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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니발 라이징
토머스 해리스 지음, 박슬라 옮김 / 창해 / 2007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유충은 고치를 만들면서 번데기가 된다. 그런 다음에 이 변태(變態)의 밀실에서 아름다운 이마고가 되어 세상으로 나온다. 이마고가 뭔지 알지?” - ‘양들의 침묵 中 - 한니발 렉터-’
‘이마고’란, 유아기에 무의식화 했다가 성인이 된 후에 나타나 유치한 짓을 하게 하는 부모의 이미지. 이 말은, 고대 로마인들이 장례식에서 사용한 조상들의 밀랍 초상 이름에서 나왔다. ‘토머스 해리스’의 작품 곳곳에서는 이런 ‘이마고’의 상징성이 부여되어 있다. 유아기에서부터 이루어진 무의식은 이미 의식이 되어 긴 잠복기를 거쳐, 성인이 된 후에야 은밀하게 표출되는 잠재적 능력을 내포하고 있다.
이런 상징을 읽는 것은 ‘토머스 해리스’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우선 「양들의 침묵」에 등장했던 ‘좀나방’ 역시 상징적인 의미로 큰 작품을 이해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피해자의 목에서 검출되었던 ‘좀나방 번데기’의 상징적인 변화는, 유충에서 나비, 혹은 나방으로의 변화를 암시하고 있었다. 극중 ‘버팔로 빌’은 변화하고 싶어 했다. 남성임에도 불구하고 여성을 꿈꾸며, 그것을 거부당하자 난폭한 스스로의 살인적인 본성을 드러내게 된다.
유아기에서 유년기를 거쳐 청년이 되는 시기는 한 인간의 본성에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시기다. 「한니발 라이징」은 ‘한니발 렉터’ 박사의 과거로 돌아가 그의 살인 본성에 대한 근원적인 연구를 하고 있다. 얼핏 느끼기에는 ‘진부한 외전’ 쯤으로 여겨진다. 모든 살인에는 동기가 있음은 자명한 일인데, 그 동기는 평범하게도, 괴로웠던 과거의 기억들에 의한 분노의 표출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정석이 된 ‘과거의 고통 = 현재 살인적 욕구, 혹은 살인의 충동’ 익숙하게 다가오는 소재이기에 신선도가 떨어진다.
‘한니발 렉터’ 박사의 기억의 궁전에는 ‘2차 세계대전’ 전후의 끔찍한 증후군에 시달리는 자아가 있었다. 작품의 배경은 프랑스, 한니발은 나치 전범들에 의해 여동생 ‘미샤’의 죽임을 당하고, 그 때문에 복수를 결심하게 되는 설정이다. 그런데 열세 살 때 첫 살인을 저지르는 한니발은 지나치게 담담하다. 과거의 충격 때문이 아닌, 막상 눈앞에 닥친 분노의 표출로 한 남자를 서슴없이 살인하는 과정에는 연민의 감정 따윈 찾아보기 힘들다.
‘무라사키’ 숙모와 한니발의 관계는 묘한 연인의 냄새를 풍기며 발전한다. 자신을 위기에서 탈출 시켜준 ‘무라사키’ 숙모에 대해 충분히 사랑을 품을 수 있지만, 그녀에 대한 감사함 보다는 처음부터 그녀에게 잘 보이고 싶었던 이기적인 남성의 욕망이 먼저 자리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를 욕하는 ‘푸주한’을 살해하는 과정에서 느꼈던 동기는 전적으로 불순한 감정에 의한 것이다. 열세 살 때 저지른 첫 살인은 섬뜩하기 그지없다. 어린 아이에게서 느껴지는 살기는 ‘공포’ 그 이상이다.
‘한니발 렉터’라는 지적인 살인마의 캐릭터는, 선천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었던’ 선천적인 살인 본능으로 정의 내릴 수 있겠다. 작가 또한 작품 전반에 그리고 있는 인간의 이미지인 성악설에 힘을 실어 주고 있는 듯 하다. 계기에 의한 살인과 천부적인 살인 능력은 별개의 문제다. 「한니발 라이징」은 한니발의 성장기를 통해서, 본능을 움직이게 하는 타인의 횡포와, 그에 반응하여 더욱 끔찍하게 변화해가는 주인공의 모습을 담고 있다.
미래가 아닌 과거로 떠난 한니발 외전은 전작들에 비해 신선함이 떨어졌지만, 악마성의 근원을 묻는 우울한 분위기가 스릴러 작품으로서는 무난한 정도라고 판단된다. ‘2차 세계대전’ 전후의 일본을 바라보는 시각은 마음에 들지 않았고, 또 역사적인 배경의 설득력은 부족했지만, 장르에 솔직한 작품이니 그쯤은 감수해야 할 듯 하다. 다만, 앞으로 다시는 ‘한니발’ 시리즈가 나오지 않았으면 한다.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한니발 렉터’라는 매력적인 인물의 이미지를 더 이상 훼손시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