는 도살업자를 양수척(楊水尺), 화척(禾尺) 등으로 불렀다. 양수척은 후삼국시대부터 고려 초 무렵에 들어와 정착한 말갈 또는 거란인의 후예로 시간이 지나면서 화척, 재인 등으로 불렸다.

 

그러던 백정이 조선 세종 당시 양인 확보 정책으로 도살업자가 되었다. ”재인과 화척은 본시 양인이지만 업이 천하고 칭호가 특수하여 백성들이 모두 다른 종류의 사람으로 보고 그와 혼인하기를 부끄러워하니 불쌍하고 민망합니다. 칭호를 백정이라 고쳐서 평민과 서로 혼인하고 섞여 살게 하며 그 호구를 적(籍)에 올리고 경작하지 않는 밭과 묵은 땅을 많이 가진 사람의 밭을 나눠주어서 농사를 본업으로 삼게 하소서.“

 

양수척 또는 화척은 신량역천(身良役賤)이었다. 국가 파악권 밖의 사람들이었다. 재인과 화척들이 백정이란 칭호를 얻자(백정으로 승격하자) 진짜 백정인 농민들은 불만스러워 하며 새로 백정이 된 자들을 신백정이라 칭했다. 세종 실록에 의하면 관리와 백정들이 신백정을 사냥 등 여러 일에 동원해 부렸다. 농민들은 백정이라는 호칭 자체를 기피하며 그들을 천시했다.

 

일반 농민들은 백정 칭호 대신 평민, 양민, 촌민, 백성 등으로 불렸고 백정은 도살업자를 지칭하는 말로 격하되었다. 조선 명종 당시 임꺽정은 유기를 만드는 고리백정이었다. 조정은 백정을 농민과 동화시키려던 정책을 포기하고 철저히 차별하여 통제하는 정책으로 방향을 바꿨다.

 

저자는 두문동에서 두문불출이란 말이 나온 것이 아니라 두문불출이란 말에서 두문동이 나왔다고 말한다.(두문동 이전에 두문불출이란 말이 있었다.) 함흥차사로 간 사람들 중 죽은 사람은 두 사람뿐이었고 그것도 조사의(趙思義)가 이끄는 반란군에게 죽은 것이다.

 

조선 시대의 이상적 여성은 현모양처가 아니라 열녀효부였다. 바보 온달은 평강공주와 결혼한 덕분에 출세한 것이 아니라 뛰어난 무공을 세워 왕의 눈에 띈 덕분에 공주와 결혼할 수 있었다. ’고려사‘에 최영이 아니라 최영 아버지가 황금 보기를 돌 같이하라고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최영은 유언대로 청렴하게 살았다. 물론 왜구를 물리치고 나라에서 받은 토지, 노비 등이 상당했다.(최영 딸은 우왕의 妃다.)

 

강감찬은 귀주대첩에서 강물을 막아 대승을 거둔 것이 아니다.(귀주대첩은 들판에서 벌어진 전투다.) 강물을 막아 대승을 거둔 전투는 흥화진(의주) 전투다. 귀주대첩, 흥화진 전투 모두 거란의 3차 침입 때 일어난 전투다. 거란은 세 차례(993년, 1010년, 1018년) 고려를 침입했다.

 

1차 침입은 서희의 담판으로 끝이 났고, 거란 왕 성종이 직접 40만 대군을 이끌고 온 2차 침입은 고려 왕 현종이 전라도 나주까지 피난 가는 위기에 몰린 끝에 직접 거란을 찾아가 인사를 올리는 친조(親朝; 제후가 친히 조정에 나아가 천자를 찾아 뵘)를 조건으로 강화를 맺고 막을 내렸다. 3차 침입은 친조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침공한 것이다.

 

당시 강감찬은 71세의 고령이었다. 참고로 을지문덕의 살수대첩도 강 상류에 둑을 쌓아 물을 막아놓았다가 일시에 터뜨려 승리를 거두었다고 기록된 바가 없다. 문익점은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중국 강남 지방에서 3년간 귀양살이를 한 뒤 귀국길에 목화씨를 몰래 붓두껍에 넣어가지고 왔다고 한다. 하지만 목화씨는 국외반출 금지 품목이 아니었다. 문익점은 목화씨를 몰래 붓두껍에 숨겨 들여오지 않았다.

 

강남에서 귀양살이를 하지도 않았다. ’고려사’나 ‘태조실록’에 얻어 가지고 왔다, 주머니에 넣어 가지고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문익점은 30세에 과거에 급제해 공민왕 12년에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당시 원나라는 공민왕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특히 원 순제의 제2 황후인 기황후는 공민왕을 몰아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기황후의 오빠 기철이 공민왕에 의해 권좌에서 쫓겨났기 때문이다.

 

기황후는 부원배 최유, 고려 출신 환관 박불화 등과 손잡고 원 순제를 부추겨 공민왕을 폐위시키고 원나라에 있던 충선왕의 셋째 아들 덕흥군을 왕위에 앉히려 했다. 문익점은 원나라가 택한 덕흥군 편에 섰다. 덕흥군의 군사 1만은 최영, 이성계가 이끄는 고려군과 압록강 이남의 수주(隨州; 지금의 평북 정주)에서 맞붙어 패했다. 이에 원나라는 덕흥군 옹립 계획을 철회했다. 이런 상황에서 문익점은 목화씨를 주머니에 넣고 돌아오는 것을 잊지 않았다.

 

돌아온 문익점은 덕흥군에 의부(依附)한 죄과 때문에 파직당했다. 문제는 문익점이 덕흥군을 지지했다는 사실은 슬그머니 공민왕을 지지한 것으로 또는 본의 아니게 덕흥군 편으로 오해를 받은 것으로 뒤바뀌었다는 점이다. 공민왕에게 끝까지 충성하다가 머나먼 강남으로 귀양살이를 갔다는 이야기, 목화씨는 반출 금지 품목이라는 이야기, 붓두껍에 몰래 숨겨 들어왔다는 이야기 등이 덧붙었다.

 

문익점이 가지고 온 목화씨는 중국 강남에서 나는 다년생 목면이 아니라 화북 지방에서 나는 1년생 초면(草綿)이었다. 물론 문익점 이전에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누구도 목화씨를 가져와 백성들을 따뜻하게 해줄 옷을 입힐 생각을 하지 못했다. 문익점은 귀국하면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절박한 상황에서도 잊지 않고 목화씨를 주머니에 넣어 가지고 왔다.

 

이이의 십만 양병설은 시무 6조(이이가 병조판서 즉 지금의 국방장관 자리에 있으면서 선조에게 올린 글)에도 없고 이이의 문집에도 없다. 선조실록이 아닌 선조수정실록에 있다. 선조수정실록은 광해군과 북인 세력을 무너뜨리고 집권한 서인 세력이 다시 편찬한 것이다. 이유는 광해군 때 편찬된 선조실록이 완성도가 떨어지고 특정 당파에 유리하게 쓰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선조수정실록은 율곡 사후 그의 제자인 김장생이 쓴 ‘율곡행장’을 토대로 한 것이다. 십만양병설은 서인들이 반대파를 깎아 내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남인인 유성룡이 서인인 이이의 탁월한 선견지명을 몰라보고 양병(養兵)은 곧 양화(養禍)라는 명분에 따라 반대한 것은 어리석고 옹졸한 짓임을 강조하기 위한 허구였다. 사실 이순신을 등용한 것도 남인인 유성룡이었다. 이이는 군정 개혁을 역설했다. 그것은 양병은 양민을 근본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그나마 구체적 계획 없이 한 것이었다.

 

저자는 고인돌을 북방식, 남방식으로 구분하는 것은 의미를 잃은 지 오래라고 말한다. 고인돌 연구가 진전됨에 따라 북방식이라고 했던 탁자 모양의 고인돌이 한강 남쪽인 전라도에서 발견되고, 남방식이라 했던 바둑판 모양의 고인돌이 한강 북쪽 북한에서 발견되었는가 하면 남방식과 북방식이 같은 지역에서 발견되기도 하여 설득력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지금은 지역과 무관하게 모양에 따라 탁자식, 바둑판식, 개석식(받침돌 없이 무덤방에 덮개돌을 올려놓은 것) 등으로 분류한다.

 

북방식, 남방식은 식민사학이 낳은 분류법이다. 이 분류법을 처음 정립한 사람은 도리이 류조(鳥居龍藏)다. 류조는 한반도를 남부와 북부로 나누어 남부는 순수한 한민족의 영역이지만 북부는 대륙에서 들어온 다른 민족의 영역이며 한민족은 예부터 스스로 발전하지 못하고 언제나 외부에서 들어온 세력에 의해 발전했다는 논리를 깔고 논의를 전개했다. 우리나라는 2006년판에 이르러서 비로소 고등학교 교과서의 관련 내용을 탁자식, 바둑판식 등으로 고쳤다.

 

고인돌은 지배자의 무덤이 아니다. 답사를 다녀보면 고인돌은 대개 한 지역에 몇십 기씩 군(群)을 이루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 고인돌이 모두 지배자의 무덤일 리 없다. 고인돌은 지배자와 그 가족의 공동묘지 또는 한 집안의 공동묘지다. 고인돌은 지배자의 무덤이 아니라 전사자의 무덤이라는 주장도 있다. 무덤이 아닌 고인돌도 있다. 제단(무리 짓지 않은 채 홀로 존재) 또는 묘표석(무덤방 없음) 등이다.

 

무덤방으로서의 고인돌은 1인 1무덤이라고 단정지을 수 없다. 시신을 그대로 묻기도 하고 시신을 가매장 했다가 뼈만 추려 묻기도 한다.(두벌 묻기 또는 세골장; 洗骨葬) 고려 사람들은 고인돌을 성인(聖人)의 화신으로 여겼다. 고인돌은 민간 신앙의 대상이었고 장독대 같은 생활 필수품이기도 했다. 청동기 시대 무덤은 고인돌만이 아니다. 돌무지무덤, 돌널무덤, 돌곽무덤, 나무널무덤, 움무덤, 독무덤 등등 여러 종류가 있었다.

 

저자는 금관은 평소 왕이 머리에 썼던 것이 아니라 부장품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 금관은 죽은 자를 위한 마스크라고밖에 볼 수 없다. 금관은 머리에 쓰고 다닐 수 없는 구조로 되어 있다. 세종은 신라는 포석정에서 패했고 백제는 낙화암에서 멸망했다고 말했다. 포석정은 제사를 지내는 성스러운 장소였을 가능성이 높다.

 

견훤이 쳐들어온 것은 927년 음력 11월이었다. 한겨울 추위에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워놓고 놀이를 할 수 없다. 경애왕은 사태의 급박함을 깨닫고 왕건에게 구원군을 요청해놓은 상태였다. 포석정 주위에는 유적들이 즐비했다.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했다는 놀이인 유상곡수(流觴曲水)는 제의(祭儀)의 일부였다. 포석정에서 했다는 놀이가 유상곡수가 아니라 불교의식인 팔관회였다는 말도 있다. 그런 포석정을 질펀한 술잔치를 벌인 놀이터로 묘사한 것은 신라 멸망 뒤 고려와 조선의 식자들이 경애왕을 망국의 책임자로 규정하고 폄하하려는 의도에 따른 결과였다.

 

첨성대(瞻星臺)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천문대라고 하기에는 석연치 않다. 천문대라 하더라도 당시의 천문현상은 제사와 불가분의 관계였다. 일연의 ‘삼국유사’에는 고조선이 기원전 233년에 건국되었다는 내용이 없다. 일연은 ”단군왕검은 요임금이 즉위한 지 50년인 경인년인 평양성에 도읍을 정하고 비로소 조선이라 불렀다.“고 썼다. 이를 근거로 계산하면 고조선 건국 연도는 기원전 2284년이다. 기원전 2333년은 조선 성종 때의 유학자 서거정이 쓴 ‘동국통감’에 근거한 연도다.

 

이 책에 의하면 고조선은 요임금 무진년에 고조선이 건국되었다. 문제는 요임금 즉위년이 정확하지 않다는 데 있다. 대개의 한국사 학자들은 고조선의 건국 연대를 기원전 10세기 이후로 본다.

 

도선은 왕건이 아니라 후백제의 견훤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을 가능성이 높다. 도선의 출생지와 활동 무대는 견훤의 후백제 지역이다. 전라도 영암 구암리가 그의 출생지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도선에 대한 기록이 없다. 도선의 풍수지리설은 왕건의 세력 확대와 후삼국 통일에 적극 활용되었다. 왕건과 도선의 끈끈한 인연은 후세에 창작되었다.

 

풍수지리설은 호족의 사상이었다. 풍수지리설은 신라 말, 고려 초에 유행했다. 수도 금성(경주)이 아닌 지방의 여러 곳을 명당이라고 지목함으로써 수도 중심, 중앙 귀족 중심에서 지방의 호족 중심으로 사고방식을 바꿔놓았기 때문이다. 당시 호족들은 저마다 자신을 지지하는 풍수지리설을 갖고자 했다. 하지만 오늘날 남아 있는 풍수지리설은 모두 왕건을 지지하는 것들뿐이다.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면서 각 지역의 호족들은 왕건 휘하에 들어가거나 제거되었다. 그와 함께 그들을 뒷받침하던 풍수지리설은 왕건을 주인공으로 하는 풍수지리설로 슬쩍 바뀌거나 자취를 감추었다.

 

이규보의 ‘동명왕편’은 민족의식 고취와는 별 관계가 없는 책이다. ‘삼국사기’는 동명왕을 주몽 또는 추모로 표기하나 동명왕은 북부여의 시조로서 고구려 추모왕과는 무관하다. 고구려 추모신화가 북부여 동명신화를 차용한 것이다.(이석연, 정재수 지음 ‘새로 쓰는 광개토왕과 장수왕‘ 27, 78 페이지)

 

신라에만 여왕이 있었다. 이는 신라 여성의 지위와 무관한 것으로 성골(聖骨)이라는 특별한 혈족의식이 빚어낸 결과다. 윤관이 개척한 동북 9성은 여진족(만주족)의 간청으로 돌려준 것이 아니라 지키기 어려워 포기한 것이다. 고려 숙종은 여진을 공격하다 패한 것을 국치(國恥)로 여겨 설욕을 다짐했다. 고려는 적의 기병을 우리 보병으로 대적할 수 없어서 패했다는 윤관의 건의를 받아들여 별무반이라는 기병을 만들었다. 동북 9성을 쌓기 100년전 고려는 서희의 담판으로 강동 6주를 획득했다.

 

강동 6주 획득으로 고려의 서쪽 국경선은 압록강 일대로 확장되었지만 동북 9성의 실패로 동쪽 국경선은 함흥 일대에 머물렀다. 동쪽 국경선이 두만강 일대까지 확장된 것은 조선 시대의 일이다. 동북 9성의 정확한 위치는 논란거리다. 두만강 일대라고도 하고 식민지 시대 일본 학자들은 그보다 훨씬 남쪽인 함흥평야 일대로 보았다. 최근의 국내학자들은 함흥에서 두만강 유역까지의 해안평야를 따라 9성이 있었다고 본다.

 

임진왜란 때 경복궁을 불태운 것은 백성들이 아니라 왜군이다. 선조실록에는 없는 간민(姦民), 난민(亂民)이란 표현이 선조수정실록에 등장한다. 방화는 이들의 소행으로 기록되었다. 선조 다음 임금인 광해군을 몰아낸 서인 정권은 광해군대에 편찬한 선조실록을 수정했다. 선조는 떠나기 전까지 "내가 한양을 두고 어디로 가겠는가. 염려 말라;"는 말을 되풀이하다가 비 쏟아지는 새벽 성문을 빠져나갔다.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행동과 오버랩된다. 1년반 만에 돌아온 선조는 그 사이 왜놈말을 익혀 지껄이는 자는 엄벌에 처한다는 영을 내렸고 한강 인도교를 폭파해 시민들을 고립되게 해 놓고 3개월만에 돌아온 이승만은 피난 못 가고 서울에 남았던 시민들을 공산당에 부역하지 않았느냐고 닦달했다.

 

저자는 경복궁이 누구에 의해 불탔는지는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고 말하며 중요한 것은 백성이든 왜군이든 또 다른 누구에 의해서였든 당시 궁궐을 불태운 불길은 지배층의 나태와 무책임을 질타하는 소리 없는 아우성이었다고 결론지었다. ’한국사 상식 바로잡기‘는 흥미와 의미를 함께 느끼게 하는 책이다. 나는 특히 고려사 부분을 흥미롭게 읽었다. 관련 책을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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