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주동안 선생님들이 이런 방식으로 학급을 운영한 후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젠더 라벨링 학급의 아이들이 개인의 이름을 부른 학급보다 훨씬 성별 고정관념이 강해졌다. 선생님이 성별 고정관념을 입에 올리지 않았고 그저 학급을 남녀로 구분하기만 했는데도 건축가, 의사, 대통령 같은 특정 직업은 ‘남자들만 할 수 있다고 대답한 여학생들이 많았다. 반대로 간호사, 가정주부, 베이비시터는 여자들만 하는 직업이라고 대답했다. ‘여자들만, 상냥하고 부드러우며 육아를 할 수 있다고도 대답했다. 이런 성별 고정관념의 강화로 인해 젠더 라벨링 학급의 학생들은 집단 내 개인의 차이를 인식하지 못했다. 즉 성별을 기초로 모든 남학생‘은 이런 방향으로 행동하고 여학생’은 절대 저런 방향으로 행동하면안 된다는 식의 일반화를 많이 했다. 한마디로, 선생님이 개인의특징보다 성별에 집중할 경우 아이들은 집단 안에서 개별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간과하게 되었다.
성평등 교육을 하는 스웨덴의 유치원 ‘에갈리아‘에서는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아이들은 성별 고정관념을 거스르는 교육을 받는다. 가령 직업 교육을 할 때 우주항공사가 나오면 여성 우주항공사의 사진을 보여준다. 그래서 이곳의 아이들은 성별에 따라 직업이 정해져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장난감이나 책을 나누어줄때도 마찬가지이다. 동성애 커플이나 혼자서 아이를 키우는 엄마아빠가 많이 등장하는 책을 읽어준다.
그래서 아이들은 비록 주변에서 전통적인 생활 방식을 접하더라도 그것만이 유일한 삶의 방식이 아니라는 사실을 배운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자. 우리의 의견과 가치관, 생활방식이 옳은데남들이 뭘 몰라서 저러는 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결단코 한 번도 없는가? 우리는 나와 다른 그룹, 나와 다른 생각과 입장, 성별, 연령, 계층, 종교,국적에 따라 끊임없이 경계를 긋고 니 편, 내 편을 나누려고 한다. 소비 행동은 신분의 상징이 되고, 직업은 정체성이 되었으며, 정치적 다름은 적개심이 되었다. 과연 우리는 어떤 기준으로 ‘우리‘와 ‘저들을 끊임없이 구분하는가. 무엇으로 1류와 3류를 규정하는가. 이 책은 소속 범주로서의 ‘우리‘가 직업, 소속, 성별, 빈부격차, 소비취향, 관심사, 범죄, 정치 영역에서 어떤 구조를 띠는지, 또 그 안에서 ‘남들을 바라보는 독선적 시선이어떻게 표현되는지 살핀다.
영국 신문 인디펜던트>는 이렇게 물었다. 아일란은 내전을 피해 유럽으로 넘어오다 목숨을 잃었다. 아일란보다 앞서 수천 명의 어른과 아이들이 똑같이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인도주의 위기의 상징이 된 것은 죽은 세 살배기 아이의 사진이었다. 그의 사연이 난민 위기에 얼굴을 선사했다. 여기서 인간의 패러독스가 드러난다. 우리의 공감은 반드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의 숫자와 관련 있지 않다. 우리의 공감은 오히려 개인에게서 솟구친다. 그를 보며 자신을, 자신의 아이들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지중해에 빠져 죽은 500명의 난민 뉴스는 그 정도의 고통을 유발하지 않는다. 숫자 뒤에 숨은 개인들은 추상이되고, 추상은 감정을 불러일으키지 않기 때문이다. 고통받는 사람이 우리와 가까워야, 혹은 그들의 고통이 가깝게 느껴져야 우리는그들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그 고통에 맞설 각오를 다지게 된다.
그저 한 동네에서 같이 살던 이주민의 운명과 인간 드라마에마음이 움직여 공식적인 강제 추방 반대 운동에 동참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수많은 작은 지역의 저항이 강제 추방을막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핵심은 사회적 친밀도, 친숙한 개별 사례에 있다. 쫓겨나게 생긴 이주민이 평소 우리 집에도 놀러 오던 아들의 같은반 친구이다. 개인적인 관계를 통해 공감과 부당하다는 느낌, 타인의 상황을 개선하고픈 욕망이 생겨난다. 이런 관계가 탄생할 수있으려면 서로를 알 수 있는 계기가 반드시 필요하다. 아이들은학교에 다닐 수 있어야 하고 어른들에겐 일자리를 제공하고 여가시설을 이용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러나 정치권은 이런 가능성을 차단하기에 바쁘다.
아직 유럽의 언어를 모르는 난민 아이들은 따로 학급을 배정하때문에 그 아이들이 친구들과 어울리며 자연스럽게 언어를울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진다. 또 난민 보호소는 지역민들이 사는주거지에서 멀리 떨어진 외곽에다 둔다. 자국민과의 접촉이 생길수가 없으므로 연대 활동과 정치권의 부정적 결정에 반대하는 제항 운동이 발전은커녕 아예 싹이 트지도 못한다. 따라서 지역민들이 공감과 의무적 책임감을 느낄 수 있는 가능성도 줄어든다. 난민 문제를 바라보는 개인의 입장이 어떻든 관계없이 지역민과 접촉이 많은 사람의 체류 기회가 더 높다는 사실은 불공정하지 않은가?
이런 위협감이 널리 퍼지게 된 데에는 정치 엘리트들의 역할이크다. 많은 정치인이 대중의 인기를 얻기 위해 속죄양과 적의 이미지를 부추기고 원한과 시기, 증오를 자극하는 손쉬운 방법을 택한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특정 집단을 도구화하고 잠재적 위험요인으로 매도하는 것이다. 심각한 정치 문제를 힘들게 파헤치는것보다 이런 방법이 힘은 덜 들면서 얻는 것은 더 많다. 과도한 이주 물결, 일자리 경쟁, 복지 제도의 남용, 범죄 우려를 부추기면서공포와 불안을 조장하는 편이 훨씬 간편하다. 공공 담론에서 구조적 폐해와 사회적 문제가 자취를 감춘 지는 이미 오래다. 그럴수록 깬 시민들이 나서서 포퓰리즘의 말장난에 놀아나지 않도록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것이다. 그 시작은 언어이다.
이주에 대해 말하는 방식이 이주에 대한 인식에 큰 영향을 미친다. 국외 거주자(Expat)와 이민자 (Immigrant)를 굳이 구분하여 부르는 것이 재미있지 않은가? 둘 다 외국에서 들어온 사람들을 말한다. 하지만 고학력 백인 6으로 자신이 원해서 들어온 사람과 이 조건에 부합하지 않는 사람은 차이가 난다. 고학력 흑인은 유럽에서국외 거주자라고 부르지 않는다. 필리핀 간호사는 이민자이거나계절노동자일지언정 국외 거주자는 아니다.
이런 구분은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특권의 표현이다. 국외 거주자를 높이 평가하기 위한 위계적 구분이다. 명칭은 사회적계급과 국적과 인종을 나타낸다. 국외 거주자는 여권이 없어도 되고 사회적 통합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 그래도 아무 상관 없다. 어차피 톱클래스의 전문 인력이고 -경제적 어려움이 아닌 - 자발적 의지로 이곳에 왔다. 스위스 최대 온라인 쇼핑몰 디지텍 갈락서스(Digitec Galaxus)의 홍보팀장이자 칼럼니스트 리코 쉬파흐 (RicoSchipbach)의 말대로 국외 거주자는 1급 이민자 37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끼리라도 모든 이민자를 국외 거주자라고 높여 불러보면 어떻게 될까? 아니면 아프리카에 사는 유럽 국외 거주자들도이민자라고 불러보면 어떨까? 흥미로운 실험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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