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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양 ㅣ 한림신서 일본현대문학대표작선 26
다자이 오사무 지음, 유숙자 옮김 / 소화 / 2002년 10월
평점 :
품절
사양(斜陽). 해가지는 모습처럼 점점 추락하듯 내려오는 삶에 관한 이야기다. 태평양 전쟁 직후, 아버지의 사망과 함께, 제 나라처럼 몰락한 귀족 집안의 허전한 풍경을 화자 ‘가즈코’가 그려낸다. 하지만 태양이 지는 어두운 풍경을 바라보면서도 포기하지 않은 채 역경을 견디어 내는 모습에서, 선천적으로 나약한 여자답지 않은 강인한 힘이 느껴졌다. 곱게 자란 공주님이 하루아침 밭으로 일을 하러 나가야 하는 상황, 어머니는 갈수록 병환이 짙어지시고, 하나 있는 남동생마저 마약에 혼이 팔려 방황 한다. 지독한 생활고에 시달리며 삶의 즐거움이란 도무지 찾아볼 수 없는 상황.
이러한 극한의 상황에서도, ‘가즈코’는 자신의 사랑을 지켜내며, 세상을 향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강인한 여성상이다. ‘인간은 사랑과 혁명을 위해서 태어난 것이다.’ 라고 당당하게 외칠 만큼 강해지려 노력하지만, 슬픔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이 한번쯤은 좌절의 고배를 마실 줄도 아는, 어찌 보면 지극히 평범한 여자라고 볼 수 있다. 지극히 일본적인 사상과 지극히 일본적인 문체로 내게 다가온「사양」은 하나 같이 입을 모아 이야기 하는, 다자이 오사무의 어둡고 음습한 기질이 내게는 불행하지만은 않은 희망으로 언뜻 비춰졌다.
그 이유는 「사양」에 등장하는 네 명의 인물 성격과 변화하는 내면의 실체가, 작가가 말하고자 함이 단순한 인간의 불행을 논함이 아닌, 저물어져 가는 태양 아래에 있을 아름다운 황혼 빛처럼 한 가닥의 순수와 아름다움을 겹쳐놓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가즈코와 그녀의 어머니, 남동생, 우에하라의 캐릭터를 살펴본다면, 어설픈 자존심을 세우는 거짓과 스스로 삶을 허비하는 방탕함이 자리하고 있기도 하지만, 마지막의 편지글이나 사소한 고백 등을 비추어 볼 때, 어쩐지 그들을 아주 어둡게만 그리고 있지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랑이라는 가장 주요한, 이 작품의 성질이 작용하고 있는 탓도 될 것이다.
스토리를 사근사근 이끌고 있는 작가의 매력을 흠뻑 맛볼 수 있었던 감동적인 작품이다. 소박한 밥상이나 다도의 풍경이 자주 등장하는 일본 고전 영화처럼 조용하지만, 그 조용함 속에서 느끼지는 짙은 매력이 있다고 할까. 얇은 문고본 한 권에서 뿜어 나오는 힘이 제법 크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마음에 안 들었던 점 한 가지는, 일본 문학에서 과연 ‘자살’이라는 테마가 등장하지 않을 수는 없을까? 하는 점이다. 일본인의 몸속에 흐르는 피 자체가, 자살을 미화하며, 자살함으로써 비로소 자신의 모든 죄가 씻기고, 구원 받을 수 있다고 여기는 할복역사의 문화에서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하는데, 문화적인 차이 큰 탓인지 나는 아직 이 부분에 크게 공감 할 수가 없다.
유독 일본 문학에서는 지나치게 자살 자체를 가볍게(?) 다루는 점이 있는데, 아무리 민족적인 특성이라고는 하지만, 자살이라는 결론을 접할 때는 마음 한 구석이 무겁게 다가온다. 스스로의 목숨을 끊는 행위, 그 무섭고 잔인한 행위를, 달랑 한 줄, ‘XX가 자살했다.’라고 명시해 두고 끝. 물론 다섯 번의 자살 시도 끝에 생을 마감하게 된 작가의 이력이 고스란히 반영된 사소설이라는 점을 감안해야겠지만, 그런 점을 배제 하고, 문학 자체에서 느끼는 감동의 참맛이 어쩐지 그러한 점 때문에 깎여 들어가는 듯 했다. 자살에 따른 내적 고통과 불안들을 충분히 이해는 하지만, 그 무질서한 위태로움을 문학에서 너무 가벼이 다룬다는 점이 크게 공감가지 않았다.
사람 살아가는 풍경은 모두 똑같다. 하지만 제 각기 다른 사정이 있고, 다른 색채가 있다. 「사양」역시 그러한 명제에 주안점을 두고, 사람이 살아가는 모두 똑같은 방식 속에서도, 조금씩 다른 모습들을 캐치해서 그려 놓고 있는 듯 하다. 다 비슷하게 사는 듯 하면서도, 모든 사람이 같을 수는 없다. 어둡게 내려앉는 하늘을 멀리서 보면 모두 검은색으로 동일한 듯 보이지만, 실상 가까이서 바라보면 어느 한 곳 같은 색을 발하고 있지 않은 듯, 사람 사는 모습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설령 인생이 지나치게 힘들고 괴롭다 하더라도, 사람에게 주어진 스스로의 살아갈 기회를 저버리지 말고, 소중히 다루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아, 이 사람들은 뭔가 잘못된 거야. 하지만 이 사람들도 내 사랑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렇게라도 하지 않고선 살아갈 수 없는 건지도 모른다.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어떡하든 끝까지 살아야 하는 거라면, 이 사람들이 끝까지 살기 위한 모습도 미워할 수 없는 게 아닌가. 살아 있다는 것. 살아 있다는 것. 아아 이 얼마나 버겁고 숨 넘어 가는 대사업인가. -172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