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은 식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 순간 성령께서는 그가식별을 하도록 도우셨습니다. "아냐, 그렇게는 난 싸울 수 없어. 그렇게 싸우다간 난 지고 말아. 내게 입혀진 이 모든 것을벗어버려야 해. 나에게 고유한 것을 가지고 싸우러 갈 거야."
다윗처럼, 축성된 사람 각자는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난 나에게 고유한 것을 가지고 삶과 일을 대면해야지." 나에게 고유한것은 무엇일까요? 내 존재입니다. 인격체, 세례를 받은 이, 이름과 성씨姓氏를 가진 이, 이 수도회의 회원, 이 가족의 구성원…. 이것이 나에게 고유한 것입니다. 나는 나에게 둘러 씌워진구조나 잘못된 생각이나 잘못 형성된 관습 혹은 은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수많은 다른 것이 아니라 오직 나에게 고유한

축성의 기쁨을 살아가세요. 축성의 기쁜 증언이 되세요. 젊은이들은 그것을 보고 뛰어듭니다. 그들이 보는 것은 소명의 힘입니다. 그들이 권태에 빠진 사람들을, 갈등을 해결할 줄 모르는사람들을 본다면 그 사람들에게 가지 않아요. 입회하지않는다고요. 결론적으로 중요한 것은 기쁨에 찬 축성의증언입니다.

어떤 조건에 달려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언제나 (여기서 제가한 가지 표현을 지어내겠는데) 축성생활이 지닌 예언적 드러남에달려 있어요. 축성생활이 보여주는 힘, 곧 이 길로 주님을 따르고 싶은 어떤 젊은 사람의 마음에 가 닿는 그 힘에 달려 있다는의미입니다. 항상 기쁨으로 드러나는 소명의 힘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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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틀림없이 그저 인간적기준만 가지고는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적 기준으로 이해하고자 한다면 다른 종류의 범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범주는 사목적 효율성이나 다른 형태일 수 있지요. 그것들은 어쩌면 좋은 범주들이지요. 나쁜 것들이 아니에요. 하지만 인간적 기준들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축성생활은 사랑하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철저히 살기라는 근본 개념에 응답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저는 어떤 변두리에서 - 비록 도심지라 해도 - 임무에 종사하면서 일을 하고 있는 사제들, 수녀들, 수사들을 말합니다. 자랑하지도 않고 떠들어대지도 않는 그 축성생활자들, 자신을 중요하게 여기지도 않고 일하는 그 축성생활자들 말이에요. 축성생활을 살아가면서, 축성생활을 기도하면서, 축성생활신학을 하는사람들이지요. 일종의 본질적 겸손을 지닌 사람들은 바로 이런
사람들이지요

생각해보세요! 카누를 타고 강을 건너는 84세의 수녀님을.
믿을 수 없는 일이에요! 그 수녀님은 자기는 저쪽 콩고에 있는병원에서 일하는 산파産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곳에 있으면서 3천 번 이상 출산을 도왔다고 말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분은 60년 이상 선교지에 있었습니다. 그 여자아이가 태어날때는 난산이었는데 엄마는 죽었다고 나에게 말해주었습니다.
"엄마는 아주 좋은 사람이었는데 하느님께서 저에게 이 아이를입양하라고 요구하시는 것을 들었대요." 하고 수녀님이 말했어요. 저는 충격을 받았지요. 서너 살짜리 여자아이를 데리고 있는 84세의 수녀라니…. "그래서 저는 이 아이를 입양했지요. 그때부터 아이는 저를 엄마라고 부른답니다." 입양한 아기를 데리고 카누를 타고 장을 보러 가며 수녀로서의 삶을, 자신의 축성을 대단히 감동적인 신선함으로 살아가는 노인 수녀님, 그여성 안에 집약되어 있는 그 큰 다정한 사랑을 볼 때 저는 그모든 것 뒤에 있는 소명의 힘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저는 세 단어를 사용하고 싶습니다. 곧 ‘느리고 풍요롭고 무질서한‘이 그것입니다. 물론 공의회와 함께 어떤 식으론가 문들이 열렸지요. 그때는 우리가 시대의 징표와 발을 맞춰서 걸어가지 못하고 광범위하게 뒤쳐져 있었습니다. 세상과 더 많은대화를 할 필요가 있었고 많은 것에 문을 열어야 했었어요.

이데올로기가 인도할 때 참으로 저는 염려됩니다. 그 이데올로기가 어떤 것인지는 중요치 않아요. 그건 항상 끝이 좋지않습니다. 권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에서 저는 신영지주의에 대해 말했습니다. 펠라지우스주의에 대해서도 말했지요.
아니, 신펠라지우스주의라고 하는 것이 낫겠습니다. 이 두 가지 경향 모두 이데올로기적입니다. 이는 오늘날에도 지나치게 펠라지우스적인 단면을 가지고 태어나는 몇몇 신생 축성생활회 안에서 발견됩니다. 규범을 이행하는 데 모든 완덕을 두는 것으로 보이는 회들입니다. 축구를 하고 노는 대신 성규聖規Santa Regola를 준수하기 위해 이상한 일들을 하고 다른 것들은 죄가 된다는 말을 듣는 그 소년은 불쌍하기도 하지요! 젊은남녀 수도자는 단지 경직된 규칙을 준수하는 것뿐 아니라 모든것에서 성장해야 합니다. 성소에 도움이 되는 건전한 규범들을준수할 필요가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피상적인 것들을준수하는 데서 보이는 이 경직성은 그리스도교적인 것이 아닙니다. 순전히 이단적인 펠라지우스주의예요. 참된 사랑은 결코경직된 것이 아닙니다. 이런 일이 몇몇 신생 수도회에서 일어

기능성은 사도적 삶, 섬김의 삶이 당하는 하나의 유혹입니다.
주요한 유혹들 중 하나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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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현대에서도 유사한 논리가 발견된다. 신의 질서는 완전하기에 여기에서 벗어나는 변화는 타락일 수밖에 없다. 이런 관점에 따르면 정상에서 벗어나 보이는 모든 현상은 신이 정한 질서가 아니라타락 때문이다. 예를 들어, 동성애는 신이 정한 창조질서에서 벗어난타락이라는 생각이 그것이다. 인간과 세상은 치료와 구원이 필요하다. 구원이란 신이 정한 본래의 창조질서를 회복하는 것이다.

현대천문학은 존재의 변화가 타락이기는커녕,
오히려 존재는 변화의 열매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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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그날을 있는 그대로 즐기는 거죠. 인생이 주는 하루를그대로 받아들이는 거예요. 수용하는 거. 수용이 정말 중요해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걱정하지 말잔 말이지." 이제 시련과 상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게 예전만큼 신경 쓰이진 않아요"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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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걸 방해하는 게 마라의 역할이다. ‘오래 살아야 공부도 오래할 수 있어!‘라고 속삭이는 마라의 정체는곧 내 욕망의 다른 소리다. 이 욕망 앞에서 흔들렸던 내 마음. 그순간의 마음은 참으로 황량한 바람이 부는 황무지 같았다. 그것이 언제이든 언젠가 죽음은 실제 상황이 될 터이다. 정말 죽음을이렇게 정신없이 휩쓸려 가듯 맞닥뜨릴 수 있겠구나 생각하니공포와 두려움이 밀려왔다. 이건 나이가 문제가 아니었다. 백 살을 산다고 죽음 앞에서 저절로 편안하고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붓다는 이런 나의 마음을 법구경法句經에서 정확하게 표현하고있었다.
물고기가 물에서 잡혀 나와 땅바닥에 던져진 것과 같이 이 마음은 펄떡이고 있다. 악마의 영토는 벗어나야 하리.(게송 34)

니체는 내가 사회가 제시하는 도덕적 가치들을 아무런 의심없이 받아들인 것이 문제라고 말한다. 도덕은 원래부터 주어져서 당연히 따라야 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특정한 조건과 상황에서 만들어지고 변화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맞는 보편적도덕이란 존재하지 않고, 조건과 상황이 달라지면 도덕 또한 새롭게 창조되어야 한다. 그러니 외부에서 주어진 도덕을 내 것으로 받아들여 그것에 얽매이는 노예가 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창조한 도덕을 삶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주인이 되어야 한다.

연암은 자신이 만나는 세상 자체가 글 쓸 거리였다. 연암의 시선은 언제나 남들을 향해 열려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글을 쓰면서 다른 사람들은커녕, 오직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움켜쥘 생각만 하고 있지 않았던가.

유식에서는 의지작용이 생기기 바로 전 단계인올라오는 감정에 집중하라고 한다. 즉 마음에서 일어나는 감정들을 자아‘에서 분리시켜 바라보라는 것이다. 요동치는 감정들은 집착하면 할수록 그 세력은 더욱 강성해지고 자신을 더 세게옭아맨다. 그러나 감정에서 적당히 떨어져서 바라보면 그 감정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저절로 사라진다. 사실 인간이 몸을 가지고 태어난 이상 모든 욕망이나 그 욕망에서 파생되는 감정들을 다 없앤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해 보인다. 오히려 요동치는 감정을 없애며 통제하기보다는 자아에서 감정들을 분리시켜 바라볼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이 감정을 제어하기가 수월해

화가 나는 마음을 살펴보면 거기에는 반드시 내 생각이 옳다!‘ 하는 아상我相이 버티고 있다"라고 말씀하셨다.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내가 원하는 간호사의 올바른상은 접수를 잘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접수도 제대로못하고 일을 대하는 태도도 내 생각我相과 다르니 그녀만 보면 화가 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접수를 잘해야 한다는 간호사에 대

붓다를 금욕적 스승으로 보는 한 수행자에게 붓다가 자신이때로는 발우 한가득 식사하기도 하고, 고급스러운 옷을 입기도하며, 좋은 처소에 머물기도 한다고 이야기하는 장면이 있다.
요한 것은 붓다가 그 어떤 감각적 쾌락의 즐거움에도 집착하지않고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웠다는 점이다. 오히려 붓다는, 인간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보고 듣고 맛보고 감각하며 욕망을 일으수밖에 없는 신체와 마음의 조건을 역으로 이용하라고 한다.
그는 몸과 마음에 일어나는 상태를 주의 깊게 살피고 관찰함으로써 밖으로 향하는 마음을 내부로 돌리는 방향의 전환을 유도한다.

『전습록은 꽉 막혀 있는 마음을 시원하게, 확 트이게 만들어 주는 책이다. 아니 그렇게 시원하고 확 트인 마음이, 우리가본래 가지고 있는 마음이라고 말한다. 우리 모두는 어떻게 하는것이 옳고 그른지 아는 명쾌한 마음, ‘양지‘良知를 갖고 있다고. 그것은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고 하면 달려가 붙잡게 되는 것처럼, 배우지 않아도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마음이다.
우리 마음이 본래 그러하다면, 어째서 우리에게는 명쾌하지않은 순간들이 종종 생기는 걸까? 양명에 따르면 그것은 양지가
‘사심心에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 사사로운 욕심에 본래의 마음이 가려져, 막상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는 정도의 큰일이 아니면 양지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내 경우처럼 상대의 힘을 받기만 할 뿐 아무런 행동도 하지못하는 수동적 상태에서는 상대와 자신에 대한 불만이 생기게마련이다. 이때 우리는 힘을 쓰는 상대를 ‘악한 사람‘으로, 그에대립하는 자신을 ‘선한 사람‘으로 설정한다. 이 구도에서는 선한사람이 악한 상대에게 일방적으로 괴롭힘을 당한다. 그래야 상대에게 모든 책임을 돌림으로써 복수하는 쾌감을 맛보고, 자신에 대한 불만도 해소할 수 있기 때문이다.

레비스트로스는 달랐다. 그는 불안정한 기질을 지닌 남비콰라족의 환심을 사려고 열기구를 띄웠다가 그 집단을 혼란에 빠뜨렸다. 당황한 그는 원주민들과 면담하며 과학적 원리 너머에있는 그들의 인식, 즉 하늘 높이 올라가는 것은 재앙과 종말로 여기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덕분에 그들이 ‘천국 복음을 전하는기독교 선교단을 학살한 사건의 배경을 이해할 수 있었고, 그들이 이 사건을 두고 영예로운 싸움인 것처럼 명랑하게 떠드는 이유도 깨닫게 되었다.

그는 남비콰라족의 세계관을 미신으로 치부하지 않고, 그차이를 서구사회와 동등한 차원에 두고 닮은 차이를 찾으려 했다. 나는 이런 그의 눈이 놀라웠다. 현상에 머물지 않고, 심층을꿰뚫는 눈, 차이 너머에 있는 구조‘를 발견하는 눈 말이다. 이제그의 질문을 따라가며 탈북민들과 충돌을 일으킨 내 마음의 심층 구조를 밝히는 통찰력을 배워 보고자 한다.

루쉰의 소설집 『외침』喊에 수록된 작은 사건을 읽게 되었다.
중국 근대혁명기에 베이징에 사는 주인공은 자신이 탄 인력거꾼이 허름한 차림의 노파를 치는 사건과 맞닥뜨린다. 노파가 일부러 인력거가 가는 길을 방해했다고 생각한 그는, 이 사고 때문에 자신의 일에 차질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는 맘이 앞선다. 다친노파의 상태는 안중에도 없다. 주인공인 ‘나‘가 이런 생각을 하는사이 인력거꾼은 노파를 부축해 일으킨다. 그녀의 몸을 살피고자신의 잘못을 직접 주재소에 찾아가 알리기까지 한다.

어느 날, 양명陽明의 제자가 공무와 송사로 바빠 공부에 매진할 수 없다고 하소연을 한다. 양명은 내가 언제 평소 하던 일을때려치우고 공부하라고 한 적이 있냐고 따끔하게 말한다. 지금맡고 있는 업무를 하는 동안 공부할 수 있다고, 아니, 공부는 지금 그 자리에서 하는 거라고 말이다. 송사에 임할 때 사사롭지 않게 마음을 쓰고, 한순간이라도 치우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너의공부라고, 이것이 바로 ‘사상마련‘事上練이라고! 공부는 고요할때 하는 마음수양이 아니라 부딪히는 일상 속에서 하는 거라고말이다.

무엇이 이 책을 악으로 들끓게 만들었을까? 니체는악이란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하나하나의 덕德(virtue)들이벌이는 전쟁과 싸움(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옮김, 책세상, 2015, 58쪽)이라고 말했다. 선에 대비되는 성질로서의 악이 아니라, 존재를 뒤흔들고 정신의 전부를 차지하길 원하는 이 들개 같은 힘이 바로 악이다. 이 정도의 악의를 가지고 덤

게 변화시켰을까? 니체는 내게 이렇게 말한다. "그동안 너의 공부와 노력에는 자기 극복‘이 없었다. 너는 언제나 너의 ‘정의로움‘을 앞세워 남을 탓하고, 제도를 바꾸면 다 된다고 생각했다.
아니다! 나는 일찍이 그러한 너의 ‘정의로움‘이 얼마나 궁핍하고,추하며, 가엾기 짝이 없는 자기만족인지를 알고 있었다. 특히 너는 제도를 앞세워 스스로를 작열하는 불꽃이자 숯으로 생각하고있었지 않느냐?"(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감이당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4개의 구호 "도심에서 유목하기", "세속에서 출가하기", "일상에서 혁명하기", "글쓰기로 수련하기" 를 볼 수 있다. 유목을 초원이 아닌 도심에서, 출가를 산속이 아닌 세속에서, 혁명을 아스팔트가 아닌 일상에서, 글쓰기를 숙제하기가 아닌 수련하기라고… 하나하나를 음미해 보면 상식적 생각을 뒤집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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