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는 나약한 이들을 위한 목발일 뿐이죠. 나는 하느님이 필요치않아요. 내가 나의 하느님이니까요." 어느 공개 토론에 갔더니 한 젊은이가 이렇게 결연히 선언했다.
혼자 생각했다. 젊은이, 나는 자네를 알지 못하지만 나 같으면 하느님 역할을 자처하고 싶지는 않을 것 같은데.‘ 그래도 그를 조롱하거나 모욕하고 싶지는 않아서 살짝만 비꼬는 투로 이렇게 물었다. 그런데 지겹지 않은가요? 나는 이 나이쯤 되니 이제 나에 대해 예측 가능한 것들을 너무 잘 알게 되어 걱정인데, 나의 하느님께서는 여전히나를 놀라게 하시지요. 나라면 꽉 닫힌 창문보다는 확 트인 전망이 있는 곳들에서 시간을 보내는 편을 택할 텐데요."

인간에게 ‘너‘란 자신이 조종할수 없는 것, 자신의 통제 아래 있지 않은 것, 자신이 존중해야 하는것, 전혀 다름을 간직하고 자신에게 다가오도록 허락해야 하는 것을말한다. 부버에게 ‘절대적 너는 하느님이며 오직 하느님뿐이다. 하느님은 모든 것이 우리에게 ‘그것‘에서 ‘너‘로 변할 수 있는 공간을 열어주는 지평이다. 다른 사람들뿐 아니라 풍경, 꽃 한 송이, 나무 한 그루,책 한 권도 ‘너‘가 될 수 있으며, 나에게 조건 없이 말을 걸 수 있다.
모든 ‘타자‘가 그 ‘너‘가 될 수 있고, 그런 것은 하느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사르트르의 말을 부버는 단호히 거부했다. 부버에 따르면, 나는 아무 타자와 나와 너의 관계를 영구적이고 배타적으로 맺을 수는 없다. 어떤 상황에서는 모든 타자가 나에게 그것이 되고, 그렇기에 나는 그것과 거리를 둘 수 있고 때로는 반드시 거리를 둬야 한다. 그러나 내가 거리를 둘 수 없는 것이 있으니 바로 하느님이다.

순간 내 느낌은 뭐랄까, 카프카의 소설 『심판 마지막 장면, 요제프K가 스트라호프의 채석장에서 심장이 칼에 찔렸을 때의 심정과 비슷했다. "치욕이 나보다 더 오래 살아남을 것 같았다."
나는 의심의 과정을 거치며 서서히 신앙을 갖게 된 경우다. 나로서는 예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같은 현수막들과 참기 힘든가식적 미소를 띤 치어리더들이 있는 대형 집회에서 갑자기 집단 신심에 전염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게다가 내가 회심하던 때는경기장과 서커스단이 본연의 목적에 쓰였지, 종교적 광대놀이에 동원되지는 않던 시절이다. 물론 자기 신앙을 북돋우기 위해 비슷한 마음을 지닌 군중 속에 섞여 있어야만 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존중한다. 그러나 내 신앙은 그런 인파 속에서 오히려 길을 잃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 얄팍한 종교적 열정에 치우치는 것을 늘 경계하고바로잡기 위해서 약간의 회의론과 반어법과 비판적 이성을 갖추는것은 정신 건강과 영적 건강의 필수 조건일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함성과 외침으로 하느님의 참된 목소리를 덮어 버리지 않기 위해 꼭필요한 전제 조건이다. 어떤 사람이 텅 빈 깜깜한 방에서 검은 고양이를 찾으면서 잡았다, 잡았다‘ 하고 조급하게 외치기만 한다는 일화가떠오른다.

살아 계신 하느님을 찾고 참으로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들은 얕은 개천이 아니라 깊은 바닷속에서 헤엄치는 법을 배울 용기를 가져야 한다. 하느님은 참으로 ‘깊이‘ 이시다. 얕은 개천에서는 그분을 찾을 수 없다.
신앙과 ‘하느님을 아는 길은 어떤 과목이나 기술을 배우는 것이아니다. 학문이나 기술의 목적은 그것에 통달하는 데 있고, 그렇다면 체계적으로 나아가는 것이 최선의 길일 것이다. 피아노를 배울 때동요에서 시작해서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으로 발전해 가는 것이 그런 경우다. 그리스도교 교사들이 하느님은 어떤 지식의 대상‘이 아니라 모든 실재의 깊이라는 생각을 진지하기 받아들이기까지, 수많은설교와 종교적 논문들과 강좌들은 깊이에 대한 인식을 키워 가지 못하고 계속 동요만 뚱땅거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노래는 점점 음이삐걱거려서 들어 주지 못할 지경이 되고 만다.

나는 그 물리학자 친구에게 있는 그대로 말하라고 조언해 주었다. 과학은 하느님의 현존을 절대 입증할 수 없다. 과학적으로 입증된 신‘은 우리가 믿을 만한 가치가 없다. 그런 신은 우상일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그대가 이해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이 아니다"

이 책에서 이미 몇 번 인용한, 이해할 수 있으면 그것은 하느님이아니다‘라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격언과 유사하게, 부버도 우리가 ‘대상‘으로서 관계 맺을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이 아니며 하느님일 리 없다고 주장한다. 하느님은 온전히 인격적 관계 안에서만 체험할 수 있고, 그런 관계의 원형이 기도이다.
하느님은 가까이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첫째, 그분께서는 ‘것‘이 아니고, 둘째, 그분께서는 이해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으며 객관화할 수 없는 그분 본성 안에서 무한히 멀리 계신다.) 오히려 하느님께서는 가까움 그 자체이다. 보나벤투라 성인은 성경의 잘 알려진 구절을 끌어와서 하느님은 빛이라고 선언하면서, 우리가 볼 때는 ‘빛‘자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빛 안에서 모든 것을 본다고 덧붙였다. 우리는 세상에서 하느님을 찾기보다, 하느님 안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 하느님을 세상으로, 또는 세상을 하느님으로 착각하지 않으면서,우리는 하느님의 빛 안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

그 토론 막바지에 이르자, "내가 나의 하느님" 이라고 말했던 젊은이가 어느 모로는 옳았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처음에 인간은 ‘하느님의 지위에 있는 자신‘을 본다. 살아 있는 신앙의 시작이며 토대인회개, 참된 회심(메타노이아)이 이루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의 ‘나‘는 그 지위에서 면직‘된다. 물론 그 회심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하고, 자기중심적 세상을 절대적 너에게 열어 본 적도 결코 없어서, 종종 아무 생각 없이 자기도 모르는 채 영원히 그 ‘하느님 같은 지위에 머무르는 사람들도 있다. 스스로 무신론자라 여기는 이들이 그렇고, 나와그것‘의 세계에서 ‘나와 너의 세계로의 존재론적 전환이자 자기 세계의 재구성인 ‘회심‘을 거치지 못한 채 종교적 믿음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도 그렇다. 덧붙이자면, 그들은 그들 자신과 또 가장 가까운 이들에게 큰 해를 끼치면서 그렇게 살아간다.

우리는 듣고 식별하는 법을 배우는 데 우리의 삶을 보내고, 내려놓는 법을 배우는 데 우리 삶을 보낸다. 우리가 그 언어를 이해하기시작한다면, 우리의 온 삶은 우리 나름의 개념들과 시도들과 야망들과 환상들과 계획들에서, 또한 하느님의 친절한 손길이 그때 개입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해낼 수 있었을 것만 같은 온갖 ‘또 다른 시나리오들‘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오른훌륭한 정치인, 외교관, 주교, 배우, 법률가, 심리치료사, 언론인,대가족의 아버지를 보는 일은 나에게 큰 기쁨을 준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누군가 이런 일을 하고 있고 그것도 아주 잘해 내고 있다면, 더 이상 나까지 그런 사람이 될 필요는 없다는 확신과 함께 안도감과 해방감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내가 뒤를 돌아보지 않을수 있게 해 주고, 내가 직접 그런 사람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라거나아마 나도 꽤 잘해 냈을 것이라는 생각과 환상에서 자유롭게 해 준다.
나는 기쁘게 내려놓는 법, 사람이 모든 것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닫는 법을 배우고 있다. 하느님 홀로 당신의 모든 잠재력을 온전히 실현하실 수 있는 존재이시다. 하느님께서는 나의 길을 좁혀 주시고, 당신께서 나에게 참으로 바라시는 것, 내가 다른 이에게 떠넘길 수 없는것을 더 정확히 이해할 수 있게 해 주신다. 그저 토마시 할리크, 내가되는 것이다. 내가 이것을 해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비어 있을유일한 자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삼손이 되지 못했다고 심판하지 않으실 것이다."

우리는 서로를 탐색하듯 바라보며 말없이 앉아 있다. 이 젊은 재개종자가 적어도 지금은 더 말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아서 내가 나섰다.
"잘 돌아왔네." 내가 미소 지었다. 그러다 그가 어떤 생각에 영감을 받았을지 퍼뜩 떠올라 나 혼자 다시 미소 짓고는 이렇게 말했다. "사실내가 자네를 환영하는 것은 자네가 우리 양 떼의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이어서도 그렇지만, 자신의 인생 여정에 선禪의 지혜까지 더한 사람에게 내가 축하를 건넬 수 있어서이기도 해." 나는 어느 선禪 지도자가 자신의 여정과 깨달음의 열매를 훌륭하게 요약한 유명한 문장을들려주었다. "처음에 나는 산은 산이고 숲은 숲이라 생각했고, 그러다 산은 산이 아니고 숲은 숲이 아니라 생각했지. 이제 나는 산은 산이고 숲은 숲인 것을 다시 알게 되었네."

깨달음이란 내가 선글라스를 쓰고 있다는 걸 잊은 것을 깨닫고는 선글라스를 벗는 것과도 비슷하다고 했다.
다른 일본인 선승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많은 서양 사람들은불교도들이 윤회를 믿는다‘고 여긴다. 하지만 윤회의 본질은 윤회 신화가 환상임을 깨닫는 것이다. 그런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영원한 지금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의 그리스도교는 이제 다시 부는 바람인 그리스도교‘
가 되어야지, 몇 해 전 집에 벗어 놓고 간 신발을 다시 신으려 해서는안 된다. (신발이 너무 작아졌을 테니 그렇게 할 수도 없을 것이다.) "다시 여기네요"라는 그의 말은 귀환을 뜻하지만, 단순히 과거로의회귀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가 돌아오려 하는 그 신앙은 똑같다. 주제도 ‘내용‘도 같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도 오늘도 영원히 같은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이를 이해하고 살아 내는 방식과 깊이는달라야 한다. 다시 산은 산이고, 숲은 숲이다. 그리스도는 영원하시다. 그러나 우리는 달라진다.

그 어느 해보다 이번 부활절에 나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복음 이야기들에 깊이 빠져 있었다. 여러 번 되풀이되며 두드러지는 주제가 있다. "그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라는 것이다. 그들은 오랫동안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낯선 사람‘으로 여겼다. 그들이 마침내 그분을 알아보았을 때는 그분의 겉모습이 아닌 표징들을통해서였다. 그분이 빵을 떼시는 모습에서, 이름을 불러 주시는 그분의 목소리에서 그리고 그분의 상처를 만짐으로써 알아본 것이다.
어쩌면 복음사가들은 이를 통해 부활 신비의 특성을 강조하려고하는지도 모른다. 부활은 소생이나 원상 복귀, 아무 변화 없이 그저제자리로 돌아가는 여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의체험을 통해 변화하시고 다른 분, 낯선 분으로 오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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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얻은 최고의 교훈은, 재활 과정에 있을 때 나를 돌보는 사람이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는 내게 달려 있다는 사실이다. 마음을 여느냐 마느냐 하는 결정은 내 소관이었다. 나와 교감을 나누고, 부드럽고 적절하게 나를 만져주고, 눈을 마주보며 차분하게 말을 건네면서 에너지를 주는 사람에게는 마음을 열었다. 긍정적인 대우에는 긍정적으로 반응했다. 반면 나와 교감하지 않고 기운을 빼는 사람을 대할 때는 그들의 요청을 무시하고 자신을 보호했다.

내가 외상으로 고통받는 동안 어머니가 가장 즐겨 한 말은 "더 나쁠 수도 있었어!"였다. 정말 그랬다. 표면에 드러난 상황은 참혹했지만 훨씬 더 나쁠 수도 있었다. 어머니는 이 과정에서 정말 대단한 일을 해주었다. 나는 막내였고, 그녀는 내가 걸음마를 뗄때부터 무척 바쁘게 일했다. 그래서 이렇게 다시 어머니에게 의지하며 보살핌을 받을 기회가 생긴 것이 기뻤다. 그녀는 포기할 줄 몰랐고 끝까지 친절했다. 한 번도 목소리를 높이거나 나를 비난하지 않았다.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여인이었다. 내가 잘하든 못하는 상관하지않았다. 우리는 회복 과정을 함께했으며, 모든 순간이 새로운 희망과가능성으로 빛났다.

뇌졸중 환자 중에는 더 이상 회복이 되지 않는다며 불평하는 이들이 많다. 그런데 그들이 이루고 있는 작은 성취에주목하지 않는 것이 진짜 문제가 아닐까 싶다.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없는 것을 명확히 볼 줄 알아야 다음에 무엇을 할지 판단할 수 있다.
그러지 않으면 절망이 회복을 가로막는다.

나는 방문객들이 내게 자신의 긍정적인 에너지를 나눠주기를 바랐다. 대화가 사실상 불가능했기에 나는 그저 사람들이 몇 분의 시간을 내서 내 손을 잡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천천히 자신의 안부를 전하거나, 내가 회복되리라 믿는다고 말해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불안한 에너지를 잔뜩 갖고 오는 사람을 상대하기가 가장 어려웠다. 사람들이 내게 올 때는 자기가 어떤 에너지를 갖고 오는지 확인하기를바랐다. 모두가 눈살을 펴고 마음을 열고 사랑을 나눠주기를 원했다.극도로 신경이 곤두서 있거나 화가 난 사람들의 방문은 내 회복에 역효과를 냈다.

뇌졸중을 통해 내가 배운 최고의 교훈이라면 감정을 몸으로 느끼는방법을 배운 것이다. 기쁨의 감정이 내 안에 있었다. 평화의 감정이내 안에 있었다. 새로운 감정이 밀려들어 나를 해방시키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이런 감각 경험에 어울리는 새 단어를 배워야 했다. 아울러 감정이 내 몸에 계속 남아 있게 할지, 아니면 내 몸에서 곧장 흘러나가게 해야 하는지 판단할 힘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판단은 몸이 어떻게 느끼는지에 따라 결정되었다. 분노, 좌절, 공포 같은 감정이 몸 안에 차오르면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런 감정은 마음에 들지 않으니 신경 고리에 접속하고 싶지 않다고 뇌에게 말했다. 언어를 통해 왼쪽 뇌를 사용하면 뇌에게 직접 말을어 내가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원하지 않는지 말할 수 있었다. 이렇게 되자 이제 예전의 내 성격으로 절대 돌아가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감정적 치유는 지루하리만치 서서히 진행되었지만 노력할 가치가있었다. 왼쪽 뇌의 힘이 점차 강해지면서 내 감정이나 상황을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이나 외적 사건 탓으로 돌리고 싶어졌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보면 나와 나의 뇌 말고는 나에게 어떤 기분을 느끼게 만들사람은 없었다. 외부의 그 무엇도 내 마음의 평화를 앗아갈 수 없었다. 그것은 온전히 나의 문제였다. 내 삶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통제할 수는 없지만, 내 경험을 어떻게 지각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내게 달려 있었다.

회복과정에서 나는 양측 반구의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 처했을 때 내 생각을 좌우하는 성격을 내가 직접 선택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는 중요한 문제였다. 내 우뇌 성격의 밑바탕에는 깊은 마음의 평화와 공감의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우뇌의이런 성격을 담당하는 회로를 가동하는 데 많은 시간을 들일수록 우리가 세상을 향해 보내는 평화와 공감의 메시지도 많아지고, 그만큼..

오른쪽 뇌에는 현재 순간 외의 시간이 존재하지 않으며, 매 순간이감각들로 채워진다. 출생이나 죽음은 현재 순간에 일어난다. 기쁨의경험 역시 현재 순간에 일어난다. 우리 자신보다 거대한 존재를 지각하고 그것과 연결되어 있다는 경험 또한 현재 순간에 일어난다. 우뇌에서는 ‘지금 이 순간 The Moment of Now‘만이 끝없이 계속 이어진다.

오른쪽우뇌의 타고난 기능 가운데 하나는 낡은 정보가 담긴 파일을 새롭게 업데이트할 수 있도록 매 순간 새로운 깨달음을 가져다준다는 점이다. 나는 유년기 내내 호박을 먹지 못했다. 그런데 우뇌 덕분에 기꺼이 호박에 재도전할 수 있었고, 지금은 호박을 아주 좋아한다. 많은 사람들이 좌뇌로 판단을 내린 후에는 파일 업데이트를 위해 선뜻오른쪽으로(우뇌의 의식으로) 넘어가지 못한다. 그래서 판단을 한번내리고 나면 그 결정을 끝까지 고집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깨닫기로지배욕이 강한 좌뇌가 가장 싫어하는 일은 제한적인 두개골 공간을개방적인 우뇌와 공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른쪽 뇌는 새로운 가능성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틀에서 벗어나 사고한다. 틀을 만든 장본인인 좌뇌가 세운 규칙과 규제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래서 창의력을 발휘해 새로운 일을 시도한다. 혼란이창의적 과정의 첫 단계임을 잘 안다. 근운동 감각이 뛰어나고 기민하며, 육체가 세상 속으로 뛰어드는 것을 사랑한다. 내 세포들이 직감이라는 통로을 통해 보내는 미묘한 메시지를 잘 받아들이며, 촉감과경험을 통해 배운다.

뇌가 아주 단정적이거나 비생산적이거나 통제 불능으로 느껴지는회로를 가동할 때면, 나는 정서적·생리적 반응이 사라질 때까지 90초를 기다린다. 이어 아이를 대하듯 뇌에게 차분하고 거짓 없이 말한다. ‘생각하고 느끼는 네 능력은 높이 사지만 나는 더 이상 이런 생각이나 감정에는 관심이 없어. 그러니 이런 것들을 끄집어내지 마’.

세포들이 말을 듣지 않는 극단적인 상황이 오면 나는 진정한 목소리를 이용해 언어 중추의 훼방꾼을 엄격한 스케줄로 관리한다. 이야기꾼에게 오전 9시부터 9시 반, 그리고 오후 9시부터 9시 반까지는마음대로 푸념해도 좋다고 허락한다. 뜻하지 않게 푸념 시간을 놓치면 다음 약속 시간이 돌아올 때까지 그 행동을 재개할 수 없다. 내가이런 부정적인 사고의 회로에 정말로 엮이고 싶지 않아 한다는 메시지를 세포들은 금세 알아듣는다. 따라서 지금 뇌에서 어떤 회로가 돌아가고 있는지 끈질기고 확고한 태도로 주목하기만 하면 된다.

나는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정신 건강에 아주 중요하다고 믿는다. 내 생각에는 내부의 언어적 폭력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이 마음의 깊은 평화를 발견하는 첫걸음이다. 나는 뇌에서 부정적인 이야기꾼의 비중이 고작 땅콩 크기밖에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을때 엄청난 힘을 깨달았다.

마음의 평화를 잃지 않으려면 순간순간 마음의 정원을 착실하게 가꾸고, 하루에도 수천 번 긍정적 결정을 내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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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혈연관계를 일컬어 ‘익명의 그리스도인‘ 이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게다가 테야르는 스스로 외부인이라 생각하는 많은 이들을 자신은 그리스도의 참된 형제들로 여긴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사실 행동이 아닌 말로만 열심히 그리스도를 "주님,주님" 하고 부르는 이들보다 그들이 그리스도께 더 가까이 있다.

하느님의 말씀이 몸소 인성을 취하셨다. 육화를 가리키는 독일어 ‘멘쉬베르둥Menschwerdung은 하나의 ‘과정‘이라고 할 만한 역동적인 것을 가리킨다. 사람이 되어 가는 활동인 것이다. 라너의 관점에서, 하느님의 사람 됨‘(Menschwerdung Gottes)에 대한 인간의 가장 참된응답은 ‘인간의 사람 됨‘(Menschwerdung des Menschen)이다.

하느님 앞에서 오롯이 자신을 위해서만, 말하자면 기도하지 않는형제들을 기억하지 않으면서 기도하기를 원하는 그리스도인이있을까? … 그런 사람은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에서, 또 동료 인간에 대한 책임감에서 기도할 것이다. 그는 하느님의 현존이나 부재를 체험하면 할수록 자신의 감정이나 무감각에는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그는 기도하지 않는 이들이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흔적을 넌지시 느낄 수 있도록, 그들이 말하는 부재하시는 하느님을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 일은 성인의 통공(communio sanctorum) 안에서 일어난다. 넓게 보면 성인의 통공이란, 십자가 위의 하느님께서 그들을 위해 완전한 버림받음을 견디고 겪으신 모든 이의 공동체를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 모든인간이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며,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 인도의 어느 예수회원에게 배운 대로 그저 숨만 쉰다. 내모든 근심과 걱정과 슬픔을 내뱉기 위해 날숨을, 그분의 평화와 기쁨과 힘을 들이키기 위해 들숨을 쉰다. 파도가 바위에 부딪친 다음 다시바다로 돌아가듯이, 인간도 이런 들숨과 날숨의 리듬 안에서 바오로사도의 말을 몸으로도 거의 체험할 수 있다. "내가 약할 때 오히려 나는 강하기 때문입니다"(2코린 12,10). 그러나 단지 나만 바라보는 것은아니다. 인간은 아무도 섬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교회의 근심과 상처와 약함은 또한 나의 약함이다. 하느님께서 가까이 계심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는 이들의 슬픔과 어둠은 또한 나의 깊은 골이다. 그러나썰물이 다시 밀물로 바뀌듯, 우리도 평화와 힘과 기쁨의 물결을 느낄수 있거나 적어도 넌지시 알아챌 수 있다. 성경 말씀처럼 "주님께서베푸시는 기쁨이 바로 여러분의 힘"(느헤8,10 참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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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와 관련한 뇌의 화학물질이 분비된다. 그러면 몸이 느최초의 화학반응이 혈류에서 완전히 빠져나가는 데에90초가 걸린다고 한다. 90초가 지나도 계속 분노를 느끼는 것은이 화학반응을 지속시키겠다는 나의 선택이다. 이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사용하는 목욕탕의 이미지가 그런 것이다. 일단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90초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고 작정한다. 다만 이 시간 동안 나 자신의 몸의 반응을 세심하고 알아차리고 그 시간이 지나면 선택권은 온전히 내게 있다고 스스로에게 말하는 것이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몸의 느낌을 존중하는 것이다. 내가 뜨거운 목욕물의 이미지를 쓰는 이유도 여기에있다. 화가 나면 정말로 뜨거운 목욕물에 들어간 것처럼 체온이오르고 숨을 멈추게 된다. 그 시간 동안 나 자신을 자책하지도않고 나를 분노케 한 상황을 이해하려 하지도 않고 그저 몸을 가진 동물로서 있는 그대로 분노를 느낀다. 그러면 이 순간조차도꽤나 달콤하다.

우뇌가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한다는 뜻이 구체적으로 어떤 기능을 말하는 것일까? 우뇌는 매 순간 깨달음을 준다. 가령 저자는 호박을 먹지 않았다. ‘나는 호박을 싫어해. 이것을 철석같이믿는 것이 좌뇌다. 좌뇌는 이런 자신에 대한 판단을 새롭게 하는것을 싫어하며 사고의 패턴을 반복한다. 그렇지만 우뇌는 매 순간이 새롭다. 어제 호박을 싫어했다고 오늘도 같을 리는 없다고판단하는 것이 우뇌가 하는 일이다. 저자는 이제 호박을 아주 좋아하게 됐다. 이렇게 다른 좌뇌와 우뇌를 함께 쓰기 위해 우리는섣부른 판단을 피하고 ‘자신만의 마음의 정원‘을 세심하게 돌봐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지금 당장 전파사에 가서 전기충격기를 사세요. 화를 한 번내자마자 방에 들어가서 그걸로 몸을 지져버려요. 그러면 고통을 겪으면서 기절을 할 거예요. 그렇게 몇 번만 하면 다 고쳐집니다."

스님은 설명한다. 화내는 건 습관이기 때문에, 절대 고쳐지지않는다고. 그래도 고치려면 화를 냈을 때 전기충격기의 고통을연상하게 해서 저절로 화가 안 나게 하는 방법밖에 없는 거라고.
테일러가 말하는 뇌의 회로를 선택한다는 것과 같은 원리일 것이다. 분노와 고통을 새로운 회로로 연결시키라는 말이다.

그게 거짓말이지. 안 고쳐도 살 만한 거 아니에요? 그냥화내고 살아요. 그렇게 살면, 애나 배우자가 나중에 당신을 떠날수도 있고, 싫어서 상대도 안 해줄 가능성이 높지만, 그건 당할때 ‘내 탓이다‘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그냥 살면 돼요."
정말 중요한 이야기는 ‘내가 정말 변화를 원하는가‘라고 냉정하게 질문하는 것이다.

소시오미터 이론에 따르면 남들의 긍정적시각을 제대로 인식할 때 자아 이미지가 좋아진다. 내가 환영받는 곳, 내가 잘 해낼 수 있는 역할을 발견할 줄 아는 건 삶을 행복하게 이끌어 갈 능력이나 다름없다. 그렇다고 남의 인정에 목을 매라는 뜻은 아니다. 남의 의견을애써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남‘이 누구인가를 내가 의식적으로정할 수 있으면 된다.

내가 가진 건 자존감이 아니라 적극적인 탐구 끝에 얻은 나에대한 이해다. 언제, 어떤 사람들과 함께 행복한지, 무엇이 나를채워주는지, 어떤 거리감이 좋은지, 나를 아는 만큼 다른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것을 쫓아다니지 않을 수 있다. 시골에 오지 않아도 궁금해하기만 한다면 충분히 알아낼 수 있는 것들이다.

나를 묶어두지 않는다.
나는 어떤 일에도 100퍼센트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 무엇이든 처음 시작할 때, 항상 생각하는 건 쉽게 빠져나올 수 있는 길이다. 취미 생활을 할 때도 장비를 먼저 준비하지 않는다. 회사에 다닐 때도, 박사 공부를 할 때도, 갑자기 그만두어도 억울하지않을 정도로 대충 한다. 다음에 할 일, 내일 하고 싶은 일을 하기위한 에너지나 돈이 항상 남아 있기를 바란다. 그것이 내 인생관이다. 나는 나 자신의 삶보다 더 중요한 건 없다고 생각한다. 최선을 다한 끝에 지쳐버려서 다른 일은 하고 싶지 않게 되는 것도싫고 좋아하는 사람과 시시한 농담을 주고받는 즐거움을 놓치기도 싫다. 그리고 어떤 일이고 지겨워지거나 멈추고 싶을 때 언제라도 그럴 수 있는 자유도 나에게는 아주 중요하다. 이 가치들이중요한 만큼 세속적인 욕망은 약하다. 배수의 진을 치지도, 있는

인생에서 내가 꾸준히 노력하는 건 바로 열심히 노력하지 않기‘이다. 그럼 가만히 살면 될 것 같지만 의식적으로 경계하지않으면 생각보다 어렵다. 나는 모든 걸 남김없이 불살랐다고 의심 없이 자부할 수 있을 정도로 최선을 다한 적은 없지만 나 역시 어떤 일을 할 때 서서히 나를 잊게 되고, 마구 달려가 끝을 보고 싶을 만큼 몰두하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때,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아, 안 돼, 이렇게 열심히 하면 안 되지‘ 하며 멈추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방법은 단순하다. 끝을 생각한다. 빵 만들기 싫어질 때, 빵을그만 만들 때를 생각한다. 왜 그렇게 되는지는 아직 모른다. 지금은 죽을 때까지 빵을 만들고 싶으니까. 그때를 생각하면 일단 도구를 사는 것을 극도로 삼가게 된다. 마찬가지로 천연 발효 기술까지 배우고픈 마음이 잠잠해진다. 언제든지 빵 굽기를 그만둬도 미련도 귀찮은 뒷정리도 없는 상태로 머무를 수 있다.
내게 미니멀리즘이나 소비 줄이기가 쉬운 이유도 마찬가지다.
새 물건을 사고 싶거나 필요할 때, 내가 가장 고민하는 것은 돈이나 쓸모가 아니다. 물건의 끝을 생각한다. 버리고 싶어질 때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상상한다. 소파나 식탁 같은 큰 가구, 텔레비

인간은 순간을 살 수밖에 없지만, 동시에 끝을 상상할 수 있는유일한 동물이라고 한다. 그래서 괴롭기도 하지만, 그렇기에 삶의 충만함을 이해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끝의 아름다움을그렇게 이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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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내게 실망하지 않는 법에 대해 물었다. 상황을 생각하면 내가 무척 천진난만해 보인 모양이다. 그럴 만했다. 기자가 되었지만 5년을 못 채우고 그만두었고, 좋다는 대학에서 영문학을전공했는데 직업에 조금도 활용하지 않았고, 심리학 박사학위도받았지만 6년간 공부만 즐기다가 지금은 시골에서 직접 구운 빵을 판다. 아니, 팔다가 코로나 세상이 되어서 그것도 중단했다.세상의 눈으로 보기에 다 실패라고 부를 만한 것들이다. 그런데정작 나는 대체로 신이 난 얼굴로 빵을 굽고 애들과 낄낄거리고멍하니 책을 뒤적인다.

소로는 『월든』에서 다음과 같은 일화를 들려준다. 어떤 마을사람이 부자 변호사를 찾아가 자기가 짠 바구니를 사달라고 한다. 하지만 거절당한다. 그러자 마을 사람은 화가 나서 말한다.
"당신은 나를 굶겨 죽일 작정입니까?" 마을 사람이 화를 낸 이유는 대략 다음과 같았다. 변호사는 말이나 엮어내면서 저렇게 잘사니, 나도 사업을 해야지. 내가 잘하는 건 바구니 짜는 일이지.내가 바구니만 짜면, 사주는 건 변호사가 할 일이야. 마을 사람은 화를 낼 것이 아니라 살 만한 가치가 있는 바구니라고 믿게만들거나, 아니면 변호사가 사고 싶은 다른 물건을 만들어야 한다고 소로는 말한다.

변호사가 내가 짠 바구니를 내가 만족할 만한 가격에 사준 경우는 어떨까? 변호사에게 감사해야 할까? ‘누가 너더러 바구니를 짜래? 너 좋아서, 너의 판단으로 짠 거잖아‘라는 논리를 받아들이자면, 변호사가 바구니를 산 것 역시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변호사 자신이 필요하니까 샀을 뿐이다. 갑자기 솟아난 선의를총족시키려고 그랬든, 귀찮아서 그랬든 이유는 중요하지 않다.
전혀 감사하거나 기뻐하지 않아도 된다. 이 세상이나 타인에게기대하거나 원망하는 마음과 감사하고 기뻐하는 마음은 사실 똑같은 동전의 양면인 셈이다.

당신의 선택일 뿐이다. 세상은 요구하지 않는다. 당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런 만큼 세상에 무엇을 해줄 필요도, 감사하거나 보답할 이유도 없다. 그런 부담이 없을 때 세상에 대한 원망과 분노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비로소 공평해졌으니 말이다.
이런 기분이 될 때 자주 흥얼거리는 노래가 있다. 소로의 마을사람과 변호사를 떠올리면서 어반자카파의 〈널 사랑하지 않아)의 가사를 곱씹으면 정말이지 거의 모든 일이 괜찮아진다. 달콤하고 포근한 위로를 받아서가 아니라, 내 노력과 꿈과 나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는 세상과 사람에 대한 모든 마음이 잠잠해진다.

소로의 삶이 보여주듯 나만의 바구니를 계속해서 짠다고 세상이 알아봐준다는 보장 같은 건 없다. 그러나 소로의 인생이 불행했냐고 하면 아닐 것 같다. 그는 자신에게 기쁨을 주는 방향으로계속해서 살아나갔다. 세상이 무심하는 아니든, 주어진 자유를누렸다. 이따금 그 섬세한 바구니를 알아보는 에머슨 같은 친구나 독자 앞에서 세상과 통하는 그만의 길을 발견했을 것이다.

"음. 엄마가 시키는 대로 한 건 맞아. 그런데 생각해보면 엄마가 뭘 시킨 적이 없어. 그게 이상한 거지."
바로 이 지점이 변화를 위한 첫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변화시키겠다는 목표와 의지를 버리는 것. 변화가 필요 없게 되어야 그때 변화가 제 발로 찾아온다.

그런데 일시적이지 않은 진짜 변화들은 오히려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마음이 됐을 때 나도 모르게 찾아왔다.

엄마도 그분 나름 아등바등 당신을 희생했으니 그것만으로도엄마에게 감사와 사랑을 느껴야 한다고 다짐했지만 도저히 안됐다. 그 대신 엄마도 그냥 소로가 이야기했던 바구니를 팔려다.
가 실패한 마을 사람일 뿐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엄마 멋대로 바구니를 백만 개쯤 짜서 나에게 팔려고 했던 것이다. 여기서내가 지불해야 하는 돈은 나의 무한한 애정과 존경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엄마가 짜준 바구니가 그렇게 많이 필요 없는데, 그걸억지로 전부 사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렸다. 엄마가 나를 위해 무얼 희생했건 그건 엄마의 바구니일 뿐, 나에게 그걸 사야 할 의무는 없었다.

포기나 이해와는 달랐다. 그 전에도 포기하거나 남편을 이해하자고 마음먹었지만 결국 폭발하곤 했었다. 그런데 신기한 건,
이때부터 남편도 바뀌고, 나도 바뀌고 결혼 생활도 바뀌었다.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힘보다 더 상위의 강력한 힘은 변화가 필요 없는 맥락과 상황을 만드는 것이다. 그 정도의 힘이 생기면, 변화가 드디어 저절로 찾아온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변화가 아니라 변화가 필요 없는 맥락에 모든 것이 적절하게 들어맞는다. 맥락을 만들 때의 장점은 ‘주인 되기를 나 혼자만 독점할필요가 없다는 데에 있다. 내가 바꾸고 싶은 상대도 그 나름으로자기중심이 있다. 그들이 변했다면 그들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성급하게 고마워하지도, 미안해하지도 않는다. 그들이 변화하기를 기대하지 않는 것처럼.

완벽하게 다림질된 아름다운 셔츠를 포기하는 것은 단순한 포기가 아니다. 오래된 나의 습관이나 남들이 정해놓은 관습의 맥락을 다시 점검하고 의식하는 과정이다.

물건 버리기, 간소화하기, 미니멀리즘 같은 용어는 비우고 없애는 것, 포기하는 것을 강조한다. 하지만 비우고 없애기 위한 우리의 의식적인 살핌은 사실 더 많은 의미를 채우는 것이다. 내물건, 나와 함께하는 사람, 나의 일을 버리고 없애기 전에, 거기서 어떤 가치와 의미를 의식하고 즐기고 있는지 질문한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눈에 보이는 것들의 숫자가 줄어들게 된다.
그 우연한 결과가 미니멀리즘일 뿐, 어느 날 하루 고생해가며 죄다 치우는 것이 목표는 아니다. 실제로 해보니 비우기 위해 비운물건들, 관계들, 습관들은 저절로 다시 채워졌다. 하지만 나의 현재에 중요한 의미, 맥락을 이해하고, 나만의 삶을 가꾸겠다는 목표를 가지면, 조금씩 나에게 맞는 것들만 남는다.

꼭 필요한 일이라면 내 삶 안에서 소화할 수 있어야 한다는 믿음으로 다림질에 다가갔다. 빳빳하게 다려진 셔츠야말로 쓸모없는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열심히 다림질을 하면서 스스로 일상을 가꾸는 재미를 발견했더니, 셔츠 입고 출근하는 일에 대한집착이 사라졌다. 그리고 지금은 다림질을 안 하고 살게 됐다. 하지만 언젠가 셔츠를 다릴 일이 또 생긴다면 또다시 새롭게 일상의 기쁨이 되는 다림질 법을 개발할 것이다.

우리에게 더 중요한 질문은 늘 ‘내가 어떻게 다른 사람을 보고 있는가‘라는 문제다. 타인에 대한 내 반응이 내가 누구인지 가장 정확하게 알려준다.

샤르트르는 "타인은 지옥이다. enfer,cestles autres" 라고 말했다. 그런데 나중에는 사르트르가 직접 이 유명한 문장이 잘못 이해되고 있다고 밝혔다. 흔히 인용하듯이 나를 괴롭히는 타인과의 나쁜 관계 때문에 지옥같이 힘들다는 뜻이 아니라, 내가 나 자신을인식하고 스스로를 평가하는 모든 것이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온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니 정확하게 해석하자면, ‘타인은지옥이다‘가 아니라, ‘지옥은 타인에 있다가 더 맞을 것이다. 이대사가 등장한 사르트르의 연극에는 지옥에 갇힌 세 사람이 등장한다. 이 공간을 지옥으로 만드는 것은 갇혀 있다는 사실도 아니고, 나머지 두 사람이 나를 괴롭히고 나를 비난해서도 아니다.
내가 나 스스로를 평가하기 위해 다른 사람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지옥‘이라고 사르트르는 설명한다. 생존을 위해 공기와 물이필요하듯이, 끊임없이 타인에게 기대어야 한다는 그 사실. 우리는 이 지옥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타인이 나를 괴롭혀서가 아니라 내가 나로 살아가기 위해서다.

세상이 내게 거는 기대에 무심하기 위해, 우리는 결국 더욱더사람에게 기대어야 한다. 나 자신을 잃는다는 것도 결국 내가 있는 관계 안에 존재하는 것이다. 내가 완벽한 존재가 되려고 하지않고, 나의 모자란 점을 채워주는 사람들을 발견하며 사는 삶이다. 그래도 그런 사람들과 사회에 대해 빚을 졌다는 생각은 하지않는다. 나도 그들도 관계 안에 있는 것만으로 서로의 모자란 점을 채워주고 있으니, 세상이 나를 통해 흘러간다.

나의 모자란 점이야말로 나 자체다. 타인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가운데 오는 고통은 나답게 타인과 연결되는 것이다. 그 고통을 그토록 피하고자 했던 나이트는 좀도둑이 되어 사람들에게다른 고통을 안겼다.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일은 분명히 때로 불편하고, 내 부족한 점들을 마주하게 하며, 아무리 노력해도 그 거리를 좁힐 수 없을 것 같은 순간도 많다. 이런 우리의 인생이 쉬워지는 일은 없겠지만 인간으로 살아가는 이 수고로움이 자신을잃음으로서 더욱 나다워지는 길임을 깨달을 수는 있다.

일상에서 화가 날 때 나는 재빨리 어떤 이미지를 떠올린다. 내몸이 화라는 목욕탕 뜨거운 물에 들어가 있고 거기서 몸을 일으켜 물 밖으로 나오면 끝이라는 상상이다. 화가 내 안에서 꿇고있는 게 아니니, 내가 아무것도 할 필요도 이유도 없다. 뜨거운목욕탕에 들어가면 처음에는 온몸의 살갗이 터질듯이 자극적이고, 숨을 꾹 참고 멈추게 된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몸을 담그고있으면 나른하게 편안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뇌졸중을 통해 내가 배운 최고의 교훈이라면 감정을 몸으로느끼는 방법을 배운 것이다. (…) 감정이 내 몸에 계속 남아있게 할지, 아니면 내 몸에서 곧장 흘러 나가게 해야 하는지판단할 힘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힘이 점차 강해지면서 내 감정이나 상황을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이나 외적 사건 탓으로 돌리고 싶어졌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보면 나와 나의 뇌 말고는 나에게 어떤 기분을 느끼게 만들 사람은 없었다. 외부의 그 무엇도 내 마음의 평화를 앗아갈 수 없었다. 그것은 온전히 나의 문제였다. 내 삶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통제할 수는 없지만, 내 경험을 어떻게 지각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내게 달려 있었다.

오른쪽 뇌에는 현재 순간 외의 시간이 존재하지 않으며, 매 순간이 감각들로 채워진다. 출생이나 죽음은 현재 순간에 일어난다. 기쁨의 경험 역시 현재 순간에 일어난다. 우리 자신보다 거대한 존재를 지각하고 그것과 연결되어 있다는 경험 또한 현재 순간에 일어난다. 우뇌에서는 ‘지금 이 순간 The Moment of Now‘만이 끝없이 계속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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