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리케의 여정
소냐 나자리오 지음, 하정임 옮김, 돈 바트레티 사진 / 다른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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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매다 중남미 국가들에 살고 있던 70만 명의 주민들이 미국의 국경을 불법으로 넘어온다고 한다. 이렇게 엄청난 불법 이주민의 숫자는 날이 갈수록 늘어가고 있는 추세다. 혹독한 빈곤에 시달리고 있는 중남미의 국민들은 일자리가 없어 미국을 찾게 되는데, 자식들을 떼어 놓고 일자리를 찾아 머나먼 타국으로 돈을 벌기 위해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엔리케의 여정」이러한 불법이주민들의 힘겨운 삶의 애환을 사실적으로 담고 있는 책이다. 

  이 책의 주인공 ‘엔리케’는 ‘온두라스’라는 중앙아메리카 작은 나라에 살고 있는 소년이다. ‘언리케’가 다섯 살 때, 엄마 ‘라우데스’는 일자리를 찾아 미국으로 떠나오게 되고, ‘엔리케’는 엄마 없는 11년을 견디지만, 생각처럼 쉽지가 않다. 미국에서 간간히 붙여주는 돈으로 학교도 다니고, 생활을 하고 있긴 하지만, 그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바로, ‘엄마’라는 존재의 따뜻함이기 때문이다.

  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참지 못한 ‘엔리케’는 생사를 기약할 수 없는 위험천만한 기차여행을 떠나게 된다. 화차에 몸을 실어 엄마의 전화 번호 하나만 달랑 들고 머나먼 여정을 떠나는 것이다. 엔리케 외에도 많은 불법이주민들이 기차의 지붕이나 짐칸에 몰래 숨어 멕시코를 경유해 미국으로 떠나고 있었다. 그 길은 너무나 위험해서 사람들은 불안정한 기차를, ‘죽음의 기차’라고 부른다고 한다.


  가장 위험한 지역으로 알려진 멕시코 최남단 주 치아파스는 짐승 같은 깡패들과 경찰들의 소굴이었다. 이 곳에서 몰매를 맞고 목숨만 간신히 건진 ‘엔리케’는 처음으로 이 여정의 위험함을 몸소 깨닫게 된다. 깡패도 무섭고, 이민국의 단손도 무섭고, 각 지역 주민들의 냉정함도 무섭지만, 가장 무서운 존재가 바로, ‘경찰’이다. 모든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 존재하는 경찰이 갈취를 하고, 강간을 하고, 모든 악행을 저지르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참으로 끔찍한 그 곳의 온갖 고난을 견디면서 ‘엔리케’는 엄마를 찾아가기 위한 여정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차마 눈 뜨고 볼 수도 없을 만큼 끔찍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 죽음의 기차에 올라탄 수많은 불법 이주민들의 생사를 건 험난한 여정이 그저 믿을 수 없을 뿐이었다. 사람으로 태어나 어떻게 그렇게 잔인할 수가 있을까? 어떻게 그렇게 사람의 목숨을 하찮게 여길 수 있을까? 경찰들의 횡포에도 쉬쉬하며 눈 감아버리는 당국의 태도는 단연 최고의 몰상식함이었다. 물론, 짐승보다 못한 나쁜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천사의 마음처럼 따뜻한 주민들과 신부님도 있었다. 그들은 몇 일째 굶주리고 있는 불법 이주민들에게 식량을 제공하며, 친절을 베풀기도 했다.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견디며, 122일 동안 일곱 번의 헛된 시도 끝에 19,310킬로미터를 달려온 엔리케. 그토록 바라던 엄마와의 해후는 과연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뒷부분을 유추해보면서 책을 읽었지만, 바라는 만큼 가슴이 따뜻해지거나, 포근한 감동만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니었다. 만약 이 작품이 픽션이었다면, 가장 멋진 마무리로 감동적인 엔딩을 장식할 수가 있었겠지만, 어디까지나 이 작품은 ‘논픽션’이므로,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말해야하기 때문이다.


  엔리케의 가슴 아픈 여정에 동참하는 동안 머릿속이 참 복잡해졌다. 불법 이주민에 대한 미국의 너그러운 태도도 문제고, 불법 이주민을 강력하게 제안하여 타도하는 태도 역시 문제이긴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가난에 치여 먹고 살기 힘든 사람들의 최후의 선택을 막을 방법은, ‘라우데스’의 말처럼, 오로지 ‘넉넉한 일자리’ 뿐이다. 일자리가 풍부해 돈을 벌 수 있는 길이 많다면, 엔리케처럼 엄마를 찾아 위험천만한 여행을 자초하는 아이들은 사라질 테니까.

 

  그러나 이 문제가 결코 말처럼 이렇게 단순하지 않음을 잘 알고 있다. 지독한 가난에 시달리고 있는 나라의 부채 탕감이나, 일자리 창출이 그토록 간단하게 해결 될 문제라면 이미 지구상에는 모든 나라들이 잘 살고 부자가 되었을 테니 말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선택권이 그다지 많지 않다. ‘이대로 굶어 죽느냐, 다른 나라로 떠나 돈을 버느냐.’ 이런 좁은 선택의 기로에서, 지금도 수많은 엄마, 아빠가 아이를 혼자 남겨두고, 돈을 벌기 위해 먼 나라로 떠나고 있다. 과연 어느 길이 올바른 길인지는 그 누구도 섣불리 판단할 수 없는 문제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건, 아이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맛있는 음식도, 축구공도, 나이키 운동화도, 곰 인형도 아닌, 바로 ‘엄마, 아빠’의 따뜻한 손길임에는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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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니발 라이징
토머스 해리스 지음, 박슬라 옮김 / 창해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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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충은 고치를 만들면서 번데기가 된다. 그런 다음에 이 변태(變態)의 밀실에서 아름다운 이마고가 되어 세상으로 나온다. 이마고가 뭔지 알지?” - ‘양들의 침묵 中 - 한니발 렉터-’


  ‘이마고’란, 유아기에 무의식화 했다가 성인이 된 후에 나타나 유치한 짓을 하게 하는 부모의 이미지. 이 말은, 고대 로마인들이 장례식에서 사용한 조상들의 밀랍 초상 이름에서 나왔다. ‘토머스 해리스’의 작품 곳곳에서는 이런 ‘이마고’의 상징성이 부여되어 있다. 유아기에서부터 이루어진 무의식은 이미 의식이 되어 긴 잠복기를 거쳐, 성인이 된 후에야 은밀하게 표출되는 잠재적 능력을 내포하고 있다.


  이런 상징을 읽는 것은 ‘토머스 해리스’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우선 「양들의 침묵」에 등장했던 ‘좀나방’ 역시 상징적인 의미로 큰 작품을 이해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피해자의 목에서 검출되었던 ‘좀나방 번데기’의 상징적인 변화는, 유충에서 나비, 혹은 나방으로의 변화를 암시하고 있었다. 극중 ‘버팔로 빌’은 변화하고 싶어 했다. 남성임에도 불구하고 여성을 꿈꾸며, 그것을 거부당하자 난폭한 스스로의 살인적인 본성을 드러내게 된다.


  유아기에서 유년기를 거쳐 청년이 되는 시기는 한 인간의 본성에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시기다. 「한니발 라이징」은 ‘한니발 렉터’ 박사의 과거로 돌아가 그의 살인 본성에 대한 근원적인 연구를 하고 있다. 얼핏 느끼기에는 ‘진부한 외전’ 쯤으로 여겨진다. 모든 살인에는 동기가 있음은 자명한 일인데, 그 동기는 평범하게도, 괴로웠던 과거의 기억들에 의한 분노의 표출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정석이 된 ‘과거의 고통 = 현재 살인적 욕구, 혹은 살인의 충동’ 익숙하게 다가오는 소재이기에 신선도가 떨어진다.


  ‘한니발 렉터’ 박사의 기억의 궁전에는 ‘2차 세계대전’ 전후의 끔찍한 증후군에 시달리는 자아가 있었다. 작품의 배경은 프랑스, 한니발은 나치 전범들에 의해 여동생 ‘미샤’의 죽임을 당하고, 그 때문에 복수를 결심하게 되는 설정이다. 그런데 열세 살 때 첫 살인을 저지르는 한니발은 지나치게 담담하다. 과거의 충격 때문이 아닌, 막상 눈앞에 닥친 분노의 표출로 한 남자를 서슴없이 살인하는 과정에는 연민의 감정 따윈 찾아보기 힘들다.     


  ‘무라사키’ 숙모와 한니발의 관계는 묘한 연인의 냄새를 풍기며 발전한다. 자신을 위기에서 탈출 시켜준 ‘무라사키’ 숙모에 대해 충분히 사랑을 품을 수 있지만, 그녀에 대한 감사함 보다는 처음부터 그녀에게 잘 보이고 싶었던 이기적인 남성의 욕망이 먼저 자리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를 욕하는 ‘푸주한’을 살해하는 과정에서 느꼈던 동기는 전적으로 불순한 감정에 의한 것이다. 열세 살 때 저지른 첫 살인은 섬뜩하기 그지없다. 어린 아이에게서 느껴지는 살기는 ‘공포’ 그 이상이다.


  ‘한니발 렉터’라는 지적인 살인마의 캐릭터는, 선천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었던’ 선천적인 살인 본능으로 정의 내릴 수 있겠다. 작가 또한 작품 전반에 그리고 있는 인간의 이미지인 성악설에 힘을 실어 주고 있는 듯 하다. 계기에 의한 살인과 천부적인 살인 능력은 별개의 문제다. 「한니발 라이징」은 한니발의 성장기를 통해서, 본능을 움직이게 하는 타인의 횡포와, 그에 반응하여 더욱 끔찍하게 변화해가는 주인공의 모습을 담고 있다.


  미래가 아닌 과거로 떠난 한니발 외전은 전작들에 비해 신선함이 떨어졌지만, 악마성의 근원을 묻는 우울한 분위기가 스릴러 작품으로서는 무난한 정도라고 판단된다. ‘2차 세계대전’ 전후의 일본을 바라보는 시각은 마음에 들지 않았고, 또 역사적인 배경의 설득력은 부족했지만, 장르에 솔직한 작품이니 그쯤은 감수해야 할 듯 하다. 다만, 앞으로 다시는 ‘한니발’ 시리즈가 나오지 않았으면 한다.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한니발 렉터’라는 매력적인 인물의 이미지를 더 이상 훼손시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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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들의 침묵
토머스 해리스 지음, 이윤기 옮김 / 창해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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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들의 침묵」원작의 출간년도는 88년도다. 그로부터 2년 후인 91년도에 영화화 되어, 보수적인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주요 5개 부문을 휩쓰는 기염을 토했다. 더불어 ‘스릴러’ 장르의 한계를 뛰어넘은 수작이란 찬사와 함께, 흥행과 비평을 모두 제패한 몇 안 되는 장르 영화 중 하나로, 지금까지 ‘양들의 침묵’이상 가는 스릴러 영화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책이 출간 된지 정확히 19년. 거의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음에도 전혀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는 퀄리티는 스릴러 소설의 교과서라 불릴만하다.

 

   영화는 뛰어난 배우들의 연기력도 최고였고, 치밀한 시나리오 덕택에 압도적으로 높은 완성도를 보였는데, 원작의 우수함이 큰 역할을 했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영화와 원작 소설의 스토리는 동일하지만, 엄연히 살로 와 닿는 느낌은 다르다. 그러나 소름끼치는 ‘한니발 렉터’와 신출내기 FBI요원 ‘클라리스’의 대결은 언제 봐도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소설로 느끼는 그들도 역시나 치밀한 신경전이 대단했다.


  「양들의 침묵」의 매력은 뭐니 뭐니 해도, ‘한니발 렉터’ 박사의 천재적인 악마성에 있다. 지나치게 똑똑한 두뇌를 지닌 살인마 렉터 박사에게선 연민이나 증오, 두려움을 넘어선 ‘우아함’이 느껴진다. 사람을 아홉 명이나 잔인하게 살해서 직접 시식까지 한 ‘렉터’ 박사는 특수 교도소 독방에 수감되어 있는데, 범죄학과 심리학을 전공한 ‘클라리스’는, 이토록 너무도 지적인 렉터 박사에게 연쇄 살인마 ‘버팔로 빌(별명)’의 정보를 캐내기 위해 접근하게 된다.


  「양들의 침묵」에서 특이한 점은, ‘범인과 경찰’이라는 두 인물에 포커스를 집중시키지 않고, ‘렉터와 클라리스, 그리고 버팔로 빌’이라는 세 명의 인물에 포커스를 집중 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렉터와 클라리스가 주인공임은 분명하지만, 렉터는 현재 발생되고 있는 연쇄살인의 범인이 아닌, 그 범인을 알아내기 위한 ‘자문위원’, 혹은 ‘인간도구’일 뿐인 것이다. 과거의 살인을 했으나, 지금은 수감 중인 중증 정신병자. 혹은 지나치게 똑똑해서 모든 것을 꿰뚫어보고 있는 정신분석계의 거물쯤으로 보면 된다.


  제목의 암시 또한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다. 양들의 침묵. 침묵하는 양들…. 이것은 다름 아닌, 유년의 기억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클라리스’의 꿈에서 비롯된 ‘비밀’이다. 과거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인간, 과거로부터 이어지고 있는 현재와 미래. 모든 인간들에게서 찾을 수 있는 공통적인 문제들로 인해, 사건의 실마리에 접근하게 되고, ‘렉터와 클라리스’라는 은밀한 관계가 형성 되는 것이다.

 

  유년의 끔찍한 기억은 모든 이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생하는 문제다. ‘클라리스’와, ‘버팔로 빌’, 그리고 「한니발 라이징」을 보면 알 수 있는 ‘렉터’ 박사의 기억 또한 별로 안녕하지 못한 기억들의 잔재가 여전히 남아 있다. 강렬한 표지만큼이나 강렬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양들의 침묵’이라는 제목…. 다소 복잡한 구도와, 기이한 살해 방식 등으로 90년대 당시에는 정말 신선한 충격이었다. 지금이야 피가 난자한 살육이나, 독자들의 두뇌를 시험하는 법의학 시리즈가 많이 나오고 있지만, 그래도 양들의 침묵처럼 높은 완성도를 지니고 있는 스릴러를 만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작가가 실제로 신문사에서 범죄 기사를 쓰던 기자 경력을 지니고 있기에 사건들의 묘사가 더욱 실감나게 표현된 듯 하다. 미국 범죄물이 의례 그렇듯 ‘재미’ 하나는 확실히 보장된 셈인데, 거기에 완벽한 사건의 개연성과 살인마의 품위까지 유지하고 있는 스릴러라니. 아마 앞으로도 당분간은 「양들의 침묵」 이상 가는 영화는 물론이고, 소설도 나오기 힘들지 않을까 싶다. (적어도 내 기준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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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미오와 줄리엣 - Shakespeare's Complete Works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이윤기.이다희 옮김 / 달궁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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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세계 방방곡곡 널리 읽히는 유명한 러브 스토리는, 로미오와 줄리엣이 나오기 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토록 강경하게 주장할 수 있는 극단적인 정의에 반문을 제기하는 분은 아마도 없으리라 본다. ‘로미오와 줄리엣’을 효시로 남녀의 비극적인 사랑을 그린 소설과 영화들이 수 없이 탄생했다. ‘죽을 만큼 사랑했다.’ 아마도 이 문장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는 작품이 ‘로미오와 줄리엣’이 아닐까 싶다.

  웬만한 장비가 없고서야 도저히 불가능한 벽 타기. ‘줄리엣’을 보기 위해 발코니에 올라가 사랑을 속삭이던 ‘로미오’의 벽 타는 기술은, 거의 암벽 등반가 수준이다. 또한 조숙한 줄리엣은 어떤가? 만 열 네 살도 안 되는 어린 나이에 로미오를 보자마자, 곧장 한다는 소리가 ‘손바닥을 맞대는 것은 곧 입맞춤……. 사람을 보낼 테니 식을 올릴 시간을 알려주세요.’라는 당찬 포부를 밝힌다. 두 사람은 첫눈에 반해 사랑에 빠지고, 두 번 보고 나서 결혼식을 올리고, 죽도록 사랑하여 결국 죽음에 이른다.


  전 세계 여성 99%가 꿈꾼다는 바로 그 ‘운명’! ‘로미오와 줄리엣’을 통해 운명적인 사랑은 언제나 방해자들이 있기 마련이라는 법칙 아닌 법칙까지 생겨나게 되었다. 이토록 순간적인 불꽃처럼 열정적으로 타오르는 사랑이 더욱 아름다워 보였던 이유는 비극적인 결말 때문이 아니었을까? 만약 두 사람이 해피엔딩으로 끝나 아들, 딸 낳고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결말을 맞이했다면, 분명 지금까지 이토록 수많은 패러디를 낳으며 유명한 작품으로 남겨지지는 않았을 것 같다.

      

  ‘로미오와 줄리엣’을 다시 읽어보는 내내, 나의 눈앞엔 ‘디카프리오’가 아른거렸다. 60년대 당시 ‘레오나드 위팅’이 제 아무리 조각미남이었다고 해도 나는 ‘디카프리오’세대였으니, 그 옛날 나의 로미오는 오직 ‘디카프리오’ 뿐이다. 그의 우수에 젖은 눈동자와 신들린 연기력을 보며 흠뻑 빠져 있었던 소녀 시절이 떠오른다. 책 본 김에, 영화도 다시 한번 보며 현대판 로미오와 줄리엣의 애틋함을 느껴봐야겠다. 그리고 차근차근 셰익스피어의 다른 작품들과도 조우해야지.


  덧붙여 번역의 중요성을 새삼 실감한다. 원문을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번역한다는 것은 불가능 하므로, 역자의 재량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특히나 희곡 같은 경우는 한 문장 한 문장에 더욱 섬세한 주의를 기울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예전에 타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던 ‘로미오와 줄리엣’을 읽었을 때는 굉장히 지루했다. 이른바 맛깔스러운 대사의 묘미를 찾아볼 수 없으니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된다. 시대에 맞게 번역 또한 다르게 탄생해야 한다는 말에 공감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윤기씨 버전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지금 시대에 적절한 단어의 차용으로 원문의 맛을 더욱 멋지게 살린 아름다운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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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이야기 - Shakespeare's Complete Works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이윤기 외 옮김 / 달궁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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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셰익스피어를 접하는 사람이 이윤기씨를 만난 것은 행운이라고 생각한다.「겨울 이야기」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이라기보다는, 탁월한 이야기꾼이자 번역가인 ‘이윤기’씨의 번역이라는 점에서 더욱 관심이 갔던 작품이다. 나는 오만불손하게도 셰익스피어의 위대함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읽어봤자 분명 ‘너무 어려울 것이다’, 라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점 또한 부인하지 못하겠다.

  「겨울 이야기」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임에도 대중에게 크게 알려지지 않은 작품인 것 같다. 그런데 읽고 보니, 책을 읽는 시간이 그렇게나 행복할 수가 없었다. 셰익스피어가 만들어내는 마법의 시간으로 초대받은 기분에, 생소한 전율마저 느껴진다. ‘아, 이래서 대단하다는 거구나. 아, 이래서 셰익스피어를 읽어야 하는 거구나.’ 무릎을 치며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겨울 이야기」는 글쎄……. 제목과 내용은 크게 연관성이 없어 보인다. ‘겨울 이야기’에는 혹독한 추위나, 겨울을 떠올릴만한 내용은 없다. 아니면 시련을 의미하는 겨울의 상징적인 제목을 붙인 것일까? 어쨌든 한번 읽기 시작하면 손에서 놓을 수 없을 만큼 술술, 재미있게 읽히는 작품이다. 그런데,「겨울 이야기」는 ‘로버트 그린’의 <판도스토>라는 상시의 인기 작품에서 줄거리를 빌린 것이라고 한다. 약간의 모티브만을 차용한 셈인데, <판도스토>와는 내용이 확연히 틀리다고 하니, 크게 신경 쓸 부분은 아닌 것 같다.

  셰익스피어가 ‘그리스 로마 신화’에 큰 관심을 가지며, 그의 작품 전반적인 곳에 신화적인 요소들을 숨겨 두었다는 사실은 금시초문이었다. 역자의 부연설명이 없었더라면 분명「겨울 이야기」를 작품을 올바르게 이해하며 100% 즐기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처음 접하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이윤기씨의 번역으로 보게 되어서 더욱 쉽고 푹 빠져드는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이윤기씨의 말대로, 그의 작업은 숨겨진 보석 같은 셰익스피어의 압축 파일을 차근차근 풀어내는 신비롭고도 기쁜 작업이었음이 틀림없다.

  「겨울 이야기」의 대략적인 줄거리는 시칠리아의 왕 ‘레온테스’와 그의 아내이자 왕비 ‘헤르미오네’ 사이의 오해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헤르미오네’가 보헤미아의 왕 ‘폴릭세네스’와 간통을 저질렀다는 질투로부터 시작된 분노의 오해를 하게 되면서 비극이 이루어진다. 뒤 이어 ‘헤르미오네’의 딸 ‘페르디타’와, ‘폴릭세네스’의 아들이자 보헤미아의 왕자 ‘플로리젤’의 사랑 이야기가 뒷부분을 장식하고 있다.   

  매우 보편적인 줄거리이긴 하나, 단어 하나하나가 아름답고, 문장들의 연결 또한 매우 감성적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능통하다면, 「겨울 이야기」를 더욱 멋지게 즐겨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신화의 인물들과 비슷한 면이 많았고, 신화적인 요소가 그만큼 많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근 3천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는 매력적인 신화를 셰익스피어가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니, 신화를 더욱 철저히 공부해보고픈 욕심이 생겼다.

  아버지와 딸이 합심해서 독자에게 가장 편안하게 읽을 수 있는 셰익스피어 이야기들을 전해주고자 한 노력에 대해서 찬사를 보내고 싶다. 앞으로도 이윤기씨와 그의 딸, 이다희씨가 더욱 훌륭한 번역으로 셰익스피어의 보석처럼 아름다운 희곡 작품을 많이 보여주기를 소원한다.「겨울 이야기」는 눈이 밟히는 겨울 밤, 멋진 왕과 아름다운 왕비님 이야기를 들으며 설레어 하던 어린 시절의 감정이 되살아났던, 읽으면서도 내내 행복함이 떠나지 않았던 시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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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ersu 2007-02-12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나도 <로미오와 줄리엣>을 읽고 난 후...이윤기 선생의 이 시리즈에 관심이 팍팍 생겼어요..그래서 저도 셰익스피어와 더불어 이윤기 선생에게 빠져볼까 하고 있어요..^^ 난 <로미오와 줄리엣>리뷰인줄 알고 들어와 봤음.ㅎㅎ

mind0735 2007-02-12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작년 봄인가..? 암튼 그 때 사놓고 이제서야 읽어요. 하하하 ㅠ.ㅠ 1년이 지나고 지금 읽었는데, 너무 재밌지 뭐예요. 달궁에서 나온 이 시리즈 앞으로 쭈욱 모으기로 결심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