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욕은 젊어서는 즐겨도 늙으면 식는다. 분노는 참으면 없어지 요하면 물러난다. 하지만 교만은 한번 마음에 들어오면 언제 어디서고 붙어다닌다. 몸이 늙어도 교만은 시들지 않는다.
如色慾則, 老則息, 如, 忍則去, 靜則知, 惟微一納於心志 焉, 身能老而傲不衰.

습정習靜은 고요함을 익힌다는 뜻이다.
침묵과 고요도 연습이 필요하다.
정신없이 세상에 흔들리는 사이,
정작 소중한 것들이 내 안에서 빛바래 간다.
침묵이 주는 힘, 고요함이 빚어내는 무늬를우리는 완전히 잊어버린 것은 아닐까?
고요히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이 필요한 이유다.

고요함에 익숙해지자 헤아려 살피는 일도 심드렁하다. 마음 밭은 인연따라 흘러가도록 놓아둔다. 작위하지 않는다. 실없는 농담과 공연한 말이 싫다. 산자락 집 사립문은 대낮에도 굳게 잠겼다. 나는 나와의 대면이 더기쁘다. 나는 더 고요해지고 편안해지겠다.
이수광도 무제無題)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온종일 말도 없이 좌망坐忘에 들었자니
이렇게 지내는 일 홀로 즐김 넉넉하다.
몸을 움직이면서도 고요함을 익히니
담백하게 어디서건 참나가 드러나네..
坐忘終日一言無 長工程足 自娛身在動時猶習靜濟然隨地見真吾좌망은 나를 잊은 경계다. 말을 잊고 욕심을 거두자, 부지런히 움직여도 마음이 고요하다. 담담하게 때 없이 참나와 만난다.
이게 나고 이래야나다.

고요 익혀 지내자니 온갖 생각 재가 되고
찾아오는 사람 보면 문득 놀라 꺼려지에
산 스님 지팡이 짚고 어디서 오는 게요
사립문 밖 길 위 이끼 망가지게 생겼네..
習靜居萬念灰 若逢人到便驚淸山僧枚錫從何處破我柴門一逻苔

찾는 사람 아예 없어 문 앞 길에 이끼가 곱게 앉았다. 스님 오신 것이야환영하오만, 지팡이 눌러 짚어 이끼 망가질까 겁이 납니다. 살살 오시지요.
정약용이 이승훈李承薰(1756~1801)에게 보낸 답장에서 말했다.

요즘 고요함을 익히고 졸렬함을 기르니(習靜養世), 세간의 천만 가지즐겁고 득의한 일들이 모두 내 몸에 ‘안심하기安心下氣’ 네 글자가 있음만 못한 줄을 알겠습니다. 마음이 진실로 편안하고, 기운이 차분히 내려가자, 눈앞에 부딪히는 일들이 내 분수에 속한 일이 아님이 없더군요. 분하고 시기하며 강팍하고 흉포하던 감정도 점점 사그라듭니다. 눈은 이 때문에 밝아지고, 눈썹이 펴지며, 입술에 미소가 머금어집니다..
피가 잘 돌고 사지도 편안하지요. 이른바 여의치 않은 일이 있더라고모두 기뻐서 즐거워할 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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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지.. 난 책을 읽으며 평생을 보냈어. 그리고 내 생각에 나는…… (그는 한순간 머뭇거린다 …) 나는 그걸…… (그가다시 말을 멈춘다……) 그 인생a vie이란 걸 살지 못한 것 같아,
그 진짜 인생 말이다."

"물론이지! 내가 뭘 할 수 있을지 전혀 모르는 채 내 앞에 그모든 시간이 펼쳐져 있다는 생각에 얼어붙어 있었지. 시간은 내앞에 있었어. 끝이 보이지 않았지. 공허의 냄새가 났어. 아니, 더고약하게도 권태의 냄새를 풍겼지. 그리고 그런 내 생각은 틀리지 않았단다, 나는 지긋지긋해하며 인생의 사분의 삼을 살았으니까. 책을 사랑한다. 그래 좋아, 겉으로 보기에 멋진 일이지, 매력적이야. 하지만 책을 팔면서 평생을 살아간다, 그건 그 사랑을

책은 우리를 타자에게로 인도하는 길이란다. 그리고 나 자신보다 더 나와 가까운 타자는 없기 때문에, 나 자신과 만나기위해 책을 읽는 거야. 그러니까 책을 읽는다는 건 하나의 타자인 자기 자신을 향해 가는 행위와도 같은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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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적인만찬이 끝났습니다. 하지만 바베트는 프랑스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아니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이 만찬을 준비하느라 복권 당첨금을 모두 써버렸기 때문입니다. 자매는 얼굴이창백해져서 말합니다. "바베트, 이제 다시 가난하게 살아야 하잖아!" 그러자 바베트가 답합니다. "예술가는 가난하지 않아요."
그리고 덧붙입니다. "자신이 최선을 다하면 사람들을 행복하게할 수 있죠." 천사의 축복이라도 내리는 듯, 창문 너머로는 흰 눈이 소복소복 쌓입니다.
바베트는 복권 당첨금 1만 프랑 모두를 이웃을 대접하는 데썼습니다. 마치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가 은화 삼백 데나리온이나 되는 비싼 향유를 예수 발에 부어드린 것처럼 말입니다. 훗날 예수를 팔아넘긴 유다는 그 돈이면 가난한 사람을 살릴 수 있었을 것이라며 비난했지만, 예수는 오히려 마리아를 칭찬합니다.
.... 만찬은 잔치가 되어 진정한 관계를 회복하는 화목제가 되었으며, 거기서 닫힌 몸이 열리며 몸에 갇혔던 사랑이 완성되은 것입니다.

결심이란 익숙한 것과의 결별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내 몸에는 너무 많은 관성이 들어 있습니다. 오래된 세월의 흔적이 몸
구석구석에 살뜰히도 배어 있습니다. 그것과 싸워 이겨내기에는 우리는 너무나 호락호락한 사람들입니다. 싸울 게 따로 있지왜 자신과 싸운답니까.

그렇습니다. 영화처럼, 영화의 카메라처럼, 우리 인생도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인 겁니다. 다른 사람들, 남의 집을 보면 다 잘 사는 것처럼, 다들 행복하게 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멀리서 보니까요. 하지만 나 자신, 우리 집을 보면우울해집니다. 속속들이 들여다보면 비극적인 부분만 돋보입니다. 가까이서 보니까요. 마찬가지로 자기 인생도 지금 당장의 가까운 시점에서 보면 비극입니다. 하지만 며칠, 몇 달, 몇 년이 지난 후 멀찌감치 돌이켜보면 별거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니 행복하려면 자기 자신을 약간 떨어진 자리에서, 좀 더 객관적인 시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냥 사는데 그냥 사는 게 아닌 삶이라고 하면 어떨까요? 무슨 목적이나 의도가 있어서 누군가에게 선물하는 것보다 그냥선물하는 게 더 감동적인 것처럼 말입니다. 말이 그냥이지 그게정말 그냥이겠습니까? 대충 산다는 뜻이 아닙니다. 목표나 결과에 너무 얽매이지 말되 다른 이들에게 감사와 작은 감동을 줄 만큼
최선을 다하는 삶을 말하는 겁니다.
그냥 네가 좋아서, 그냥 당신을 사랑해서, 그냥 오는 길에 네가 생각나서, 그냥 보고 싶어서, 그냥 주고 싶어서, 이 선물을 준비했다고 말하듯, 그냥 내 마음이 움직여서 오늘 하루도 값있게사는 겁니다, 그냥! 내 마음의 행복은 그런 무목적의 합목적성에서 온다고 저는 믿습니다. 시, 아름다움, 낭만, 사랑처럼 말입니다.

딸을 위한 시

마 종 하

한 시인이 어린 딸에게 말했다
착한 사람도, 공부 잘하는 사람도 말고
관찰을 잘하는 사람이 되라고
겨울 창가의 양파는 어떻게 뿌리를 내리며
사람은 언제 웃고, 언제 우는지를
오늘은 학교에 가서
도시락을 안 싸온 아이가 누구인가를 살펴서
함께 나누어 먹으라고

이 이야기가 왜 중요할까요? 궁금하시다면, 박민규의 소서《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보세요. 이 소설에는 고로야구계의 만년 꼴찌 팀 삼미 슈퍼스타즈가 등장합니다. 그들이 꼴찌를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드디어 밝혀집니다. 삼미는자신의 야구‘를 완성하고자 했기 때문이죠.
삼미가 지향한 자신의 야구‘란 "치기 힘든 공은 치지 않고,
잡기 힘든 공은 잡지 않는다" 였습니다. 그러니 전성기의 뉴욕양키스나 요미우리자이언츠도, 아니 그 어떤 프로팀도 결코 완성할 수 없었던 거죠. 그들의 목표는 한결같이 우승뿐이니까. 우승을 목표로 하는 프로팀들로서는 가장 하기 힘든 야구가 바로저 자신의 야구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삼미는 이런 식입니다. 타석에 서서 보니까 투수가정말 너무나 멋진 커브를 던진 거예요. 그럼 치지 않습니다. 치기 힘든 공이잖아요. 치려고 하기보다 그 멋진 커브를 감탄하고
경이로운 마음으로 지켜보는 겁니다. 그게 원래 우리가 처음 야구를 하려고 했을 때의 뜻 아닙니까? 치고받기보다는 즐기고,
이기기보다는 아름다움을 누리는 것이 야구의 본질이요, 매력아닐까요? 그리하여 소설 속 삼미 슈퍼스타즈는 프로 올스타즈와의 대결을 이렇게 마무리하게 됩니다.


7회 초의 공격은 끝이 나지 않았다. 오른쪽의 잡초 덤불 쪽으로 빠진 2루타성 타구를 잡으러 간 〈프로토스〉는 공을 던지지 않았고, 그이유는 공을 찾다가 발견한 노란 들꽃이 너무 아름다워서였고, 또모두가 그런 식이었다. 워낙 힘을 들이지 않기 때문에, 괴소년은 그렇게 많은 포볼을 던지고도 도무지 지치지 않았고, 또 같은 이유로아무도 데미지를 입지 않았다. 수비들은 계속 체력을 축적하고, 오히려 전력을 다해 공격하는 타자들이 지쳐만 가는 이상한 경기가계속 이어졌다. 길고 긴 7회의 공격이 언제 끝날지가 요원했던 - 아직 원아웃인가 그랬고 스코어는 20:1의 상황에서, 결국 타임을 외친 올스타즈의 주장이 웃으며 걸어 나왔다.
"그만 하죠." 승패를 떠나, 뭔가 태도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그는 한 것 같았다. 고개를 가로젓는 조성훈에게 그는 농담처럼 "하하, 우리가 졌습니다."라고 웃으며 말했고, 돌아가다 문득 뒤를 돌아보더니 "왜 이런 식으로 야구를 하시는 겁니까?"라고 물었다.
모자를지는 조성훈이, 끝없이 겸손한 표정으로 예를 갖춰 대답했다. "야구를 복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랑론論허형만

사랑이란 생각의 분량이다. 출렁이되 넘치지 않는 생각의 바다, 눈부신 생각의 산맥, 슬플 땐 한없이 깊어지는 생각의 우물, 행복할땐 꽃잎처럼 전율하는 생각의 나무, 사랑이란 비어있는 영혼을 채우는 것이다. 오늘도 저물녘 창가에 앉아 새 별을 기다리는 사람아.
새 별이 반짝이면 조용히 꿈꾸는 사람아.

우리말 역사에서 ‘사랑하다‘와 ‘생각하다가 원래 한 뜻이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다만 ‘사랑‘이란 우리말의 어원은 확정된바가 없는데, 생각하여 헤아리다‘라는 뜻의 ‘사량思量‘에서 유래되었다는 설도 있으니, 아마도 이 시인은 내친 김에 ‘사량思量‘을
‘생각의 분량으로 풀어본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이런 걸모르더라도 "사랑이란 생각의 분량이다" 라는 말을 이해하는 데전혀 지장은 없을 겁니다. 말 그대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그만큼 그를 생각한다는 것일 테니까요.
많이 사랑한다는 건 많이 생각한다는 것이고 많이 생각난다는건 그만큼 그를 사랑한다는 증거가 될 테지요.

"마음을 비웠다" 라는 말을 저는 잘 안 믿는 편입니다. 마음이 잘 비워지질 않더라고요. 마음은, 영혼은, 채우는 겁니다. 채우는데 뭘로 채울까가 중요한 겁니다. 얼마나 선한 것, 얼마나귀한 것, 얼마나 사랑스러운 것으로 채울까. 그런 것들로 채워진 삶은, 행복하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얘기합니다. 사랑이란 비어 있는 영혼을 그대 생각으로, 그대와 함께한생각의 바다와 산맥과 우물과 나무로 채우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저물녘 창가에 앉아 반짝이는 새별을 보며 조용히 꿈꾸는 그대 생각으로 내 비어 있는 영혼을 채우노니...

신형철 평론가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해요. "나로 하여금 좀 더 나은 인간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사람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훌륭한 시를 읽을 때, 우리는 바로 그런 기분이 된다." 훌륭한 시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처럼, 나로 하여금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게 만든다는군요.

거짓을 사랑하는 것에 있어서 ‘리플리‘와 ‘방탄소년단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전자는 타인이 기준이 되는 것, 후자는 자신이 기준이 된다는 데 차이가 있습니다. 타인을 모방하고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나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그로부터 오히려 자유하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기준이 되는 것, 그것이 진짜 ‘인싸‘의 삶 아닐까요.

내가 만난 시인들은 하나같이 다른 시인을 의식하지 않았다. 자신들이 그려나가고 있는 좌표에 충실할 뿐 다른 이들의 동선을 염탐하지 않더라는 것이다. 당연히 누구와 비교되는 것도 마뜩찮아 했다. 그것은 부단히 자기 부정과 자기 갱신을 감행해본 자들이 가닿은 자유로움 같은 것으로 여겨졌다.
- 김도언, 세속 도시의 시인들 (위즈덤하우스, 2016) 중에서

다만 확실한 것은, 그래도 그 곡선이 아니었다면, 나는 결코남한산성 고개를 넘지 못했을 거라는 겁니다. 물리학의 진실은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남한산성 고개를 넘겠노라고 자동차가직진으로 질주했더라면 최대등판각도를 이기지 못해서 중도에전복되고 말았을 거라고요. 직진으로 흘러가는 강은 급기야 폭포라는 절벽을 뛰어내려야 하지만, 굽이굽이 휘돌아가는 강물 은 끝까지 바다에 이르게 되리라는 것을. 그것이 바로 부드러운곡선의 힘 아닐까요.
가끔은 보통의 삶에서 밀려나는 듯 느껴지고, 잘 살아오던
삶의 관성에서 벗어나는 것 같아 불안해하지만, 인생이 먼 곳을우회하는 것 같을 때, 어쩌면 우리는 직진해오는 바람에 만나지
못했던 가치들을 발견하고 깨닫고 배워가며 성장해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미니죽음에 관해 생각한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삶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냥 정신없이 살 때는 삶에 대해 생각하지 않아요. 그냥 삶을 사는 거지. 그런데 죽음을 생각함으로써 비로소 산다는게 뭔지를 생각하는 것이죠. 이렇게 사는 게 과연 의미 있는 건가? 그런가 하면 타인의 죽음을 보면서 자신의 죽음도 깨닫게되죠. 죽음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사랑하는사람도 언젠간 죽을 것입니다. 이 절대적인 사실을 통해 ‘아, 나도 죽는구나‘ 하는 삶의 본질을 깨닫습니다.
인생이란, 요약하면, 살다가 죽는 것 아닐까요. 이렇게 인생에 대한 설명이 단순해져버리는 순간 오히려 삶에 대한 고민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는 역설도 만들어집니다. 스티브 잡스의유명한 스탠퍼드 대학 졸업 축사의 일부입니다.
죽을 날이 그리 멀지 않음을 기억하는 것은 인생의 중대한 결정들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되는 도구들 중 가장 중요한 겁니다. 왜냐하면거의 모든 것들, 모든 외부로부터의 기대, 자존심, 당혹감이나 실패에 대한 두려움 등 이 모든 것들은 죽음 앞에서 맥을 추지 못하며,
정말 중요한 것만 가려내주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죽을 것이라사실을 기억하는 것은 여러분이 무언가를 잃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함정을 피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미 가진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가슴으로 느끼는대로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더딘 슬픔, 그것이 상실에 대한 올바른 애도입니다. 끝내 허무하게 사라질지라도, 생명의 불 꺼지면 바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한동안은 연기로 남아, 무중력처럼, 시간이 멈춘 것처럼,
그렇게 잠시 그대와 함께한 추억들을 되새기며, 그대 떠나 텅 비어버린 이 세상의 공백을 채우는 것, 그것이 애도 아니겠습니까.
우리네 짧은 인생에도 그런 정도의 여운과 여백은 허락되어야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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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허하고 허전한 마음이 들 때
자기마음을 한번 잘 들여다보세요.
그 허전함을 무언가로 채우려 하는
마음이 보일 것입니다.

사는 건 특별한 일이 아닙니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상대를 이해하고 어려운 일에 처했을 때
서로 돕고 위로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마음이 허전할 때는
내가 뭔가 바라는 마음으로 헤매고 있음을 알고
그 바라는 마음을 놓아버리면,
허전함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입니다.

무의식적인 감정의 습관에서 자유로워지는 것,
그것이 해탈입니다.
더는 고뇌가 생기지 않는 것,
그것이 열반입니다.
사물을 보는 관점을 바꾸고
탁 알아차려서 습관에 끌려가지 않는 삶,
행복해지는 연습,
그것이 수행입니다.

집착과 외면

어떤 것을 갖고 싶고, 유지하고 싶고,
꼭 자기 뜻대로 하려는 것을 집착이라고 합니다.
낚시를 하다 아무리 큰 물고기가 걸렸더라도
물에 빠져 죽을 정도가 되면 낚싯대를 놓아야 하는데,
아까운 마음에 끝까지 낚싯대를 잡고 있는 게 집착입니다.
물속으로 끌려 들어가면서 살려 달라 아우성을 칩니다.
빨리 놓으라고 하면 죽어도 못 놓겠다,
이런 기회가 어디 있냐고 합니다.
집착에 이끌려 고통에 빠지는 겁니다.

내 뜻대로 하고 싶은데 안되면
집어치워버리는 것을 외면이라 합니다.

그런데 하나하나 따져보면모든 것은 다 내 안에서 일어납니다.
똑같은 비가 와도 어떤 씨앗을 심었느냐에 따라
제각기 다른 싹이 트듯이
자기 내면에 그런 씨앗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시각을 밖으로 돌리지 말고
안으로 돌려 내면을 깊이 관찰해야 합니다.

장님 몇이 코끼리의 생김새를 알고 싶어 손으로 코끼리를 만집니다.
이때 한 사람은 코끼리의 다리를 만지고 코끼리가 기둥같이 생겼다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은 코끼리의 꼬리를 만지고는 밧줄같이 생겼다고 말합니다. 또 다른 사람은 코끼리의 등을 만져보고는 언덕과 같다고 말합니다.

이런 것을 편견 또는 단견짧은 생각이라고 합니다.
한쪽 면만 보고 전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물이나 현상을 볼 때 이쪽뿐 아니라 저쪽도 보고, 앞면만이 아니라 뒷면, 아랫면만 아니라 윗면도 같이 살피며 전체를
보는 것을 통찰력 혹은 지혜라고 합니다.

행복으로 가는 길은
마음이 바뀌지 않는 게 아니라
마음이 바뀌는 줄 알고
그 변화에 구애받지 않는 것입니다.
좋다 하더라도 너무 들뜨지 말고
싫다하더라도 너무 사로잡히지 않도록
꾸준히 연습해 보세요.

자기 마음의 움직임을 스스로 알아차리고 지켜본다면,
마음의 끊임없는 출렁거림 속에서도
참으로 한결같은 삶이 찾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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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길. 삼겹살에 소주 한잔 없다면."
"아 이것마저 없다면 !!"
그래요, 아무것도 없는 겁니다.
퇴근길에 희망이라고 삼소뿐인 겁니다. 이것마저 없다면 그 시절을 어떻게 버티며 살 수있겠느냐는 탄식과 원망이 들려오지 않습니까.
우리가 삶을 버티는 데 그렇게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사실, 아 이것마저 없다면‘ 하는 그것 하나만 있어도 의외로버텨지는 게 삶입니다. 사랑하는 사람, 나를 위로해주는 가족만있어도, 아, 그리고 무엇보다도, 희망이 있으면 우리는 버틸 수있습니다. 비정규직이어도, 아직 취업을 못하거나 심지어 직장을 잃었어도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해주는 힘, 그 희망이 있다면우리 삶은 견딜 만해집니다. 아 이것마저 없다면‘ 하며 지켰던,
삼겹살에 소주 한잔만으로도 단군 이래 최대 위기라던 그 환란을 이겨낸 게 우리들이지 않습니까.

이것은 일찍이 알베르 카뮈의 소설 《페스트》에서 감동적으로그려진 바 있습니다.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걸 정부는 그저 속수무책으로 바라만 보고 있는 그때, 의사들은 목숨을 걸고 페스트와맞서 싸웁니다. 의사 리외는 랑베르 기자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 모든 일은 영웅주의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것은 단지 성실성의 문제입니다. 아마 비웃음을 자아낼 만한 생각일지도 모르나, 페스트와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성실성입니다.
리외에게 랑베르 기자는 다시 묻습니다. 그 성실성이란 게 대체 뭐냐고. 의사 리외는 다시 답합니다.
"내 경우로 말하면, 그것은 자기가 맡은 직분을 완수하는 것이라고알고 있습니다.
어떠신가요? 정말 현실 같은 소설이고, 소설 같은 현실 아닙니까? 소방관이나 의사만이 아니라 직업을 가진 누구나 이렇게
자기 직업과 직분의 본질을 지키며 사는 세상이 온다면, 우리는비로소 살 만한 세상, 소설에서나 꿈꾸었던 세상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모두가 영웅이어서 영웅이 필요 없는 세상일 테니 말이죠. 하지만 아직은 먼 것 같습니다. 더도 덜도 말고 그저 업의 본질을 지킨다는 일이 정말 이렇게 힘든 일일까요?

얼마전 저는 SNS에 농담조로 한 문장짜리 짧은 글을 올렸니다. "죽어라 일하는데 왜 나는 죽지도 않고 왜 일은 줄지도않는가?" 많은 이들이 ‘좋아요‘를 누르자 내친 김에 그에 대한담도 올렸습니다. 일은 하면 할수록 늘기 때문"이라고. 갓 취업해서 제대로 일할 줄 모르면 선임들이 격려해줄 때 하는 말이 그것 아닙니까. "괜찮아, 일은 하다 보면 늘어"라고,
아, 정말 일은 듭니다. 하면 할수록 실력이 느는 게 아니라 정말 일은 늘면 늘지 줄어드는 법이 없습니다. 잘하면 잘하는 대로, 못하면 못하는 대로, 줄지 않는 것이 일입니다. 과로로 죽을판인데, 과로하지 않으면 더 죽을 판으로 일이 넘쳐 어쩔 수 없이 과로라도 해서 일을 줄이려는데, 그러면 그새 일은 또 늘어나는 악순환인 겁니다.

지금부터 무려 600여 년 전인 1516년, 토마스 모어가 ..
《유토피아》란 책에 등장하는 철학자 라파엘 히슬로디는 자시이항해하다 만난 유토피아 섬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그 섬의 사라들은 하루 6시간을 일한답니다. 그것도 오전 3시간 일하고, 점심으로 2시간 휴식한 다음, 오후 3시간 일하면 끝. 모든 일은 제녁식사 전에 마칩니다. 잠자는 시간을 빼고 그 외의 시간은 다자유로운 여가시간인데, 대부분 그 시간을 학문 탐구나 음악 향유 같은 데에 바치는, ‘저녁이 있는 삶‘ 정도가 아니라 ‘문화가 있는 삶을 사는 것이죠. 라파엘 히슬로디는 말합니다. 모든 시민은 육체노동에 투여하는 시간과 정력을 가능한 한 아끼어 이 시간과 정력을 자유와 정신의 문화를 누리는 데 쓸 수 있도록 하자고, 그것이야말로 삶의 진정한 행복이라고, 워라밸이라고

언젠가 스칸디나비아 항공을 이용할 때의 일이었습니다. 조마 소금 봉지 같은 게 나왔는데 아무리 봐도 소금sall이란 말이바이질 않습니다. 거기에는 단지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TheColor of Snow, The Taste of Tears!‘ 소금이 ‘눈의 색깔, 눈물의맛이라니요. 감동이었습니다. 항공사가 달리 보였습니다. 문학과 문화를 생활화하자고 백날 말만 하면 뭐합니까. 명품은 이런디테일에 숨어 있더군요.
동서양을 막론하고 소금은 눈물의 맛입니다. 그냥 눈물의 성분이 짜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니고 소금은 눈물 없인 얻을 수 없는 귀한 존재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직장인을 샐러리맨이라고 부를 때, 그때 ‘샐sal‘의 라틴어 어원이 바로 소금입니다. 초기 로마시대에는 소금이 화폐 역할을 했다고하죠. 그래서 관리나 병사의 급료도 소금으로 지급했는데 그 급료를 살라리움‘ salarium이라고 불렀고, 소금이 화폐로 대체된 뒤에도 지금껏 그 명칭은 살아남아 봉급을 샐러리salary라 부르고있습니다. 병사를 뜻하는 영어 단어 soldier도 ‘소금을 주다‘라는 뜻의 단어 saldare에서 비롯된 것이죠

우리의 꿈은 명사가 아니라 형용사이어야 할지 모릅니다. 우리는 누구나 무엇인가가 되고 싶어 합니다. 그 무엇은 명사겠지요. 의사, 교사, 공무원, 회사원 같은 것들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 가령 명사 교사는 정말 이삼십 대 안에 되든지 안 되든지가
결정이 납니다. 하지만 가령 형용사 ‘존경스러운‘ 교사는정년까지도, 아니 평생토록 이루기 힘듭니다. 생의 목표는 그런게 되어야 하지 않을는지요. 어쩌면 존경스러운‘ 사람이 되는게 내 인생의 꿈이고, 교사‘나 ‘의사‘ 따위는 그 꿈을 이루기 위한 수단들일지도 모릅니다. 의사가 되었어도 환자나 주변으로부터 평생 존경을 얻지 못했다면 그 인생을 어찌 성공한 인생이라 하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라면 시 같은, 아름다운, 낭만적인, 사랑이 넘치는 삶을 사는 것이야말로 우리 인생의 목표여야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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