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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들의 침묵
토머스 해리스 지음, 이윤기 옮김 / 창해 / 2006년 6월
평점 :
품절
「양들의 침묵」원작의 출간년도는 88년도다. 그로부터 2년 후인 91년도에 영화화 되어, 보수적인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주요 5개 부문을 휩쓰는 기염을 토했다. 더불어 ‘스릴러’ 장르의 한계를 뛰어넘은 수작이란 찬사와 함께, 흥행과 비평을 모두 제패한 몇 안 되는 장르 영화 중 하나로, 지금까지 ‘양들의 침묵’이상 가는 스릴러 영화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책이 출간 된지 정확히 19년. 거의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음에도 전혀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는 퀄리티는 스릴러 소설의 교과서라 불릴만하다.
영화는 뛰어난 배우들의 연기력도 최고였고, 치밀한 시나리오 덕택에 압도적으로 높은 완성도를 보였는데, 원작의 우수함이 큰 역할을 했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영화와 원작 소설의 스토리는 동일하지만, 엄연히 살로 와 닿는 느낌은 다르다. 그러나 소름끼치는 ‘한니발 렉터’와 신출내기 FBI요원 ‘클라리스’의 대결은 언제 봐도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소설로 느끼는 그들도 역시나 치밀한 신경전이 대단했다.
「양들의 침묵」의 매력은 뭐니 뭐니 해도, ‘한니발 렉터’ 박사의 천재적인 악마성에 있다. 지나치게 똑똑한 두뇌를 지닌 살인마 렉터 박사에게선 연민이나 증오, 두려움을 넘어선 ‘우아함’이 느껴진다. 사람을 아홉 명이나 잔인하게 살해서 직접 시식까지 한 ‘렉터’ 박사는 특수 교도소 독방에 수감되어 있는데, 범죄학과 심리학을 전공한 ‘클라리스’는, 이토록 너무도 지적인 렉터 박사에게 연쇄 살인마 ‘버팔로 빌(별명)’의 정보를 캐내기 위해 접근하게 된다.
「양들의 침묵」에서 특이한 점은, ‘범인과 경찰’이라는 두 인물에 포커스를 집중시키지 않고, ‘렉터와 클라리스, 그리고 버팔로 빌’이라는 세 명의 인물에 포커스를 집중 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렉터와 클라리스가 주인공임은 분명하지만, 렉터는 현재 발생되고 있는 연쇄살인의 범인이 아닌, 그 범인을 알아내기 위한 ‘자문위원’, 혹은 ‘인간도구’일 뿐인 것이다. 과거의 살인을 했으나, 지금은 수감 중인 중증 정신병자. 혹은 지나치게 똑똑해서 모든 것을 꿰뚫어보고 있는 정신분석계의 거물쯤으로 보면 된다.
제목의 암시 또한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다. 양들의 침묵. 침묵하는 양들…. 이것은 다름 아닌, 유년의 기억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클라리스’의 꿈에서 비롯된 ‘비밀’이다. 과거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인간, 과거로부터 이어지고 있는 현재와 미래. 모든 인간들에게서 찾을 수 있는 공통적인 문제들로 인해, 사건의 실마리에 접근하게 되고, ‘렉터와 클라리스’라는 은밀한 관계가 형성 되는 것이다.
유년의 끔찍한 기억은 모든 이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생하는 문제다. ‘클라리스’와, ‘버팔로 빌’, 그리고 「한니발 라이징」을 보면 알 수 있는 ‘렉터’ 박사의 기억 또한 별로 안녕하지 못한 기억들의 잔재가 여전히 남아 있다. 강렬한 표지만큼이나 강렬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양들의 침묵’이라는 제목…. 다소 복잡한 구도와, 기이한 살해 방식 등으로 90년대 당시에는 정말 신선한 충격이었다. 지금이야 피가 난자한 살육이나, 독자들의 두뇌를 시험하는 법의학 시리즈가 많이 나오고 있지만, 그래도 양들의 침묵처럼 높은 완성도를 지니고 있는 스릴러를 만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작가가 실제로 신문사에서 범죄 기사를 쓰던 기자 경력을 지니고 있기에 사건들의 묘사가 더욱 실감나게 표현된 듯 하다. 미국 범죄물이 의례 그렇듯 ‘재미’ 하나는 확실히 보장된 셈인데, 거기에 완벽한 사건의 개연성과 살인마의 품위까지 유지하고 있는 스릴러라니. 아마 앞으로도 당분간은 「양들의 침묵」 이상 가는 영화는 물론이고, 소설도 나오기 힘들지 않을까 싶다. (적어도 내 기준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