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번째 사요코
온다 리쿠 지음, 오근영 옮김 / 노블마인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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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묘하게 진행되는 미스터리 추리 문학이라는 공동 화제를 타고 등장하는 우수한 일본 작가군 가운데서, 유독 ‘온다 리쿠’는 자신의 영역이 확고한 듯 보인다. 하나의 획일적인 흐름과 새로운 문장의 틈에서도 전혀 우왕좌왕 하지 않고, 자신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를 노골적이지 않게, 은밀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노스탤지어, 즉 잊혀져 가는 소중했던 추억을 상기시키고, 그러한 아련함을 그리워하게 만드는 특유의 감각이 남다르다.  
  
  「여섯 번째 사요코」 역시 작가의 한결 같이 매력적인 특징성이 잘 반영된 작품이라고 생각 된다. 1991년 데뷔작으로써 일본 판타지노벨 대상 최종후보작까지 오른 작품이라고 하니, 문단의 시작이 대성공인 셈이었다. 만약 우리나라에 일본 문화 개방이 좀 더 빨리 이루어졌었다면, 영화「여고 괴담」이 나오기 전에 이 작품을 만나 볼 수 있었을 텐데, 영화 「여고 괴담 1」보다 한참 늦게 만났다는 사실이 매우 아쉬운 점으로 남는다. 두 작품의 주요 스토리나 극의 분위기가 매우 비슷하기 때문이다.

  영화와 소설은 자주 비교의 대상이 되곤 하는데, 서로 각자의 장단점이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섯 번째 사요코」는 출간 된지가 15년도 넘은 올드작이라는 사실에 큰 점수를 주고 싶다. 학교 괴담…. 지금에야 흔하디흔한 소재가 되었을지 모르지만, 당시로썬 큰 이슈였을 것이 틀림없다. 학창시절 무시무시한 공포에 괴담이 돌고 있을 때, 꼭 그 ‘무서운 이야기’의 출처는 ‘일본의 어디 어디.’였다. ‘왜 항상 그 무서운 이야기들의 출처는 일본일까?’하는 궁금증이 밀려 든 적이 있었는데, 일본은 아주 오래전부터 사요코란 캐릭터와 흡사한 전설적인 호러 퀸들이 많이 있었던 걸까?

  학교라는 하나의 큰 상징을 떠 올려 보면 그 속에 파생되는 수많은 이미지가 있다. 커다란 교실에 모두 같은 책장 앞에, 모두 같은 교복을 입고, 모두 같은 헤어스타일을 하고 앉아 있는 학생들. 동경하는 친구, 선배, 후배가 있었을 것이고, 남몰래 속앓이하며 짝사랑하는 이성도 있기 마련이다. 시험, 공부, 방학, 여행, 축제, 강당……. 이 얼마나 익숙하고도 그리운 존재들인가. 그러한 가운데, 학교의 전설로 내려오는 섬뜩한 ‘괴담’ 또한 또렷이, 그리고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다.

  「여섯 번째 사요코」는 이 모든, 열아홉이 지니고 있는 소재들의 ‘집합체’이다. 입시에 시달리는 고3의 학교. 그 살풍경한 모습과 서로를 믿고 따르는 친구라는 존재의 애틋함이 작품 구석구석 만연해 있다. 학교라는 커다란 공간이 주는 유대감에 얽힌 이런 이미지들을, 어쩌면 전 세계 모든 학생들이 동일한 느낌으로 받아들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이도 아닌, 어른도 아닌, 어정쩡한 중간 단계에서 방황하기도 하고, 혼란을 겪기도 하는 모든 평범한 학생들이 이 책의 주인공이다.

  지방의 한 고등학교에, 언제부터인가 ‘사요코의 해’라는 괴담이 전해 내려오고 시작한다. 마침내 올해 맞은 ‘여섯 번째 사요코의 해’에 ‘사요코’라는 이름을 지닌, 모든 것을 다 갖춘 미모의 여학생이 전학을 온다. 미스터리 여학생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묘하게 섬뜩한 일렬의 사건들. 이렇게 시작되는 사요코의 이야기는 봄부터 겨울까지 사계에 걸쳐 차근차근 1년 동안 진행된다. 오싹한 분위기라기보다는 신비로운 분위기의 소설이라는 말이 더 적절할 듯 하다. 억지로 뒷내용을 예측하기 보다는 그저 글에 서서히 매료되어 무작정 이끌려 가는….

   그리고 이 책의 주인공, 미스터리한 사요코는 그 미모가 얼마나 뛰어날지 머릿속에 상상해 보았으나, 아무리 찾아봐도 이 정도로 아름다운 소녀는 내 인생을 통 틀어 단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듯 하다. 그녀가 너무 너무 예쁘다는 말이 식상할 만큼 자주 등장한다. 예쁜 소녀를 동경하는 또래의 학생들 마음까지 잘 표현한 듯한데, 온다 리쿠의 소설에는 유독 이러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매력적이고 뛰어난 미모의 소녀’가 자주 등장하는데, 그건 작가의 경험이 100% 투영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여섯번째 사요코」는 미스터리한 분위기의 소녀 취향의 괴담 소설이다. 획기적인 반전도, 또렷한 결론도 없어서 뭔가 허전한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이 작품의 요지는 독자들이 알아서 판단하리라 믿는다. 생각할 여지를 많이 남겨두는 작품이라서 여운이 길게 남는다. 간혹, 학교라는 그리움의 대상을 막연하게 추억해 보는 어른들이 읽어본다면 정말 좋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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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양 한림신서 일본현대문학대표작선 26
다자이 오사무 지음, 유숙자 옮김 / 소화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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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사양(斜陽). 해가지는 모습처럼 점점 추락하듯 내려오는 삶에 관한 이야기다. 태평양 전쟁 직후, 아버지의 사망과 함께, 제 나라처럼 몰락한 귀족 집안의 허전한 풍경을 화자 ‘가즈코’가 그려낸다. 하지만 태양이 지는 어두운 풍경을 바라보면서도 포기하지 않은 채 역경을 견디어 내는 모습에서, 선천적으로 나약한 여자답지 않은 강인한 힘이 느껴졌다. 곱게 자란 공주님이 하루아침 밭으로 일을 하러 나가야 하는 상황, 어머니는 갈수록 병환이 짙어지시고, 하나 있는 남동생마저 마약에 혼이 팔려 방황 한다. 지독한 생활고에 시달리며 삶의 즐거움이란 도무지 찾아볼 수 없는 상황.

  이러한 극한의 상황에서도, ‘가즈코’는 자신의 사랑을 지켜내며, 세상을 향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강인한 여성상이다. ‘인간은 사랑과 혁명을 위해서 태어난 것이다.’ 라고 당당하게 외칠 만큼 강해지려 노력하지만, 슬픔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이 한번쯤은 좌절의 고배를 마실 줄도 아는, 어찌 보면 지극히 평범한 여자라고 볼 수 있다. 지극히 일본적인 사상과 지극히 일본적인 문체로 내게 다가온「사양」은 하나 같이 입을 모아 이야기 하는, 다자이 오사무의 어둡고 음습한 기질이 내게는 불행하지만은 않은 희망으로 언뜻 비춰졌다.

  그 이유는 「사양」에 등장하는 네 명의 인물 성격과 변화하는 내면의 실체가, 작가가 말하고자 함이 단순한 인간의 불행을 논함이 아닌, 저물어져 가는 태양 아래에 있을 아름다운 황혼 빛처럼 한 가닥의 순수와 아름다움을 겹쳐놓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가즈코와 그녀의 어머니, 남동생, 우에하라의 캐릭터를 살펴본다면, 어설픈 자존심을 세우는 거짓과 스스로 삶을 허비하는 방탕함이 자리하고 있기도 하지만, 마지막의 편지글이나 사소한 고백 등을 비추어 볼 때, 어쩐지 그들을 아주 어둡게만 그리고 있지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랑이라는 가장 주요한, 이 작품의 성질이 작용하고 있는 탓도 될 것이다.

  스토리를 사근사근 이끌고 있는 작가의 매력을 흠뻑 맛볼 수 있었던 감동적인 작품이다. 소박한 밥상이나 다도의 풍경이 자주 등장하는 일본 고전 영화처럼 조용하지만, 그 조용함 속에서 느끼지는 짙은 매력이 있다고 할까. 얇은 문고본 한 권에서 뿜어 나오는 힘이 제법 크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마음에 안 들었던 점 한 가지는, 일본 문학에서 과연 ‘자살’이라는 테마가 등장하지 않을 수는 없을까? 하는 점이다. 일본인의 몸속에 흐르는 피 자체가, 자살을 미화하며, 자살함으로써 비로소 자신의 모든 죄가 씻기고, 구원 받을 수 있다고 여기는 할복역사의 문화에서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하는데, 문화적인 차이 큰 탓인지 나는 아직 이 부분에 크게 공감 할 수가 없다. 

  유독 일본 문학에서는 지나치게 자살 자체를 가볍게(?) 다루는 점이 있는데, 아무리 민족적인 특성이라고는 하지만, 자살이라는 결론을 접할 때는 마음 한 구석이 무겁게 다가온다. 스스로의 목숨을 끊는 행위, 그 무섭고 잔인한 행위를, 달랑 한 줄, ‘XX가 자살했다.’라고 명시해 두고 끝. 물론 다섯 번의 자살 시도 끝에 생을 마감하게 된 작가의 이력이 고스란히 반영된 사소설이라는 점을 감안해야겠지만, 그런 점을 배제 하고, 문학 자체에서 느끼는 감동의 참맛이 어쩐지 그러한 점 때문에 깎여 들어가는 듯 했다. 자살에 따른 내적 고통과 불안들을 충분히 이해는 하지만, 그 무질서한 위태로움을 문학에서 너무 가벼이 다룬다는 점이 크게 공감가지 않았다.

  사람 살아가는 풍경은 모두 똑같다. 하지만 제 각기 다른 사정이 있고, 다른 색채가 있다. 「사양」역시 그러한 명제에 주안점을 두고, 사람이 살아가는 모두 똑같은 방식 속에서도, 조금씩 다른 모습들을 캐치해서 그려 놓고 있는 듯 하다. 다 비슷하게 사는 듯 하면서도, 모든 사람이 같을 수는 없다. 어둡게 내려앉는 하늘을 멀리서 보면 모두 검은색으로 동일한 듯 보이지만, 실상 가까이서 바라보면 어느 한 곳 같은 색을 발하고 있지 않은 듯, 사람 사는 모습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설령 인생이 지나치게 힘들고 괴롭다 하더라도, 사람에게 주어진 스스로의 살아갈 기회를 저버리지 말고, 소중히 다루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아, 이 사람들은 뭔가 잘못된 거야. 하지만 이 사람들도 내 사랑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렇게라도 하지 않고선 살아갈 수 없는 건지도 모른다.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어떡하든 끝까지 살아야 하는 거라면, 이 사람들이 끝까지 살기 위한 모습도 미워할 수 없는 게 아닌가. 살아 있다는 것. 살아 있다는 것. 아아 이 얼마나 버겁고 숨 넘어 가는 대사업인가. -17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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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실격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3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춘미 옮김 / 민음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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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 한 작품을 읽고 난 후에는, 머릿속에 그려지는 어떠한 이미지가 반드시 존재하기 마련이다. 가령 밝은 미래에 대한 희망이라던가, 가슴 가득 들어찬 슬픔의 묘한 전율, 혹은 「인간 실격」처럼 음침한 하늘의 탁한 잿빛 공기처럼 답답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머릿속에 그려지는 작품에 대한 완결의 이미지보다 강한 것은, 가슴 속을 수놓는 뜨끔한 한방의 일침일 것이다.

  그랬다.「인간 실격」을 읽으며 나는 내내 누군가 내 등을 쿡쿡 찔러대는 듯한 기묘한 감상에 사로잡혔다. ‘이건 나잖아. 이건 당신이야. 그래, 이건 어쩌면 우리 모두야.’ 허망한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결코 평범하지 않았던 한 남자의 삶에 무심한 시선을 던지며 동참한다.

  여기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낸 한 사내가 있다. 그 사내는 인간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을 모르는 사내다. 살아가면서 자연적으로 터득하게 되는 거짓 섞인 가식과 양심의 양면에서 괴로워한다. 사람의 자식으로 태어나 마땅히 해야 할 자식의 도리조차 지키지 못하며, 그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에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행위를 베풀 줄 모르며, 그저 속은 텅텅 빈 채 허물어진 빈껍데기 같은 삶을 살아갈 줄밖에 모른다. 

  술과 마약에 의지하고, 소위 여자 등 처먹는 삶을 살다가, 몇 번의 자살 시도 끝에 생을 마감하고 말, 그야말로 인간 중에서도 가장 하류인, 인간 실격자. 삶을 개선하고자 할 한 줌의 희망조차 말살된 채, 엉망으로 부끄럼 많은 생을 살아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 사내를 둘러싸고 있는 배경은 매우 안정적이고 편안했으나, 그러한 안락에서 오는 불안함이 항상 내제되어 있었다. 인간과 인간을 구분 짓는 허례허식 속에서 괴로워하며, 타고난 천성 자체가 순수했다는 어쩔 수 없이 진부한 성선설에 기대고 마는 나약한 인간상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듯 보였다. 한 마디로 실격된 삶을 스스로 자초했고, 그렇게 귀결되고 말았다고 판단된다.

  ‘다자이 오사무’라는 작가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고, 옮긴이 ‘김춘미’씨가 쓴 짧은 분량의 작가에 대한 설명을 읽고서 비로소 그를 미약하게나마 이해했다. 이 글을 탄생시킨 작가의 이력을 보니, 이런 글이 탄생할 수밖에 없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으로 ‘김춘미’씨의 일문학 번역을 가장 좋아하고, 가장 신뢰한다. 김춘미씨는 역자로써의 훌륭한 재능뿐만 아니라, 작품을 해석하는 능력 또한 매우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인간 실격」은 작가의 자서전이자, 유서이자, 가장 마지막에 탄생시킨 39년 삶을 집약한 고백이다. 끊임없이 타인과의 불안정한 유대를 생각하고, 스스로의 혐오로 인한 개인의 몰락과 파괴과정이 섬뜩하리만치 생생하게 펼쳐져 있다.       

  「인간 실격」은 한 개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지나치게 넓은 세상에 대한 공포감에서 비롯된 상처가 곪아있는 상태라고 볼 수 있다. 밥을 먹어 위를 든든하게 만드는 동물적인 기본 본능조차 이해하지 못한 채, 그러한 공복에 대한 불쾌감에 사로잡혀 전혀 세상과 소통할 줄 모르는 나약한 인간…. 자신을 혐오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인간관계를 지속시키기 위한 위선을 택할 때 나타나는 극도의 자괴감에 허덕이는 ‘요조’라는 남자. 그러한 인간상을 적나라하면서도 은밀하게 나타내고 있기에, 불신과 과욕으로 가득 찬 환멸의 세상을 그로인해 폭로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본서에서는, 섬뜩하게 드러나는 어두운 작가의 자화상 「인간 실격」과 함께, 예수를 배반하는 유다의 장황한 변명을 다루고 있는 「직소」까지, 다자이 문학에서 빠져선 안 될 주요 두 작품을 살펴볼 수 있다. 「직소」는 독특한 요설체의 어지러운 분위기와 함께, 예수를 사랑하면서도 자신의 손으로 죽이고자 마음먹은 유다에 대해 재조명 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두 작품 모두 신뢰를 잃은 인간의 나약한 천성과 타인의 배신으로 고통 받는 비참함, 그리고 불안함 가득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탁한 시선을 동시에 느꼈다. 아마도 그것이 작가의 불행했던 삶만큼이나, 여기저기 혼재해 있는 어쩔 수 없이 살아가는 자들의 서글픈 고백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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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 1 밀리언셀러 클럽 51
스티븐 킹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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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스티븐 킹’의 「셀」의 제일 앞장에는 ‘리처드 매드슨과 조지 로메로에게 이 책을 바친다.’ 라는 문장이 적혀있다. 모든 작가들이 의례 그렇듯이 존경이나 사랑을 담은, 누군가에 대한 헌사를 책의 가장 앞 장에 바치기 마련인데, 나는 ‘옮긴이의 말’을 읽기 전까지 이 두 사람이 누군지 몰랐다. 리처드 매드슨은 「나는 전설이다」라는 전설적인 좀비 소설을 쓴 작가이고, 조지 로메로는 「새벽의 저주」라는 좀비 호러 영화를 탄생시킨 감독이라고 한다.  

  두 작품을 읽거나 보지 못했으니, 당연히 전작들에 대한 비교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흔히 오마주로 불리는 존경을 담은 일부 장면의 모방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두 작품에서 어느 정도의 모티브를 얻어 새로운 특색을 갖춘 「셀」이 완성된 듯 하다. 좀비영화를 좋아하지 않아서 많이 보지는 못했으나, 유명한 몇 작품을 본 경험이 있는데, 그 때 경험했던 좀비들의 허탈한 이미지와는 다소 상반된 모습을 이 소설에서 볼 수 있었다.

  우선 책을 읽는 내내 영화를 겨냥했다, 거나, 영화로 꼭 만들어질 것 같다, 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셀」은 역시나 내후년쯤 영화로 탄생하게 된다고 한다. 스티븐 킹 소설을 원작으로 둔 모든 영화들이 대부분 큰 흥행수익을 올리며 성공가도를 탄 듯이 「셀」역시 좋은 성적을 거두리라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이유는, 원작이 굉장히 참신한 아이디어를 둔 작품은 아니지만, (좀비라는 소재 자체가 이제는 매우 클래식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신선한 맛은 떨어지더라도, 특유의 독자를 사로잡는 소위 ‘글빨’이 성공적으로 먹히고 있기 때문이다.

  「셀」은 시작부터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보스턴의 유원지 한 복판에서 벌이지는 참극은 경악할 수준의 끔찍함을 담고 있었다. 멀쩡했던 사람이 갑자기 정체불명의 바이러스에 감연된 괴물처럼 돌변해서 서로를 죽이거나, 자살을 하거나, 지능 지수가 사라진, 마치 모든 두뇌가 포맷된 사람들처럼 행동을 한다. 피가 난무하는 문명의 마지막 종결지에서, 그 아비규환 속에서도 영웅심을 발휘한 몇몇 사람들이 살아남게 된다. 뭔가에 홀린 듯한, 산 자도 죽은 자도 아닌, 어정쩡한 폰 사이코 좀비들과 우리의 영웅들은 정면으로 대결을 벌이게 되는 내용이다.

  전형적인 헐리우드 호러, 액션, 재난 영화들의 집합체라고 볼 수 있다. 솔직히 말해서 ‘뻔한’ 내용이지만, 그럼에도 두 손 들고 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볼 수밖에 없는 ‘재미’가 일단 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뒷내용을 상상하며, 궁금해 하며, 거대한 스케일에 압도당하며「셀」을 읽었다. 21세기 트렌드에 맞춰서 잘 나온 작품이라고 생각 된다. 인간을 지배하고, 인간이 지배당하기를 원하는 휴대폰이라는 무시무시한 매개체를 통하여 파괴되어 가는 문명의 실상을 풍자하고 있는 듯도 하다. 게다가 언제나 단골 메뉴로 등장하는 가족간의 사랑과 어려움에 처한 사라들의 투철한 의협심도 두루 두루 살펴볼 수 있는 작품이다.

  게다가「셀」에 등장하는 영웅, ‘클레어’라는 캐릭터가 참 마음에 들었다. 전혀 영웅적이지 않은 영웅이라서, 더 정이 간다고 할까. 모든 영화들에 등장하는 두뇌 천재나, 경찰, 액션 영웅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미국의 어느 시민이기에 더욱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물론 클레어조차도 어찌할 수 없는 상황들이 존재하고, 어느 날 갑자기 모든 사람들이 휴대폰을 통해서 펄스에 감염되어, 광기에 사로잡힌 이해할 수 없는 좀비가 되어가는 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상황들이 많지만, 무언가를 하려는 작은 노력들이, 극악의 상황에 처한 우리들의 모습을 리얼하게 표현하고 있는 듯 했다.

  너무나도 대중적인 작가이기에, 오히려 그 유명세가 ‘스티븐 킹’의 작품에 대한 평가에 걸림돌로 작용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 이유는 늘 독자들이 그에게 ‘지나치게’기대를 많이 하고 있는 탓도 될 것이다. 작가의 이름을 지우고, 편안한 마음으로 읽는다면, 무시무시한 호러 소설이 아닌, 인류에게 닥친 심각한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해 나가는 주인공들의 인간미와 함께,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스토리의 흐름에 대한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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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1-01 1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킹은 정말 킹!^^

mind0735 2007-01-02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정군님이 진정 킹입니다~
 
희망의 인문학 - 클레멘트 코스 기적을 만들다
얼 쇼리스 지음, 이병곤.고병헌.임정아 옮김 / 이매진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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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 자신을 알라’ 한 문장을, 자신의 철학적 출발점으로 두었다는 소크라테스의 정신을 반드시 배워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면철학의 선구자였던 소크라테스를 이해하면서 진정한 나 자신을 알아보고 싶은 욕구가 생기겠지만, 보편적으로 모든 이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스스로의 무지를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은, ‘나’는 물론이거니와, ‘너’와 ‘우리’까지 이해할 수 없다. 결국 극단적인 한 마디로,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 속에서 발전의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의미다.

  거의 모든 이들이 가난은 대물림 된다고 한다. 몇 해 전, 한 신문기사에서 읽은 가난에 따른 통계자료를 본 기억이 있는데, 빈익빈 부익부는 최근 10년 사이 놀라운 수치로 증가했음을 알 수 있다. 경제가 발전할수록 부를 축적하는 상위 1%의 부자들에 비해, 사회 최대극빈층은 훨씬 높은 수치로 증가했다고 한다. 반드시 변화하는 체제이자, 변화 해야만 하는 체제인 민주주의가, 부자가 있으면 당연히 빈곤층이 있어야 한다는 명제를 제시해 주는 듯 하다. 그리고 나라가 발전 할수록 부자들을 제외한 많은 사람들은 더욱 살기 척박해야 한다는 무서움까지 엄포하고 있는 듯 느껴졌다.  
  
  이렇듯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더욱 절감하게 되는 부와 가난의 모순속에서 클레멘트 코스의 창시자 ‘얼 쇼리스’는 밀접하게 연관되는 부와 가난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게 되고, 부자와 가난한 자의 차이를 가장 명확하게 짚어냈다. 그것은 바로 ‘인문학’의 부재에 따른 계층간의 차이점을 간파한 것이다. 우연히 여자 교도소의 재소자와 대화를 나누던 도중, 그녀의 말에 영감을 받아,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배움터 ‘클레멘트 코스’의 수업을 열게 된다.

  어떻게 보면 가장 어려운 문제 속에 가장 쉬운 정답이 숨어있는 경우가 있다. 쉬운 말로 해서, 인간은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다. 무엇을 아느냐가 관건인데, 빈곤층에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교양에는 지나치게 무관심하기에 자신을 분별 있는 시각으로 정확하게 돌아볼 수가 없는 것이다. 하루하루 먹고 살기 빠듯한 사람들에게 ‘철학, 문학, 예술, 역사’가 다 무슨 소용이냐고 반문 할 수도 있겠지만, 앞서 말했듯이 가장 어려운 문제 속에는 의외로 가장 단순하고 쉬운 정답이 숨어 있다. 배움의 기회가 없는 사람에게 더더욱 인문학의 부재야 말로 인간이 살아가는 인생에서 가장 필요한 지식들이며, 현명하게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넓은 시야를 차단해버리는 수단인 셈이다.

  인문학은 세상과의 적절한 타협을 위해서, 올바른 지식의 습득과 바르게 생각하는 스스로의 능력 향상, 그리고 외부의 무력적인 힘에 대항하는 방법을 알기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교육이다. 얼 쇼리스는 그러한 인문학 수업을 거리의 노숙자나 사회 최하위 계층의 빈곤한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어, 여러 사람들과 함께 하는 정치적인 활동과 빈곤으로부터의 탈출할 수 있도록 배움을 제공하고 있다.

  처음에는 지루해하고, 수업에도 자주 빠지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수업에 참여 하면서, 무언가를 습득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배움의 재미를 알아간다. 5-8개월가량 되는 클레멘트 코스를 이수한 후에는 대학에 진학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삶의 아무런 희망이 없던 사람들에게, 인문학이란 새로운 희망을 제공하는 일생의 전환점이었던 것이다. 책에도 간간히 등장하는 클레멘트 수업의 교육 방침과 교과 과정을 살펴본 결과, 한쪽으로 치우침 없이 골고루 분포되어 있는 빈민들을 위한 가장 적절한 해결책인 듯 보였다.

  인문학이 반드시 가난을 탈출해서 우리 모두를 록펠러처럼 부자가 된다는 보장을 해주지는 않는다. 다만, 완벽하지는 않지만, 인문학의 혜택을 누려서 민주주의 사회에서 시민들이 영위하고 있는 그러한 공적 삶에 입문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다. 당연한 결과지만, 문화를 알아가는 만큼 생각할 수 있는 본인의 능력이 발전하게 된다. 중요한 것은 개인의 추상적인 지성이 아니라, 사람들의 호기심이 갖는 활력과 정신적 몰두,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인지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어 하는 욕망, 그리고 열정적이고도 균형 잡힌 방식으로 기꺼이 삶에 대한 질문 속에서 살아가려는 마음가짐이라고 ‘리츠 리엘’은 말한다. 지긋지긋한 가난의 연속 속에서, 가장 합법적이며 당당하게 벗어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 클레멘트 코스의 희망은, 현재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이어질 ‘가난’의 굴레를 떠안고 있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수업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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