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적인만찬이 끝났습니다. 하지만 바베트는 프랑스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아니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이 만찬을 준비하느라 복권 당첨금을 모두 써버렸기 때문입니다. 자매는 얼굴이창백해져서 말합니다. "바베트, 이제 다시 가난하게 살아야 하잖아!" 그러자 바베트가 답합니다. "예술가는 가난하지 않아요." 그리고 덧붙입니다. "자신이 최선을 다하면 사람들을 행복하게할 수 있죠." 천사의 축복이라도 내리는 듯, 창문 너머로는 흰 눈이 소복소복 쌓입니다. 바베트는 복권 당첨금 1만 프랑 모두를 이웃을 대접하는 데썼습니다. 마치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가 은화 삼백 데나리온이나 되는 비싼 향유를 예수 발에 부어드린 것처럼 말입니다. 훗날 예수를 팔아넘긴 유다는 그 돈이면 가난한 사람을 살릴 수 있었을 것이라며 비난했지만, 예수는 오히려 마리아를 칭찬합니다. .... 만찬은 잔치가 되어 진정한 관계를 회복하는 화목제가 되었으며, 거기서 닫힌 몸이 열리며 몸에 갇혔던 사랑이 완성되은 것입니다.
결심이란 익숙한 것과의 결별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내 몸에는 너무 많은 관성이 들어 있습니다. 오래된 세월의 흔적이 몸 구석구석에 살뜰히도 배어 있습니다. 그것과 싸워 이겨내기에는 우리는 너무나 호락호락한 사람들입니다. 싸울 게 따로 있지왜 자신과 싸운답니까.
그렇습니다. 영화처럼, 영화의 카메라처럼, 우리 인생도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인 겁니다. 다른 사람들, 남의 집을 보면 다 잘 사는 것처럼, 다들 행복하게 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멀리서 보니까요. 하지만 나 자신, 우리 집을 보면우울해집니다. 속속들이 들여다보면 비극적인 부분만 돋보입니다. 가까이서 보니까요. 마찬가지로 자기 인생도 지금 당장의 가까운 시점에서 보면 비극입니다. 하지만 며칠, 몇 달, 몇 년이 지난 후 멀찌감치 돌이켜보면 별거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니 행복하려면 자기 자신을 약간 떨어진 자리에서, 좀 더 객관적인 시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냥 사는데 그냥 사는 게 아닌 삶이라고 하면 어떨까요? 무슨 목적이나 의도가 있어서 누군가에게 선물하는 것보다 그냥선물하는 게 더 감동적인 것처럼 말입니다. 말이 그냥이지 그게정말 그냥이겠습니까? 대충 산다는 뜻이 아닙니다. 목표나 결과에 너무 얽매이지 말되 다른 이들에게 감사와 작은 감동을 줄 만큼 최선을 다하는 삶을 말하는 겁니다. 그냥 네가 좋아서, 그냥 당신을 사랑해서, 그냥 오는 길에 네가 생각나서, 그냥 보고 싶어서, 그냥 주고 싶어서, 이 선물을 준비했다고 말하듯, 그냥 내 마음이 움직여서 오늘 하루도 값있게사는 겁니다, 그냥! 내 마음의 행복은 그런 무목적의 합목적성에서 온다고 저는 믿습니다. 시, 아름다움, 낭만, 사랑처럼 말입니다.
딸을 위한 시 마 종 하 한 시인이 어린 딸에게 말했다 착한 사람도, 공부 잘하는 사람도 말고 관찰을 잘하는 사람이 되라고 겨울 창가의 양파는 어떻게 뿌리를 내리며 사람은 언제 웃고, 언제 우는지를 오늘은 학교에 가서 도시락을 안 싸온 아이가 누구인가를 살펴서 함께 나누어 먹으라고
이 이야기가 왜 중요할까요? 궁금하시다면, 박민규의 소서《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보세요. 이 소설에는 고로야구계의 만년 꼴찌 팀 삼미 슈퍼스타즈가 등장합니다. 그들이 꼴찌를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드디어 밝혀집니다. 삼미는자신의 야구‘를 완성하고자 했기 때문이죠. 삼미가 지향한 자신의 야구‘란 "치기 힘든 공은 치지 않고, 잡기 힘든 공은 잡지 않는다" 였습니다. 그러니 전성기의 뉴욕양키스나 요미우리자이언츠도, 아니 그 어떤 프로팀도 결코 완성할 수 없었던 거죠. 그들의 목표는 한결같이 우승뿐이니까. 우승을 목표로 하는 프로팀들로서는 가장 하기 힘든 야구가 바로저 자신의 야구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삼미는 이런 식입니다. 타석에 서서 보니까 투수가정말 너무나 멋진 커브를 던진 거예요. 그럼 치지 않습니다. 치기 힘든 공이잖아요. 치려고 하기보다 그 멋진 커브를 감탄하고 경이로운 마음으로 지켜보는 겁니다. 그게 원래 우리가 처음 야구를 하려고 했을 때의 뜻 아닙니까? 치고받기보다는 즐기고, 이기기보다는 아름다움을 누리는 것이 야구의 본질이요, 매력아닐까요? 그리하여 소설 속 삼미 슈퍼스타즈는 프로 올스타즈와의 대결을 이렇게 마무리하게 됩니다.
7회 초의 공격은 끝이 나지 않았다. 오른쪽의 잡초 덤불 쪽으로 빠진 2루타성 타구를 잡으러 간 〈프로토스〉는 공을 던지지 않았고, 그이유는 공을 찾다가 발견한 노란 들꽃이 너무 아름다워서였고, 또모두가 그런 식이었다. 워낙 힘을 들이지 않기 때문에, 괴소년은 그렇게 많은 포볼을 던지고도 도무지 지치지 않았고, 또 같은 이유로아무도 데미지를 입지 않았다. 수비들은 계속 체력을 축적하고, 오히려 전력을 다해 공격하는 타자들이 지쳐만 가는 이상한 경기가계속 이어졌다. 길고 긴 7회의 공격이 언제 끝날지가 요원했던 - 아직 원아웃인가 그랬고 스코어는 20:1의 상황에서, 결국 타임을 외친 올스타즈의 주장이 웃으며 걸어 나왔다. "그만 하죠." 승패를 떠나, 뭔가 태도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그는 한 것 같았다. 고개를 가로젓는 조성훈에게 그는 농담처럼 "하하, 우리가 졌습니다."라고 웃으며 말했고, 돌아가다 문득 뒤를 돌아보더니 "왜 이런 식으로 야구를 하시는 겁니까?"라고 물었다. 모자를지는 조성훈이, 끝없이 겸손한 표정으로 예를 갖춰 대답했다. "야구를 복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랑론論허형만
사랑이란 생각의 분량이다. 출렁이되 넘치지 않는 생각의 바다, 눈부신 생각의 산맥, 슬플 땐 한없이 깊어지는 생각의 우물, 행복할땐 꽃잎처럼 전율하는 생각의 나무, 사랑이란 비어있는 영혼을 채우는 것이다. 오늘도 저물녘 창가에 앉아 새 별을 기다리는 사람아. 새 별이 반짝이면 조용히 꿈꾸는 사람아.
우리말 역사에서 ‘사랑하다‘와 ‘생각하다가 원래 한 뜻이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다만 ‘사랑‘이란 우리말의 어원은 확정된바가 없는데, 생각하여 헤아리다‘라는 뜻의 ‘사량思量‘에서 유래되었다는 설도 있으니, 아마도 이 시인은 내친 김에 ‘사량思量‘을 ‘생각의 분량으로 풀어본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이런 걸모르더라도 "사랑이란 생각의 분량이다" 라는 말을 이해하는 데전혀 지장은 없을 겁니다. 말 그대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그만큼 그를 생각한다는 것일 테니까요. 많이 사랑한다는 건 많이 생각한다는 것이고 많이 생각난다는건 그만큼 그를 사랑한다는 증거가 될 테지요.
"마음을 비웠다" 라는 말을 저는 잘 안 믿는 편입니다. 마음이 잘 비워지질 않더라고요. 마음은, 영혼은, 채우는 겁니다. 채우는데 뭘로 채울까가 중요한 겁니다. 얼마나 선한 것, 얼마나귀한 것, 얼마나 사랑스러운 것으로 채울까. 그런 것들로 채워진 삶은, 행복하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얘기합니다. 사랑이란 비어 있는 영혼을 그대 생각으로, 그대와 함께한생각의 바다와 산맥과 우물과 나무로 채우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저물녘 창가에 앉아 반짝이는 새별을 보며 조용히 꿈꾸는 그대 생각으로 내 비어 있는 영혼을 채우노니...
신형철 평론가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해요. "나로 하여금 좀 더 나은 인간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사람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훌륭한 시를 읽을 때, 우리는 바로 그런 기분이 된다." 훌륭한 시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처럼, 나로 하여금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게 만든다는군요.
거짓을 사랑하는 것에 있어서 ‘리플리‘와 ‘방탄소년단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전자는 타인이 기준이 되는 것, 후자는 자신이 기준이 된다는 데 차이가 있습니다. 타인을 모방하고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나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그로부터 오히려 자유하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기준이 되는 것, 그것이 진짜 ‘인싸‘의 삶 아닐까요.
내가 만난 시인들은 하나같이 다른 시인을 의식하지 않았다. 자신들이 그려나가고 있는 좌표에 충실할 뿐 다른 이들의 동선을 염탐하지 않더라는 것이다. 당연히 누구와 비교되는 것도 마뜩찮아 했다. 그것은 부단히 자기 부정과 자기 갱신을 감행해본 자들이 가닿은 자유로움 같은 것으로 여겨졌다. - 김도언, 세속 도시의 시인들 (위즈덤하우스, 2016) 중에서
다만 확실한 것은, 그래도 그 곡선이 아니었다면, 나는 결코남한산성 고개를 넘지 못했을 거라는 겁니다. 물리학의 진실은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남한산성 고개를 넘겠노라고 자동차가직진으로 질주했더라면 최대등판각도를 이기지 못해서 중도에전복되고 말았을 거라고요. 직진으로 흘러가는 강은 급기야 폭포라는 절벽을 뛰어내려야 하지만, 굽이굽이 휘돌아가는 강물 은 끝까지 바다에 이르게 되리라는 것을. 그것이 바로 부드러운곡선의 힘 아닐까요. 가끔은 보통의 삶에서 밀려나는 듯 느껴지고, 잘 살아오던 삶의 관성에서 벗어나는 것 같아 불안해하지만, 인생이 먼 곳을우회하는 것 같을 때, 어쩌면 우리는 직진해오는 바람에 만나지 못했던 가치들을 발견하고 깨닫고 배워가며 성장해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미니죽음에 관해 생각한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삶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냥 정신없이 살 때는 삶에 대해 생각하지 않아요. 그냥 삶을 사는 거지. 그런데 죽음을 생각함으로써 비로소 산다는게 뭔지를 생각하는 것이죠. 이렇게 사는 게 과연 의미 있는 건가? 그런가 하면 타인의 죽음을 보면서 자신의 죽음도 깨닫게되죠. 죽음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사랑하는사람도 언젠간 죽을 것입니다. 이 절대적인 사실을 통해 ‘아, 나도 죽는구나‘ 하는 삶의 본질을 깨닫습니다. 인생이란, 요약하면, 살다가 죽는 것 아닐까요. 이렇게 인생에 대한 설명이 단순해져버리는 순간 오히려 삶에 대한 고민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는 역설도 만들어집니다. 스티브 잡스의유명한 스탠퍼드 대학 졸업 축사의 일부입니다. 죽을 날이 그리 멀지 않음을 기억하는 것은 인생의 중대한 결정들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되는 도구들 중 가장 중요한 겁니다. 왜냐하면거의 모든 것들, 모든 외부로부터의 기대, 자존심, 당혹감이나 실패에 대한 두려움 등 이 모든 것들은 죽음 앞에서 맥을 추지 못하며, 정말 중요한 것만 가려내주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죽을 것이라사실을 기억하는 것은 여러분이 무언가를 잃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함정을 피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미 가진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가슴으로 느끼는대로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더딘 슬픔, 그것이 상실에 대한 올바른 애도입니다. 끝내 허무하게 사라질지라도, 생명의 불 꺼지면 바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한동안은 연기로 남아, 무중력처럼, 시간이 멈춘 것처럼, 그렇게 잠시 그대와 함께한 추억들을 되새기며, 그대 떠나 텅 비어버린 이 세상의 공백을 채우는 것, 그것이 애도 아니겠습니까. 우리네 짧은 인생에도 그런 정도의 여운과 여백은 허락되어야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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