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안경을 차에 두고 오셨나요? 아니면 시력에 문제가이 시가요? 벽 전체를 망쳐 놓은 저 잘못 놓인 벽돌 두 장이 보이지 않나요?"
그가 그 다음에 한 말은 그 벽에 대한 나의 시각, 나아가 나 자신과 삶의 많은 측면에 대한 나의 전체 시각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
"물론 내 눈에는 잘못 놓인 두 장의 벽돌이 보입니다. 하지만 내눈에는 더없이 훌륭하게 쌓아 올린 998개의 벽돌들도 보입니다."
- 그 순간 나는 말문이 막혔다.
나는 석 달 만에 처음으로 그 두 개의 실수가 아닌, 벽을 이루고 있는 훌륭하게 쌓아 올린 수많은 벽돌들을 바라볼 수가 있었다.
그 잘못 놓인 벽돌의 위와 아래, 왼쪽과 오른쪽에는 제대로 쌓은, 완벽하게 놓인 수많은 벽돌들이 있었다. 그 완벽한 벽돌들은 두장의 잘못된 벽돌보다 압도적으로 숫자가 많았다.
그 전까지 내 눈은 오로지 두 개의 잘못된 벽돌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 밖의 다른 것들에 대해서는 눈뜬장님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 자신이 그 벽을 바라보는 것조차 싫었고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보는 것도 싫었다. 그 벽을 폭발시켜 버리고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제 훌륭하게 쌓아 올려진 벽돌들을 볼수 있었다. 벽은 전혀 흉한 모습이 아니었다. 그 방문객이 말한 대로 매우 아름다운 벽이었다.

당신 집의 특별한 점은 어쩌면 실수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당신이 자기 자신 안에서, 상대방 안에서, 혹은 삶전체에서 잘못된 것이라고 여기는 것들은 어쩌면 당신이 이곳에서보내는 시간을 즐겁고 풍요롭게 해 주는 특별한 것 인지도 모른다.
일단 당신이 오로지 그것들에만 초점을 맞추는 일을 중단하기만한다면 말이다.

행복과 고통은 거의 같은 비율로 얻는 것이삶의 본질이다. 만일 지금 고통에 처해 있다면이것은 우리가 전에 받거나 잃은 행복 때문이다.
행복은 고통의 끝이 아니고고통은 행복의 끝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해서이 순환을 돌고 있을 뿐이다.
- 아잔차

왜 청중 대부분은 그 수도원장이 다른 수도승들을 대신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할 것이라고 생각할까? 왜 우리의 문화에서는 언제나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것을 좋은 덕목으로 여기는 것일까? 왜 우리는 타인보다 자기 자신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더 비판적이며, 더 가혹할까? 그것은 언제나 한가지 이유 때문이다. 아직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당신이 무엇을 하든 내 마음의 문은 당신에게 열려있다‘라고 말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훨씬 더 어려운 일은 자기자신에게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내가 기억할 수 있는 만큼 오랫동안 나와 함께 지내온 나 자신이여, 내가 지금까지 무엇을 했든 상관없이 내 마음의 문은 나에게도 열려 있다. 안으로 들어오라."
이것이 바로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다.

고통을 더 아프게 하는 것이 두려움이다. 두려움을 내려놓으면 단지 아프다는 감각만 남는다. 내가 내려놓은 것은 아픔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나는 그 아픔을 받아들였으며, 그것을 껴안았고, 거부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것은 떠나갔다.

우스꽝스럽게 보이겠지만 우리 모두가 하고 있는 방식이 그것이다. 엉뚱한 것을 내려놓으려 하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우리가 내려놓아야 할 것은 바로 내려놓으려는 그 마음이다. 우리 안에서 사사건건 통제하려고 드는 그 감독관을 내려놓아야 한다. 우리 모두는 그 감독관이 누구인지 잘 안다. 내려놓는다는 것은 우리 안에서 감독관이 사라졌음을 의미한다.

설령 평생 머물러 있을지라도! 그리고 그것이 더 나빠지더라도 거부하지 않는다. 고통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다. 그는 고통을통제하려는 마음을 버렸다. 그것이 바로 내려놓는 것이다. 고통이머물러 있든 떠나는 그에게는 아무 차이가 없다. 오직 이때만이 고통은 사라진다.

아무것도 되려고 하지 말라.
자신을 다른 존재로 바꾸려 하지 말라.
명상가가 되려 하거나깨달으려 하지 말라.
앉을 때는 앉으라.
걸을 때는 걸으라.
아무것도 붙잡지 말고 붙잡히지 말라.
그 무엇에도 저항하지 말라.
좋고 나쁨은 그대의 마음속에서만 일어난다.
- 아잔차

누군가 당신을 바보라고 부를 때 당신이 기분 나빠하는 이유는 그 말이 사실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에고를 내려놓으면 누군가 당신을 바보라고 불러도 그것은 당신을 괴롭히지 않는다.
왜 다른 사람이 당신 내면의 행복을 지배하도록 허락하는가?,

"우리를 더 힘들게 하는 것은 일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일에 대한우리의 생각이오."
그는 입을 다물고 나를 응시했다. 몇 초 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는 조용히 일을 시작했고, 나는 못 잔 잠을 보충하기 위해 그곳을떠났다.
그날 늦게 그가 나를 찾아와 빨래를 도와주어서 고맙다고 말했다. 그는 빨래하는 일보다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훨씬 마음을 힘들게 한다는 것을, 그것이 진실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가 불평을 멈추고 빨래만을 했을 때 아무 문제도 없었다.
삶에서 어떤 것이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그것에 대한 생각때문이라는 값으로 따질 수 없는 교훈을 나는 일찍이 태국 북히부에서 승려 생활을 하던 초기 시절에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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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진짜 가족 대신 가짜 가족을 원하는 사람도 많아졌다..
진짜 가족이 된다는 것은 결혼과 출산을 통해 법적 관계로 연결된다는 이미다. 진짜 가족이 되면 제도적 혜택을 볼 수 있다는 장점도 있지만그 관계가 틀어졌을 때 복잡해진다는 특성도 있다. 반면 가짜 가족즉 대안 가족은 그 반대다. 표현상 가짜 가족이라고 했지만, 엄밀히말하면 진짜냐 가짜냐를 가늠하는 건 불가능하다. 법적, 제도적 관계만을 진짜라고 할 수도 없거니와 사람과 사람의 관계와 연대를 반드시 법적, 제도적 틀 속에 가둘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서도 결혼과 동거를 절충한 대안적 제도가 필요하다. 일종의 생활동반자법이다. 1인 가구가 증가하는 시대인 오늘날에는 연인 간의동거만이 아니라 친구, 이성, 동성 간의 다양한 동거가 이뤄지고 있다.
싱글맘끼리의 동거, 노인들끼리의 동거도 가능하다. 현재 이런 동거는 모두 법적 제도와 무관해 법적으로는 가족으로 전혀 인정받지도 보호받지도 못한다.

Family‘의 어원은 라틴어 ‘Famulus‘에서 유래했는데 이는 하인, 노예를 뜻하는 말이다. 로마에서 ‘Familia‘를 한 집안이란 의미로 썼고, 이후 ‘Familie‘를 거쳐 현재의 Family가 되었다. 고대 로마에서는 가장이강력한 힘을 가지고 가족을 지배했다. 소유권은 가장만이 가졌고, 다른 가족 구성원은 아무것도 가질 수 없었다. 가족은 하나의 경제 단위이고 노동 기반이었다. 그렇기에 가족 구성원은 노동자이자 생산도구, 즉 노예 같은 존재였다. 결혼이 제도화된 것도 이런 배경과 연관이 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가족이란 말의 끈끈하고 낭만적인느낌과는 다르다. 이래서 직원들을 착취하는 기업들이 유독 ‘가족 같은 회사‘를 강조하는구나 싶다. 물론 Family가 ‘Father, and Mother, ILove You‘의 이니셜 조합이라고 얘기하는 호사가들도 있다. 시작이야어쨌든 우리에게는 가족이라는, 함께 어울리고 살아갈 존재가 필요하다. 다만 그 존재가 혈연이 아니어도 된다. 이제는 동물도 가족 같은 존재다. 반려동물은 과거 애완동물이라 불릴 때와 차원이 달라졌다. 동물과도 동등한 관계를 지향하는 시대인데, 사람과는 오죽하겠는가. 수직적인 권력 구조였던 기존 가족 제도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2030세대가 늘어나면서 ‘평등한 관계’가 가족의 핵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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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들의 지난 수십 년간의 분투가 놀라울 따름이다. 학교에서배우지 않은 이야기가 책에 무수히 많았다. 그들이 들려주는 나와 우주에 관한 설명은 흥미진진했다. 아내가 나를 쫓아 다니지 않고 왜 내가 아내를 쫓아 다녔는지, 남자는 왜 이리 극단적인지, 나는 왜 숨어서섹스를 해왔는지, 내 선조의 오래된 고향이 아프리카 대륙이라는 걸어떻게 유전자 추적으로 알아냈는지 등등 모든 이야기가 전율에 가까웠다. 한마디로 과학은 나를 알 수 있는 보물창고였다. 인문학자들은늘상 ‘나와 만나야 한다‘고 강조하는데, 나는 과학책을 읽으며 나를 만날 수 있었다.

사자와 톰슨가젤이 경쟁한다고 보는 게 ‘집단선택‘이다. 두 집단이 살아남기 위해 경쟁한다는 생각이다. 반면 개체 선택‘은 사자는 사자와, 톰슨가젤은 다른 톰슨가젤과 경쟁한다는 생각이다. TV 다큐멘터리 〈동물의 왕국>이 자주 보여주는 것은 사자와 톰슨가젤의 경쟁이다. 사자와 톰슨가젤이 경쟁하는 것일까? 이렇게 본다면 생존경쟁의본질을 놓친 것이다. 경쟁은 톰슨가젤들 사이에서 일어난다. 톰슨가젤에게 중요한 것은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다른 톰슨가젤보다 빨리 달아날 수 있느냐이다. 사자보다 주력이 좋을 필요는 없다. 다른 톰슨가젤보다 빨리 달아날 수 있으면 사자는 자신에게 달려들지 않는다. 우리가 다니는 직장에서의 경쟁도 비슷하다. 경쟁은 선후배간에 벌어지는게 아니라, 입사 동기들간에 벌어진다. 이렇게 개체끼리의 경쟁으로 보는 게 개체선택론‘이다.
유전자선택론‘은 개체 안에 있는 유전자에 주목한다. 톰슨가젤이라는 군체population의 유전자 풀aene pool에서 한 유전자가 다른 유전자보다 개체를 빨리 달리게 만들면, 그 유전자는 유전자 풀에서 살아남게 된다.

사회심리학자 로이 F. 바우마이스터의 《소모되는 남자》에 흥미로운 설명이 있다. 그는 "남녀 차는 능력이 아닌 동기 유발에서 생긴다"라고 말한다. 남자는 여자에 비해 호승심好勝心이 강하고, 극단적이다.
호승심은 경쟁에서 남을 이기려는 마음이다. 남자가 지배 지위에 오른것은 호승심이 강해서라고 한다. 1991년 《개미와 공작으로 명성을 얻은 바 있는 다윈주의 철학자 헬레나 크로닌도 《과학의 최전선에서 인문학을 만나다》에서 같은 말을 한다.

"경쟁심이 있고, 위험을 무릅쓰고, 사회적 지위에 대한 욕심이 강하고,일에만 집중하고, 오직 그것밖에 모르고, 끝까지 참고 견디는 성향, 바로 그것이 성공을 만드는 차이이며, 이러한 성향은 평균적으로 남성이 더 많이 가진 성질들이다. 때로는 놀랍도록 많다." (과학의 최전선에서문학을 만나다 존 브록만 엮음 안인희 옮김 동녘사이언스)

"암수 사이에서 널리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차이는 누구를 배우자로 뽑는가에 대해 암컷이 수컷보다 신중하다는 것이다. .…… 한편 수컷은아무리 많은 암컷과 교미한다고 해도 부족하다. 수컷에게 ‘지나치다‘라는 말은 의미가 없는 셈이다." 이기적 유전자 리처드 도킨스 지음 홍영남, 이상임 옮김
이처럼 남자의 성공과 실패는 극단적이다. 아니 남자는 극단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다. 때문에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 후손을 보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이다. 심리학자 로이 F. 바우마이스터는 "남성은 여성보다극단적이며, 이 모습은 위아래 양극단에서 모두 나타난다. 사회 꼭대기뿐 아니라 밑바닥에도 남성이 더 많다. 자수성가한 백만장자에 남성이 여성보다 더 많지만, 교도소에도 남성이 여성보다 많다" 라고 말한다. 바닥권에 여자보다 남자가 많다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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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그대로인데 다만 책을 읽는 나는 조금씩 바뀐다. 나아지 지는 못하더라도 달라지기는 하는 것 같다.

"주머니나 가방에 책을 넣고 다니는 것은, 특히 불행한 시기에,
당신을 행복하게 해줄 다른 세계를 넣고 다니는 것을 의미한다."
오르한 파묵의 이야기처럼 가끔씩 책 속으로 도망치는 것은 도움이 된다. 세상이 커다란 거울을 들이밀며 주름살이 얼마나 늘었는지 보여주고, 나의 이력서는 이대로 지루하게 끝날 거라고 확인시켜주는 요즘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우리가 보는 대부분의 부고는 지나치게 건조해서 사망 일자와유족 명단, 연락 전화 정도가 전부이다. 그 사람이 춤을 잘 추었는지, 스파게티를 잘 만들었는지, 가족을 얼마나 사랑했는지에대해서는 알 수 없는 일방적이고 딱딱한 통지문에 불과하다.
어떻게 죽을지 생각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어떻게 살지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 의미다.

"우린 모두 계단 같은 존재다. 한 단계, 한 단계 올라가고 내려오고 하지만, 우린 모두 같은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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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늘 더 많은 것을 얻으려고만 애쓸 뿐, 적은 것에 만족하는 법은 배우려 하지 않을까? 또한 왜 죽음을 앞둔 존경받는 시민이 젊은 세대를 앉혀 놓고는 엄숙한 어조로, 집 안에 늘 여분의 장화와 우산과 텅 빈방을 오지도 않을 손님을 위해 마련해 두어야 한다고, 자신도 평생을 그리했다고 가르쳐야 한다는 말인가? 왜 우리의 가구는 아랍 인이나 원주민의 가구처럼 소박해서는 안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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