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문화에 대해 ‘안다‘는 것은 두 가지를 의미한다. 하나는 그 문화에서 살아지는 일상적인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런 일상적인 삶을 설명할 수 있는 개념적 도구들을 보유하는 것이다. 삶을 통해 개념을 확증하고 개념을 통해 삶을 해석하는 순환작업이 무수히 반복될 때, 그때 비로소 한 문화에 대해서 ‘안다‘고 할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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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분장한 모습을 흑인 비하로 몰아가는 형의 이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는 어떻게 해석이 되냐면 영구, 맹구라는 캐릭터는 자폐아들에 대한 비하로 해석될 수 있고, 예전에 한국에 시커먼스라는 오랫동안 사랑받았던 개그란 것도 있었어. 그럼 그것도 흑인 비하인 건가?

오늘날 중요한 변화의 하나는 그런 개그가 웃기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나도 어린 시절에 영구, 맹구, 시커먼스 연기를 보며 깔깔거리고 웃었다.
학교에는 그 연기를 너무나 잘 흉내내어 인기몰이를하던 친구들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제 더이상 그런 개그가 웃기지 않다. 그렇다고 이에 대한 불편함을 표시하기도 쉽지 않다. 잘못하면 그냥 웃고 넘길 일을 지나치게 예민하게 받아들여 확대해석한다는 말을 들을 수도 있다.
흑인 분장의 논란은 "도대체 왜 웃긴가?" 라는 상당히 심오하고적인 질문을 던져준다. 그리고 그 웃음을 차별로 연결시키는것은 과연 얼마나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이며 ‘확대해석‘인지에대해서도 생각하게 만든다. 웃자고 한 말을 우리는 가볍게 웃어 넘서야 할까? 아니면 정말 죽자고 달려들어야 할까?

최근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군 키워드인 혐오표현 (hate speech)은 약자들을 향한 언어유희의 현상으로 대표된다.
주로 인터넷 커뮤니와 포털사이트의 댓글을 통해 특정 집단을 향한 비하성 언어들이 만들어지고 유통되었다. "똥남아"(동남아시아인), "똥꼬충 (게이),급식충" (아동·청소년), "틀딱충"(노인), "맘충"(엄마) 등 사람을 벌레‘나 ‘똥‘에 비유하여 비인격화하는 말들이 등장했다. 무엇이든웃음거리가 된다면 괜찮다는 듯, 집단적 편견과 적대감이 봉인해제되었다.

우리는 누구를 향해 웃는가? 토머스 포드 등은 실험을 통해 대상집단에 대한 사회적 가치판단에 따라 사람들이 비하성 유머에 다르게 반응한다고 밝혔다.
테러리스트나 인종차별주의자와 같이 사회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하다는 합의가 있는 집단에 대해서는 이들을 비하하는 유머로 인해 잠재된 편견이 표출되는 효과가 크지않았다. 반면 무슬림, 게이, 여성과 같이 사회적으로 긍정적 태도와 부정적 태도가 혼재된 집단에 관해서는 이들을 비하하는유머를 보았을때 억눌렸던 편견이 표출되는 효과가 컸다.

예전에 한 식사 자리에서 나는 어느 로펌의 원로 변호사와 같은테이블에 앉은 적이 있다. 나를 비롯한 로스쿨 학생들 사이에서 그는 기분 좋은 큰 목소리로 이런 말을 했다. "여자는 공부 잘해봐야소용없어. 남자가 공부를 잘해야 큰일을 하지." 옆에 앉아 있던 학생들은 이 말을 유쾌한 웃음으로 받아넘겼고, 나도 그랬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그 일을 생각하며 뒤늦게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 말을 한 원로 변호사에게 화가 난 만큼 그 자리에서 웃는 모습을 보인 나 자신에게도 화가 났다. 그리고 다시는 그런 말에 웃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문제제기를 할 만큼 순발력이 없다면, 그런 상황에서 웃지 않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소극적 저항이라고생각했다.

한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 유머의 중요한 속성 중 하나는 청중의 반응에 의해 성패가 좌우된다는 점이다. 그러니 "누가 웃는가?"라는 질문만큼 "누가 웃지 않는가?"라는 질문도 중요하다.
웃찾사의 흑인 분장 사건처럼 웃지 않는 사람들이 나타났을 때 그 유머는 도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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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햇빛은 너무나 찬란하다.
차창을 스치고 지나가는 풍경은 모두 생명에의 환희에 차 있는 것만 같다. 아무 소망도 희망도 없는, 없다고 생각하는 최 여사 마음에 그러나 이상하게 삶에 대한 얇고 약한 것이지만 기쁨이 조금씩 되살아나는 것을 느낀다. 푸른 하늘과 햇빛이 푸른 가로수와 얼기설기 엮어진 전선, 사람이 아니라도, 그래서 더욱 배반하고외면하지 않는 그런 풍경에 최 여사의 마음은 젖어드는 것이었는지도모른다.
"저마다 괴로워했을 뿐이지. 누군가 한 사람만이라도 바보가 될 수 있고 신경이 둔할 수 있었다면 좀 잘 되어갈 수 있었을 것을……. "

"난 너가 나한테 반항을 하고 내가 신경질을 부리고 하던 그때가 더 좋았던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뭔지 허탈에 빠진 것처럼 마음을 가눌 수가 없구나. 사람이란 불행하는 행복하든 싸움을 할 수 있는 대상이 있어야 하나 봐. 싸움을 할 때가 좋아 난 앞으로 뭘 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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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그렇지. 서랍을 닫았다 열어본 것뿐이야. 영혼이니 뭐니 해도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이것, 새삼스런 일인가? 인생에 욕심이 많은 사람들은 가끔 이런 곳에 와서 구경을 하고 가야 해. 슬프다, 외롭다는 말이 얼마나 쑥스러운 것인지 알게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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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음들의 조합이고 목젖과 혀로 음의 파열에서 생기는 다양한 음성인데, 이는 알라가 인간의 신체기관과 혀를 빌려 창조한 것이다.
인간은 생각을 말로 타인과 교류할 수 있는데 이것이 사고를 교류하는 첫 단계이다. […] 보이지 않는 곳에 존재하는 이, 몸이 멀리 떨어져 있는 이, 후세의 사람, 동시대인이 아니어서 만나 본 적도 없는 사람에게 자신의 생각을 보내는 것이 두번째 단계이다. 이것은 글의교류로 이루어진다. (이븐 칼둔, 『무깟디마 2, 김정아 옮김, 소명, 2012,
386쪽)

누구든 천지인의 이치를 깨닫게 되면, 그 순간 바로 진리의 전령사가 된다. 얇은 곧 교 동이므로, 그 파동에 몸을 맡기게 되어 있다.
서양에서는 문자의 역할이 훨씬 두드러졌다. 유대교는 특히
‘책의 종교‘였다. 이슬람의 경전인 코란은 그 의미 자체가 읽어라!‘라는 뜻이다. "신이 세계에 내려 준 것은 글이다. 아담이 동물에 처음으로 이름을 부여했을 때, 신은 단지 가시적이고 말없는 표지를 읽게 했을 뿐이다. 율법 역시 인간의 기억이 아닌 석판에 새겨졌다. 그리고 참된 말씀을 재발견해야 하는 것은 바로 책에서이다.

비주네르와 뒤레는 둘다 거의 동일한 용어로, 자연에서는 돌이고 어쩌면 인간의 지식에서조차, 글이 말보다 언제나 선행했다.
고 단언하곤 했다."(푸코, 『말과 사물』, 이규현 옮김, 민음사, 2012, 75쪽)말과 글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우선하는가는 핵심이 아니다. 말과글은 늘 서로 갈마든다. 때론 유연하게 어울리고, 때론 심오하게맞서면서. 하지만 그 본질은 동일하다. 천지인을 연결하는 가장 보편적이고도 신성한 행위라는 점에서 말이다.
이 우주적 차원의 SNS는 무한한 변주 속에서 스마트폰과 함께 ‘정보, 검색, 페북, 카톡‘ 등의 방식으로 우리에게 도래했고, 또그 어디론가 흘러갈 것이다. 그리고 그 흐름은 결코 멈추지 않을것이다. 존재와 세계가 완벽하게 ‘통하는‘ 그 순간까지..

나무는 직립한다. 뿌리는 땅속 깊은 지하세계를, 가지는 하늘을 향해 뻗어 나간다. 사람의 형상과 닮았다.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존 재라는 점에서 상통한다. 그래서인가. 나무는 하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역할을 자임했다. 태곳적 숲은 신성한 영역이었다. 나무는샤먼들에게 영감을 주는 원천이었다. 문명이 시작되자 나무는 지식을 전달하는 전령사가 된다. 처음엔 죽간으로, 그다음에는 종이로, 종이가 발명된 지 1,900여 년, 문자는 종이와 만나서 책이 되었다. 문자를 통해 지식과 지혜를 더 길게, 더 멀리 전달하고자 하는 열망은 마침내 책을 창조했다. 나무가 인류에게 선사한 최고의 선물 이다.

나무는 오행상 목(木)기에 해당한다. 목기는 태양과 동람, 그리고 교육을 상징한다. 배운다는 것은 곧 책을 읽는다는 지을 의미한다. 나무가 아니었다면, 종이가 없었다면, 지혜는 여지히 허공을 맴돌고 샤먼이나 가객의 기억을 통해 말로 전승되고 있을 것이다. 말이 문자로 변이되고, 그것이 다시 종이를 만나 책이되면서 지혜는 듣기에서 읽기로 변주된다. 배운다는 것은 듣고 읽는 것에서 시작한다. 듣기에서 읽기로 전환되면서 지식은 양적으로 폭발하고 질적으로 변이한다. 샤먼이나 사제들 혹은 엘리트라는 지배계급에서 점차로 보통사람들 속으로 스며들었다. 지나가는 누구에게나 그늘을 허락하고 쉼터를 허락하는 나무, 그리고 그나무들의 집합체인 숲이 그러하듯이, 인도문명이 영성탐구의 센구자가 된 까닭도 북인도 지역을 장식하는 숲으로 인해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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