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쓸쓸한 날의 선택, 자살 - 삶과 죽음에 대한 세계 지성인들의 명쾌한 진단!
프리드리히 니체 외 지음, 주정관 옮김 / 북스토리 / 2003년 10월
평점 :
절판


몇 해 전, 나와 무척 가까웠던 누군가의 자살을 목격하고서, 비로소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슬픈 공포를 처음으로 체험했었다. 그 후로, 자살을 하는 사람들의 심리나, 자살을 하게 되는 배경과 원인에는 무엇이 있을까, 라는 의문과 걱정이 증폭되었다. 우리는 왜 죽고 싶은 것인가? 자살은 명백한 살인 행위인가? 우리는 육체가 정신을 소유하고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정신이 육체를 소유하고 있는 것인가? 만일 정신이 육체를 소유하고 있다면, 정신에 의해 일어나는 육체의 말살이 엄연한 살인일 것이고, 만일 육체가 정신을 소유하고 있다면, 육체에 의해 일어나는 자기 포기의 관점은 정신까지 포함되는 육체 자신에게 위배 될 것이다.

자살의 이유와 철학적인 견해가 궁금해서 「어느 쓸쓸한 날의 선택, 자살」이라는 제목의 책을 읽어보게 되었다. 200P 의 얇은 책 한권을 읽는데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만큼 생각할 시간이 많이 필요했던 책인 것 같다. 쇼펜하우어, 니체, 미우라 아야코, 생텍쥐페리, 알베르 카뮈, 장 그르니에, 뢰뵈트 등의 철학자, 소설가와 저명한 정신과 의사들의 에세이나 수필집에서 자살에 대한 부분만 발췌한 책이다. 니체는 그의 저서,「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카뮈는 「시지프의 신화」에서, 정신과 의사들의 논문에서도 분명 발췌가 되었다.

1부의 철학적인 논의들에 대한 분량은 상당히 짧기 때문에, 약간은 실망을 했고, 흥미롭게 읽었던 부분은, 3부 ‘자살의 방정식’ 의 ‘칼, A, 메닝거’ 자살의 해부 론이다. 좀 더 사실적인 측면에서 자살에 대한 통계와 상세한 분석을 볼 수 있었는데, 분량 자체로 책의 절반 가까이 된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시에 죽어간다. 사람에 따라 그 끝이 언제인가에 대한 차이는 있겠지만, 죽음 앞에 누구나 동등한 입장이라는 사실이 불변의 진리다. 누구나 인생의 마지막 종착점인 ‘죽음’을 향해 걸어가고 있지만, 그 직립의 길을 역행하는 자들을 종종 볼 수 있다. 한 해 평균 백만 명에 육박한다고 하는 ‘자살자’들이 바로 주어진 운명을 거스르는 신의 반역자이다. 스스로를 살인함으로써, 주어진 삶에 허락되지 않았던 마침표를 긋는 행위. 나는 무신론자이기에 기독교 신앙에 대해 자세히 알지는 못한다. 그러나 어떠한 종교에서도 자살을 찬미하는 신은 없을 것이다.

신에 대한 배반,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 이웃들, 관계 된 모든 이들을 배반하는 행위, 자살. 과연 사람은 무엇 때문에 자살을 하는 것인가? 정신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본인의 육체와 결부해 많은 문제점들이 지적되기 마련이지만, 정신과 육체라는 분배의 의미가 과연 올바른 것인가에 대한 의문점이 생긴다. 육체는 어디에서 왔는가? 혹은 정신은 어디에서 왔는가? 자아라는 개념이 신에 존속되기 이전에, 육체의 소유권에 대한 철학적인 성찰은 분명한 사실은 좀 더 확고하게 만들어 줄 테지만, 아마도 정확한 결론의 정의는 내릴 수 없을 것이다.

세상에는 다양한 죽음의 종류가 존재한다. 그 수많은 죽음의 종류 중, 유일하게 미화될 수 있는 죽음이 바로 자살이다. 죽음에의 동경, 유희가 혼합되어 죽음에 대한 완벽한 자유를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자살을 꿈꾸었던 사람들에게서 느꼈던 보편적인 감정의 느낌은, 죽음 자체를 동경하는 것보다는 ‘그들이 정말 원하는 것은 단지 자신의 현재 상황에 있어 변화를 얻는 것이지 목숨을 끊는 게 아니다.’ 라는 양면의 견해도 찾아볼 수 있다.

한번도 자살을 꿈꾸어 봤다는 사람이 없다면 아마도 거짓말일 것이다. 나 역시, 적어도 몇 번의 힘든 시기를 겪는 도중, 죽고 싶다는 생각이 했었다. 그러나 죽음으로 나를 파괴하기 보다는, 현재의 상황에서 좀 더 좋은 방향으로 삶을 개선시키고자 하는 바람이 극단적인 표현의 방식으로 터져 나온 것이다. 실제로도 자살을 목격한 경우를 보았지만, 그들 대다수는 삶에 대한 불만이 가장 끔찍한 형태로 터져 나왔던 것일 뿐, 진심으로 원했던 것은 삶에 대한 변화였을 것이다.

흔히 자살하는 사람들을 보며, 나약한 사람들의 구차한 변명이나, 정신병적인 질환을 앓고 있다거나, 세상을 살아갈 힘이 없는 한심한 겁쟁이로 치부해 버리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절대로 적절한 견해가 아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인간이 없듯이, 코앞에 나타난 죽음의 사신 앞에서 얼마나 두려움에 떨었으며, 최대한의 용기를 쥐어짜서 실행에 옮겼을 것인가. ‘죽을 용기로, 살아라.’ 라는 말이 있듯이, 삶에 대한 회의감을 보다 타당하게 변화시키다 보면 자연히 삶에 대한 욕구가 솟을 것이다.

누군가를 향한 분노의 표출, 타인과 자신을 둘러싼 맹목적인 열등감의 잘못된 인식으로 스스로를 파괴하는 행위는 노력으로 얼마든지 개선시킬 수 있다. 엄마 뱃속에서 태아로 있던 최초의 시간으로 돌아가려는 욕구의 자살로 볼 수 있는 물에 뛰어드는 행위처럼, 사랑이 우선적으로 내제되어 있어야 하겠다. 주변인의 도움을 먼저 찾고, 주변인 역시 잠재되어 있는 자살자들의 곁을 지켜준다면 끔찍한 자살의 숫자는 현저하게 줄어들게 될 것이다.

매일 밤, 뉴스를 장식하던 수많은 자살 보도들. 가령 카드 빚을 이유로 4인 가족이 동반자살을 한 경우나, 인기 배우나 가수들의 자살 사건, 한국을 대표하는 대기업의 총수의 자살 사건 등을 접할 때 마다 참으로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나와는 무관한 사람들의 자살이 나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지는 않지만, 가까이서 자살을 접한 사람으로서, 자살자의 주변인의 심정 고충과 충격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문득 자살에 대한 걷잡을 수 없는 유혹과 충동에서 헤어 나올 수 없다면, 자기 파괴의 다른 돌파구를 반드시 찾아야 한다. 남겨진 자들의 슬픔을 모른 척하고 홀로 떠나는 것만큼 이기적이고 어리석은 일은 없기 때문이다.

[인상깊은구절]
산다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 실패이다. 한 마리의 독충이 그들의 심장을 파먹고 있는 것이리라. 그런 사람에게는 죽음이 훨씬 더 성공적인 삶임을 알게 하라. - 1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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