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주님이 필요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나약함을 보지 않으시고 감당할 수 없는 사랑으로 아름다움을 보십니다. 비록 우리가 나약할지라도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주님과 함께 우리는 다시 알게 됩니다. 우리가 깨지기 쉽지만 동시에 귀하고 아름다운 크리스탈과 같다는 점을우리는 알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크리스탈처럼 주님앞에서 투명할 수 있다면 주님의 빛, 자비의 빛은 우리안에서 빛날 것입니다. 우리를 통과해서 온 세계에 빛날것입니다. 「베드로의 첫째 서간」에서 "즐거워하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얼마 동안은 갖가지 시련을 겪으며 슬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1베드 1,6) 라고 이야기했던 이유입니다.
하느님의 자비 축일(부활 첫 주일), 가장 아름다운 메시지는, 늦게 도착했던 사도 토마스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토마스는 그 자리에 없던 유일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토마스를 기다렸습니다. 자비란 뒤에 남겨진 사람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제 질병의 대유행에서 우리가 천천히 그리고 힘들게 회복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때, 뒤에 남겨진 이들을 잊어버리는 위험도 있습니다. 바이러스보다도 더 나쁜, 이기적인 무관심이 공격해오는위험입니다. 이 바이러스는 나에게 좋으면 좋은 삶이라는 생각, 나에게 만족스러우면 모든 것이 만족스럽다는생각 때문에 퍼집니다. 이렇게 시작해서는 사람을 차별하고, 가난한 이들을 버리고, 뒤에 남겨진 이들을 발전이라는 제단에 희생물로 바치는 것으로 끝을 맺습니다.
"주님, 저들은 가끔 저의 선함을 마구잡이로 이용하기만합니다." (『일기 Diary』 1937.12.24.) 그러자 예수님이 답하셨습니다. "마음 쓰지 마라. 그것들이 너를 방해하지 못하게 하여라. 언제나 모두에게 자비로워야 한다." (『일기 Diary』1937.12.24.)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은 대단한 영웅이 되는 것, 말하자면예수님과 같은 영웅의 삶을 똑같이 살아내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누구이신가 알아듣는 것이지, 모두가 예수님처럼 도인이나 성인이 되라는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예수님이 내 삶에서 누구이시고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 묻는 데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이미 살아가게 된다. 요한복음이 말하는 생명은서로 다름의 만남이다. 만남은 제 삶을 포기한 채 특정인의 삶에 기생하는 것이 아니다. 그건 노예 생활이고, 을의 서글픈굴욕일 뿐이다. 모두가 같은 삶의 자리에서 살아야만 하는 세상은 파시스트들의 세상이다. 삶의 자리가 달라도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고 이해하는 세상이 민주적인 세상이고, 그 세상은 신앙적인 세상과 다르지 않다. 요한은 자신의 자리와 예수님의 자리를 혼동하지 않았다. 요한을 통해 배울 수 있는건, 우리가 경쟁하는 대상이 무엇보다 자기 자신이어야 한다는것이다. 신랑의 친구인 자신의 처지를 버려두고 왜 신부를 차지하는 신랑의 자리를 탐하려는지 되돌아보아야 한다. 자신의자리가 명확하고 분명해야 육화하신 예수님이 한결 선명히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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