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틀림없이 그저 인간적기준만 가지고는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적 기준으로 이해하고자 한다면 다른 종류의 범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범주는 사목적 효율성이나 다른 형태일 수 있지요. 그것들은 어쩌면 좋은 범주들이지요. 나쁜 것들이 아니에요. 하지만 인간적 기준들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축성생활은 사랑하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철저히 살기라는 근본 개념에 응답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저는 어떤 변두리에서 - 비록 도심지라 해도 - 임무에 종사하면서 일을 하고 있는 사제들, 수녀들, 수사들을 말합니다. 자랑하지도 않고 떠들어대지도 않는 그 축성생활자들, 자신을 중요하게 여기지도 않고 일하는 그 축성생활자들 말이에요. 축성생활을 살아가면서, 축성생활을 기도하면서, 축성생활신학을 하는사람들이지요. 일종의 본질적 겸손을 지닌 사람들은 바로 이런
사람들이지요

생각해보세요! 카누를 타고 강을 건너는 84세의 수녀님을.
믿을 수 없는 일이에요! 그 수녀님은 자기는 저쪽 콩고에 있는병원에서 일하는 산파産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곳에 있으면서 3천 번 이상 출산을 도왔다고 말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분은 60년 이상 선교지에 있었습니다. 그 여자아이가 태어날때는 난산이었는데 엄마는 죽었다고 나에게 말해주었습니다.
"엄마는 아주 좋은 사람이었는데 하느님께서 저에게 이 아이를입양하라고 요구하시는 것을 들었대요." 하고 수녀님이 말했어요. 저는 충격을 받았지요. 서너 살짜리 여자아이를 데리고 있는 84세의 수녀라니…. "그래서 저는 이 아이를 입양했지요. 그때부터 아이는 저를 엄마라고 부른답니다." 입양한 아기를 데리고 카누를 타고 장을 보러 가며 수녀로서의 삶을, 자신의 축성을 대단히 감동적인 신선함으로 살아가는 노인 수녀님, 그여성 안에 집약되어 있는 그 큰 다정한 사랑을 볼 때 저는 그모든 것 뒤에 있는 소명의 힘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저는 세 단어를 사용하고 싶습니다. 곧 ‘느리고 풍요롭고 무질서한‘이 그것입니다. 물론 공의회와 함께 어떤 식으론가 문들이 열렸지요. 그때는 우리가 시대의 징표와 발을 맞춰서 걸어가지 못하고 광범위하게 뒤쳐져 있었습니다. 세상과 더 많은대화를 할 필요가 있었고 많은 것에 문을 열어야 했었어요.

이데올로기가 인도할 때 참으로 저는 염려됩니다. 그 이데올로기가 어떤 것인지는 중요치 않아요. 그건 항상 끝이 좋지않습니다. 권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에서 저는 신영지주의에 대해 말했습니다. 펠라지우스주의에 대해서도 말했지요.
아니, 신펠라지우스주의라고 하는 것이 낫겠습니다. 이 두 가지 경향 모두 이데올로기적입니다. 이는 오늘날에도 지나치게 펠라지우스적인 단면을 가지고 태어나는 몇몇 신생 축성생활회 안에서 발견됩니다. 규범을 이행하는 데 모든 완덕을 두는 것으로 보이는 회들입니다. 축구를 하고 노는 대신 성규聖規Santa Regola를 준수하기 위해 이상한 일들을 하고 다른 것들은 죄가 된다는 말을 듣는 그 소년은 불쌍하기도 하지요! 젊은남녀 수도자는 단지 경직된 규칙을 준수하는 것뿐 아니라 모든것에서 성장해야 합니다. 성소에 도움이 되는 건전한 규범들을준수할 필요가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피상적인 것들을준수하는 데서 보이는 이 경직성은 그리스도교적인 것이 아닙니다. 순전히 이단적인 펠라지우스주의예요. 참된 사랑은 결코경직된 것이 아닙니다. 이런 일이 몇몇 신생 수도회에서 일어

기능성은 사도적 삶, 섬김의 삶이 당하는 하나의 유혹입니다.
주요한 유혹들 중 하나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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