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내게 실망하지 않는 법에 대해 물었다. 상황을 생각하면 내가 무척 천진난만해 보인 모양이다. 그럴 만했다. 기자가 되었지만 5년을 못 채우고 그만두었고, 좋다는 대학에서 영문학을전공했는데 직업에 조금도 활용하지 않았고, 심리학 박사학위도받았지만 6년간 공부만 즐기다가 지금은 시골에서 직접 구운 빵을 판다. 아니, 팔다가 코로나 세상이 되어서 그것도 중단했다.세상의 눈으로 보기에 다 실패라고 부를 만한 것들이다. 그런데정작 나는 대체로 신이 난 얼굴로 빵을 굽고 애들과 낄낄거리고멍하니 책을 뒤적인다.

소로는 『월든』에서 다음과 같은 일화를 들려준다. 어떤 마을사람이 부자 변호사를 찾아가 자기가 짠 바구니를 사달라고 한다. 하지만 거절당한다. 그러자 마을 사람은 화가 나서 말한다.
"당신은 나를 굶겨 죽일 작정입니까?" 마을 사람이 화를 낸 이유는 대략 다음과 같았다. 변호사는 말이나 엮어내면서 저렇게 잘사니, 나도 사업을 해야지. 내가 잘하는 건 바구니 짜는 일이지.내가 바구니만 짜면, 사주는 건 변호사가 할 일이야. 마을 사람은 화를 낼 것이 아니라 살 만한 가치가 있는 바구니라고 믿게만들거나, 아니면 변호사가 사고 싶은 다른 물건을 만들어야 한다고 소로는 말한다.

변호사가 내가 짠 바구니를 내가 만족할 만한 가격에 사준 경우는 어떨까? 변호사에게 감사해야 할까? ‘누가 너더러 바구니를 짜래? 너 좋아서, 너의 판단으로 짠 거잖아‘라는 논리를 받아들이자면, 변호사가 바구니를 산 것 역시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변호사 자신이 필요하니까 샀을 뿐이다. 갑자기 솟아난 선의를총족시키려고 그랬든, 귀찮아서 그랬든 이유는 중요하지 않다.
전혀 감사하거나 기뻐하지 않아도 된다. 이 세상이나 타인에게기대하거나 원망하는 마음과 감사하고 기뻐하는 마음은 사실 똑같은 동전의 양면인 셈이다.

당신의 선택일 뿐이다. 세상은 요구하지 않는다. 당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런 만큼 세상에 무엇을 해줄 필요도, 감사하거나 보답할 이유도 없다. 그런 부담이 없을 때 세상에 대한 원망과 분노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비로소 공평해졌으니 말이다.
이런 기분이 될 때 자주 흥얼거리는 노래가 있다. 소로의 마을사람과 변호사를 떠올리면서 어반자카파의 〈널 사랑하지 않아)의 가사를 곱씹으면 정말이지 거의 모든 일이 괜찮아진다. 달콤하고 포근한 위로를 받아서가 아니라, 내 노력과 꿈과 나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는 세상과 사람에 대한 모든 마음이 잠잠해진다.

소로의 삶이 보여주듯 나만의 바구니를 계속해서 짠다고 세상이 알아봐준다는 보장 같은 건 없다. 그러나 소로의 인생이 불행했냐고 하면 아닐 것 같다. 그는 자신에게 기쁨을 주는 방향으로계속해서 살아나갔다. 세상이 무심하는 아니든, 주어진 자유를누렸다. 이따금 그 섬세한 바구니를 알아보는 에머슨 같은 친구나 독자 앞에서 세상과 통하는 그만의 길을 발견했을 것이다.

"음. 엄마가 시키는 대로 한 건 맞아. 그런데 생각해보면 엄마가 뭘 시킨 적이 없어. 그게 이상한 거지."
바로 이 지점이 변화를 위한 첫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변화시키겠다는 목표와 의지를 버리는 것. 변화가 필요 없게 되어야 그때 변화가 제 발로 찾아온다.

그런데 일시적이지 않은 진짜 변화들은 오히려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마음이 됐을 때 나도 모르게 찾아왔다.

엄마도 그분 나름 아등바등 당신을 희생했으니 그것만으로도엄마에게 감사와 사랑을 느껴야 한다고 다짐했지만 도저히 안됐다. 그 대신 엄마도 그냥 소로가 이야기했던 바구니를 팔려다.
가 실패한 마을 사람일 뿐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엄마 멋대로 바구니를 백만 개쯤 짜서 나에게 팔려고 했던 것이다. 여기서내가 지불해야 하는 돈은 나의 무한한 애정과 존경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엄마가 짜준 바구니가 그렇게 많이 필요 없는데, 그걸억지로 전부 사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렸다. 엄마가 나를 위해 무얼 희생했건 그건 엄마의 바구니일 뿐, 나에게 그걸 사야 할 의무는 없었다.

포기나 이해와는 달랐다. 그 전에도 포기하거나 남편을 이해하자고 마음먹었지만 결국 폭발하곤 했었다. 그런데 신기한 건,
이때부터 남편도 바뀌고, 나도 바뀌고 결혼 생활도 바뀌었다.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힘보다 더 상위의 강력한 힘은 변화가 필요 없는 맥락과 상황을 만드는 것이다. 그 정도의 힘이 생기면, 변화가 드디어 저절로 찾아온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변화가 아니라 변화가 필요 없는 맥락에 모든 것이 적절하게 들어맞는다. 맥락을 만들 때의 장점은 ‘주인 되기를 나 혼자만 독점할필요가 없다는 데에 있다. 내가 바꾸고 싶은 상대도 그 나름으로자기중심이 있다. 그들이 변했다면 그들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성급하게 고마워하지도, 미안해하지도 않는다. 그들이 변화하기를 기대하지 않는 것처럼.

완벽하게 다림질된 아름다운 셔츠를 포기하는 것은 단순한 포기가 아니다. 오래된 나의 습관이나 남들이 정해놓은 관습의 맥락을 다시 점검하고 의식하는 과정이다.

물건 버리기, 간소화하기, 미니멀리즘 같은 용어는 비우고 없애는 것, 포기하는 것을 강조한다. 하지만 비우고 없애기 위한 우리의 의식적인 살핌은 사실 더 많은 의미를 채우는 것이다. 내물건, 나와 함께하는 사람, 나의 일을 버리고 없애기 전에, 거기서 어떤 가치와 의미를 의식하고 즐기고 있는지 질문한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눈에 보이는 것들의 숫자가 줄어들게 된다.
그 우연한 결과가 미니멀리즘일 뿐, 어느 날 하루 고생해가며 죄다 치우는 것이 목표는 아니다. 실제로 해보니 비우기 위해 비운물건들, 관계들, 습관들은 저절로 다시 채워졌다. 하지만 나의 현재에 중요한 의미, 맥락을 이해하고, 나만의 삶을 가꾸겠다는 목표를 가지면, 조금씩 나에게 맞는 것들만 남는다.

꼭 필요한 일이라면 내 삶 안에서 소화할 수 있어야 한다는 믿음으로 다림질에 다가갔다. 빳빳하게 다려진 셔츠야말로 쓸모없는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열심히 다림질을 하면서 스스로 일상을 가꾸는 재미를 발견했더니, 셔츠 입고 출근하는 일에 대한집착이 사라졌다. 그리고 지금은 다림질을 안 하고 살게 됐다. 하지만 언젠가 셔츠를 다릴 일이 또 생긴다면 또다시 새롭게 일상의 기쁨이 되는 다림질 법을 개발할 것이다.

우리에게 더 중요한 질문은 늘 ‘내가 어떻게 다른 사람을 보고 있는가‘라는 문제다. 타인에 대한 내 반응이 내가 누구인지 가장 정확하게 알려준다.

샤르트르는 "타인은 지옥이다. enfer,cestles autres" 라고 말했다. 그런데 나중에는 사르트르가 직접 이 유명한 문장이 잘못 이해되고 있다고 밝혔다. 흔히 인용하듯이 나를 괴롭히는 타인과의 나쁜 관계 때문에 지옥같이 힘들다는 뜻이 아니라, 내가 나 자신을인식하고 스스로를 평가하는 모든 것이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온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니 정확하게 해석하자면, ‘타인은지옥이다‘가 아니라, ‘지옥은 타인에 있다가 더 맞을 것이다. 이대사가 등장한 사르트르의 연극에는 지옥에 갇힌 세 사람이 등장한다. 이 공간을 지옥으로 만드는 것은 갇혀 있다는 사실도 아니고, 나머지 두 사람이 나를 괴롭히고 나를 비난해서도 아니다.
내가 나 스스로를 평가하기 위해 다른 사람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지옥‘이라고 사르트르는 설명한다. 생존을 위해 공기와 물이필요하듯이, 끊임없이 타인에게 기대어야 한다는 그 사실. 우리는 이 지옥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타인이 나를 괴롭혀서가 아니라 내가 나로 살아가기 위해서다.

세상이 내게 거는 기대에 무심하기 위해, 우리는 결국 더욱더사람에게 기대어야 한다. 나 자신을 잃는다는 것도 결국 내가 있는 관계 안에 존재하는 것이다. 내가 완벽한 존재가 되려고 하지않고, 나의 모자란 점을 채워주는 사람들을 발견하며 사는 삶이다. 그래도 그런 사람들과 사회에 대해 빚을 졌다는 생각은 하지않는다. 나도 그들도 관계 안에 있는 것만으로 서로의 모자란 점을 채워주고 있으니, 세상이 나를 통해 흘러간다.

나의 모자란 점이야말로 나 자체다. 타인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가운데 오는 고통은 나답게 타인과 연결되는 것이다. 그 고통을 그토록 피하고자 했던 나이트는 좀도둑이 되어 사람들에게다른 고통을 안겼다.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일은 분명히 때로 불편하고, 내 부족한 점들을 마주하게 하며, 아무리 노력해도 그 거리를 좁힐 수 없을 것 같은 순간도 많다. 이런 우리의 인생이 쉬워지는 일은 없겠지만 인간으로 살아가는 이 수고로움이 자신을잃음으로서 더욱 나다워지는 길임을 깨달을 수는 있다.

일상에서 화가 날 때 나는 재빨리 어떤 이미지를 떠올린다. 내몸이 화라는 목욕탕 뜨거운 물에 들어가 있고 거기서 몸을 일으켜 물 밖으로 나오면 끝이라는 상상이다. 화가 내 안에서 꿇고있는 게 아니니, 내가 아무것도 할 필요도 이유도 없다. 뜨거운목욕탕에 들어가면 처음에는 온몸의 살갗이 터질듯이 자극적이고, 숨을 꾹 참고 멈추게 된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몸을 담그고있으면 나른하게 편안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뇌졸중을 통해 내가 배운 최고의 교훈이라면 감정을 몸으로느끼는 방법을 배운 것이다. (…) 감정이 내 몸에 계속 남아있게 할지, 아니면 내 몸에서 곧장 흘러 나가게 해야 하는지판단할 힘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힘이 점차 강해지면서 내 감정이나 상황을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이나 외적 사건 탓으로 돌리고 싶어졌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보면 나와 나의 뇌 말고는 나에게 어떤 기분을 느끼게 만들 사람은 없었다. 외부의 그 무엇도 내 마음의 평화를 앗아갈 수 없었다. 그것은 온전히 나의 문제였다. 내 삶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통제할 수는 없지만, 내 경험을 어떻게 지각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내게 달려 있었다.

오른쪽 뇌에는 현재 순간 외의 시간이 존재하지 않으며, 매 순간이 감각들로 채워진다. 출생이나 죽음은 현재 순간에 일어난다. 기쁨의 경험 역시 현재 순간에 일어난다. 우리 자신보다 거대한 존재를 지각하고 그것과 연결되어 있다는 경험 또한 현재 순간에 일어난다. 우뇌에서는 ‘지금 이 순간 The Moment of Now‘만이 끝없이 계속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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