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사람들이 문지방 앞의 전투에서 실패함으로써 그 한 발짝을 넘어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지 못하고 이땅을 떠나는 것이 현실이다. 독일의 영성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말한 ‘돌파’, 즉 ‘브레이크스루’(Breakthrough)가 그 문지방을 통과했을 때, 이뤄지기 마련이다. 그러니 문지방에서 가장치열한 영적 전투가 벌어지는 것이다.

문지방을 넘기란 쉽지 않지만 반드시 그 문지방을 넘어야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며 새로운 생명, 즉 뉴 라이프(New Life)가탄생된다. 영정 속 이어령에게 "박사님, 정말 그 문지방을 넘어가셨나요?"라고 여쭤보았다. 한 개인의 영적 여정은 누구도 판단할 수 없고, 함부로 말할 수 없다. 오직 그분만이 알 것이다.

물론 소원, 즉 사모함은 중요합니다. ‘사모함이 재산‘이라는 생각을 늘 했습니다. 사모함, 갈망을 통해서 인간은 다른 세상으로 들어갈 수 있으니까요. 저와 오랜세월을 함께 한 소설가 김승옥(‘무진기행‘ 작가)씨가 하나님을 믿게 된 이후에 이렇게 고백했어요.
"내가 목숨 바쳐 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 알고 나니까마음이 그렇게 편안해질 수가 없었다. 목표가 있는 자는 준비를 하게 되고 따라서 부지런해진다."
‘목숨 바쳐 가야 할 길‘을 아는 자는 정말 행복한 사람 아닙니까? 저도 지성과 지상에서의 목표가 아니라영성과 영원의 차원에서 목숨 바쳐 가야 할 길을 찾아야 했습니다.

이런 치열한 과정을 거치다 보면 마침내 자신이 들어가야 할 문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드디어 자신이 머무를 방을 찾게 된 사람에게 필요한 덕목이 있습니다.
그것은 존중입니다. 현관 마루에서 함께 있다 자기와는 달리 다른 방을 선택한 사람도 있고, 여전히 현관 마루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을 존중해야 합니다. 그들의 판단과 결정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이 바른 결정을 내리지 못해 엉뚱한 방에서 허우적거리거나, 혹은 현관 마루에서 한 발짝도 떼지 못한다고 판단될 때, 여러분이 할 일은 하나입니다. 그들을위해 기도하며 하나님의 빛이 그들에게도 비치기를 기원하는 것입니다. 결코 인간적 잣대로 그들을 판단하는우를 범하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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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곡>에서 ‘지옥inferno (인페르노)‘은 9개의 원으로 이루어져 제1원은 넓고 아래로 내려갈수록 점점 좁아지는 마치 팽이 같은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지옥의 심층부로 내려갈수록 죄는 깊어지고 커집니다. 반대로올라갈수록 죄는 가벼워집니다. 지옥의 구조는 단테의 여행에서 매우 중요한데, 오르기 전에 먼저 내려가야 한다는 진리를 배우게 됩니다.다시 말해 지옥으로의 하강은 신神을 향해 상승하기 위한 훈련입니다.
‘내려감‘은 절대자를 향한 길이며 회개의 걸음입니다. 내려가야만 다시올라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놀랍게도 신의 공의와 사랑의 균형을 지옥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플라톤에 따르면 인간의 영혼은 원래 이데아의 세계에 거주하며 살았습니다. 그 영혼들은 이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이데아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자기 안에 지니고 있었어요. 그러나 영혼이 육체와 결합하여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감각에 의해 획득되는 정보에 의해 영혼은 오염되기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이데아의 세계에 대한 지식을 잃어버리게 되었죠.그래서 인간은 동굴 속에 갇혀 쇠사슬에 묶인 채로 동굴의 벽에 비친 그림자를 ‘실재‘로 착각하며 살아가게 되었어요. 이것이 플라톤의 생각입니다.
플라톤의 인간은 내부에 이데아의 세계에 관한 정보를 이미 지니고 있기에, 감각적 정보에서 벗어나는 능력을 길러 영혼 속에 든 이데아의 세계를 회상해 내게 되면 진정한 진리를 얻을 수 있지요. 이것을 일명 상기설(想起說)이라고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관념론자인 스승에 대비되는 자연주의적인 철학자로, 현실적, 경험적인 면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사물의 본질이 개개의사물과 분리되어 이데아의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개개 사물 속에 내재되어 있다는 실재론 주장했어요. 모든 사물은 지니고 있는 목적(형상)을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변화해 가는 존재로 보았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이성은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며, 오랫동안 도덕적 습관을 훈련시키고 이성적 능력을 계발시켜야 비로소 얻을 수 있는것입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교육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동양에선 가위바위보를 합니다. 가위바위보의 동양은 니체의원회귀‘와 인도의 윤회 ‘처럼 순환하죠.
가위바위보는 확률적으로도 우연성을 바탕으로 한 겨루기여서 절대 승자는 없고 승부가 거의 균등하다고 합니다. 삼항 순환인 것이죠이 삼항 순환을 이야기하자면 피시스 Physis, 노모스 Nomos, 세미오시스 Semiosis를 이야기 안 할 수 없네요. 각각을 자연계, 법칙계, 기호계라고 설명할 수있어요.

피시스는 자연법칙입니다. 세계 어디든 물은 0도에서 얼고 100도에서 끓지요. 그러나 법률이나 제도의 노모스는 국가와 시대에 따라 다르고 바뀝니다. 피시스와 노모스 중간에 있는 세미오시스는 언어와 같이 하룻밤 사이에 바뀌는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영구불변의 자연법칙도 아닙니다. 세미오시스는 상상력의 세계, 예술의 세계를 뜻해요.

피시스의 관점에서 보면 중국은 대륙, 일본은 섬, 한국은 반도의 나라입니다. 대륙(중국)은 개체를 초월하는 생명력을 갖고 세계를 감싸 안는다는점에서 가위바위보의 ‘보‘에 가깝죠.
일본은 무사가 지배하는 나라여서 주먹은 힘을 상징합니다. ‘바위‘와 비교할 수 있어요. 대륙과 비교해 여유보다는 긴장, 확대보다는 축소지향인것이죠.

한반도의 ‘가위‘가 있어야 비로소 다이내믹한 순환운동이 일어납니다. 바위도 섬도 아닌, 또는 대륙이기도 하고 바다의 섬이기도 한 독특한 다양성과 통합성이 ‘반도 문화‘를 이루었다고 봐요.
가위가 정상적으로 움직이면 동아시아는 선형적인 이항대립의 시스템에서 벗어나 원형적인 순환과 생성의 시스템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비유로 이야기하자면, 대립하는 물과 불 사이에 가마솥이 있으면 맛있는 음식을 만들 수 있어요. 한국이 가마솥 역할을 수행하던 시기에는 동아시아에평화가 찾아오고 아름다운 문화의 꽃이 피어났죠 가위가 제 역할을 못하면 동북아는 불행했어요.
현재 북한은 중국의 대륙문화의 연장선상에 있어 대륙의 나라로 변했고,남한은 인공적인 섬나라가 되어 해양 문화의 영역으로 전환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한반도 분단은 한민족의 비극을 넘어 동북아시아 전체의 비극이기도 합니다.

콧물도 나면서 배도 아픈 병이 어떤 병인지 나는 의사가 아니라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선입견 때문에 3초를 더 듣지 않아서 의사는 환자의 증상하나를 놓치고 오진을 하게 되는 겁니다. 이게 패러독스, 아이러니예요재미난 이야기가 하나 있는데요. 평생 동안 영화를 딱 몇 편밖에 보지 못한 시골 사람이 영화관 간 거예요.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사자가 나와서 울부짖는 것 같은 MGM 영화사의 로고 영상, 그러니까 그 영화 제작사의 상표가 나오니까 이 시골 사람이 이렇게 말하더래요
"어, 이거 나 본 영환데."하고는 영화관에서 나와 버렸다는 이야기예요

전에도 MGM 영화사에서만든 영화를 보고 동일한 영상을 본 적이 있는 모양이지요. 이 이야기에사람들은 웃겠지만, 사실 대부분의 사람이 일상적으로 하는 일이 이와 같습니다. 물건을 보지 않고 상표만 보고 어떤 물건을 구매할 때가 있어요그런 사람들이 있으니 가짜 물건에 상표만 붙여놓고 파는 사람들도 있어요

어니스트 헤밍웨이 Ermest Hemingway (1899~1961)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간이바로 스테레오타입 Stereotype의 고정관념에 빠진 경직되고 정형화된 인물입니다. 의미를 추론할 줄 모르는 무지몽매한 인간이죠. 소설에 등장하는 인간은 신을 부르기는 하지만 신의 도움에 의존하거나 기대지 않습니다. 세상에 버려진 미아迷兒 같은 존재들입니다.

노인과 바다》에서 산티아고 노인은 거대한 마를린치과의 물고기)과 24시간의 사투 후에 "나는 신앙심이 없어. 성모 마리아보다는 우리하나님 아버지가 말하기에 더 수월하지"라고 생각하면서 그냥 기계적으로 하늘에 도움을 청할 뿐입니다. 48시간 후에 그는 "이제 저놈이 너무나멋있게 저에게 다가옵니다. 하나님, 제가 저놈과의 싸움을 해낼 수 있도록도와주십시오. 나중에 우리 하나님 아버지를 백 번이나 부르겠으며 성모마리아님도 백 번이나 부르겠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싸움 중이라서) 말할수 없습니다. (..…) 나중에 말하겠습니다"라고 합니다. ‘
이것은 신의 능력을 믿지 않는 자의 말투죠 노인은 무엇이 자신을 패배하게 했는가를 자문한 후 "아무것도 없어 ・・・ . 내가 너무 멀리 갔었어"

일종의 인지부조화이자 자기합리화입니다. 먹을 수 없는 포도에 대해, "저 포도는 신 포도일 거야"라고 체념하며 합리화하는 식이죠헤밍웨이에게 인간은 패배할 수밖에 없는 운명임을 알면서 회피하지 않고 대결하는 인물입니다. 상어와의 무망無望한 대결을 그저 감내하고 외롭게 싸울 뿐입니다. 그래서 비극적입니다. 정말 신의 바짓가랑이에 매달리는 심정으로 간절하게 싸웠다면, 버텼다면 자신에게 닥친 비극은 반전되지 않았을까요? 고통을 그저 되새김질하는 것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각에서 말이죠. 세계적으로 가장 공명이 잘 되는 명품 바이올린은 ‘무릎 꿇은 나무‘로 만든 악기라고 합니다. 이 나무는 로키산맥의 해발 3000m 높이의 수목 한계선인 지대에서 자라는데 눈보라가 얼마나 심한지 생존을위해 무릎 꿇고 사는 삶을 배웠다고 합니다. 얼마나 놀라운 반전인가요?

무릎 꿇은 나무‘를 생각하니 정호승 시인의 <나무에 대하여>라는 시가떠오릅니다. 시인은 곧은 나무보다 굽은 나무가 더 아름답고 더 사랑스러우며 함박눈도 더 많이 쌓인다고 말합니다. 고통의 무게를 견딜 줄 알기에 굽은 나무는 그림자가 구부러지는 것도 싫어하지 않아요 눈에 보이는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세속적인 편견,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그 너머에존재하는 실체와 마주하고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밤길 홀로 걸을 때에도 그림자에 부끄러움이 없어야 하고, 홀로 잠잘 때에도이불에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獨行不愧影 獨寢不愧衾.
남이 보든 안 보든 스스로 삼간다는 이 신독 • 신기독, ‘나와 하늘‘이서로 연결돼 있음을 뜻합니다.
‘나(개인)와 사회‘, 다시 말해 ‘사회 법률 제도‘가 나와 연결된 것이 아니라 ‘나와 하늘‘이 직접 연결돼 있습니다. ‘나와 하늘‘이 주고받는 것이지 중간에 ‘사회와 법률‘이 개입할 순 없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손가락질을 받아도 법을 어겨 혹독한 처벌을 받아도 ‘나와 하늘‘ 앞에 떳떳한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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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반세기 동안은 이성의 각성으로 잠시 억눌러져 있었을 뿐이다. 어떤 계기이든이성의 갑옷이 스르르 벗겨지는 날에는 그 본능이 꿈틀대며불쑥 올라온다. 그래서 이런 부족 본능이 제일 좋아하는 것은 방심이며 가장 사랑하는 것은 전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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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나 왕이 되는 것이 아니라 천天 하늘의 힘과 지地 땅의 힘 거기에 인ㅅ, 인간의 힘까지 아우를 수 있는 사람만이 왕이되고 리더가 될 수 있다는 뜻이지요.
고대 중국에서 이상적 통치자의 모습은 성인이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내성외왕內聖王(안으로는 성인이면서 밖으로는 군주)으로 개념화하였지요. 성인의 성자는 ‘耳(귀)+(드러내다)‘으로 이뤄져 있는데, 성인은 귀(들)를 중시한 존재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무언가를 듣는다는 경청敬聽의 의미는 서로 공감共感한다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자연과 하나가 되는 나, 즉 물아일체物我一體를 지향합니다.

사막에서 살아가려면 물을 밖에서 구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낙타처럼 혹은 선인장처럼 자신의 몸속에 수분을 저장해 두어야 하죠. 자신의 갈증을자신의 체액으로 적셔주는 외로운 그 작업에 익숙해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막에서 자라는 생물들은 타자로부터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으며아무런 보상도 받으려 하지 않습니다. 이 단절이 오히려 그들의 내면을풍요롭게 만듭니다.

그럼, 낙타는 무슨 꿈을 꿀까요? 열사의 모래밭을 지날 때 속눈썹이 긴 낙타는 결코 하늘을 쳐다보는 일이 없습니다. 낙타의 꿈은 그의 등 위에 달린 혹 속에 있어요. 자신이 키워온 그 혹이 자신의 하늘인 것입니다. 거기에서 구름이 흐르고 거기에서 비가 내립니다. 거기에서 상상력이 무르익습니다. 거기에서 시가 나오고 소설이 나옵니다.

철학적 인간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불행에 좌절하지 않는 희망입니다. 희망처럼 좋은 물건이 없습니다. 희망이 있으면 나에게 나도 몰랐던 재능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희망은 철학을 뛰어넘습니다. 어쩌면 희망이 있다면 철학이란 상품이 더는 필요 없을지 모릅니다. 희망은절망을 몰아내지만 희망은 ‘소유‘가 아니라 ‘존재‘입니다. "내 것이냐, 네것이냐를 따지는 소유의 희망은 가짜 희망입니다.

사실 포기해버린, 이미 지쳐 버린 29마리의 사냥개들은 사슴을 직접 보고달린 게 아니었어요. 앞의 사냥개를 쫓아 덩달아 뛰었을 뿐이죠. 맨 먼저달렸던 한 놈의 사냥개만이 사슴을 직접 봤기에 끝까지 뛰어갔던 겁니다.
희망도 마찬가지입니다. 희망은 절대로 쓰러지지 않습니다. 사슴을 발견한 사냥개만이 끝까지 쫓아가듯이, 희망을 품은 사람은 어떤 난관에도 쓰러지지 않습니다?

7많고 많은 희망가 중에서 미겔 데 세르반테스 Miguel de Cervantes쓴 《돈키호테 Don Quixote》(1605)에 나오는 이 시만큼 기막힌 희망가가 또있을까 싶습니다. ‘불가능한 꿈속에서 사랑에 빠진다‘는 노랫말에 돈키호테의 황당무계하지만 아름다운 이상주의가 담겨 있습니다.
불가능한 꿈을 꾸는 것.
무적의 적수를 이기며,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디고
고귀한 이상을 위해 죽는 것.
잘못을 고칠 줄 알며,
순수함과 선의로 사랑하는 것.
불가능한 꿈속에서 사랑에 빠지고,
믿음을 갖고, 별에 닿는 것.

라만차의 시골 지주 ‘알폰소 키하노‘는 핍박받는 이의 편에 서야겠다고어느 날 다짐하고는, 자신의 이름을 ‘돈키호테‘라고 고치고 ‘산초 판자‘와 모험을 나섭니다. 영어의 ‘키호티즘 Quixotism‘이라는 단어가 있어요. 자신의 꿈과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저돌적으로 나아가는 성품이나 경향을일컫는 말인데 돈키호테에서 파생되었죠. 풍차를 거인으로 생각하고, 양떼를 교전 중인 군대로 생각하며, 포도주가 든 가죽 주머니를 상대로 격투를 벌인 돈키호테를 떠올려보세요. 여행이 이렇게 어처구니없고 황당할지라도, 그는 ‘오직 믿음을 갖고, 별에 닿기 위해‘ 길을 떠납니다.

훗날 소설 《돈키호테>를 각색한 뮤지컬 <라만차의 사람Man of La Mancha〉에서 극중 돈키호테가 부르는 <불가능한 꿈Impossible Dream>은 앞서 시에서 느껴지는 장중함을 넘어 달콤하며 낭만적인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이루지 못한 꿈을 꾸고쳐부수지 못할 적과 싸우며견디지 못할 슬픔을 견디고용감한 사람도 가기 두려워하는 곳에 가고순수하고 정결한 것을 사랑하고잡을 수 없는 저 별을 잡으려고 손을 뻗는 것,
이것이 나의 여정이다.

아무리 희망이 없어 보여도아무리 길이 멀어도정의를 위해서 싸우고천상의 목표를 위해서는 지옥에 가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이 영광의 여정에 충실해야 나 죽을 때 평화로우리그리고 이것 때문에 세상은 더 좋아지리아무리 조롱받고 상처 입어도한사람이라도 끝까지 노력한다면잡을 수 없는 저 별을 위해

나그네에게 신념은 버려야 할 짐일지 몰라요 신념에 사로잡혀 답이 정해져있는 사람과는 대화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하고 있는 대화가 중요한 것이죠 길 떠난 나그네에게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은 달라야 해요그래서 오늘이 제일 아름답고, ‘지금 여기‘가 중요한 것이죠. 오늘도 내일도 변하지 않는 신념을 가진 사람은 신뢰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신념은 위험합니다. 관점에 따라 시간에 따라 변하는 게 인간사인데, ‘예스‘와‘노‘만으로 세상을 판단하기 때문이에요. 메이비 maybe를 허용해야 합니다.
‘maybe‘ 덕분에 우리는 오늘을 살고 내일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신념에 기대어 산다는 건 시간낭비가 아닐까요? 신념 속에 빠져 거짓 휴식을 취하지 말고 변화무쌍한 진짜 세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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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죽음이 "생애 말기신체, 정서, 사회 기능에 대한 개인의 기대와 같이 인식적 차원에서 죽음에 접근하는 것이라면, 웰다잉은 "존엄한 죽음을 위해 개인이 적극적으로 취해야 할 삶의 태도와 행동적 차원에서 죽음에 접근하는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말이다.
그 이론적 정의는 웰다잉이 무엇인지 말해주는가? 애석하게도 그렇다고 답하기 어렵다. 인식적 차원이 부각된 좋은 죽음과 실천적 차원이 강조된 웰다잉을 구별해서 다루는 게 의미가 있는지 의문이다. 앞서 인용한 이론적 정의는 웰다잉에관한 어떤 사소한 것도 놓치지 않겠다는 야망을 드러내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웰다잉이 무엇인지 밝히는 데 실패하고만다. 그 정의 안에 ‘죽음‘ 대신 다른 단어를 넣어도 말이 된다.

웰다잉이 강조하는 좋은 죽음(표방)과 능동적인 죽음 준비(실천)라는 ‘가치의 틀‘은 죽음을 각종 기술로 통제할 대상으로만들고, 정작 죽음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불평등한 삶의 조건에는 주목하지 못하게 한다. 학력, 직업, 소득, 지역 등에 따른죽음의 불평등성을 잘 살고 잘 죽어야 한다‘는 윤리적 언어 표현으로 가리거나 정당화한다. 웰다잉이 상정하는 자기의 죽음을 능동적으로 준비하는 개인은 자기 주도적으로 삶을 계획하고, 관리하고, 계발하고, 실현하는 ‘자기 안에 갇힌 주체‘로 보인다. 그에게 정책, 제도, 법률, 또 가족, 친구, 동료 등의 이른바 사회적 관계는 잘 죽는 것과는 별 상관이 없는 일로 치부되거나,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존재로 여겨지지 않을까?

오늘날 웰다잉의 유행은 그만큼 사람들이 잘 죽지 못하고있다는 말이자, 죽음이 개인의 노력으로 대비해야 하는 일이됐다는 방증이다. 마치 죽음이라는 불행을 막는 주술이 등장한 것 같다. 우리는 잘 죽는 것만 고민하면 될 정도로 좋은 삶을 살고 있는가? 그렇게 사는 건 불가능한 일이니 잘 죽는 거라도 고민하는 것일까? 웰다잉은 우리에게 죽음에 관한 두툼한 언어와 상상력을 촉구한다.

동사 몽테는 ‘오르다’를 의미한다. 즉 인간과 비인간(동식물, 사물,
물질, 신 등)이 아래에서 위쪽으로 움직여 간다는 뜻이다. 이러한 물리적 이동은 인간 사회에서 상징적 의미를 획득한다. 가령 높은 지위를 얻고, 이동 수단을 타고, 주변에서 중심으로 가고, 세력이 왕성해지고, 감정이 치솟고, 소리를 내고, 의례에서 향이 피어나고, 해와 달이 뜨고, 수치 따위가 늘어나고, 공들여 준비한 일을 발표하고, 벽 등에 액자 따위를 걸고, 명성이커지는 것을 표현할 때 동사 몽테를 쓸 수 있다. 즉 몽타주(혹은오름)는 ‘특별한 변화‘를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의 신체적조건을 벗어나는 일, 중력을 거스르는 일, 보이지 않던 것을 보게 하는 일, 들리지 않던 것을 듣게 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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