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타깝게도 지금은 많이 무감각해졌지만, 예전만 하더라도 나는 정직하게 삶을 살아가는 동시에 진정으로 바라는 바를 자유롭게 추구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많이 고민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누리는 사람은 대부분 ‘가난한’ 문명인인 데 반해, 이런 것을 누리지는 못해도 원주민은 대부분 ‘풍요로운’ 원주민인 이유가 대체 무엇일까? 만약 문명이라는 말이 개선된 상태의 인간 삶을 칭하는 것이라면(나는 그 말이 맞다고 보지만, 오직 현명한 사람만이 문명의 이점을 이용할 수 있다.), 문명은 비용을 더 들이지 않고도 인간에게 더욱 나은 주거 여건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비용이란, 내가 삶이라 칭하는 것과 같은 개념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무언가를 얻는 대가로 지금 당장이든 장기적으로든 그에 해당하는 만큼의 삶을 지불해야 한다.

보유하고 있어 봐야 얻게 되는 이득이란, 개인의 관점에서 봤을 때, 기껏해야 자신의 장례비용 정도 치르는 용도밖에는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인간은 자신의 장례를 자기가 직접 치를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미래를 대비하는 성향은 바로 문명화된 인간과 원주민 사이의 중요한 차이점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우리가 문명화된 삶을 제도화해서 개개인의 삶 또한 대부분 그 제도에 흡수시킨 이유는 의심의 여지없이 인류의 삶을 보존하고 완성시켜 모두에게 이득이 되도록 하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나는 현재 그 이익이 얼마나 큰 희생을 치르면서 얻어지고 있는가를 밝히려 한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가 어떠한 불이익으로 고통받는 일 없이도 그 모든 이득을 얻으며 살아갈 방법이 있다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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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감당할 수 없는 진리를 가슴에 품었던 것을 후회하네. 내가 지킬수 없는 진리를 버리기로 한 것일세. 그것이 아무리 옳은 것일지라도 내가 지킬 수 없는 것이라면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어. 진리는 내가 지킬 수 있을 때만 진리일 뿐이고 그럴 수 없을 때는 진리가 아닌것일세. 그런 점에서 서학은 내게 진리가 아니네..
서학이 말하는 것이 옳지 않아서가 아니라 내가 그 진리를 지키고 실행할 수 없기 때문에 서학을 버리기로 했네. 지킬 수 없는 진리를 부여잡고 번민하고 끙끙거리고 울부짖고 스스로를 학대하는 짓을 더이하고 싶지 않아. 그래서 나는 단호하게 천주를 부인하네.
그래도 또 묻고 싶은가? 왜 천주를 버렸느냐고?
자네가 다시 물으니 다시 답을 함세. 힘이 들었네. 천주를 믿는 일이무척 힘들었어. 한 번 믿으면 되는 것인 줄 알았어. 한 번 믿는다고 고배하면 그것으로 끝이라 생각했네. 그런데 그렇지가 않았네. 신앙은 내게끝없는 결단을 요구했네. 신앙은 내게 끝없는 용기를 요구했네, 신앙은내게 끝없는 희생을 요구했네. 신앙은 그 결단과 희생과 용기를 밑거름삼아 성장하는 것이었어. 그러나 나는 신앙이 요구하는 것을 계속 내줄능력이 없었네. 아무나 천주를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어. !
조선처럼 신앙의 뿌리가 없는 나라에서 믿는 일이란 지극히 고통스럽고 어려운 일이었네. 지쳤어. 그 고통을 계속 이겨 나가는 일이 버거웠어.
끝이 보이지 않는 수난의 길을 계속 갈 힘이 없었네. 그래서 나는 포기했어. 신앙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진 것이지.
자네가 아는 것처럼 나는 몇 번이나 천주를 부인했네. 그리고 어떤 때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어떤 때는 죽을상을 지으며 교회로 돌아오곤 했지. 배교와 회개를 그렇게 몇 번이나 반복했어. 그러는 사이에 내 육신과 영혼이 상처 입고 너덜너덜해졌네. 내 양심이 뭉개졌어. 양심이 철저히 뭉개지더라고, 그 행동을 반복할 수가 없네. 더이상 배교와 회개를바보하고 싶지 않아. 더이상 버틸 힘이 없다는 것을 깨끗이 인정하고 백기를 던지네. 나는 정직한 배교자로 남으려네

... 맡기 싫다고 피할 수도 없었고 맡고 싶다고 맡을 수 있는 일도 아니었지. 그것은 절대자의 의지에 달린 것이지 사람의 뜻으로 될 일이 아니라고 그때는 믿었네. 어쨌든 우리는 그 일에 정성을 다하고 마음을 다했네. 그점은 우리 서로 인정하기로 하세. 우리는 서품 받지 않은 임시신부였지만제대로 된 신부로 살려 했고 사제답게 처신하려고 애썼네.
그때 처음으로 사는 보람을 느꼈어. 하늘에 계신 천주와 가까워지는듯했고 주님의 은총이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것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네. 나의 은밀한 기도를 귀 기울여 들어 주시고 내 어깨 위에 다정하게 손올려 위로해 주시는 절대자의 존재를 나는 여러 차례 실감할 수 있었어..
늘 감시의 눈을 의식하며 살아야 했기에 몸은 고단하고 항상 신경이 곤두서 있었지만 행복했네. 사람이 주는 행복과는 전혀 다른 복을 주시겠다고하신 주님의 말씀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지..
나는 주님으로부터 받는 위로와 영적 보상은 물론이고 친구와 교우들로부터 풍성하고 분에 넘치는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었다네. 내가 누군가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 그것이 권력의 맛이란 것을 그때는 미처 몰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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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지체할 수가 없구나.
모든 것을 끌어들이는 저 바다가 나를 부르니, 나도 이제 뱃길을 떠나야 하리.
더 지체하는 것은, 비록 시간이 밤새도록 불탄다 하더라도,
그대로 얼어붙고 응고되고 틀에 갇히고 마는 것.
여기 있는 모든 것을 다 가져갈 수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련만, 어찌 그것이 될성부른 일인가?
목소리도 허공을 날 제, 자기에게 날개를 달아준 혀와입술을 함께 가지고 가지는 못하는 법,
독수리도 태양을 가로질러 날 제, 그 보금자리를 두고혼자일 수밖에 없는 것.

사랑은 소유하지도 않고 또 소유되지도 않습니다.
사랑은 사랑으로 넉넉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할 때는 "하느님이 내 마음 안에 계시다"라고 하지 말고, 내가 하느님 마음 안에 있다"라고 하십시오.
여러분이 사랑의 흐름을 좌우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에게 사랑할 자격이 있음을 알게 되면,
오히려 사랑이 여러분의 흐름을 좌우합니다.
사랑은 스스로를 충만하게 하는 일 말고는 다른 소망 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사랑을 하면서 다른 소망을 가져야 할 필요 가 있다면 그것이 이런 소망이 되게 하십시오.
녹아서 밤 이슥도록 자기의 가락을 노래하며 흐르는시냇물처럼 되는 것.
다정도 병일 수 있음을 아는 것.
여러분 자신의 사랑을 깨달음으로 인해 상처받는 것,

류트의 줄들이 비록 같은 노래로 함께 울릴지라도
모두 각각 혼자이듯이.
서로 마음을 주십시오.
그러나 그 마음을 붙들어놓지는 마십시오.
저 위대한 생명의 손길만이 여러분의 마음을 잡아둘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함께 서십시오. 그러나 너무 가까이 서지는 마십시오.
성전의 기둥들도 서로 떨어져 서 있고,
참나무 삼나무도 서로의 그늘 속에서는 자랄 수 없기때문입니다.

그 내일이라는 것, 성지로 가는 순례자를 따라가는 개가 어디서 얻은 뼈다귀를 모래에 흔적도 없이 묻어 둔들그 내일이 이 지나치게 사려 깊은 개에게 무슨 의미가있겠습니까?
필요함이 아니라 필요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란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우물이 물로 가득한데도 목마름을 두려워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결코 가실 수 없는 목마름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은 보통 말합니다. "주기는 하겠지만, 받을 자격이 있는 이에게만"이라고.
여러분 과수원의 과일 나무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초장의 가축들도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냥 주면서 삽니다. 움켜쥐고 있는 것은 멸망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받는 이들이여, 사실 여러분은 모두 받는 이들이지만 신세 진다는 부담감을 갖지 마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은 스스로에게나 주는 이에게 멍에를 씌우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가 준 것을 날개 삼아 그 준 이와 함께 날아오르십시오.
여러분이 신세 진 것에 대하여 지나치게 마음을 쓰는것은 모두 그냥 주는 마음을 가진 대지를 어머니로 모시고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있는 그 준 이의 너그러움을 의심하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삶은 충동이 없을 때 실로어둠이고,
모든 충동은 앎이 없을 때 맹목적이 되고,
모든 맑은 일이 없을 때 허망한 것이 되고,
모든 일은 사랑이 없을 때 공허하게 되고,
여러분이 사랑으로 일할 때 스스로에게, 서로에게, 결국 하느님에게 여러분을 묶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일을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사랑하는 이가 그 천으로 옷을 해 입을 것처럼 여러분 마음으로부터 자아낸 실로 천을 짜는 것.
여러분의 사랑하는 이가 그 집에 들어가 살 것처럼 정성을 다해 집을 짓는 것.

기쁠 때는 여러분의 마음 깊이를 들여다보십시오. 그러면 지금 기쁨을 주고 있는 것이 바로 지금까지 슬픔을주던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슬플 때도 다시 여러분의 마음 깊이를 들여다보십시오. 그러면 사실 지금까지 즐거움이었던 바로 그것 때문에 지금 울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중 더러는 "기쁨이 슬픔보다 좋다"라고 하고또 더러는 "아니다. 슬픔이 기쁨보다 좋다"라고 하십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단언합니다. 이 둘은 떨어질 수 없다고.
이 둘은 함께 옵니다. 그중 하나가 여러분과 함께 식탁에 앉아 있을 때, 다른 하나는 여러분의 침대에서 자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진실로 여러분은 슬픔과 기쁨 사이에 걸려 있는 저울입니다.
비어 있을 때만 고요와 평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보물을 지키는 자가 그의 금과 은을 달기 위해 여러분을 들어 올릴 때 여러분의 기쁨과 슬픔은 오르락내리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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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길이 서오릉 가는 길 틀림없지?" "네. 일루 곧장 가면 서오릉이에요." …… "우리도 서오릉에 가는 길이에요."
버스 종점에서 반쯤 온 셈인가?" "아니요. 반두 채 못 왔어요." 이렇게 대화를 트고 문화동에서 온 아이들과 친숙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서오릉까지 간다. 쇠귀가 아이들 세계에 들어가 그들과 친해지는 비결은 두 가지다. 첫째, 아이들을 존중하고 그들 스스로 자기가나름 쓸모가 있는 사람이라고 인식하게 해 준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자기 효능감이 떠오른다. 둘째,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적극적으로 반응한다. 이런 비결은 비단 아이들에게만 해당하는 건 아니다.

당신은 유적지를 돌아볼 때마다 사멸하는 것은 무엇이고 사람들의 심금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를 돌이켜 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오늘 새로이 읽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라고 하였습니다. ‘과거’를 읽기보다 ‘현재’를 읽어야 하며 역사를 배우기보다 ‘역사에서 배워야 하기 때문이라고하였습니다. [나무야, 84】

고대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근본에 있어서는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는 확인은 매우 쓸쓸한 것이었습니다. 과거의 청산은 그만큼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생각이 그렇고,
완고한 현실의 구조가 그렇습니다. 떠난다는 것은 지금까지우리들이 쌓아 온 생각의 성(城)을 벗어나는 것일 뿐 아니라그 성(城)을 허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숲, 서문)

인간주의의 절정인 파르테논 신전을 바라보며 이제는 자기의소산(所産)인 문화와 물질 속으로 함몰해 가고 있는 오늘의 인간주의를 반성하게 됩니다. 우리는 현대라는 또 하나의 어두운 바다를 건너 바야흐로 새로운 인간주의를 모색해야 한다는생각이 들었습니다. 새로운 인간주의는 자연으로부터 독립하는 것도 아니며, 궁핍으로부터 독립하는 것도 아니며, 오히려인간이 만들어 쌓아 놓은 자본으로부터, 그리고 무한한 허영의 욕망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숲, 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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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은 ‘생각‘을 더 잘할 수 있게 만드는 방법이지만 실패를 헤치고 나갈 의지가 있을 때에만 행동이 효력을 발휘한다고 투오미넨이 설명했다.
"문제는 절대 나쁜 게 아닙니다. 문제는 좋은 거죠. 우리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도 마찬가지고요. 그런 문제와 장애물 하나하나가 우리를 만들어 가는겁니다."
오늘날의 학교들은 완벽주의에 맞게 합리화되어 있어서 시험 볼 때를 제외하고는 아이들이 시도하고 실패할 자유가 없다. 아이들이 창조적인 존재로 성장하기를 바란다면, 미래에는 아이들에게 더 많은 자유와 실패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 아이들 스스로가 그럴 수 있다고 믿으려면, 아이들이 시도해볼 수 있게 어른들이 내버려 두어야 한다. 그래서 투오미넨은 캐롤 드뢰에 의해 유명해진 개념인 성장형 사고방식을 언급하며, "학교에서 ‘
야 할 가장 중요한 능력은 성장형 사고방식이다"라고 말한다. 해보고말한다. 해보고, 해보고 또 해보게 하고, 더 나아질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 믿게 해야한다는 것이다.

진정한 학습 목표를 찾기가힘들었고, 엄격함이 전혀 없었다. 핀란드 방식은 뭐랄까, 다소 무질서해 보였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중요한 점이라는 사실을 금세 이해하게 됐다.
"실수를 해도 괜찮고, 바보 같은 질문을 해도 괜찮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이야기해요." 히덴키벤 종합학교 교감인 일포 키비부리 Ippo Kiriva"가 점심시간에 나와 대화를 나누며 이렇게 설명했다.

점심을 먹으며 교감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다른 선생님 한 분이대화를 거들었다.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를 주지 않으면 창의성이발달하지 않아요. 처음에는 아주 사소한 부분에서 자유를 허용하고, 나중에는 재량권을 더 많이 주고 있어요. 그리고 아이들이 아직 어리기 때문에 놀시간도 필요해요. 그래서 저희들은 아이들에게 45분 동안 꼼짝 않고 가만히앉아서 수업을 들어야 한다고 강요하지는 않아요. 여기 핀란드에서는 일곱살짜리 아이들이 그렇게 가만히 앉아 있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리고 장난기어린 분위기가 이런 접근 방식의 핵심이었다. 아이들이 숨을 쉴 공간이 있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기본적인 규칙은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런 규칙은 깊은 의미가 있어야 하고, 어른들의 삶과도 일지되어야 해요. 저희들은 그 나이에 어울리는 감정과 행동을 존중합니다."
일포 교감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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