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죽음이 "생애 말기신체, 정서, 사회 기능에 대한 개인의 기대와 같이 인식적 차원에서 죽음에 접근하는 것이라면, 웰다잉은 "존엄한 죽음을 위해 개인이 적극적으로 취해야 할 삶의 태도와 행동적 차원에서 죽음에 접근하는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말이다. 그 이론적 정의는 웰다잉이 무엇인지 말해주는가? 애석하게도 그렇다고 답하기 어렵다. 인식적 차원이 부각된 좋은 죽음과 실천적 차원이 강조된 웰다잉을 구별해서 다루는 게 의미가 있는지 의문이다. 앞서 인용한 이론적 정의는 웰다잉에관한 어떤 사소한 것도 놓치지 않겠다는 야망을 드러내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웰다잉이 무엇인지 밝히는 데 실패하고만다. 그 정의 안에 ‘죽음‘ 대신 다른 단어를 넣어도 말이 된다.
웰다잉이 강조하는 좋은 죽음(표방)과 능동적인 죽음 준비(실천)라는 ‘가치의 틀‘은 죽음을 각종 기술로 통제할 대상으로만들고, 정작 죽음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불평등한 삶의 조건에는 주목하지 못하게 한다. 학력, 직업, 소득, 지역 등에 따른죽음의 불평등성을 잘 살고 잘 죽어야 한다‘는 윤리적 언어 표현으로 가리거나 정당화한다. 웰다잉이 상정하는 자기의 죽음을 능동적으로 준비하는 개인은 자기 주도적으로 삶을 계획하고, 관리하고, 계발하고, 실현하는 ‘자기 안에 갇힌 주체‘로 보인다. 그에게 정책, 제도, 법률, 또 가족, 친구, 동료 등의 이른바 사회적 관계는 잘 죽는 것과는 별 상관이 없는 일로 치부되거나,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존재로 여겨지지 않을까?
오늘날 웰다잉의 유행은 그만큼 사람들이 잘 죽지 못하고있다는 말이자, 죽음이 개인의 노력으로 대비해야 하는 일이됐다는 방증이다. 마치 죽음이라는 불행을 막는 주술이 등장한 것 같다. 우리는 잘 죽는 것만 고민하면 될 정도로 좋은 삶을 살고 있는가? 그렇게 사는 건 불가능한 일이니 잘 죽는 거라도 고민하는 것일까? 웰다잉은 우리에게 죽음에 관한 두툼한 언어와 상상력을 촉구한다.
동사 몽테는 ‘오르다’를 의미한다. 즉 인간과 비인간(동식물, 사물, 물질, 신 등)이 아래에서 위쪽으로 움직여 간다는 뜻이다. 이러한 물리적 이동은 인간 사회에서 상징적 의미를 획득한다. 가령 높은 지위를 얻고, 이동 수단을 타고, 주변에서 중심으로 가고, 세력이 왕성해지고, 감정이 치솟고, 소리를 내고, 의례에서 향이 피어나고, 해와 달이 뜨고, 수치 따위가 늘어나고, 공들여 준비한 일을 발표하고, 벽 등에 액자 따위를 걸고, 명성이커지는 것을 표현할 때 동사 몽테를 쓸 수 있다. 즉 몽타주(혹은오름)는 ‘특별한 변화‘를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의 신체적조건을 벗어나는 일, 중력을 거스르는 일, 보이지 않던 것을 보게 하는 일, 들리지 않던 것을 듣게 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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