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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는 라푼첼
야마모토 후미오 지음, 이선희 옮김 / 창해 / 2007년 8월
평점 :
절판
언젠가, 친구가 ‘나 요즘 너무 외롭다.’라는 말을 한적이 있다. 평소에 전혀 그러던 애가 아닌데, 진심으로 사력을 다해, 자신의 한없는 외로움을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내색한 것이다. 무신경한 남자친구 때문에 외로워서, 도저히 맨 정신으로 견딜 수가 없었다고 한다. 혼자 있는 것보다 사랑하는 남자친구와 함께 있을 때 더 외롭다는 사람들을 종종 보곤 하는데, 그 때 마다 그 심정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사실은 당신과 함께 있을 때가 혼자 있을 때보다 더욱 외로웠다는 말처럼 무섭고 슬픈 말이 또 있을까.
결혼한 부부들이 흔히 겪는 문제는 ‘떨림’의 부재로 인한 무신경함이다. 대화가 차단되고 웃음이 마비되고 함께 하는 시간이 점점 줄어든다. ‘가족끼리 무슨 키스야?’ ‘아직도 당신을 보면 떨리느냐고? 이봐, 우린 결혼한 지 5년이 넘었어. 아직도 떨린다면 그건 심장병이지.’ 이런 영화 속의 우스갯소리를 웃으며 넘길 수 없다. 왜냐? 이 모든 것이 현재 발생하고 있는 처절한 리얼이기 때문이다. 영원한 사랑을 믿는 쪽과 영원한 사랑을 믿지 않는 쪽, 첫눈에 반하는 불꽃같은 사랑을 기다리는 쪽과 사랑은 모두 개 풀 뜯어먹는 소리라고 비웃음을 흘리는 쪽, 어쩌면 이 모든 사랑의 정의는 맞는 말이며, 굳이 이유나 해석을 달지 않아도 무방할지도 모르겠다.
야마모토 후미오의〈잠자는 라푼첼〉을 읽고 결혼을 하기가 더욱 싫어졌다. 나 역시 ‘시오미’처럼 라푼첼로 박제되어 성 안에 갖혀 버리는 운명이 되면 어쩌나 싶어서. 물론 결혼을 해도 꾸준히 일을 할 것이기에 집안에만 틀어박혀 지내는 일은 없겠지만, 결혼이라는 제도 자체가 일종의 나 자신을 버리고 타인에게 의탁하는 일이 될지도 모르기에 막연한 불안함이 샘솟는다. 아무리 사랑하고 미칠듯이 원했어도 결국 그 사람을 합법적으로 갖게 되면 왜 사랑의 유효기간은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고 마는 것일까. 모두들 이기적이기에 그럴까? 미치도록 갖고 싶어서 꿈속에 까지 등장하는 옷을 구매해서 내 소유로 만들었을 때 느끼는 잠깐의 기쁨. 그리고 그 후론 그 옷을 봐도 아무런 감흥이 없는 이기적이게 변모하는 것처럼.
〈잠자는 라푼첼〉은 무기력한 일상에 힘겨워하는 전업주부의 삶을 잔잔하게 보여준다. 특별히 미화시키지도, 그렇다고 적나라하지도 않은 평범한 이웃집 누군가의 삶이다. 이웃들 간에 말 많기로 유명한 아파트에 사는 ‘시오미’. 매일 출장가 있는 남편의 부재로 외로움에 지친 그녀는 옆집에 사는 15살 연하의 소년을 사랑하게 된다. 이제 겨우 중학교 1학년 ‘로미’를 정말 정말 진심으로. 무신경한 남편과 그렇게 좋던 연애 초기에도 느껴보지 못했던 그 터질 것만 같은 사랑의 실체를 15살 연하의 핏덩이처럼 어린 소년에게 느끼다니. 그녀는 이 아이러니한 부조리에 대해서 스스로 난감해 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감정에 이끌려가게 된다.
지독하게 보수적인 사람이 읽는다면 다소 엽기적이라고 여길지도 모르겠다. 이웃집 남자들과 오묘한 관계를 맺는 그녀, 지독히 게으르며 자기만의 세계라는 선을 긋고 누구도 그 속으로 침범함을 허락하지 않는 그녀. 그러나 작가는, 15살 연상의 남자는 괜찮다고 여기면서 15살 연하의 남자는 이해하지 못하는 사회의 시선을 오히려 냉엄하게 꾸짖는다. 미성년자를 탐하면 물론 범법행위이지만, 나이라는 장벽을 넘어 우선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사랑이라는 광범위한 범위의 수용성인 것이다. 찬반의 여론이 강한 특성을 이용하되, 은근한 찬성의 뜻을 내비치게 되는 사람들을 응원하고 있을 것이다.
자기가 가둔 감옥에서 힘겨워하는 주인공 시오미를 보며 이런 저런 생각이 들었다. 그토록 무기력하게 하루 하루를 주인에게 사료를 받아먹는 고양이처럼 연명하기 보다는, 스스로 그 성을 탈출해서 좀 더 즐겁고 활기차게 살아가겠다는 의지를 보였더라면 어땠을까. 남편에게 먼저 다가가 대화를 시도했더라면 루피오라는 금단의 사랑을 넘보게 되는 일도 애초에 없지 않았을까. 여자의 일생이 다소 서글프게 그려졌지만, 기묘하게 사람을 이끄는 유혹에 대해서 섬세하게 표현 한 것 같아서 많은 공감이 가는 소설이다. 지푸라기처럼 축축 늘어져 사는 한가한 주부들이 읽는다면 색다른 재미를 발견하게 되겠지만, 이웃집 소년을 탐하는 행위는 철창 감이므로 각별히 조심할 것~! 흐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