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하게 제압하라 - 남자 직원들이 당신을 미치게 할 때
페터 모들러 지음, 배명자 옮김 / 리더스북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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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요즈음에는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은 직장에서 근무를 하고 있습니다. 업무를 직접 다루고 책임을 지는 위치가 아니라 실무에서 진행하고 있는 일을 지원하고 자문하는 정도의 일이기 때문에 그녀들과 업무상 상하관계에 놓여있지는 않습니다. 이런 특성 때문인지 국외자의 시각으로 그녀들을 지켜볼 수 있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전에 실무를 맡아서 할 때는 다양한 위치에 있는 여성들과 함께 일할 때를 다시 생각해보면 조직 안에서 남성과 차이를 둔 적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만 그건 전적으로 제 입장에서의 생각일 것이고, 저와 같이 일했던 그녀들의 생각은 어땠는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조직 내에서의 남성과 여성의 특성이 다르다고 합니다. 생각의 틀이 다르고 상황을 대하는 기본방식이 다르다는 점을 고려하여 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조직에서 여성성을 내세워 특별한 대우를 받아야 된다는 생각을 가진 분에게는 왜 저렇게 살까 싶었던 것 같습니다. 일을 하려고 조직에 들어왔으면 똑같이 일을 나누고 책임을 져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인데,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데보라 테넌은 의사소통에서의 남녀 차이는 어린 시절부터 나타나는데, 여자아이와 남자아이들은 자라면서 각기 효율적인 의사소통방식을 발전시키다보니 두 집단 사이에 분명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여자아이들은 ‘관계’를 중시하는 방식을 발달시키는 반면, 남자아이들은 ‘지위’를 중시하는 경향을 보이더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결과는 성장과정에서 남자아이들과 여자아이들을 구분하는 방식으로 키우고 교육하던 시절의 경향일 것입니다. 요즈음은 대부분 남자아이들과 여자아이들이 같이 놀고 교육도 같이 받고 있기 때문에 서로의 방식에 익숙해지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렇듯 이미 시대가 많이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능력이 있음에도 그것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는 여성들이 여전히 많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는 것은 아직 리더그룹에 이른 연령대에서는 상대방의 특성을 잘 이해하고 있는 여성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유럽에서는 잘 알려진 컨설턴트인 페터 모들러는 이러한 여성들에게 도움이 될 핵심적 조언을 <오만하게 제압하라>에 담았습니다. 남성이 여성의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겠느냐는 의문에 대하여는 바로 남성이기 때문에 여성의 문제를 제대로 볼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숲 속에서는 나무를 볼 수 있지만 숲 전체를 가늠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사회가 발전하면서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인식이 자리잡게 되면서 수평적 언어체계의 중요성이 강조되다 보니 수직적 언어체계의 중요성이 간과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수직적 언어체계는 실제로 조직을 운영하는데 있어 중요한 요소라고 할 추진력, 결단력, 모험심, 서열의식, 영역 확보 의지 등과 같은 능력을 갖추는데 기여한다고 합니다. 이 점에 착안한 저자는 여성리더를 위하여 오만훈련법을 개발하였다고 합니다. 특히 여성들이 직장에서 남자들과 소통하는 법을 몸짓 언어, 영역에 대한 태도, 권력 언어 등과 같은 여러 관점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책을 읽다보면 저자의 이론을 굳이 여성에 국한하여 이해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리더로서의 자질을 함양하기 위한 프로그램이라고 한다면 같은 문제로 고민하는 남성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저자는 ‘여자들만 남자들의 언어를 배워야 하고, 남자들은 여자들의 언어를 배우지 않아도 된다면 불공평하다면서 ’굳이 다른 성별의 언어를 익혀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불공평하게도 아직도 많은 권력을 남자들이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도덕성 확보가 아니라 전략적 이익을 위해서 남자의 언어를 익혀야 하며, 남자들 역시 자신의 이익과 성공적인 직장생활을 위해 여자의 언어를 배워야 한다(116쪽)”고 주장하고 있습니다만, 조직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서는 남성과 여성 모두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하며 리더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 특정한 성(저자는 남성의 언어라고 못을 박았습니다만)의 언어가 아니라 리더의 언어를 배우는 것이 옳다는 생각입니다.

 

직장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남녀 간의 갈등에 대한 저자의 조언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직장에서의 남녀 간의 갈등이 있다면 그것을 일종의 경기로 생각하라, 2. 성공적인 직장생활을 위하여 무브토크, 스몰토크, 하이토크(용어가 어렵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만, 몸짓, 간단한 감성적 언어, 논리적 설명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를 적절하게 사용하라. 3. 다른 성의 언어를 이해하라, 등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리더가 되고 싶은 여성을 위한 책’이라는 저자의 의도에 더하여 ‘리더가 되고 싶은 모든 이를 위한 책’이라는 느낌이 든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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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럴드 프라이의 놀라운 순례
레이철 조이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민음사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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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종교상의 여러 성지나 의미가 있는 곳을 찾아다니며 참배하는 ‘순례’라 하면 우선 기독교의 이스라엘, 이슬람의 메카와 메디나, 불교의 룸비니 등지가 있겠습니다만, 최근 불고 있는 걷기 열풍과 관련하여 스페인의 ‘산티아고 가는 길’이 먼저 생각납니다. 언젠가는 저도 걸어보고 싶은 길이기도 합니다. 영국의 드라마작가 레이철 조이스의 첫 번째 소설 <해럴드 프라이의 놀라운 순례>는 정말 놀라운 순례의 길을 걸어간 한 남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누구나 산티아고까지 가지 않더라도 자신만의 순례의 길을 따라 걸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만드는 이야기입니다.

 

영국의 남서쪽 끝에 있는 사우스햄스 킹스브리지에서 영국을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스코틀랜드와 만나는 북동쪽 끝에 있는 버윅어폰트위드까지 대략 800킬로미터의 거리를 실수와 일탈 때문에 우회하는 경우도 있어 1,000킬로도 넘게 걸어서 87일 만에 도착하는 동안, 해럴드와 그가 만나는 사람들이 엮어내는 다양한 이야기들이 펼쳐집니다. 처음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는 해럴드가 걷기 시작한 동기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해럴드와 아내, 아들 데이비드 그리고 해럴드가 만나러 가는 퀴니 사이에 얽혀 있는 복잡한 관계가 드러나면서 해럴드의 순례가 무엇을 위한 것인지 모습을 갖추어 갑니다. 미스터리 소설은 아닙니다만,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놀라운 사실들이 드러나게 되기 때문에 내용을 미리 말씀드리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해럴드의 놀라운 순례여행을 시작하게 만든 퀴니의 편지는 4월 중순경에 받게 됩니다. 해럴드가 집을 나선지 한참 뒤에야 내용이 알려지기는 합니다만, 몇 가지 의문점 때문에 미리 인용을 합니다. “해럴드에게, 이 편지를 받고 좀 놀라실지 모르겠네요.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난 지 오래되었다는 것을 알아요. 하지만 최근 들어 나는 지난날을 쭉 생각해 왔어요. 작년에 종양 수술을 받았는데, 암이 이미 퍼져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어요. 나는 차분해요. 또 편안해요. 어쨌든 오래 전에 해럴드가 나에게 보여준 우정에 감사하고 싶었어요. 부인에게도 안부 전해 줘요. 여전히 좋은 마음으로 데이비드를 기억하고 있어요. 모든 일이 잘되기를 빌며.(171쪽)” 해럴드가 은퇴하기 전에 다니던 양조회사에서 경리를 보던 퀴니는 이십년 전에 쫓겨나 떠난 다음에 연락이 끊겼던 것인데 그야말로 느닷없이 연락을 보내온 것입니다.

 

퀴니 헤네시의 소식을 들은 모린은 위층에 있는 아들 데이비드의 방으로 올라갑니다. 사실 여기서 작가가 은유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장면을 읽다보면 이들 부부 사이에 문제가 있다는 점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모린은 위층 데이비드의 방에 들어가 문을 조용히 닫고 잠시 그 자리에 선 채로 아이를 들이마셨다. (…) 그녀는 데이비드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방을 늘 깨끗이 청소해 두었지만, 그날이 언제일지는 알지 못했다. 그녀의 한 부분은 늘 기다리고 있었다.(17쪽)” 모린이 아들과 함께 있는 동안 해럴드는 퀴니에게 답장을 씁니다. “퀴니에게, 편지 고마워요. 정말 안타깝네요. 당신의 모든 일이 잘되기를 빌며-해럴드(프라이)” 이보다 더 무미건조할 수는 없을 것만 같은 한 줄로 된 답장, 그리고 퀴니의 편지를 보면 퀴니와 해럴드 부부 사이는 특별한 관계랄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편지를 부치러 나간 해럴드가 집근처 우체통에서 편지를 밀어 넣지 못하고 다음 우체통 그리고 우체국까지 지나치기까지 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간식을 사러 들른 주유소의 아가씨와 편지를 받을 사람이 암에 걸렸다는 이야기를 건넨 것도 영국인들의 일상적인 모습일까요? 고모가 암이었다는 소녀가 “믿어야 한다는 거예요.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약이니 뭐니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사람이 좋아질 수 있다는 걸 믿어야 돼요. 인간의 마음에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게 아주 많아요. 하지만 있잖아요. 믿음이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어요.(28쪽)”라고 전한 말이 해럴드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는 것을 이해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퀴니가 입원하고 있는 요양원에 전화를 걸어 “해럴드 프라이가 가는 길이라고 전해 주세요. 그냥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고 말입니다. 내가 구해 줄 거니까. 나는 계속 걸을 테니. 퀴니는 계속 살아 있어야 한다고. 그렇게 전해주겠어요? (…) 걸어갈 거예요. 사우스데번에서 버윅어폰트위드까지 쭉. 내가 걷고 있는 동안은 반드시 살아있어야 한다고. 이번에는 내가 실망시키지 않을 거라고 전해주세요.(33쪽)”라고 하는 것까지는 이해불가입니다. 해럴드는 자신이 퀴니에게 걸어가는 것만으로 그녀를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정말 믿었던 것일까요?

 

이렇게 시작한 걷기입니다. 시내에 나갈 때나 신으면 좋을 보트슈즈에 갈아입을 옷도 없이 편지를 부치러 나가는 간편한 복장으로 말입니다. 휴대폰도 없고 지도나 나침반도 없이 800킬로미터나 되는 먼 길을 이렇게 나서는 해럴드가 생각이 없는 사람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혹시 집에 돌아가 아내와 상의를 했다가는 아예 출발을 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을까요? 하지만 정작 모린은 전화를 건 해럴드가 버윅어폰트위드까지 걸어갈 것이라는 말을 하자 “뭐, 버윅에 가도록 해, 해럴드. 그게 당신이 원하는 거라면. 어디 당신이 다트무어를 넘어갈 수나 있는지 알고 싶어―(40쪽)”라고 쿨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해럴드가 걷기를 이어가면서 비용이 문제가 되면서는 “비용이 얼마나 들어가는지 계산은 다 해 본 거겠죠”라고 불편한 감정을 감추지 않습니다. 하지만 퇴직금을 쓰겠다는 해럴드의 말에 반대의사를 적극적으로 표시하지는 않는 것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걷는 동안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해럴드의 계획에 동감하고 응원하는 모습입니다. 정작 해럴드는 자신의 여행에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했지만, 어떤 부인은 <순례자가 되려면>이라는 찬송가를 불러주기도 합니다. 첫날 묵은 호텔에서 만난 웨이트리스나 손님들 모두 해럴드가 떠날 때 그가 여행을 성공리에 마무리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뿐만 아니라 걷는 길에 만난 사람들은 그에게 망설임 없이 먹을 것과 쉴 곳을 제공하는 모습을 보면 영국 시골의 인심도 참 푸근한 것 같습니다. 언젠가 유럽 몇 나라를 자전거로 여행했다는 지인의 여행담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마을을 지나는 외지인에게 문제라도 생기면 적극적으로 나서서 도와주더라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비행기나 기차로 질 알려진 장소를 중심으로 이동하는 여행에 익숙한 우리로서는 여행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는 기회가 될 것 같습니다.

 

사실 걷는 일이 별거냐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지난 주에는 매일 10km 정도 꾸준하게 걸어서 휴가기간 중에 모두 100km를 걸었습니다. 걸은 다음 샤워를 하고나면 나른한 느낌에 더위에도 불구하고 쉽게 잠이 들게 됩니다. 하지만 해럴드 처럼 먼 길을 가는 경우는 분명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어쩌면 “뒤꿈치가 따끔거리고 등이 아팠다. 게다가 발바닥에는 불이 나는 것 같았다. 아주 조그만 돌만 들어가도 아팠다.”는 해럴드의 호소는 애교로 볼 정도일 것입니다. 해럴드가 걷기 시작하면서 만난 여자의 말은 걷는 사람들이라면 공감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걷는 게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라고 생각하셨군요. (…) 그냥 한 발 앞에 다른 발을 내놓으면 되는 거라고요. 하지만 본능적이라고 여겨지는 일이 사실은 얼마나 어려운지 놀라곤 해요.(71쪽)” 먹는 것도 중요하고 잠을 자는 장소도 중요한 일이지요. 결국 해럴드는 노숙을 하고 길에서 먹을 것을 해결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그야말로 순례자의 진정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할까요?

 

헤럴드는 걷는 동안 꾸준히 모린과 퀴니 심지어는 그를 걷게 만든 주유소의 소녀에게까지 편지를 쓰고, 모린과 퀴니에게 줄 선물도 사곤 합니다. 그리고 해럴드의 걷기에 대한 모린의 감정이 무엇인지 조금씩 분명해지는 것 같습니다. “모린은 해럴드가 퀴니에게 걸어가고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을 때 받은 정신이 멍해지는 충격과 곧이어 찾아온 몸에 전기가 통하는 듯한 노여움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심각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120쪽)”는 표현이 어쩌면 정상적인 아내의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가끔 내가 데이비드를 위해서 이러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121쪽)”라는 해럴드의 말에 갈피를 잡지 못하는 모린의 모습에서 이들 부부 사이에 놓인 핵심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느낌이 오는 것 같습니다. 결국 모린은 걷고 있는 해럴드를 찾아가고, “보고 싶었어, 해럴드. 당신이 집에 돌아왔으면 좋겠어요(305쪽)”라면서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던집니다. 해럴드 역시 “나도 보고 싶었어. 하지만 모린, 나는 아무 일도 안 하면서 평생을 보냈어. 그러다 이제 마침내 뭔가 하고 있어. 나는 걷기를 마쳐야 해. 퀴니가 기다리고 있어. 퀴니는 나를 믿고 있어.”라고 화답을 합니다.

 

사실 걷다 보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해럴드가 걷기 시작한지 한 달도 넘어서 만난 믹도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였을 것입니다. “정말로 버윅까지 갈 수 있다고 믿느냐”는 믹의 질문에 “밀어붙이지도 않지만 미적거리지도 않아. 계속 한 발 한 발 걸어가면 거기에 도달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는 이야기”라고 대답하는 해럴드는 이제 걷기에 달관한 모습입니다. 그런 믹이 헤어지면서 “그냥 아저씨를 기억하려고” 해럴드의 사진을 찍었는데, 믹이 해럴드의 이야기를 ‘코번트 텔레그라프’에 기고하면서 해럴드는 일약 화제의 주인공이 됩니다. 그리고 보면 무엇이든지 꾸준하게 오래하는 사람이 주목받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해럴드를 따라 버윅까지 걷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주객이 전도되는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세인트버나딘 요양원에 누워있는 퀴니의 회복을 위한 성지순례단이 꾸려진 셈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순례단의 일정을 해럴드가 아닌 사람들이 결정하고 사람들이 모여들다보면 자연히 생길 수 있는 다양한 문제들이 드러나게 됩니다. 결국 해럴드는 순례단에서 빠지게 되고, 순례단은 결국 해럴드 없이 요양원에 도착하여 버윅 지역의 유력자들과 매스컴의 열렬한 환영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정작 요양원에서 순례단에게 따로 관심을 두지는 않는 이유는 나중에 밝혀집니다.

 

어떻든 순례단이 형성되는 과정에 대한 작가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이때부터 다른 사람들이 참가하기 시작했다. 와서 하루, 또는 이틀을 걷다 돌아갔다. 날이 맑으면 사람들이 무리를 이루었다. 운동가, 산책자, 가족, 낙오자, 관광객, 음악가, 깃발, 모닥불, 토론, 준비운동, 음악이 등장했다. 사람들은 암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일을 감동적으로 이야기했다. 후회가 되는 과거의 일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수가 늘수록 속도는 느려졌다. (…) 속도는 느렸지만 이 집단은 해럴드에게는 낮선, 묘한 자신감에 차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 자신들이 이제 잡다한 몸통과 발과 머리와 심장이 아니라, 퀴니 헤네시로 묶은 하나의 단일한 에너지라고 말했다.(287-8쪽) 일종의 집단의 힘이라고나 할까요. 많은 사람들이 같은 생각과 행동을 보이는데서 모이는 힘이 긍정적인 효과를 나타낼 수 있다는 믿음 같은 것이 만들어졌다고 생각됩니다.

 

걷기 시작할 무렵에 만났던 신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헥섬으로 우회하는 문제로 순례단과 결별한 해럴드는 홀가분해졌지만, 정작 버윅에 가까워지면서 갑자기 생긴 오한을 견디는 과정에서 오랫동안 동행한 개가 사라지면서 공황상태에 빠지고 자신이 해온 일에 대한 확신이 사라집니다. 모린과 통화하면서 지금 있는 곳이 어디인지도 모르겠고 자신이 더 이상 걸을 수 없게 되었다고 고백하게 됩니다.

 

결국 모린의 격려의 도움으로 편지를 부치기 위하여 집을 나선 87일 만에 1000킬로미터도 넘는 길을 걸어서 세인트버나딘 요양원에 도착한 해럴드는 이어 도착한 모린과 함께 퀴니의 죽음을 지켜보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해럴드와 모린을 불편하게 만들었던 모든 문제들이 제자리를 찾아가게 됩니다. 한 마디로 눈빛만으로 뜻을 통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부부도 대화를 통하여 진심을 전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 같습니다. 해럴드 프라이의 놀라운 순례에 담긴 비밀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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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왜 외로움을 느끼는가
존 카치오포 외 지음, 이원기 옮김 / 민음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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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이라는 감정은 참 독특한 것 같습니다. 어쩌면 대부분의 사람들로부터 외로움을 경험했다는 대답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제 경우도 정확한 기억은 없습니다만, 분명 외로움을 느꼈던 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처럼 기억이 애매한 것은 누구나 외로움에 빠져들곤 하지만 곧바로 빠져나오기 때문일 것입니다. 외로움이라는 감정은 어쩌면 인간에게서 독특하게 나타나는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측정하거나, 어떻게 생기는지, 건강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인지, 치료하는 방법은 없는지 하는 다양한 의문이 생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인간의 뇌와 몸이 사회적 반응과 어떤 연관을 가지고 있는지를 연구해온 시카고 대학의 존 카치오포교수는 사회적 유대감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외로움에 관한 다양한 연구성과들을 모아 <인간은 왜 외로움을 느끼는가>에 담았습니다. 흔히 혼자 있으면 외롭다고 느낄 것 같습니다만, 정신과 의사 앤서니 스토는 <고독의 위로>에서 혼자 있는 것의 즐거움을 탐구하고 때로는 혼자 있어 보라고 권하고 있는 것을 보면, 꼭 그런 것 같지 않습니다. 유전자와 후천적으로 생겨난 개성이 동시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사람마다 외로움을 경험하는 방식이 다르게 나타난다고 합니다(104쪽).

 

외로움을 느끼는 수준은 20 개의 항목으로 구성된 ‘UCLA 외로움 측정 기준’이라는 심리학적 검사방법이 있다고 합니다. 외로움은 1. 사회적 단절에 대한 취약성 수준, 2. 고립된 느낌과 관련 감정을 조절할 수 있는 능력, 3. 다른 사람에 대한 심적 표상과 기대 그리고 추리 등 세 가지 복잡한 세 가지 요인이 서로 작용하여 나타나게 된다고 합니다(25쪽). 저자는 외로움의 보편적 구조가 브루어와 가드너가 발견한 자아의 세 가지 차원과 맞아 떨어지는 것을 발견했는데, “자아의 경우 개인적, 상관적, 집단적 차원으로 나타난다면, 외로움과 긴밀한 관계가 있는 사회적 연결관계, 다시 말해서 유대감의 경우도 개인적 연결관계, 상관적 연결관계 그리고 집단적 연결관계로 나타난다는 점입니다.

 

외로움은 분명 심신을 피폐하게 해서 건강을 크게 상하게 하는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심리학자 댄 러셀팀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외로움 측정치가 높게 나온 65세 이상 노인들은 향후 4년 안에 요양원에 입원할 확률이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131쪽). 저자에 따르면 외로움은 1. 건강한 생활습관, 2. 스트레스 요인, 3. 스트레스 인자와 대응, 4. 스트레스가 일으키는 생리적 반응, 5. 휴식화 회복 등 다섯 가지 경로에 영향을 미쳐서 건강을 해치게 만든다고 합니다.

 

저자는 외로움이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과정을 규명하기 위하여 다양한 가능성을 추적하고 있습니다. 17세기 수학자이자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가 정신과 육체를 엄격하게 구분해야 하겠지만 서로 영향을 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점을 인용한 것을 시작으로, 마음과 몸의 유기적 관계에 관한 다양한 동물실험과 심리실험의 결과를 인용하여 외로움과 사회적 유대관계의 관련성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외로움에 대한 두려움으로 생길 수 있는 부작용을 차단하기 위하여 충동을 제어하고 편향된 의미 창출이 가지고 있는 양면성을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회적 유대감을 높이기 위해서는 상호관계를 경쟁의 차원에서 협동의 차원으로 승화시킬 필요가 있다는 점도 지적하였습니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로 진화해 오는 과정에서 서로 협동하는 정신이 강화되었는데, 진화생물학자 마르틴 노바크는 사회적 협력은 다섯 가지의 차원에서 이루어져왔다고 정의하였습니다. 1. 혈연 선택, 2. 직접 호혜주의, 3. 간접 호혜주의, 4. 네트워크 호혜주의, 5. 집단 선택 등입니다. 물론 이런 형태의 사회적 협력은 침팬지나 보노보에서도 볼 수 있지만, 인간에서 가장 잘 발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외로움을 치유하기 위하여 사회적 유대감을 증진시키는 방법으로 저자는 1.다른 사람에게 손내밀기, 2. 구체적인 행동계획, 3. 선택, 4. 최선을 기대하기 등을 묶어서 EASE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회적 관계는 늘 얽히고설켜 복잡하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소중한 관계를 유지하려 노력하는 과정에서 다음의 세 가지를 명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 외로움은 더 많은 요구를 부른다, 2. 외로움은 남을 비난하게 만든다, 3. 외로움은 수동적인 행동과 위축을 부른다, 등입니다(326쪽).

 

저자는 이 책을 통하여 우리의 사회적 현실 대부분을 우리가 어느 정도 조절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외로움의 생물학을 통해서, 더 큰 행복, 심지어 경제적인 풍요까지도 얻을 수 있는 비결이 윤리적이고 인도적인 행동이라는 교훈에서 얻을 수 있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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댜웅 2013-08-28 1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단하신데요. 전 항상 외로움을 느끼는데.

처음처럼 2013-08-29 21:39   좋아요 0 | URL
군중 속에서도 고독을 느낀다는 분 이야기도 들은 것 같습니다. 타인을 의식하지 않으면 외로움을 덜 타는 것 같습니다.
 
처음 시작하는 철학
로제 폴 드르와 지음, 박언주 옮김 / 시공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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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을 공부해보겠다고 팔을 걷고 나서서 좌충우돌하고 있지만 여전히 암중모색인 것 같습니다. 과학분야에서 일하다보니 특히 철학부문은 거의 앎이 없다시피 해온 까닭에 모든 것이 생소하고 어렵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습니다. 언젠가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좋은 개론서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리뷰에 적기도 했습니다만, 드디어 저의 생각에 꼭 맞는 느낌이 드는 책을 만났습니다. 로제 폴 드르와의 <처음 시작하는 철학>입니다. 철학의 전체를 다룬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을 고려하여 철학에 관심을 가진 사람을 인도하기에 충분한 시대를 대표하는 철학자들을 골라 그분들의 삶과 대표적인 철학적 사유를 정리하였습니다. 시대별로는 그리스, 중세 및 르네상스시대, 고전주의시대, 계몽주의시대 그리고 현대로 구분한 것 같습니다. 모두 열아홉 분의 철학자들과 그리스시대의 스토아학파에 속하는 제논, 세네카, 에픽테토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묶어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시대별 대표적 철학자들을 고르다보니 일종의 통사(通史) 형태가 된 것 같습니다. 이 책을 옮긴 박언주교수님은 “이 책의 취지는 서양철학사에 대한 한 편의 화려한 파노라마도 아니고, 전문 철학 참고서가 되고자 함도 아니다. 철학이라는 것에 대한 사전지식이 거의 전무한 독자들, 단 진리 추구 모험에 동참할 의지만은 마음 한구석에 늘 안고 사는 독자를 철학에 가장 쉽게 접근하게 한다는 지극히 평범하고 어찌 보면 진부한 목적에서 출발한 책이다.(347쪽)”라고 설명하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이 책은 나이에 상관없이 철학에 입문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책이다.”라고 들어가는 말의 서두에 적은 저자의 집필의도를 잘 나타내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일단 저자는 시대별로 구분된 철학의 특징을 종합적으로 요약하였습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그리스 철학을 요약하여 “최초의 철학 행위는 일정한 체계에 따른 진리추구였다. 철학은 시적 언어, 즉 잠언이나 직관적 방식의 대화를 통해 드러나는 진리를 파기함으로써 이루어졌다. (…) 하지만 소크라테스와 그 이후 플라톤이 등장하면서 철학의 언어는 변화를 맞이한다. 신화의 언어가 증명과 논거, 개념의 분류와 논리적 절차를 통해서만 가늠되는 진리추구에 그 자리를 내어주기 때문이다.(22쪽)” 저자가 플라톤을 이 책에 처음 등장시킨 이유를 간접적으로 깨닫게 되는 설명이기도 합니다.

 

일단 어렵기만 한 철학을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능하도록 쉽게 풀어내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읽다보면 눈길을 끄는 구절이 많습니다만, 이런 부분에 표시를 달았습니다. “행복은 우리 손닿는 곳에 있다. 행복은 다가갈 수 없는 목표가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행복해질 수 있다. 우리가 평소 가지고 있는 쓸데없는 두려움과 잘못된 생각, 오류화 방황만 폐기할 수 있다면 언제나 가능하다. 철학은 행복에 다가가기 위한 수단이다. 철학은 인간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묘약이다. 제대로 확실하게만 처방하면, 우리는 이 약을 통해 단순하고 행복한 삶을 지속할 수 있다.(53쪽)” 기원전 4세기 후반에 아테네에 살았던 에피쿠로스의 가르침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최근 회오리바람처럼 불어지나간 ‘힐링’에 이어 떠오르는 화두가 행복이라고 합니다. 그 행복을 누가 가져다줄까 궁금했는데, 철학이 바로 답이라는 것을 2,500년 전에 가르치고 있었군요.

 

이 책의 등장인물 대부분이 나름 들어본 이름이기도 합니다만, 역시 철학의 깊이가 부족한 탓에 생소하다는 느낌이 드는 철학자도 두어 분 있었다는 무식한 고백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어떻든 저자는 증장인물아 철학적 사유를 완성해가는 과정까지도 간략하게 요약하고 있어 이해를 더할 수 있고, 여유가 없는 분들을 위하여 그 분을 이해하기 위한 대표작을 필독서로 추려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정말 간략하게 서너줄로 그의 철학을 요약하고, 이어 논할 철학자에게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도 요약하는 친절을 베풀고 있습니다.

 

저자가 강조하는 “철학이란 생각을 한다는 것 그 자체가 아니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검토하는 것이며, 생각을 갖는 것이 아니라 그 생각들을 체에 걸러 꼼꼼히 검토하여 지속 가능한 견고함을 지니고 있는지 알아보는 것이다.(11쪽)”는 구절을 새기는 것으로 이 책을 읽은 값어치는 충분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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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 - 도시 그리고 추억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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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앞을 내다보는 것보다 살아온 날을 돌아보는 시간이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한 우물만 파지 않고 다양한 분야에서 일을 해온 까닭에 생각해볼 일이 많을 수밖에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직장을 한번 옮길 때마다 새로 맡은 분야에서의 도전, 아이디어를 모아 기획한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만난 사람들 그리고 그들과의 사연들, 설명할 기회도 없이 그렇게 준비해서 추진하던 일들을 놓고 떠나야만 했던 이유들... 아마 책으로 써도 몇 권은 될 것 같습니다. 언젠가부터 이런 이야기들을 가감없이 담아 자신의 기록으로 남겨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만, 여전히 일에 묶여 기록할 시간을 내지 못하는 자신을 게으르다고 변명하고 있습니다.

 

<이스탄불: 도시 그리고 추억>은 이스탄불의 작가 오르한 파묵이 작가로 성장해온 배경을 이스탄불이 변화해온 과정과 엮어서 기록한 자전적 회고록이라고 하겠습니다. 무생물인 건물과 거리로 구성되는 도시가 세월을 따라가면서 변화하는 모습을 보면 마치 생명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 같습니다. 도시가 성장할 때는 사람들이 몰려들고 하루가 다르게 거리와 건물이 늘어나고 활력이 넘치지만, 내부 혹은 외부적 요인에 의하여 사람들이 빠져나가기 시작하면 눈에 띄게 활기가 줄어들면서 건물도 퇴락하기 시작하는 모습은 동물이 늙어 쇠락하는 모습을 닮았습니다.

 

비잔틴 시대를 거쳐서 오스만 투르크 시대에 동서양의 문명이 만나는 접점에 서서 최고의 영광을 누렸던 이스탄불(콘스탄티노플)에 대하여 과거인물들이 남긴 기록과 또 작가가 어렸을 적부터 지켜보아온 것들을 담담하게 적어내려 가는데, 그 안에는 이스탄불을 사랑하는 작가의 안타까움이 절절하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글로 적어내기 어려운 부분은 이스탄불의 다양한 모습을 담은 흑백사진은 물론, 1819년에 발간된 앙투안 이그나스 멜링의 세밀화는 지금은 사라져 볼 수 없는 모습들, 혹은 퇴락해서 스러져가는 모습들을 통해서 느낄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습니다. 이스탄불의 모습 뿐 아니라 그 속에서 일어났던 사건들도 기록의 대상이 되고 있는데, 파묵의 기억에 갈무리된 그런 사건들이 그의 작품 속에서 살아나 사람들이 기억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는 점을 깨닫게 합니다. 파묵의 작품을 번역하여 소개해오고 있는 이난아교수는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너무나 허망하고 빠르게 허물어져 가는(너무 빠르게 새로워져 가는) 이스탄불의 소멸에 대한 저항의 기록으로 이해할 수 있다.”(오르한 파묵 변방에서 중심으로; http://blog.joins.com/yang412/13126504) 자신의 방식으로 이스탄불의 쇠락을 진심으로 슬퍼하고 애도하면서, 이스탄불이 사람들의 기억으로부터 사라지지 않도록 보존하려는 시도라는 것입니다.

 

‘불행이란 자신과 도시를 혐오하는 것이다.’라고 표현하는 것에서 이스탄불에 대한 파묵의 사랑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스탄불의 가난한 변두리 마을까지도 사랑하는 그는, “가난한 변두리 마을이나 폐허, 나무, 풀 같은 자연의 우연적인 아름다움을 음미하려면, 그 마을, 즉 폐허로 덮인 그 가난한 곳에서 ‘이방인’이 되어야 한다.(351쪽)”

 

한편으로는 숨겨두고 싶을 것 같은 개인 혹은 가족의 어두운 과거사까지도 고스란히 기록하고 있는데, 예를 들면 밖으로 도는 아버지로 인한 어머니의 고통과 갈등, 어느 가정에서나 있을 법한 형과의 힘겨루기, 첫사랑 이야기 등 자신이 작가로 성장할 수밖에 없었던 운명적인 성장과정을 적고 있습니다. 그리고 작가가 자신이 겪은 일들을 작품에 어떻게 녹여냈는지 연결해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아버지의 형제들이 모여 사는 파묵아파트는 <제브데트씨와 아들들>에 등장하고 박물관 같은 할머니집의 거실 풍경은 <순수박물관>의 배경이 되었고, 레샤트 에크렘 코추의 <이스탄불 백과사전>에 관한 이야기는 <고요한집; http://blog.joins.com/yang412/12957187>에서 백과사전의 편찬에 매달리는 의사 셀라하틴으로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파묵이 어렸을 적에 가족들과 떨어져 지한기르에 있는 이모집에 보내졌다는 이야기는 꼭 제가 어렸을 적 외갓댁으로 보내졌던 일이 생각나게 하고, 가족들이 차를 타고 보스포루스로 산책을 나가면서 형과 싸웠다는 이야기에서는 미국여행길에 아이들이 싸우는 통에 운전이 힘들었던 기억을 새롭게 만들었습니다. 사소해서 지나칠 것 같은 일에서 읽는 이의 추억을 떠올리게 만드는 것도 파묵의 세심한 면을 엿보게 하는 것 같습니다.

 

<이스탄블>을 읽으면서 언젠가 꼭 방문할 도시의 목록에 이스탄불을 올려놓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꼭 누가 읽어주지 않아도 저의 이야기를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정리해보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다짐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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