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700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을까 - 문답으로 이해하는 고구려 역사 지식과 정보가 있는 북오디세이 6
김용만 지음, 장선환 그림 / 주니어김영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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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고구려에 대한 책이지만 조선 등과 비교할 만한 여지가 있는 책이다. 조선 세조는 ’병요(兵要)‘라는 책을 읽으라고 하면서 “당 태종과 수 양제가 직접 고구려를 공격했어도 이기지 못한 일 등을 만약 사람들로 하여금 듣게 하기를 어제 일처럼 한다면 유익함이 있을 것”이라 말했다. 병요는 세종 때 정인지 등이 편찬한 병서다.

 

그런데 1593년 조선에 쳐들어온 왜군을 물리치는 문제로 조선을 찾은 명나라 사신 유원외는 선조에게 “귀국은 고구려 때부터 강국이라고 알려졌는데 근래에 와서 선비와 시민이 독서와 농사에만 치중한 탓으로 이와 같은 변란을 맞게 된 것”이라는 말을 했다. 그럼 고구려는 처음부터 강한 나라였을까? 그렇지 않다.

 

고구려는 서기 전 37년 추모(鄒牟)왕이 세운 나라다. 먼 옛날 존재했던 고구려를 아는 데 도움이 되는 자료는 고분 벽화다. 물론 벽화는 단지 그림일뿐이어서 시대별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자세히 알려주지는 못한다. 가장 중요한 자료는 고구려가 망한 지 500년 정도 지난 시점에 쓴 ’삼국사기‘라는 책이다. 고구려 사람들이 직접 쓴 ’신집‘, ’유기‘ 등은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동시대에 당나라, 일본의 역사책들에 고구려에 대한 기록이 있어 이런 책들을 서로 연결하여 살펴보면 고구려의 모습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책은 아니지만 고구려 사람들이 만든 성벽, 기와, 그릇, 무덤, 무덤 속 물건, 비석 등이 유용하다. 서울시와 구리시 사이에 있는 아차산에서 고구려 군사 기지가 15개 발견되었고 임진강변에서는 호로고루 등 고구려 유적지가 발견되었다. 광개토왕릉비문에는 고구려를 세운 사람이 주몽이 아니라 추모왕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주몽은 활을 잘 쏴서 얻은 별명이다.

 

대다수의 연구자들은 압록강 북쪽의 환인현 오녀산성을 고구려의 첫 수도로 보고 있다. 추모왕은 자신을 천손의 자손이라고 내세우며 고구려 사람들이 강한 자부심과 단결력을 갖도록 이끌었다. 추모왕은 동부여 금와왕과 유화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유화부인은 미혼모이자 집에서 버림받고 두 번째 부인 생활을 한 여자였으나 고구려 사람들은 그녀를 매번 동맹 행사에서 부여신(夫餘神)으로 섬겼다.

 

그것은 그녀가 아들 추모에게 말을 고르는 법, 활과 화살을 고르는 법, 곡식 고르는 법, 나라를 세울 때 필요한 많은 일들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녀는 지혜의 여신, 생명의 여신, 물의 여신, 풍요와 곡식의 여신이었던 셈이다. 고구려 여성들은 결혼, 상속, 외출 등에서 별다른 차별을 받지 않았다.

 

어떻든 마굿간지기를 하는 등 금와왕의 아들들에게 핍박을 받던 추모왕은 동부여를 떠나 새 출발을 했다. 추모왕이 동부여에서 만족했다면 고구려는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추모왕은 우리나라 최초의 벤처 사업가라 할 수 있다.(김수로왕을 우리나라 최초의 페미니스트라 한 경우가 기억난다.) 고구려 사람들은 평소에도 경당(扃堂)에서 배운 활쏘기를 열심히 익혔다.

 

고구려 사람들은 낮은 신분의 사람들까지 공부할 수 있었다. 공부란 책 읽기와 활쏘기 등이다. 조선 시대와 큰 차이가 나는 부분이다. 달리는 말 위에서 활쏘기를 잘하려면 엄청난 훈련이 필요했다. 부여와 고구려에서 주몽은 요즘 말로 스타였다. 고구려 사람들의 사냥은 군사훈련이었다. 추모왕의 두 번째 부인인 소서노가 비류, 온조를 데리고 고구려를 빠져나가자 국력이 약화된 고구려는 유리명왕이 결혼을 통해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을 모으려고 했다.

 

첫째 부인인 송씨 왕후가 1년만에 죽자 화희와 치희를 새 왕후로 맞이했다. 둘은 사이가 안 좋았다. 큰 힘을 가진 화희 세력에 눌린 유리명왕은 치희를 붙잡을 수 없었다. 궁궐을 빠져나간 치희를 데려오지 못한 유리명왕은 혼자 궁궐로 돌아오며 황조가를 불렀다. 당시 강국은 부여였다. 유리명왕은 수도를 국내성으로 옮겼다.(평지성인 국내성과 함께 도성을 이룬 산성이 환도성이다.)

 

이곳은 높은 산으로 둘러싸였고 물이 풍부했고 사냥과 농사 등에 모두 유리한 곳이었다. 장군총, 태왕릉 등이 국내성 일대의 유적들이다. 유리명왕의 아들 무휼은 고구려를 위협하는 부여에 맞서 승리를 거둔 뒤 대무신왕(大武神王)이 되었다. 대무신왕의 둘째 부인의 아들인 호동 왕자와 낙랑공주와 사이에 자명고 이야기가 전한다.

 

호동은 아버지의 첫 번째 부인의 모함 때문에 목숨을 끊었다. 왕위 계승을 둘러싼 갈등으로 인한 결과였다. 낙랑 공주를 죽게 한 자책 때문이기도 했다. 고구려는 다른 세력권의 사람들을 배척하거나 특정인들을 무시하지 않고 두루 포용한 나라였다. 광개토왕이 등장한 뒤 고구려가 대제국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런 포용력 때문이다.

 

고구려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영혼은 죽지 않고 무덤에 머문다고 생각했다. 장군총에 사용된 돌 가운데 무게가 수십 톤에 되는 것들이 있다. 이 돌들은 집안시 외곽의 채석장에서 캐내온 것들이다. 고구려 사람들은 사람이 죽었을 때 눈물을 흘리며 슬퍼했지만 막상 장례일에는 북 치고 춤 추고 노래하며 죽은 사람을 떠나 보내는 풍습을 가지고 있었다.

 

광개토왕릉비문의 1/3은 무덤을 지키는 사람들에 대한 규정이다. 330여 가구가 무덤을 지키는 사람으로 차출되었다. 고구려가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수도를 옮긴 이유 중 하나는 너무 많은 무덤 때문에 살 공간이 부족했기 때문이다.(반면 고구려가 수도를 홀본에서 국내성으로 옮긴 중요 이유 중 하나는 압록강을 이용한 수상 교통의 이점, 물고기 등의 수산 자원을 얻기가 편리했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초기에 좌식자라 불리는 소수의 전문 군사 집단이 전쟁을 담당했지만 나라가 커지면서 전쟁에 동원해야 할 군사 수가 많아짐으로써 일반 백성들에게도 군사 훈련을 시켜 군사로 썼다. 그래서 경당을 세워 글공부, 말 타기, 활쏘기 등을 가르쳤다. 391년에 등장한 광개토왕이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었던 것도 큰 아버지 소수림왕이 세운 교육기관인 태학에서 배출된 전문적 지식을 갖춘 관리들과 경당에서 교육 받은 백성들의 역할이 컸기 때문이다. 경당은 지방에도 세운 사립학교이고 태학은 서울에 세운 국립학교였다.

 

391년부터 412년까지 광개토왕이 재위한 21년 기간 고구려는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광개토왕의 최초 업적은 거란족을 정벌한 일이다. 당시 광개토왕은 엄청난 수의 소와 말을 끌고왔다. 이는 고구려 농업 발전의 큰 기반이 되었다. 잉여 생산물은 물자 교환으로 이어졌고 상업 및 국제무역을 이끌었다. 이웃 유목민들에게 식량을 공급하는 대신 그들을 용병으로 활용하게 되었다.(126 페이지)

 

광개토왕이 고구려의 영토를 빠르게 확장한 것은 전쟁을 승리로 이끈 최고 군사령관의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이고 철갑옷을 입은 군사들을 대량 육성하고 왕의 친위군인 왕당군과 수군을 별도로 육성하여 수륙 양면에서 입체 작전을 펼쳤기 때문이다. 법, 교육, 종교 등의 뒷받침도 빼놓을 수 없다. 광개토왕은 땅만 넓힌 것이 아니라 고구려를 잘 사는 나라, 당당한 대국으로 변모시켰다.

 

서기 400년 신라는 왜와 가야의 침략을 받자 고구려에 구원병을 요청했다. 광개토왕은 5만 군사를 보내 신라 지역에 쳐들어온 왜구는 물론 가야까지 공격하여 금관가야를 멸망시켰다. 이 사건으로 고구려는 신라를 속국으로 삼았다. 고구려는 신라 수도 경주에 100명 이상의 군대를 주둔시켜 신라의 왕위 계승 문제까지 간섭했다.

 

광개토왕은 신라, 백제를 완전히 통합할 의지가 없었다. 반면 왜국은 아주 철저하게 악당의 무리로 보았다. 고구려 사람들은 자신들과 같은 뿌리를 가진 나라와 문화적으로 다른 나라를 아주 분명히 구분했다. 일부 연구자들은 고구려, 백제, 신라, 동부여 사이에 동질감을 갖는 민족의식이 생겨났다고 본다.

 

광개토왕은 같은 뿌리를 가진 나라들이 배반하지 않고 조공을 바치며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 세계 질서에 따라주기만 한다면 굳이 멸망시킬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고구려는 신라, 백제뿐 아니라 중국의 여러 나라들과 계속 싸워야 했기 때문에 두 나라를 자국의 영토로 삼지 못했다. 신라, 백제는 후에 연합해 고구려를 공격해 땅을 빼앗기도 했다.(110 페이지)

 

고구려 사람들은 요하, 송화강, 눈강, 우수리강, 혼하, 태자하, 압록강, 두만강, 청천강, 대동강 등 수많은 하천을 누비면서 다량의 수산자원을 획득했고 풍부한 물을 이용해 농업을 크게 발전시켰다. 고구려가 동아시아 바다의 지배자로 등장한 것은 이전까지 바다의 왕으로 군림했던 백제를 물리치고 난 후다. 광개토왕은 백제 수군의 핵심 기지이자 난공불락의 성으로 알려진 관미성을 점령했다.

 

이어서 백제의 수도 한성을 공략하여 아신왕의 항복을 받아냈다. 관미성의 위치는 논란거리다. 경기도 파주시 오두산 통일전망대에 위치한 오두산성이라는 설과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도의 화개산성이라는 설이 유력하다.(나는 개인적으로 후자는 주장자 때문에라도 인정하고 싶지 않다.)

 

고구려가 수, 당과의 전쟁에서 거듭 이긴 것은 바다에서 벌어진 전쟁에서 이겼기 때문이다. 백제 개로왕을 상대로 스파이 역할을 한 고구려의 도림 스님은 장수왕 시절의 사람이다. 고구려 사람들이 주로 먹은 음식은 쌀, 조 같은 곡식이다. 고구려에서 가장 중요한 산업은 농업이다. 고구려의 전사들에게 필요한 것은 뛰어난 기동성을 가진 말이었지만 농민들에게 진정 필요했던 것은 소였다.

 

장수왕은 427년 수도를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옮긴 왕이다. 국내성은 압록강을 이용할 수 있지만 주변에 넓은 평야가 없다는 단점이 있었다. 평양 천도 이후 고구려는 적극적인 남진 정책을 펼쳤다. 물론 북쪽으로도 크게 영토를 넓혔다. 39세에 죽은 광개토왕과 달리 장수왕은 98세까지 살면서 고구려의 태평성대를 이루었다. 고구려는 자주 다른 나라와 전쟁을 해야 했기에 신분의 상하를 물론하고 같은편이라는 일체감이 무엇보다 필요했다. 동맹은 왕, 귀족, 일반 백성까지 함께 즐기는 거대한 축제 마당이었다.

 

임진강변의 무등리에서 5, 6세기 고구려 군량 창고에서 쌀과 조가 발견되었다. 고구려 사람들은 요즘 아파트에서 사는 것처럼 입식 생활을 했다. 고구려 사람들은 방 전체가 아닌 잠을 자는 공간만 온돌방으로 꾸몄다. 이를 쪽구들이라 한다. 나머지 공간에는 의자, 평상, 장방을 놓았다. 고구려 남자들은 바지와 저고리를 기본 복장으로 착용했다. 윗옷은 활을 쏠 때의 편의를 위해 옷을 여민 끈을 왼쪽에 두는 좌임(左) 형식이었다.

 

이는 중원 지역 사람들의 우임과는 크게 다른 모습이다. 바지 또한 말을 타기 편리한 복장으로 중원 지역 사람들의 치마와 다르다. 후기에는 점점 소매가 커지고 바지도 통이 넓어졌고 우임으로 옷을 입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고구려 남자들은 대부분 머리에 상투를 틀고 모자를 썼다. 가장 즐겨 쓴 것은 절풍이라는 고깔모자다.

 

한국인을 백의민족이라 하지만 고구려 고분 벽화에 흰옷 입은 사람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고구려 고분 벽화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무덤 네 벽에는 현실 세계를 그렸지만 천장에는 하늘 세계를 그렸다. 5세기 중엽 이후에는 생활 풍속 장면과 장식 무늬를 많이 그렸다. 막강 고구려는 551년 백제, 신라의 공격을 받고 한강 유역을 빼앗겼다.

 

장수왕과 문자명왕이 왕위에 있을 때는 고구려가 전성기를 누렸지만 귀족들이 권력을 잡은 만큼 왕의 힘은 상대적으로 약해졌다. 551년 돌궐이 유연을 무너뜨린 뒤 고구려를 침략했다. 돌궐의 침략으로 고구려는 많은 군대를 북쪽에 배치하게 되었다. 고구려와 돌궐은 양국 사이에 있는 거란, 말갈 등의 통제권을 놓고 이후에도 여러 차례 전쟁을 벌였다. 이때 백제에는 성왕, 신라에는 진흥왕이 있었다.

 

고구려는 순식간에 지금의 경기도, 강원도 일대에 해당하는 영역을 잃었다. 고구려는 평화 제의를 해온 신라에게 한강 유역을 내주어야 했다. 553년 신라는 백제를 공격해 한강 하류를 빼앗았다. 백제 성왕이 이 전쟁에서 죽임을 당했다. 삼국 가운데 가장 약했던 신라가 삼국간의 경쟁에서 가장 중요한 지역인 한강 유역을 전부 차지하는 승자가 되었다. 이는 결국 신라의 삼국 통일로 이어졌다.

 

신라가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과 가까운 한강 유역과 함흥 평야까지 차지하자 고구려는 35년에 걸친 대규모 공사로 장안성(현재 평양시 중심)을 만들어 586년 수도를 그곳으로 옮겼다. 평원왕의 사위 온달은 신라에게 빼앗긴 한강 북쪽 땅을 되찾으려다가 전사했다. 아무리 공주와 결혼했다 해도 온달 자신이 큰 공을 세우지 못했다면 왕의 사위로 인정받기 어려웠을 것이다. 온달은 행운아가 아니라 부단한 노력으로 신분마저 뛰어넘은 영웅이었다.

 

당나라의 무리한 요구를 들어주려는 영류왕을 죽인 연개소문은 당나라의 이세민과 전쟁을 벌였다. 고구려는 유목민들과 때로 연합하고 때로 일부 부족들을 고구려의 세력권 안에 두고 이들을 활용하여 적국과 싸워나갔다. 고구려는 유목민 제국을 존중하고 도움을 주고 받았다.

 

고구려 멸망의 원인은 1) 연개소문의 독재권력의 장기화, 2) 내분과 배반, 3) 변화에 대한 대응 지연 등이다. 당나라는 혼자 힘만으로 고구려를 이기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신라를 끌어들였고 고구려의 요동 방어망이 워낙 튼튼하여 공략하지 못하자 바다를 통해 고구려를 공격했다. 거란족, 말갈족 등을 꾀어내어 고구려를 약화시켰다.

 

668년 고구려는 공식적으로 멸망했지만 당시까지 산성, 요동성, 안시성, 북부여성 등 대부분의 성들을 신라 - 당 연합군이 점령하지 못했다. 고구려 사람들은 이 성들을 중심으로 고구려 부흥 전쟁을 시작했다. 남의 지배받는 것을 싫어한 고구려 사람들은 당군을 몰아내기 위해 때로 신라와도 손을 잡았다. “중국의 역사 왜곡에 흥분하기보다 우리부터 먼저 고구려를 바로 아는 것이 지금 우리들에게 매우 중요하다.“ 이것이 저자의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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